6.25 내전

대경제국.png
 
대경제국 제1제국~대경제국 내란 목록
 
연도최고행정부사건주동 세력
제1제국
1903년박영효 내각김홍륙 독다 사건(실패)입헌민주당 보수세력
(김홍륙 · 권제순 등)
1919년숭원식 내각3.1 경제독립운동(범국민행동 규정 논의 中)상공업 종사자 및 급진반일세력
(이훤성 · 이훤신 등)
1933년안재홍 내각5.29 총리 암살기도 사건(실패)황립육군 소장파
(이성일 · 박창림 등)
1943년김구 내각제2집단군 반란 사건(실패)황립육군 제2집단군 3개 사단
(박면 · 이통정 등)
1945년좌우합작 내각3.19 항명사태(실패)황립육군 제2 방면군
(김주웅 등)
1948년좌우합작 내각1948 메이데이 사건(실패)노동당 목관주당 세력
(이주실 등)
1950년~1953년좌우합작 내각6.25 내전(장기전 돌입)노동당
(김성주 · 박현영 · 김원봉 등)
1961년윤보선 내각5.16 군사 쿠데타(성공)군사혁명위원회
(박정희 · 김종필 · 차지철 등)
제2제국
1992년노태우 내각청명계획(실패)황립육군보안사령부
2013년박근혜 내각제정 폐지 선동 사건(실패)통합진보당 및 공화국 전선 급진파
(이석기 등)
2017년박근혜 내각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실패)황립육군기무사령부
6.25 내전
대경제국 6.25 내전 장면.jpg
교전국

대경제국
제국 정치-행정 연합 연합군
혜정관주 자유동맹군

대경 사회주의 공화국
공산 민병대
국군 보좌대
노동쟁군
강북 인민동맹
지휘관

의종 대황제
이승만 총리
신성모 국방부 대신->
박성수 국방부 대신->
신성모 국방부 대신
김석
백선엽
이원경 원수부 총수
송호성 해군 원수
이기붕 청경 자유시 시장 †

김성주
박헌영
김원봉
두양
박간철
김책
김두봉
병력

대경제국: 120만 5600명
제국 정치-행정 연합 연합군: 47만 7921명

대경 노동자군: 89만 8810명
비정규군: 약 30만 5000명
공산주의 의용군: 5만 2500명
피해 규모

대경제국: 30만 9000명
제국 정치-행정 연합 연합군: 8만 9903명

대경제국 노동자군: 약 45만명
비정규군: 20만 9800명
공산주의 의용군: 1만 5069명

개요

배경

난징 회담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하면서 전후 처리 협상이 난징에서 열렸다. 각국(대경제국, 소련, 중화민국, 미국)의 대표들은 긴 협상 끝에 최종 협상안이 도출됐고 1946년 9월 10일에 난징 선언이 공표된다. 하지만 난징 선언이 공표된 당일 소련과 미국이 난징 선언을 파기하고 따로 1948년에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이 두 국가는 중화민국, 대경제국이 일본과 단독강화를 한 것으로 인정했으며 이후 이에 대한 조정안이 1949년에 체결된 도쿄 조약이다. 난징 회담에 따라 중화민국과 대경제국은 일본으로부터 배상금을 받고 중화민국은 앞으로 세워질 일본 과도정부와의 청구권 협상을 맺었고 대경제국도 1947 진도 협정이라는 청구권 협정을 체결하여 국가간 청구권에 대해 끝맺었다.그리고 결과... 또한 1946년과 1949년 도쿄 조약에 걸쳐 일본 분할안이 공식 조인되면서 대경제국은 시코쿠 지역을 얻어 군정을 실시했다. 하지만 훗날 1950년 2월 4일, 일본 왕국 조약을 체결하면서 남동도 군정은 철수한다.

냉전의 고착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의 제1 세계와 공산주의 진영의 제2 세계로 분할됐고 왕정주의 국가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리더로 하여 제1 세계와의 협력을 결정한다. 하지만 대경제국은 당시까지만 해도 동아 왕정맹에 가입하지 않았고 독자노선을 채택했었다. 미국은 1946년, 일본 분할안이 유엔 총회를 통과한다. 일본 분할안에 따라 대경제국 황립육군이 1946년 4월 6일, 시코쿠를 진주했고 소련군은 1946년 5월 10일에 하코다테혼슈 북부를 진주하였으며 영국과 미국, 프랑스는 공동 군정청 설치를 합의한다. 1946년 6월 1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규슈의 가고시마와 구마모토 지역을 진주하고 곧이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터란트 군정청을 설치한다.
미국이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겠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선포하며 본격적인 냉전이 시작되었고 미국은 그 동아시아 중요 요충지로 대경제국을 선정, 대경제국내 친미주의자들을 통해 국민당이라는 정당을 창당시켜 지원했고 소련도 맞대응으로 제국내 공산주의자들을 결집시켜 노동당을 창당시킨 후 지원한다.

전후 대경제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45년 5월 10일, 임시 의정원이 자진 해산하고 1945년 8월 10일에 제32대 대경제국 제1제국 의정원 총선이 열렸고 진보정당인 사회민주당이 73석, 보수정당인 입헌민주당은 101석을 확보한다. 이 두 거대 양당은 좌우합작을 합의하고 총리대신김구,내각총리대신여운형이 취임한다. 대경제국은 전후 난징 선언과 시코쿠 확보로 당당히 전승국의 지위에 있었다. 대경제국은 이전 대일항쟁기때 요동 지역에 잔류한 해방구의 세력은 대경제국에 투항했어도 지역내 영향력을 유지했으며 소련의 지원하 설립된 노동당이 만들어지자 이 정당에 대규모 입당하여 강북 지역의 공산화를 시작한다. 노동당은 이름바 '제국 노농자 권익 보호단'을 창설하여 노동자와 농민을 적극적으로 포섭했고 사회민주당내 급진파 세력의 이탈을 부추겼다. 또한 신분제의 폐지를 요구하며 선황인 정종경자개혁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급진적인 공약들로 극좌파 지지층을 끌어모을 수 있었으나 온건좌파와 중도층 지지파를 포기하게 된다. 그렇게 1948년 총선이 시작된다.

좌파 세력의 총선 패배

제33대 대경제국 제1제국 의정원 총선에서 노동당은 30석, 국민당은 15석을 얻었고 입헌민주당이 80석, 사회민주당이 72석, 나머지 군소 정당과 무소속이 3석을 얻는다.
뚜껑을 열어보니 30석만 얻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노동당은 민주적으로 정권교체가 힘들다고 판단, 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꾼다. 사민당의 온건파(여운형, 안창호)가 당권을 '급진파'에게 넘기면서 사민당은 급진적으로 변했는데 사민당의 당의장이자 급진파인 '장건상(후에 온건파로 전향)'은 내각 구성을 위해 노동당을 끌어들여서 과반의석을 채우는데 성공한다. 허나 총리 내정에서 갈등을 빚은 사민당과 공산당의 내각은 불과 10일만에 해체된다. 이렇듯 의정원이 내각문제를 두고 분열을 지속하자 황제인 의종 황제가 중재에 나서서 다시금 입헌 민주당과 사민당의 좌우합작 내각이 수립되어 총리대신으로 김규식, 대경제국 제1제국 내각총리대신김흠선이 내정된다. 이에 분노한 한 공산주의자 청년이 총리에 내정된 김규식을 암살하면서 좌우 갈등이 더욱 심화되기 시작했다. 김성수, 박헌영, 김두봉은 소련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김원봉은 심영과 함께 국군 보좌대, 공산 민병대, 노동쟁군, 등의 준군사조직들을 창설하여 '혁명'을 위한 군을 모으기 시작했다.

소련의 지원

소련빅토르 무지버스티를 파견하여 노동당의 국군 보좌대의 훈련을 감독했고 비밀리에 T-34 전차를 밀입시켰고 이외 야포 300문, 총기 400만정, 군수공장 설계도와 공작기계 150산[1]을 지원했다. 소련은 정치장교단을 보내서 대경제국내 혼란을 야기했고 테러 행위들도 지원하여 단동교를 파괴시키고 대련항을 마비시켰으며 강남 지역에서 좌익의 내란을 사주했다.

대혼(大昏)

강북내에서 좌익의 반란이 만연해지자 의정원은 노동자당을 위헌정당으로 결정하고 황제에게 제청하여 노동자당 해산을 건의한다.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좌익이 해산을 계기로 더 난리를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여 이를 거부한다. 한편 사민당은 급진파와 온건파의 대립끝에 급진파가 탈당하여 노동자당에 입당하고 온건파가 다시 당권을 잡는다. 이승만은 온건파에 접근하여 좌우합작 내각 수립을 약속한다. 사민당을 끌어와서 다시 내각을 구성한 이승만은 황제의 재가를 받고 강북에 특수보안대라는 특수부대를 설치하여 좌익의 상승세를 없애보려 시도했지만 강북 시민들의 비협조로 유명무실해진다.
1950년이 되면서 강북의 노동당에 사설군이 황립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정주 지역과 도희준주에서는 그 공격이 산발적으로 일어난다. 이러한 일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자 시민들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난다'라는 풍문이 돌기 시작한다. 이에 신성모 국방부 대신은 언론을 통제하면서 여론을 잠재우는데 시도한다.

협상의 체결, 근데?

민병대와 황립군간에 전투가 일파만파로 커지기 시작하자 자칫 내전이 발생할것을 염두한 시민참정당의 남포 을 의원인 백낙준단동구락부의 당의장, 허정노동당과 자유당의 중재에 나서서 1950 타협을 이끌어낸다. 헌데..
어차비 노동당은 이 타협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노동당은 시간을 끌기위해 생각한 구제책이 협상이었고 타협이 체결되자 마저 내전 준비를 완고히 한다. 그리고 1950년 6월 23일, 이미 강북의 치안력을 마비시킨 노동당은 육이공사남정주로 파견하여 그 곳에 있던 사설군을 지휘케 했다. 1950년 6월 24일에는 노동자당 휘하의 준군사조직들이 활동을 멈췄다. 군을 내전 상황에 맞게 재정비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는 사설군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 6월 25일, 비로비잔에 있던 박헌영김성주는 도로 남정주로 돌아가 남정주에 있던 사설군의 군영을 정비한다. 그리고 전투 명령을 내린다.
사설군은 일제히 남정주에 주둔한 방어여단을 상대로 사격을 시작했고 속수무책 남정주의 방어여단은 패퇴했고 잔당이 정주로 철수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각지에서 노동당의 사설군과 준군사조직들이 거병하면서 내전이 발발한다.

원인

당시 의 대결과 옵저버

요충지 확보설

왕정국가들의 개입설

미국 개입설과 소련 개입설

자유당-사회민주당 좌우합작 내각의 계획설

과정

결과

정부군의 승리, 대경제국 내부의 국론 통일, 제국내 공산주의 영향력 제거, 남부 해안 지대와 혜정관주 해안 지역을 제외한 모든 국토 황폐화
위 4개의 말로 결과를 축약할 수 있다.

주요 전투 목록

역사적 갤러리

기타

틀:6.25 내전 이모저모

각주

  1. 산: 기계의 셈단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