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종

황실 문장.png
대경제국 황제
大敬帝國 皇帝
Emperor of Korea Empire
1대2대3대4대5대6대(재위중)
안종 태황제
(1890 ~ 1918)
순종 성황제
(1918 ~ 1932)
영종 문황제
(1932 ~ 1935)
의종 대황제
(1935 ~ 1961
1987~1988)
청의태상황 이유수
(1988 ~ 2017)
전황제 이원
(2017 ~ 현재)
이강
李强
의종 이강.png
1936년 2월 10일 제정
1936년 2월 10일 제정
대경제국 황제 폐하
재위 1936년 2월 5일 ~ 1961년 5월 18일
1987년 9월 30일~1988년 11월 3일
대관식 1936년 2월 5일
전임자 영종 문황제 이은
후임자 은황제 이유수(現 청의태상황)
총리
황립군의 총통수권자
재위 1987년 10월 1일~1988년 11월 2일
제1제국군의 총통수권자
재위 1936년 2월 5일 ~ 1961년 5월 18일
대경제국 제1제국의 황태자 전하
재위 1935년 6월 21일~1936년 2월 5일
대경제국 제1제국의 친왕 전하
재위 1910년 4월 10일~1935년 6월 20일
별칭
휘(諱) 이강 (李强)
별호 혼희 (琿熙)
연호 (義)
묘호 의종
존호 박효자하예만민고관만사의소경 친왕(博孝自下譽萬民高觀萬思議昭敬 親王)->
정경봉예고관만사의소경 황태제(正更逢倪高觀萬思議昭敬 皇太弟)->
덕건성무제인명정만사성국흥강 황제(悳建成撫悌人明政萬事省國興絳 皇帝)
시호 영평상원경교송안제찰정규호경명행수도광양회평성효대황제(永平相援敬敎頌安悌察政規護經明行修韜光養晦平晟孝大皇帝)
능호 개황릉(開皇陵)
신상정보
출생일 1910년 5월 27일
출생지 대경제국 제1제국 청경자유시
사망일 1988년 11월 3일
사망지 대경제국 청경특별자유시 경복궁 강녕전
매장지 대경제국 광주시 황릉리
왕조 대경제국 황실
가문 전주 이씨
부친 순종 성황제 이척
모친 정경황후 연씨
배우자 승경황후->기경태황태후 김화
자녀 청의태상황 이유수
전황제 이원
정양친왕 이고
성미내친왕 이요양
준정친왕 이봉
기타 친인척 영종 문황제 이은, 성명대군, 이연대군, 숙정내친왕 이혜
종교 카톨릭(세례명: 대건 안드레아)
서훈 대훈위 금척대수장, 대훈위 서성대수장, 대훈위 이화대수장, 황태자 가례 기념장, 문화장, 황제 폐하 즉위 기념장, 순종 황제 폐하 즉위 5주년 기념장, 영종 황제 폐하 즉위 1주년 자응장
군사 경력
복무 대경제국 제1제국군
복무기간 1929년 4월 10일~1931년 1월 10일
소속 대경제국 제1제국군
최종계급 중령
지휘 대경제국 제1제국군 제11 사단
근무 육사
참전 제2차 경일전쟁(복무후)

개요

대경제국 제4대 황제이다.(대경제국 제1제국기 포함)

칭호

대경제국 황제중 유이하게 칭호를 갖은 황제이다.[1] 칭호는 다음과 같다.

상제의 은총으로 대경제국 황제, 첼라놉스크족의 보호자, 이용령 영윤, 상원령 영윤, 기준령 영윤, 오원령 영윤, 안산정 고문, 공상정 고문, 대운정 고문, 나주백, 목포백, 대경제국 황실의 수장, 모든 신민의 존엄이신 그 분의 첫번째 존함. 덕건성무제인명정만사성국흥강 황제 이강 폐하

하지만 제1제국이 5.16 쿠데타로 붕괴되고 다시 제정이 복고됐을때에는 이러한 칭호는 사용을 안했다. 물론 왕당파 협회는 자체적으로 현재까지 현직 황제의 칭호를 올리는 중이다.

생애

1910년 5월 27일, 경복궁 자선당에서 그가 태어났다. 순종 성황제는 태어난 황자의 이름을 '이강(李强)'이라 짓는다. 이후 성황제는 '경선(敬善)'이라는 존호를 주려 했으나 생각을 바꿔 '소경(蘇炅)'이라는 존호를 주었다. 이로써 이강은 '소경친왕 이강 전하'로 불리우게 된다. 그는 생후 3년 후인 1913년에 동궁전으로 거처가 이동했고 5살이 되어가는 1915년에 제왕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920년에 사서삼경을 깨우쳤고 대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시강원의 대사재들도 놀랄말한 지식 습득 능력을 가졌던 이강은 점차 궁중 권력 암투에도 끼어들기 시작한다.

청소년기~청년기

본격적으로 '청경 황립보통학교'를 시작으로 '청경 황립상급학교'와 '제혜 황립특급보통학교'를 수석으로 마치며 청경 대학 행정학 석사를 따내며 엘리트 과정을 거친다.

본격적인 황제(皇弟)의 생활

이 궁중암투에서 형제인 영종 문황제와의 갈등의 불이 올라온다. 두 형제는 궁중 권력암투에서 황태자의 자리를 가져가려고 많은 시도를 했지만 끝내는 장남 영종 황제가 황태자 자리를 가져가고 곧 황제에 오르면서 의종을 지지하던 파벌(시종파)과 관료가 행정부에서 실각한다. 그렇게 두 형제의 앙금이 돌이킬 수가 없었을꺼 같았지만..

갑작스러운 난리와 황제 즉위

전후 혼란

6.25 내전

혼탁한 내정

6.25 내전 종전 이후 이승만을 필두로 한 내각이 사사오입 개헌을 통한 사사오입 체제를 수립하면서 의종 대에 이르어 황제는 실권을 실추당한다. 사사오입 개헌 과정에서 의종 황제의 재가가 필요했는데 이기붕을 비롯한 자유당 의원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총리 경호실 대원들과 함께 시위대를 무력화 시키고 사실상의 친위쿠데타나 다름 없는 행동으로 황제를 겁박해 강제로 옥새를 찍게 한다(甲璽捺印, 갑새날인). 4.19 혁명이 일어나고 다시 민간정부가 정상화됐지만 실추된 황권은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제정 폐지

새로 들어선 중앙정부에 불만을 들어낸 군부5.16 군사 쿠데타을 일으켰고 이들은 민주공화제를 내세우며 제정을 폐지한다. 황실 일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조로 스위스로 망명하였으며, 그 당시 왕실 폐지 크리의 피해자가 된다.

스위스 망명 생활

이 망명 생활 당시 늦둥이로 40세에 들어갔던 나이에 청의태상황 이유수와 현임 황제인 전황제 이원을 얻었다. 당시 살았던 취리히에서 종교에 귀의하여 가톨릭에 입교했고 이어 황실 일가 대부분이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당시 황실 지위가 있던 시절에는 종교적 중립을 위해 종교를 안 가졌으나 이젠 영영 제정복고가 어렵다는 판단하에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본토 내에서는 계속 복벽운동이 전개되었다. 허나 6.10 민주 항쟁에 민주파의 영향력이 높아질까봐 두려웠던 복벽파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도리어 6.29 호헌 철폐 선언이 나오면서 민주파가 전국을 장악한다. 복벽파는 어쩔 수없이 별도의 대통령 후보를 내세워 정권을 잡은 이후 차근차근 국민의 신뢰를 얻어가는 방식으로 제정복고를 행하자는 온건파와 현 군사정권의 후예인 노태우를 필두로 한 민주정의당과 협상을 하자는 강경파로 나뉜다. 하지만 민주파에서 복벽파 출신 대통령 후보 출마를 금지시키는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자 온건파의 민주적 복벽론이 몰락하고 복벽파의 당권이 강경파로 넘어간다. 강경파는 경회루 담판을 진행하여 군사 정부와 협상을 타결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복벽론을 설파하여 지방 민심을 얻는데 성공한 복벽파는 곧이어 중장년, 노년층의 옛 제정을 경혐했던 이들을 바탕으로 제국건국준비위원회, 이름바 제건위재건위?를 설립한다. 이후 민주파 세력과는 제2차 경회루 담판을 체결하여 제건위 명예의장 및 임시총리대신 자리를 민주파의 김영삼에 주는 한편 김대중에게는 직책을 안 주어 양김간 분열 유도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양김간 분열을 유도한 것은 맞으나.. 노태우는 직접 스위스로 가서 황실 일가에 복벽을 종용하여 귀국을 요청한다. 당시 의종 황제는 처음 요구에는 거절했으나 두번째 요구는 3시간을 고민한 끝에 수락한다.

복벽

9월 10일, 황실 일가가 고국에서 추방된지 약 27년만에 고국 땅을 밟는다. 곧이어 국조오례의를 바탕으로 하는 예법이 복원되고 이어서 황실 시종관원들이 호선된다. 9월 30일에 의종의 복위 예식이 치뤄지고 다시금 옥좌에 오른다. 복위 1년차에 엄청난 업무를 소화하다 보니 의종 황제는 과로와 지병[2]이 겹쳐 직무 집행이 어려워졌고 결국 이유수 황태자의 섭정(대리청정)이 설치된다.

붕어

1988년 11월 3일, 강황제 이강이 목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79살(셈나이), 78살(만나이)이었다. 이후 그의 장례는 국장(國長)급의 전통적 의식으로 치뤄졌다.

개인 사생활

그는 오미자차와 홍차를 즐겨 마셨으며, 하루에 기본 2잔씩을 마셨다. 오미자차는 경국에 있을때 마셨고 홍차는 스위스에 있을때 마셨다. 이후 복숭아나 사과, 오렌지 같은 과일주스도 매우 좋아하여 수라에 매번 나오게 하였다.

정치적 행보

평가

전반적으로 그는 영종 문황제에 의해 무너질 뻔한 제국을 다시 살리고 정상 궤도에 올리는데 성공함에 있어 큰 업적이 있다.

긍정적

반박

부정적

반박

가족 관계

  • 할아버지 안종 태황제(1852년 9월 8일~1919년 1월 21일) 대경제국 초대 황제
  • 할머니 안경황후 영씨(1851년 11월 17일~1926년 9월 10일) 대경제국 초대 황후
  • 아버지 순종 성황제(1880년 3월 25일~1932년 4월 26일)
  • 어머니 정경황후(순원황태후) 연씨(1879년 3월 15일~1940년 10월 5일)
  • 영종 문황제(1908년 8월 7일~1935년 2월 2일) 의종에게 재위 양위
  • 형수 오경황후(금평황태후) 문씨(1906년 9월 15일~1972년 12월 21일)
  • 의종 대황제 이강(1910년 5월 27일~1988년 11월 3일)
  • 첫번째 부인 승경황후 민씨(1909년 2월 28일~1945년 8월 15일)->두번째 부인 기경태황태후 김화(1931년 12월 29일~현재)
  • 장남 이유수(청의태상황)(1952년 7월 10일~현재)
  • 차남 전황제 이원(1962년 3월 1일~현재)
  • 3남 정양친왕 이고(1963년 5월 9일~현재)
  • 장녀 성미내친왕 이요양 (1964년 12월 5일~현재)
  • 4남 준정친왕 이봉 (1966년 6월 19일~현재)
  • 남동생 윤성대군 이호 (1911년 3월 9일~1915년 11월 4일)
  • 남동생 이문(1913년 3월 4일~1911년 3월 10일) 조졸
  • 여동생 이혜운(1915년 9월 20일~191년 9월 23일) 조졸

어록

기타

  • 이 시기에 의종 대황제는 국휘를 사실상 금지시키면서 국휘는 사문화 되었다.
  • 나이 56살이 되는 1966년까지 슬하에 4남 1녀를 얻었다. ??

각주

  1. 또 다른 황제는 안종 태황제이다.
  2. 스트레스성 뇌경색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