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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은 왕세자 시절 [[의정왕후]]와 반대로 '''백성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지 않은채 아주 조용히 자랐다.''' 명종이 30대에 들어서던 4월 중순에 대왕대비 [[신덕왕후]], 왕대비 [[현덕왕후]], 왕비 [[원경왕후]]가 잇따라 세상을 떠나며 왕실 내에서 서열 2위가 되었다. 세자빈이던 [[의정왕후]]는 대내외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며 백성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명종은 백성들과 소통이 거의 없어 '''왕세자도 대내외적 활동을 해야하는게 아니냐'''라는 말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명종은 왕세자 시절 [[의정왕후]]와 반대로 '''백성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지 않은채 아주 조용히 자랐다.''' 명종이 30대에 들어서던 4월 중순에 대왕대비 [[신덕왕후]], 왕대비 [[현덕왕후]], 왕비 [[원경왕후]]가 잇따라 세상을 떠나며 왕실 내에서 서열 2위가 되었다. 세자빈이던 [[의정왕후]]는 대내외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며 백성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명종은 백성들과 소통이 거의 없어 '''왕세자도 대내외적 활동을 해야하는게 아니냐'''라는 말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왕세자로 재위한지 100일에 들어서던 6월 중순부터 대내외적 활동을 갑자기 재개하였다. 하지만 언행 문제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는데, 장녀 [[정순 공주]]가 쌍둥이 자녀를 낳자 공개적으로 불평하는 말들을 뱉었고, 왕세자로 오래 재위하며 왕위계승이 70대가 다 될때까지 되지 않자 부친 [[대조선국 성종|성종]]을 꼽주는언행을 뱉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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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로 재위한지 100일에 들어서던 6월 중순부터 대내외적 활동을 갑자기 재개하였다. 하지만 언행 문제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는데, 장녀 [[정순 공주]]가 쌍둥이 자녀를 낳자 공개적으로 불평하는 말들을 뱉었고, 왕세자로 오래 재위하며 왕위계승이 70대가 다 될때까지 되지 않자 부친 [[대조선국 성종|성종]]을 꼽을 주는 언행을 뱉기도 하였다.
  
 
==[[파일:현재2.png|width=30]] '''조선 국왕 즉위'''==
 
==[[파일:현재2.png|width=30]] '''조선 국왕 즉위'''==

2023년 8월 18일 (금) 17:52 판

조선왕조.png
대조선국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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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4대 국왕
명종 | 明宗
명종어진.png
출생2023년 2월 20일
대조선국 한양 경복궁 존현각
즉위2023년 7월 1일
대조선국 한양 경복궁 근정전
사망2023년 8월 17일 (향년 101세)
대조선국 한양 경복궁 강녕전
양릉(陽陵)
재위기간2023년 7월 1일 ~ 2023년 8월 17일 (48일)
본관전주 이씨
연(䴏)
부모부왕 성종, 모후 원경왕후
형제자매없음
배우자의정왕후
자녀정순 공주, 효문 세자(양자), 경원대군(양자)
종교유교
신장177cm
묘호명종(明宗)
시호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
연호천평(天平)
명종이라 함은 시대가 위태로울때 재위한 임금의 묘호이다. 명종대왕께서 즉위하실 때 조선이 매우 위태로운건 사실이니 명종이라는 묘호가 옳다.
—  2023년 8월 17일, 명종의 묘호가 확정될 때

조선의 제4대 국왕. 묘호는 종(明宗), 시호는 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이고 휘는 연(䴏)이다.

성종원경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3세 라는 역사상 가장 많은 고령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명종의 재위 기간 초, 조선은 위태로웠지만 중후반을 거치며 조선이 안정기에 들어서 명종은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부왕처럼 오래 장수한 끝에 101세로 훙서하였다. 명종은 성격이 강단스럽고 재위기간 동안 여러 공로를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현재2.png 즉위전 생애

2023년 2월 10일, 성종원경왕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당시에는 왕세손이였다. 19일간 왕세손으로 재위한 끝에 2023년 3월 10일, 왕세자던 성종이 왕위에 오르며 조선의 왕세자가 되었다. 2023년 3월 26일 세자 책봉식을 치룬뒤 21세가 되던 4월 2일, 자신보다 한살 어린 여산 송씨의 의정왕후와 혼례를 맺게 된다. 이후 명종은 혼례를 치룬지 얼마 안된 4월 8일에 정순 공주를 보게 된다.

명종은 왕세자 시절 의정왕후와 반대로 백성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지 않은채 아주 조용히 자랐다. 명종이 30대에 들어서던 4월 중순에 대왕대비 신덕왕후, 왕대비 현덕왕후, 왕비 원경왕후가 잇따라 세상을 떠나며 왕실 내에서 서열 2위가 되었다. 세자빈이던 의정왕후는 대내외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며 백성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명종은 백성들과 소통이 거의 없어 왕세자도 대내외적 활동을 해야하는게 아니냐라는 말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왕세자로 재위한지 100일에 들어서던 6월 중순부터 대내외적 활동을 갑자기 재개하였다. 하지만 언행 문제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는데, 장녀 정순 공주가 쌍둥이 자녀를 낳자 공개적으로 불평하는 말들을 뱉었고, 왕세자로 오래 재위하며 왕위계승이 70대가 다 될때까지 되지 않자 부친 성종을 꼽을 주는 언행을 뱉기도 하였다.

현재2.png 조선 국왕 즉위

7월 1일, 아버지 성종이 훙서하며 73세의 나이로 조선 제4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역사상 왕세자로 가장 오래 재위하며 114일만에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명종은 백성들에게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나라에 헌신을 다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연호는 하늘 아래 평화롭게 한다는 뜻에서 천평(天平)이라 정하였다.

하지만 왕위에 오르자마자, 위기를 맞이하였다. 당시 조선이 내부의 정치적 문제 등을 두고 나라 곳곳의 기능이 붕괴되며 결국 본방이 터지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명종은 왕실 가족들과 함께 한성부를 나와 배를 타고 제주로 잠시 향하여 머물렀다. 얼마 안가서 다시 조선의 대부분 시스템이 복구 되기 시작하였다. 7월 24일에는 유일한 직계 장녀인 정순 공주가 향년 65세로 훙서하며 딸을 잃게 되었다.

재위기간중 문화 콘텐츠로는 카츠오브아이언이 수개월만에 다시 열렸고, 경기 대회가 개최되어 다양한 이벤트들이 열렸다. 정치적으로 명종이 세운 공로는 사헌부와 승정원을 설립한 것인데, 사헌부와 승정원을 통해 조선의 왕권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문제가 많던 성균관을 폐지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와 토지를 개혁하였으며, 홍문관을 설립하여 시강원과 강서원 기능을 유지하게하였다. 또한 과거시험을 더욱 구체적으로 마련하고, 한성부, 내의원, 참판, 능참봉 등을 설치하여 백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실용적인 업무 구조를 만들었으며, 연호를 재도입하는 등 재위기간중 많은 공로를 쌓게된다.

8월 1일, 정순 공주의 소생이자 자신의 손주인 진평군과 경원군을 양자로 들여 진평군을 왕세자로, 경원군을 대군으로 책봉하였다. 조선의 양자 기능이 활용된 것은 역사상 처음이였다. 하지만 양자로 들여진 8월 5일 효문 세자가 훙서하고, 안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던 의정왕후가 다음날 훙서하며 국모와 국본의 자리가 비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에 효문 세자의 장남으로 6일에 태어난 원손 이황을 13일에 조선 왕세손으로 책봉하며 차기 보위를 이을 후계자를 마련하였다.

8월 12일에는 고인물이던 이무관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여, 명종은 그를 영의정으로 추승하고 대군에 준하는 국가장을 열어주었다. 그러다 재위 50일인 금경축을 이틀 앞둔 8월 17일 오후 9시, 명종은 48일간 왕위를 재위한 끝에 향년 101세로 강녕전에서 훙서하였다.

현재2.png 가족 관계


자녀이름출생배우자/자녀
1녀정순 공주2023년 4월 8일덕흥군
효문 세자, 경원 대군

현재2.png 평가

・학구열 : 공부나 학업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성품 : 늘 이성적인 판단을 하였으며 이는 부친 성종과 성격이 비슷하였다.

・치적 : 조선의 정치, 경제 분야를 크게 변화 시킨 공로를 세웠다.

・외모 : 피부색이 밝았다고 하며 눈은 작았다고 한다.

・가정사 : 장녀인 정순 공주가 자신보다 먼저 훙서하고, 잇따라 효문 세자의정왕후, 해주부부인 정씨가 잇따라 죽으며 재위기간중 많은 왕실 가족들이 죽는 고통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