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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민창원 의장은 충분히 정계은퇴를 할만한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계은퇴를 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현재까지도 미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관련 기록이 말소되어 어떻게 민창원 의장이 정계에서 살아남았는지 오리무중이다.
 
어떤 사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민창원 의장은 충분히 정계은퇴를 할만한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계은퇴를 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현재까지도 미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관련 기록이 말소되어 어떻게 민창원 의장이 정계에서 살아남았는지 오리무중이다.
  
아무튼 민창원 의장은 제5대 왕국의회가 해산된 후 127명의 의원과 함께 하늘미르당[* 국민중심당이 최고재판소법 사건을 계기로 개혁을 위해 당명을 하늘미르당으로 변경했고 대표는 [포장] 의원이었다.]을 [https://cafe.naver.com/hanulmir/4024 탈당]했다. 이와 동시에 하늘미르 경제가 침체되었다고 주장하는 [[한비자]] 전 총리가 창당한 공화당에 입당하면서 제6대 왕국의회 의원 총선거에서 공화당의 [https://cafe.naver.com/hanulmir/4074 공천관리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한비자를 막기 위해 위와 같은 졸렬한 짓까지 벌인 민창원 의장이 한비자 전 총리의 정당에 들어갔다는 것이 매우 모순적이고 자가당착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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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민창원 의장은 제5대 왕국의회가 해산된 후 127명의 의원과 함께 하늘미르당[* 국민중심당이 최고재판소법 사건을 계기로 개혁을 위해 당명을 하늘미르당으로 변경했고 대표는 [[포장|이청우]] 의원이었다.]을 [https://cafe.naver.com/hanulmir/4024 탈당]했다. 이와 동시에 하늘미르 경제가 침체되었다고 주장하는 [[한비자]] 전 총리가 창당한 공화당에 입당하면서 제6대 왕국의회 의원 총선거에서 공화당의 [https://cafe.naver.com/hanulmir/4074 공천관리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한비자를 막기 위해 위와 같은 졸렬한 짓까지 벌인 민창원 의장이 한비자 전 총리의 정당에 들어갔다는 것이 매우 모순적이고 자가당착적으로 보인다.  
  
 
민창원 위원장은 왕국의회 의원 공천에 있어서 최초로 점수표를 제작해 점수에 따라 비례대표 순번을 차등적으로 기록하는 형식의 [https://cafe.naver.com/hanulmir/4147 공천]을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 공관위원끼리 주관적인 입장에서 채점했다는 문제와 공관위원장 본인이 자신을 채점한 것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당 내부에서는 혼란이 가중되었다. 결국 민창원 위원장은 3번의 수정을 거쳐 공천안을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했다.  
 
민창원 위원장은 왕국의회 의원 공천에 있어서 최초로 점수표를 제작해 점수에 따라 비례대표 순번을 차등적으로 기록하는 형식의 [https://cafe.naver.com/hanulmir/4147 공천]을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 공관위원끼리 주관적인 입장에서 채점했다는 문제와 공관위원장 본인이 자신을 채점한 것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당 내부에서는 혼란이 가중되었다. 결국 민창원 위원장은 3번의 수정을 거쳐 공천안을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했다.  

2020년 2월 24일 (월) 02:50 판

하늘미르 왕국 의회기.png 제5왕국 이전(단원제) 의회 역대 의장 하늘미르 왕국 의회기.png
제 4대
초보자어때
제 5~6대
민창원
제 7대
루돌프
하늘미르 왕국 의회기.png 제5왕국 이전(단원제) 의회 역대 의장 하늘미르 왕국 의회기.png
제 9대
이맹박
제 10대
민창원
제 11대
김정은
민창원 (閔彰元)
Minchangwon.jpg
이름민창원 (Min Chang Won), 이승우 [1]
국적가상국제연합 하늘미르왕국 대부여국 바람나라
학력공립중학교 졸업
공립외국어고등학교 재학
소속ANM
바람나라 왕실
하늘무역동맹
정당무소속
직업언론인
경력제5~6대 하늘미르왕국 왕국의회 의장
제10대 하늘미르왕국 왕국의회 의장
바람나라 재건위원회 위원장
제5~10대 하늘미르왕국 왕국의회 의원
하늘무역동맹 사외이사
국민회의 당대표
한울당 원내대표
미래의 대안 당대표
ANM 논설위원
서명민창원사인.png


민창원(영어: Min Chang Won, 閔彰元)은 2017년 7월 3일부터 네이버 가상국가에서 활동을 시작한 가상국가인이다. 하늘미르왕국의 대표적인 정치가 중 한 명이었으며 제10대 왕국의회 의장 퇴임과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 후 1년 2개월 동안 잠시 휴식기를 가졌고 2020년 2월 복귀와 동시에 정계 복귀는 기필코 없다고 선을 그었으며 복귀와 동시에 ANM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가상국가에서 활동하기 이전에는 정치모의전에서 활동했다. 정치모의전이 쇠락의 길을 걷자 정치모의전을 떠나 가상국가에 입문했다. 가장 처음 입문한 가상국가는 남화국으로 남화대학교 총장과 각종 공직을 거쳤으나 활동량의 급감으로 하늘미르 왕국으로 옮기게 되었다.

하늘미르왕국으로 활동을 옮긴 후 각종 공직과 정치활동을 이어가며 하늘미르의 대표적인 정치가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부정한 짓과 특정 인물들로부터 심한 모욕을 받는 등 하늘미르 정치의 어두운 부분에서 선봉에 서있던 정치가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하늘미르 의회 시스템과 각종 법률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하늘미르=정치모의전이라는 오명을 만드는데 일조한 사람이 되었다. 다사다난한 정치가로서의 활동을 뒤로하고 2018년 12월 31일 제10대 의장으로서의 활동을 끝으로 하늘미르 정치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그 후 2020년 2월까지 약 1년 2개월간의 휴식 기간을 가졌고 2020년 2월 16일 ANM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면서 하늘미르와 가상국가 활동을 재개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휴식기간 동안 여러 내각에서 정계 복귀와 공직 요청이 있었으나 일절 고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복귀를 하면서도 다시는 정치가와 공직으로서의 활동을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현재는 ANM의 오피니언을 맡아 매주 일요일 오피니언(사설) 民피니언과 매달 마지막 주 일요일 기고되는 독서칼럼 민의의 서재를 기고하고 있다.

가상국가 입문

2017년 7월, 정치모의전의 활동이 줄어듦에 따라 다른 모의전 사람들과 함께 가상국가로 진출했다. 가장 먼저 진출했던 국가는 남화국이었다. 남화대학교 총학장을 비롯해 교육보건성 장관, 추밀원장 등 중요 요직을 역임했으나 계속되는 활동 인구 유출로 인한 활동량 감소 등의 요인으로 남화국은 침체에 빠지게 되면서 민창원은 본인이 임시대사로 있던 하늘미르왕국으로 활동을 옮겼다.

당시 남화국의 국왕이었던 김연화 국왕의 가상국가에 대한 이념은 민창원의 가상국가 이념을 정립하는데 일조했다. 김연화 국왕은 철저한 설정 중심의 가국을 지향했으며 사소한 것 하나까지 설정을 구성해야 한다는 설정중심주의에 따라 남화국을 운영했다. 이에 국왕의 이념에 동조한 민창원은 추후 모든 가상국가에서 설정중심주의라는 이념을 바탕으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늘미르 왕국에서의 활동

Flag of Hanulmir.jpg 가상국가 하늘미르 왕국에서 활동한 인물
이 인물(혹은 사용자)은 당신의 상상을 마음껏 펼치는 국가가상국가 하늘미르 왕국에서 활동을 하고 있거나 한 적이 있으며, 하늘미르 왕국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Emblem of Hanulmir.jpg

국민중심당 평당원 시절

민창원은 하늘미르 왕국에 진출 한 후 국민중심당에 최고위원 자격으로 입당했다. 당시 한비자 총리의 부적절한 행동에 따른 보수신당의 분열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민중심당은 가장 많은 당원을 모집했고 차근차근 총선을 준비했다. 하늘미르 최초로 중도정당의 집권 가능성에 국민중심당 내부에서는 기대의 목소리가 높았졌다. 그리고 선거결과 국민중심당이 제1당의 지위를 얻으며 연립정부 결성을 통해 총리를 배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민창원 의원은 제5대 왕국의회 의장선거에 공식적으로 출마선언을 하였다. 당시 석스 의원도 의장 출마 의사를 내비췄으나 민창원 의원을 지지하면서 국민중심당 의장 후보로 오르게되었다. 그리고 당시 연립정부 일원이었던 민주당 모니터링 대표가 의장 선출안을 발의하고 본회의에서 가결되어 공식적으로 제5대 왕국의회 의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제5대 왕국의회 의장 시절

왕국의회 의장에 선출된 민창원 의장은 다양한 의회시스템 도입을 추진했다. 우선 왕국의회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해 원내교섭단체 제도를 신설하여 의장과 교섭단체 대표의원 간의 긴밀하고 조속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리고 상임위원회 제도를 개편하여 법안의 심사와 논의의 전문성을 강화했다. 그러나 부작용도 발생했다. 민창원 의장은 상임위원회 위원 인선에 대해서 모든 정당의 대표의원이 합의해 조속한 시일내에 합의안을 제출할 것을 요청했다. 만약 여야의 정쟁으로 합의가 불발된다면 인선을 의장의 재량으로 강행할 뜻도 밝혔다. 그러나 우려했던 일이 발생했다. 일부 야당의 계속된 반발로 결국 여야는 상임위원 합의에 실패했고 민창원 의장은 이전에 예고한대로 상임위원회를 의장의 재량에 따라 상임위원회를 배분할 것임을 개진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인선이 완료되었다.

민창원 의장은 상임위원회 개편 외에도 의사일정 제도와 최초로 예산안을 작성하기 위해예산결산특별위원회를 소집했다. 또 차가워진 여야 정국을 풀기 위해 의원 대항 스포츠 데이를 개최했으며 왕국의회 최초로 의원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상임위원회와 의원회관의 생산적인 이용을 위해 왕국의회 설계도 제작을 추진했으며 새로운 왕국의회로 거듭나기 위해 왕국의회 로고 변경과 마스코트 제작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야의 차가운 정국을 타파하기 위한 민창원 의장의 노력은 모종의 이유로 변질되어 극단적으로 치닫고 만다.

최고재판소법 사건

민창원이라는 인물에게 가장 큰 오점을 남긴 사건
입법부 수장이 사법부 수장을 몰아내려한 초유의 사건

당시 하늘미르 정계에서는 한비자 전 총리에 대한 특검이 진행중이었다. 그런데 한비자 전 총리의 부계정으로 의심되는 인물이 국가사회주의당을 운용하면서 제1야당으로 거듭나게 된다. 국민중심당 내부에서는 이대로 가다간 다음 선거에서 정권을 잃을 것이 우려됐기 때문에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개진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나온 방안이 정당 해산이었다. 정당을 해산하기 위해서는 최고재판소의 판결이 필요했다. 그런데 당시 최고재판관이었던 김우석 판사에 대해 국민중심당 일부 세력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그를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방법을 고안해낸 장본인이 바로 민창원 의장이었다.

민창원 의장은 기존에 없던 최고재판소법을 신설해 김우석 판사를 몰아내려고 했다. 민창원 의장이 당시 발의한 최고재판소법의 최고재판관 정년을 이용해 김우석 판사의 나이보다 낮게 만들어 당연퇴직 시킨다는 말도 안 되는 계략을 꾸몄다. 결국 이 졸렬한 계획은 당사 채팅방의 내용이 외부로 유출되면서 무산되었고 국민중심당은 큰 비난과 함께 대부분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계략의 고안자인 민창원 의장 본인에게도 외부로부터 정치적 비난이 쇄도했으며 이 사건으로 정계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제5대 왕국의회는 해산하게 되었다.

현재 민창원 前 의장은 그 당시 사건에 대해 회고하면서 매우 부끄럽고 경거망동하게 행동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죄송스럽다고 말했다. 사건에 대한 아무런 변명이 필요하지 않으며 어리석었던 한 사람이 정권이 눈이 멀어 이와 같은 경망스러운 행동을 했기에 한없이 부끄럽고 할 말이 없다고 밝혔다. 정계에서 물러나고 언론인 생활을 할 적에는 매일 그 사건을 생각하며 후회하고 통회(痛悔)하고 있다고 한다.

공화당 시절

어떤 사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민창원 의장은 충분히 정계은퇴를 할만한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계은퇴를 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현재까지도 미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관련 기록이 말소되어 어떻게 민창원 의장이 정계에서 살아남았는지 오리무중이다.

아무튼 민창원 의장은 제5대 왕국의회가 해산된 후 127명의 의원과 함께 하늘미르당[2]탈당했다. 이와 동시에 하늘미르 경제가 침체되었다고 주장하는 한비자 전 총리가 창당한 공화당에 입당하면서 제6대 왕국의회 의원 총선거에서 공화당의 공천관리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한비자를 막기 위해 위와 같은 졸렬한 짓까지 벌인 민창원 의장이 한비자 전 총리의 정당에 들어갔다는 것이 매우 모순적이고 자가당착적으로 보인다.

민창원 위원장은 왕국의회 의원 공천에 있어서 최초로 점수표를 제작해 점수에 따라 비례대표 순번을 차등적으로 기록하는 형식의 공천을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 공관위원끼리 주관적인 입장에서 채점했다는 문제와 공관위원장 본인이 자신을 채점한 것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당 내부에서는 혼란이 가중되었다. 결국 민창원 위원장은 3번의 수정을 거쳐 공천안을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했다.

공천을 마무리한 후 민창원 위원장은 선거운동에 전념했다. 당시 하늘미르의 선거 방식은 국내 선거 반영비율이 50%였고 국외 선거 반영비율이 50%였는데 민창원 위원장은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선거 비율이 사회적으로 전혀 합의하지 않은 사항이라는 명분으로 주장했지만 사실상 국외 선거에서 불리한 공화당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였다. 그와 동시에 공화당 내부에서는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이맹박 후보가 로베르토 알 미르 국왕에 대한 비판성 글을 기고하자 이를 비판하며 당 윤리위원회 제소를 주장했다.

선거 결과 공화당은 당초 마지노선으로 정한 과반수에도 못 미치는 171석을 얻으면서 내홍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한비자 대표가 부계정을 이용해 부정선거를 했다는 것이 드러나자 하늘미르 정계는 혼란 그 자체였다. 민창원 위원장은 한비자 대표의 부정선거 논란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고 부정선거가 사실로 드러나자 공화당 탈당을 선언했다. 그리고 한비자 대표가 카페를 탈퇴함에 따라 탈당을 철회했다. 민창원 위원장은 부정선거에 대해 우선 선거 결과를 어쩔 수 없지만 용인하고 6대 의회에서 부정선거 방지를 위한 법안과 관련자 처벌을 위한 특검의 추진을 주장했다.

선거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됨에 따라 제7대 내각 구성을 위한 총리를 선출하게 되었다. 민창원 위원장은 7대 내각의 가장 중추적인 목적이자 존재 이유는 부정선거 방지와 대책 마련이라고 주장하며 동시에 공화당의 총리 후보로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같은 당에서는 공천 과정부터 민창원 위원장과 마찰을 빚었던 이맹박 의원이 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공화당 전당대회도 같이 진행하게 됨에 따라 민창원 후보는 당시 당대표 후보였던 조윤상 후보와 사실상 러닝메이트를 맺게 되었다.

공화당 총리 후보 경선은 초반부터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경선 준비를 위한 과정에서 공천관리위원회가 경선을 공고하는 등 많은 혼전이 있었다. 가장 갈등이 컸던 부분은 경선의 방식이었다. 민창원 후보와 조윤상 후보 측은 국민참여경선을 주장했고 이맹박 후보 측은 당원 투표를 주장했다. 이로 인해 양측은 열띤 공방을 이어나갔다. 그러자 민창원 후보와 조윤상 후보는 공화당 당헌에서 총리 경선은 국민참여경선으로 진행한다는 당헌을 발견하고 논란을 종식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국민 투표의 반영 비율을 가지고 양 측은 공방을 이어갔다. 그 가운데 임시대표였던 이맹박 후보는 경선위원회 위원장에 안철정 의원을 임명하면서 민창원 후보 측은 편파 인사 논란을 제기했다. 결국 경선위원회의 결정으로 당원 투표 70%와 국민 투표 30%로 결정되었다. 당시 대국민 여론조사에서는 민창원 후보가 앞섰기 때문에 민창원 후보 측은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했다.

경선 방식의 논의가 소강 상태에 이르렀을 무렵 다시 한 번 사건이 발생했다. 이맹박 후보가 민창원 후보에게 단일화를 요청했고 민창원 후보는 그것을 거절했는데 이에 대해 이맹박 후보가 민창원 후보를 향한 폭언을 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민창원 후보는 대화 내용을 공개하면서 이맹박 후보의 사과와 사퇴를 요구했다. 결국 이맹박 후보는 사과했지만 사퇴는 하지 않았다.

결국 경선 결과 이맹박 후보가 공화당 총리 후보로 선출되었고 민창원 후보는 이에 대해 승복했다. 그리고 조윤상후보도 당대표 선거에서 낙선했다. 하지만 끝날 줄 알았던 내부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결국 갈등이 너무 심해지자 서로 간의 계파를 인정하기로 각 계파 별 의석수를 할당함에 따라 공화당은 이맹박계와 개혁계[3]로 나뉘게 되었다. 다만 분당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제6대 왕국의회 의장을 선출할 때도 계파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결론적으로 민창원 후보가 다시 맡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본회의에서 선출됨에 따라 공식적으로 제6대 왕국의회 의장이 되었다.

제6대 왕국의회 의장 시절

민창원 의장은 기존 제대로 작동하지 않던 상임위원회 시스템을 다시 한 번 개편했다. 법안 심사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법무법제위원회만 남기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위원장에 조윤상 의원을 보했다. 이맹박계 측에서는 편파 인사라고 비판했다. 이맹박계에서는 의장의 무당직 의무화를 주장하는 등 계속해서 민창원 의장과 개혁계를 압박해왔다.

그리고 이맹박계는 민창원 의장과 개혁계 인사들에게는 통보도 하지 않은 채 공화당과 자유당의 합당을 선언했다. 262석의 거대정당 생성을 통한 정권 재창출이 목적이었다. 철저히 무시당한 민창원 의장과 개혁는 결국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조윤상 의원의 탈당 선언을 필두로 개혁계 의원 70인은 자유민주당(공화당)을 탈당했다. 이에 이맹박 측은 계파를 동반한 탈당은 법적 근거 없는 불법이라며 비판했다. 그러나 민창원 의장은 의장이 가진 유권해석의 권한을 통해 탈당에 대한 유권해석을 진행함으로써 탈당은 공식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정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민창원 의장은 조윤상 의원과 함께 국민회의를 창당하여 새정치를 결의했다.

그리고 카페에서 탈퇴했던 한비자 전 총리가 한비자 전 총리의 딸 컨셉으로 23명의 의원과 탈당을 선언하자 민창원 의장은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계파는 용납될 수 없다는 취지의 유권 해석을 했다.

이맹박 내각은 계속해서 민창원 의장과 국민회의를 공격했다. 심지어 이맹박 총리가 임명한 검찰총장은 처벌의 조항이 없는 절차법인 하늘미르 왕국 왕국의회법을 위반했다는 취지의 공소장으로 민창원 의장을 기소했지만 민창원 의장은 사법서사 육장을 대리인으로 지명해 즉각 반박에 나섰다. 그리고 무죄로 판결됐다.

국민회의와 자유민주당이 계속해서 공방을 가지는 가운데 이맹박 총리는 결국 의회를 해산했다. 그러나 이를 기점으로 이맹박 총리와 그 측근들의 민창원을 향한 폭언은 선을 넘을 정도로 과격해졌다. 이맹박 측은 민창원 의장의 최고재판소법 사건을 계속 언급하며 의장 사퇴를 촉구했고 그 측근들도 욕설과 망발을 민창원 의장에게 퍼부었다. 민창원 의장은 당시 모종의 이유로 몇일 동안 잠수를 탄 상태였다. 그리고 민창원 의장은 잠수를 탄 이유가 현실에서 부친이 교통사고를 당해 어쩔 수 없었다는 발언과 함께 이맹박 총리와 그 측근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의장 사회권을 이양했다. 그와 동시에 해당 발언을 한 이맹박 총리와 육성준 장관을 고소했다.

선거 결과, 위 사건의 여파로 국민회의는 34석이라는 반토막의 결과를 얻게 된다. 민창원 의원은 현실에서 상황이 녹록치 않았기 때문에 가상국가에 신경을 상대적으로 덜 쓰게 되었고 이때 조윤상 대표와도 대화가 단절되면서 관계가 멀어졌다. 조윤상 의원은 말 없이 잠적하고 결국 민창원 의원은 홀로 남게 되었다.

국민회의 당대표 시절

  1. 바람나라 한정
  2. 국민중심당이 최고재판소법 사건을 계기로 개혁을 위해 당명을 하늘미르당으로 변경했고 대표는 이청우 의원이었다.
  3. 민창원 의원과 조윤상 의원의 계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