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중국의 역사적 평가

1981년 11기 6중전회에서 통과된 결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당의 공식적 평가와 함께 작성 과정에서 화궈펑의 퇴진이 결정되었다. 이 문건에는 4천여 명의 당 간부와 이론가들이 동원됐으며 만장일치로 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이 문건의 완성을 위해 15개월의 기간이 소요됐다고 알려졌으며 덩샤오핑도 이에 심혈을 기울였다. 결의에서는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모순을 국가의 주요모순으로 보았다. 농업합작화나 1956년 사회주의 개조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1957년 반우파투쟁의 경우 그것이 필요한 것이었으며, 단지 지나치게 확대된 점이 문제였다고 평가했다. 대약진운동에 관해서는 자연재해와 소련의 기술관료들이 철수한 것에 그 책임을 돌렸고,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마오쩌둥이 그것을 일으킨 것이 과오라고 인정했지만 주요한 문제점들은 린뱌오와 4인방의 책임으로 돌렸다. 덩샤오핑은 마오의 실수나 잘못은 비판하되 혁명적 합법성과 국가 정통성을 위해서 마오의 공헌을 어느 정도 인정해줘야 된다고 강조했다. 결의는 마오의 업적을 높이 샀지만 그의 마지막 통치 20년의 잘못에 대해서는 비판했다. 여기서 문화대혁명은 "건국 이래 당·국가·인민에게 가장 큰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준 10년에 걸친 재난으로 평가되었다."

이 결의에 앞서 1980년 10월, 당의 고급간부 4천명이 참가한 1개월에 걸친 대토론회가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중국 최고의 이론가이자 마오쩌둥의 비서를 역임했던 후챠오무가 이 결의가 작성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울면서 호소할 정도로 신랄하고 직접적인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 제기된 많은 직접적인 비판들은 정식으로 통과된 결의에 채택되지는 않았다. 이는 공산당의 합법적 지위를 수호하기 위한 정치적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당의 지위는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상당히 취약해진 상태였는데, 때문에 공산당은 이러한 상황에서 반우파투쟁이나 대약진운동 등 역사적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를 대비해야 했다. 이와 관련해서, 1980년대 이후 실제로 이뤄진 개혁 정책이 이 결의의 평가와는 다르게 농업합작화 및 마오 시기의 사회주의 개조를 역전시키는 정책들이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호별영농제는 농업합작화의 폐기를 의미했고, 개혁 시기 이루어진 소유제의 전환 역시 이전까지의 정책에 대한 역전을 의미했다. 실제로 추진한 정책들과 반대됐던 정책들마저 그 성과를 옹호했던 이유는, 아직까지도 중국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이라는 가치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반우파투쟁에 대한 평가에서 지식인들이 탄압받으며 중국 역사 전체에 걸쳐 끼친 폐단을 축소시키고, 대약진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수천만의 사망자 문제 또한 회피하였고, 문혁의 문제 역시 당-민, 관-민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회피하고 린뱌오 및 4인방 등 개인들에게만 그 책임을 돌린 것은, [마오쩌둥-사회주의 건설기-공산당] 이라는 세 가지 상징이 불가분의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결의」 또한 과거의 역사 문제에 대한 비판들을 상당 부분 회피하여 결정을 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은 곧 사회주의 건설기에 대한 비판이 되고, 이는 곧 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되기 때문에 역사 문제를 상당 부분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덩샤오핑은 "1957년까지는 대체로 마오쩌둥 동지의 영도가 옳았으나 1957년 반우파투쟁 이후부터 오류가 점점 늘어났다"고 발언한 바 있다. 덩샤오핑의 상기 발언 및 「결의」의 논리에 따르면,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은 서로 깊은 연관이 있으며 그것은 마오쩌둥 동지의 오류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1957년 10월 이후 마오쩌둥이 "정풍의 4단계론"을 이야기하며 1단계인 '대명대방'의 형식으로서 군중 노선을 제시한 것, 그리고 문화대혁명 초기에 당이 통제하고 주도하는 형태의 정치운동을 거부, 즉 당 공작조 철수를 지시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마오쩌둥의 오류"는 덩샤오핑이 갖가지 역사 평가와 발언을 통해 암시하고자 하는 '공산당 혹은 개인의 지위를 수호하기 위한 대중 탄압'보다는 차라리 '쌍백방침' 내지 '정풍운동'에 연원이 닿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1977년에 출판되었던 모택동 선집 5권(1958년까지의 글들을 모은 선집)이 1991년에는 출판되지 않아 현재 일반 서점에서는 마오쩌둥의 1949년까지의 글들을 모아놓은 선집만을 구할 수 있다는 점과, 1957년 반우파운동영도소조 조장을 맡아 적극적으로 반우파투쟁을 추진했던 인물이 바로 덩샤오핑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결의」의 역사 평가에는 81년 당시 공산당의 정치적인 고려가 깊숙히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더욱 증폭된다. 즉 지식인 탄압 문제에 대한 책임을 "잃어버린 20년"으로 회피하면서도 동시에 1956년까지의 마오쩌둥은 긍정함으로써 [마오쩌둥->사회주의 건설->공산당 영도]라는 가치는 수호하려는 시도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이는 반우파투쟁에 있어서 공산당의 영도를 비판했던 우파들에 대한 반격은 정당했다고 평가하는 부분과도 일맥상통한다.

문화대혁명 연표

1965년 1월 사회주의 교육운동을 총괄하기 위한 당 중앙공작회의 소집

  • - 마오의 ‘농촌의 사회주의 교육운동에서 제기된 약간의 당면 문제(통칭 23조)’ 주장
    - 당내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를 일소할 것을 주장
    -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세력(주자파)”의 용어가 본격적 등장

1965년 11월 야오원위안이 우한의 역사극 하이루이의 파관을 비평하는 글 게재
1966년 2월 3일 문혁 소조는 당면 학술토론에 관한 문화혁명 5인 소조의 보고 제강 작성(2월 제강)

  • - 더 이상 쟁점을 확대하지 않는 방향에서 해결하려 함
    - 마오는 이런 시도에 반발, 5월에 갈등 폭발

1966년 5월 16일 야오원위안이 「‘3가촌’을 평한다」는 글 발표

  • - 정치공세의 성격 1966년 5월 마오는 문예계의 문화혁명을 학교로 확대, 교육혁명을 개시하자는 취지 「5.7지시」발표

19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 통과(5.16통지)

  • - 2월 제강 비판, 천보다가 중심이 되어 작성하고 마오의 재수정 거쳐 완성, 문혁 5인 소조 비판, 문화혁명 성격 정치적으로 전환, 공격의 대상을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세력’으로 지정
    - 영역은 학술 권위에 한정, 학술, 교육, 언론, 문예, 출판계의 반동사상을 철저히 비판하자 주장, 2월 제강 폐기, 문혁 5인 소조 해체
    - 정치국 상무위원회 산하에 중앙문화혁명소조 결성, 천보다 조장, 캉성 고문, 제1 부조장에 장칭
    - 1년 뒤에 공개됨
    - 당은 5월 25일 문화혁명을 학술, 교육, 언론, 문예, 출판계에 한정한다는 지시 하달

1966년 5월 25일 베이징대학에서 니에위안쯔 등 7명이 대자보 게시, 마오의 적극 지지
1966년 5월 29일 칭화대학 부속중학교에서 홍위병 결성 이후 전국으로 확대
1966년 6월 1일 류사오치의 주재로 회의 개최, 당이 공작조 파견해 문화혁명 지도하기로 결정

  • - 공작조는 8조 규정에 따라 제한적으로 질서있게 운동 추정
    - 베이징에만 1만명 파견
    - 이들은 주로 계급성분이 좋지않은 학생, 작가,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삼음
    - 공작조가 파견되기 시작한 6월 초에서 공작조 파견을 철회한 7월 말까지를 ‘초기 50일’이라 부름 : 문혁의 주요 대립구도 형성

1966년 6월 18일 베이징대학에서 학생들이 40여명의 학교 간부와 교수 학자들을 상대로 비판대회

  • - 이후로도 학교마다 공작조와 이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대립이 이어짐

1966년 7월 18일 마오가 베이징 정치 무대에 복귀
1966년 7월 25일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비판, 공작조 철수 지시
1966년 8월 초 8기 11중전회 소집, 문혁의 방향을 둘러싼 논의 전개

  • - 마오는 8월 4일부터 공세를 펴기 시작, 8월 7일 「사령부를 포격하라 - 나의 대자보」 발표
    - 일부 지도부가 부르주아계급 독재를 실행하고 있다 주장
    - 8월 8일 11중전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16조) 통과 시킴
    -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가 공격대상, 상부구조 개혁 목표, 방법으로 4대 민주, 대명, 대방, 대자보, 대변론 제시, ‘문화혁명소조, 문화혁명위원회, 문화혁명대표대회’의 설치 결의. 95%의 단결을 주장
    - 파리 코뮌의 원칙을 준거점으로 삼고 있음, 혁명위원회 선출시 전면선거와 인민소환

1966년 8월 18일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경축대회’ 열림, 100만 홍위병

  • - 홍위병들의 혈통론 논쟁 전개 8월 초 베이징항공학원 부속중학 홍위병이 “부모가 혁명을 하면 자식은 멋진 놈, 부모가 반동이면 자식은 개자식”이라는 문구 베이징 각 대학에 게재 8월 12일 고급 간부의 자제인 탄리푸가 “부모가 혁명을 하면 자식은 후계자, 부모가 반동이면 자식은 배신자” 구절 추가, 8월 20일에 베이징공업대학 변론회에서의 발언을 통해 혈통론 정당화(한편으로 조반파 홍위병 결성, 베이징 소재 대학들의 5대 영수 중심)

1966년 8월 23일 중앙문혁소조에서 기준제시 「공농병은 혁명 학생을 단호히 지지하라」 발표

  • - 당 중앙과 각 지역 당조직 구분, 후자를 공격대상으로 허용

1966년 10월 마오가 ‘부르주아 반동노선을 철저히 비판하자’는 구호를 제기
1966년 10월 5일 당에서 「긴급지시」를 하달 문혁에 대한 지도를 당위원회부터 대중으로 넘김
- 반혁명으로 탄압받은 대중 복권, 조반파 세력 강화
1966년 10월 공작회의에서 혈통론을 반혁명 노선이라 비판 : 혈통론 기반 홍위병 약화
1966년 10월 16일 천보다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의 두가지 노선 - 중앙공작회의 상의 강화」 발표

  • - 네 달간의 문화대혁명 정리, 문혁의 방향 천명
    - 문혁과 홍위병 운동 높이 평가
    - 마오의 「사령부를 포격하라」 전문 인용해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비판
    - 부르주아 반동 노선과 마오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혁명 노선을 구분
    - 두 가지 노선 투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지적
    - 군중을 두려워하고 혁명을 두려워하는 세력 비판
    - 노선오류를 범한 사람들에 대한 조치는 대상에 따라 상이하게 적용할 것 주장
    - 혈통론을 반혁명 노선이라 비판
    - 계급분석에 입각해 다수와 소수를 구분해야 한다는 점 강조

1966년 10월 23일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중공 중앙공작회의에서 자기비판 수행, 문혁은 격화
1966년 11월 상하이에서 조반파들이 연합해 ‘상하이 노동자 혁명 조반 총사령부’(공총사) 결성

  • - 상하이 시는 조반조직 인정하지 않음
    - 이에 공총사는 11월 10일 상하이에서 기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가는 상경투쟁 감행
    - 공총사와 이를 저지하려는 상하이측의 대치가 31시간 지속, 문혁소조는 처음에 현지해결을 지시하였지만 중앙에서 파견된 장춘치아오가 현지에서 공총사 승인

1966년 중앙에서 11월과 12월에 공업, 교통 기업 좌담회 소집

  • - 공장 내에서 문혁 제한, 당의 지도 강화, 대중조직 인정하지 않음, 학생들 대교류 수용하지 않는 내용의 15조 작성 공표하려 함
    - 마오는 이에 반대 12월 4~6일 개최된 중공 중앙 정치국 확대회의는 이를 비판하고 정반대의 내용을 담은 공업 10조를 통과 : 문혁의 새로운 전환점
    - 문혁이 상부구조에서 토대로 확장, 문예계를 넘어 당권파와 전 사회로 확장

1967년 1월 당기관지 홍기와 인민일보는 문화혁명이 공장 및 광산으로 확산되어야 한다는 사설 공식 게재 : 노동자 조반파의 결성과 확대를 촉진
1967년 1월 13일 공안 6조 발표

  • - 반혁명 분자 광범하게 규정, 진압 필요성 강조(이질적)

1967년 1월 23일 중공 중앙, 국무원, 중앙 군사위원회, 중앙문혁소조 공동으로 ‘인민해방군이 단호하게 혁명 좌파 대중을 지지하는 것에 관한 결정’ 발표, 군의 개입 시작
1967년 1월 중 상해에서 대중조직들과 조반파들이 연합해 2월 5일 상하이 인민공사의 성립 선포

  • - 파리 코뮌을 본떠서 진행, 대체 권력으로 선포됨(장춘치아오가 영향력 행사)
    - 마오는 2월 5일 상하이 인민공사 승인
    - 산시성과 흑룡강성에서도 탈권 진행, 대중조직과 군, 당간부가 결합한 혁명위원회 모델 등장
    - 마오는 이를 이상적이라 간주 : 상해에서도 혁명위원회로 대체할 것 지시(2월 23일)
    - 2월 24일 장춘치아오가 상해 혁명위원회 건립 선언

1967년 2월 고위 당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문혁 비판(1월에 ‘징시빈관’ 모임, 2월에는 화이런탕 모임)

  • - 마오와 조반파는 이를 ‘2월 역류’라 부름, 중국 측 공식 기록에서는 ‘2월 항쟁’이라 부름 - 이는 2월 18일 마오의 개입에 의해 중단
    - 저우언라이는 이들의 비판 수용 간부 권위 존중, 고급 간부 공격 금지, 탈권 범위 한정 강조
    - 마오는 1월 30일 탄전린 보고 결제하며 반혁명 분자가 잡입했음 경고, 이들 색출할 것 지시
    - 당내에서도 반혁명 진압에 대한 분위기 강화, 혈통론적 사고 재등장

1967년 3월 19일 중앙군사위원회가 ‘삼지양군’의 방침 결정, 문혁 과정에 개입(명시적으로)

  • - 삼지양군이란 좌파지지, 공업지지, 농업지지 등 세 가지 지지와 군사관제와 군사훈련을 위해 개입함을 뜻함
    - 군은 파벌간의 대립 관리 통제, 혁명위원회 수립 개입, 학생들에게 군사훈련 실시
    - 인민해방군-당 간부-보수적 대중조직의 동맹 형성
    - 임표가 마오의 후계자로 대두, 임표는 군에 마오 사상 학습과 숭배 운동을 전개
    - 애매한 군의 태도로 2. 23 학살 사건 발생 사령관과 부사령관의 충돌 발생

1967년 3월 말 중공 중앙은 2. 23 학살 사건 조사, 책임자 문책
1967년 4월 1일 이전에 군대와 충돌하거나 반혁명으로 규정된 세력 복권하고 석방 지시
1967년 5월부터 혁명 대비판 전개

  • - 류샤오치의 타도에 초점, 류사오치를 희생양 삼음
    - 류사오치는 7월 완전히 실각

1967년 여름 마오는 혁명위원회를 강력히 추진하며 대연합의 구호 제창개조반파는 이와 충돌, 당의 주도를 인정할 수 없음, 구호도 점차 변화 ‘당 위원회를 차버리고 혁명을 하자’, 무장 투쟁 빈발, 통제 불가능의 상황 전개

1967년 7월 20일 후베이성 우한에서 7. 20 사건 발생 내전 상황으로 치달음

  • - 보수파와 조반파의 대립에 군의 분열까지 더해짐 : 현지 군부대와 중앙 군대와의 충돌 직전까지 감 : 그 전후 많은 사상자 발생이 즈음 조반파 내에서도 온건조반파와 급진 조반파의 분화와 대립이 격화

1968년 5월부터 계급 대오 내부로 침투한 ‘적’ 색출 운동 전개
1968년 8월 경 광시성에서 혁명 위원회 수립을 놓고 전투 발생 : 사망자 1300명 이상, 반대파 2300여명 사형
1968년 7월 28일 마오는 ‘5대 영수’를 모아서 홍위병 운동을 중단할 것과 상산하향 운동에 참여할 것 요구

  • - 조반파 홍위병 시기가 종료되는 전환점 : 홍위병들은 점차 진압되고 조직은 해체됨

1968년 7월과 8월에 노동자 선전대와 군인 선전대가 학교에 진주하기 시작
1968년 9월 7일 각 성급 혁명 위원회 건립 완결
1968년 10월 13~31일 개최된 중공 중앙 8기 12중 전회 류사오치 영구 제명
1969년 중반 이후 조반파 조직은 대부분 와해 됨
1969년 4월 제 9차 당대회 개최 당기구의 복구와 당으로 권력 재집중, 문화혁명은 당에서 주도하는 정풍 형태로 전환

  • - 이 당대회에서 임표를 마오의 2인자이자 후계자로 언급, 하지만 임표의 동맹들은 실각하며 사실상 임표는 고립.

1970년 1월 31 반혁명 파괴활동을 타격하는 것에 관한 지시(一打三反)

  • - 계급대오 정돈 운동

1970년 3월 ‘5.16 분자 색출’작업
1970년 9월 6일부터 열린 9기 2중 전회에서 천보다 실각
1971년 9월 13일 임표 사망
1976년 1월 주은래 사망
1976년 7월 주덕 사망
1976년 9월 모택동 사망

  • - 군부와 등소평이 연합하여 사인방을 체포하고 문화대혁명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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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주의 역사 ]
역사
  1. 독일농민전쟁 (1524년)
  2. 산업 혁명 (18세기 중반)
  3. 프랑스 혁명 (1789년)
  4. 의인동맹 창설 (1836년)
  5. 공산주의자 동맹 창설 (1847년)
  6. 제1인터내셔널 성립 (1864년)
  7. 파리 코뮌 (1871년)
  8. 메이데이 총파업 (1886년)
  9. 제2인터내셔널 성립 (1889년)
  10. 10월 혁명 (1917년)
  11. 러시아 내전 (1917년)
  12. 스파르타쿠스 봉기 (1919년 2월)
  13. 코민테른 성립 (1919년 3월)
  14. 소비에트 연방 성립 (1922년)
  15. 제1차 국공 내전 (1927년)
  16.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28년)
  17. 스페인 내전 (1936년)
  18. 대숙청 (1937년 7월)
  19. 제2차 국공 합작 (1937년 9월)
  20. 그리스 내전 (1946년 3월 30일)
  21. 제2차 국공 내전 (1946년 3월 31일)
  22. 냉전 (1947년)
  23. 한국 전쟁 (1950년)
  24. 베트남 전쟁 (1955년)
  25. 1956년 헝가리 혁명 (1956년)
  26. 대약진 운동 (1958년)
  27. 쿠바 혁명 (1959년)
  28. 문화대혁명 (1966년)
  29. 니카라과 혁명 (1978년)
  30. 페레스트로이카 (1985년)
  31. 동유럽 혁명 (1989년 6월)
  32. 소련의 붕괴 (199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