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시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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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시아 공화국
アラシア 共和国
REPUBLIC OF ARASIA
Arasia.png
국기
아라시아 공화국 국장.png
국장
국호아라시아 공화국
REPUBLIC OF ARASIA
アラシア 共和国
상징국가我々は倒れない
(우리는 쓰러지지 않는다/We don't fall down)
국화모란
국조먹황새(Black stork)
표어一つの民族, 一つの体制, 一つの国
(하나의 민족, 하나의 체제, 하나의 국가)
자연환경면적(영토)97,530 km²
인문환경인구45,093,982명
인구밀도419.39 명/㎢
공용 언어영어[1], 일본어
정치국체공화제
정부형태대통령중심제 (사실상 이원집정부제)
대통령이와키 키요코 (岩城 喜世子)
국무총리소고 카츠요시 (十合 克仁)
국회의장시라하마 후미타다 (Shirahama Fumitada)
최고재판원장아야세 요시로 (Ayase Yoshiro)
경제GDP$2,422,453,592,000 (2019년/8위)
1인당 GDP$53,720 (2019년/11위)
GDP(PPP)$2,491,118,864,100 (2019년/12위)
1인당 GDP(PPP)$55,242 (2019년/12위)
공식 화폐아라시아 엔 (円)
단위
법정연호서력기원
시간대ATC (UTC+9)
도메인.ar
국제전화+83

개요

아라시아 공화국 (영어:Republic of Arasia/일본어:アラシア 共和国)는 동북아시아 끝에 위치한 섬나라이다. 수도는 타이쿄 (대경)이다. 현재 아라시아 공화국의 국체와 정치체제는 상대적으로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는데 내외적으로 공화제, 대통령 중심제, 공화정, 단일국가를 표방하지만 사실상 이원집정부제 국가이다.

민주주의 수치는 상당히 높은 국가에 속하지만 국가원수인 대통령직은 세습으로 이루어지고 있다.[2]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며 현재 대통령은 전임 이와키 코자부로으로부터 대통령직을 세습한 이와키 키요코이다.

집권여당은 소고 카츠요시 총리가 속한 아라시아 민주당이며 제2공화국 수립 이후부터 대부분 집권여당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정치

아라시아 공화국 헌법에 따라 국회의 입법부, 대통령의 행정부, 법원의 사법부가 삼권 분립에 입각해 담당하고 있다.

정당

아라시아 공화국은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현재 아라시아 공화국 34대 의회에는 총5개의 원내정당이 존재한다.

총재: 소고 카츠요시 (Sogo katsuyoshi/十合 克仁/そごう かつよし)
원내대표: 츠가 오야자토 (Tsuga Oyazato/津賀 親里/つが おやざと)

대표: 마나카 사토후미 (Manaka Satofumi/間中 郷文/まなか さとふみ)
원내대표: 타치바나 츠네사토 (Tachibana Tsunesato/橘 常邑/たちばな つねさと)

대표: 에키잔 토모히로 (Ekizan Tomohiro/奕山 朋紘/えきざん ともひろ)
원내대표: 호시카와 하츠코 (Hoshikawa Hatsuko/星川 発子/ほしかわ はつこ)

서기장: 한재익 (Han Jae-ik/韓在益/ハン・ジェイク)
원내대표: 하야미 히데요리 (Hayami Hideyori/早速 秀順/はやみ ひでより)

대표: 무라타카 노리요시 (Murataka Noriyoshi/村高 紀吉/むらたか のりよし)
원내대표: 타카다 테츠지로 (Takada Tetsujiro/高多 哲二郎/たかだ てつじろう)

문화

스포츠

아라시아 공화국에서의 스포츠는 대단히 주목받는 문화 중 하나이다. 특히 스포츠 중에서도 아라시아 공화국의 축구는 국민스포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그 인기가 대단하다.

대외관계

대한민국

아라시아 공화국과 대한민국은 상당히 긴밀한 외교관계를 맻고 있는 나라이다. 한국과 아라시아 공화국은 일제강점기란 비슷한 암흑의 시기를 겪었고 독립 이후 비슷한 처지에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두 나라는 여러가지 협력을 하며 공동발전을 도모했다. 1957년 공식으로 수교하였으며 서울특별시에 대사관이, 부산광역시에 영사관이 설치되어 있다.

2019년 10월 14일 아라시아 외무부가 대한민국 청와대에 키사라기 히나 주대한민국 아라시아 대사를 통해 한국 정부가 북한 편만 들고 제재이행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을 경우 한국과의 외교도 순식간에 단절할 수 있다고 전달한 만큼 외교단절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북한

2004년 공식으로 수교하였다. 이와키 코자부로 대통령의 지시로 한국 정부를 통해 곡류와 의약품을 수차례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에서 이명박 정부가 시작되어 중단될 때까지 엄청난 양을 지원했다.

2019년 8월 25일 대한민국 문재인 정부의 의료품 및 식량을 포함한 대북지원 제의에 이와키 키요코 대통령이 국제정세를 언급하며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10월 1일 이와키 키요코 대통령이 취재진과의 기자회견에서 북한에 인도적 지원 및 북한과의 모든 교류 중단 검토를 시사했으며 10월 5일부터 북한 전역의 모든 내국인을 우선 철수시키고 13일 대사와 총영사 및 최소한의 인력을 제외한 대사관 직원들을 철수시켰으며 10월 14일 북한에 남아있던 모든 인력들을 소환하고 오후 7시 외무부를 통해 핵폐기시까지 모든 교류를 중단하기로 하며 외교단절을 선언했다. 그러면서도 청와대에 키사라기 히나 주대한민국 아라시아 대사를 통해 한국 정부가 북한 편만 들고 제재이행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을 경우 한국과의 외교도 순식간에 단절할 수 있다고 전달했다.

일본

양국은 한일협정 1년 뒤인 1966년 아일 협정을 통해[3]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양국 간에 역사 인식, 영토 등에 대한 갈등이 존재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범들을 숭배하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나 니시타우오 섬(西多漁島), 아오우미 섬(靑海島), 토리아키하 섬(鳥昭羽島) 같은 시마토리현의 부속도서 영유권 문제[4], 일본군 위안부도 민감한 문제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에서 아라시아 공화국 문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양국간 교류가 많이 증진되었다. 그러나 역사·영토(시마토리현 부속도서 영유권 분쟁) 문제 등 여러 부분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고,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강화함으로써 양국 관계도 점차 경직되어가고 있다.

2007년에 다이쿄만 해상충돌미와시함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여 아라시아 공화국과의 일본과의 전쟁위기가 고조되기도 했다. 2019년에는 이와키 키요코 대통령이 "일본의 어이없고 불합리한 경제제재에 대해 아라시아 공화국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국편을 들겠다."라고 공식선언함과 동시에 한일관계만큼이나 경직되어 버렸다.

2019년 7월 15일 일본의 제의로 대일청구권 최종합의를 위한 협의이 도쿄에서 열렸다. 10억 엔을 배상하겠다는 일본의 제안에 아라시아 공화국 측의 아사구치 아키야 외무차관이 우리는 한국처럼 푼돈으로 해결하지 않겠다며 무조건적으로 35억 달러 이상을 요구하면서 일본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또 결렬되었다.

2019년 7월 23일 러시아의 한국 독도 영해 침공에 대해 일본이 자기 영토라고 항의하자 아라시아 공화국 공군 소속 F-35A 편대가 일본 혼슈지방과 규슈지방을 가로질러 비행하자 일본 정부가 항의했다 하지만 아라시아 공화국 정부는 불법 점유된 우리 영토에서의 훈련이라며 일본의 항의를 무시했다.

중국

미국

러시아

역사

고대

중세

근현대

미군정

아라시아 제국이 주권을 상실한 뒤,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30~40년 동안 수난과 고통의 일제강점기 시대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1945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함으로써 아라시아 지역은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하지만 승전국들이 카이로, 얄타, 포츠담 회담에서 합의한 바대로 해방과 동시에 아라시아 전역은 진주한 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아소 히사나오 (吾生 寿猶/Aso Hisanao)와 좌우익의 각 인사들이 모여 만든 아라시아건국준비위원회아라시아 인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미군정에 의해 부정되었다.

아라시아 섬 전체가 신탁통치에 따른 입장의 차이와 급속한 이념의 대립에 따른 분단의 불안감, 여러 정치세력의 투쟁과 정적에 대한 무력행사, 무질서한 경제 등 사회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좌우합작운동 같은 협력을 위한 노력들이 있었고 미국은 1948년에 군정을 끝내기로 했으나 공산세력이 7.3 사건을 일으키면서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에 미군정은 군정기간 연장하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하였고 아라시아의 좌우익 인사들과의 협의를 통해 군정 기간을 치안이 어느정도 안정될 것이라고 예상되는 1955년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아라시아 제1공화국

1953년 제헌국회 총선 이후 1955년 9월 10일 미군정의 감시하에 실시된 아라시아 초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아라시아 민족독립당[5] 소속 츠키지 타카아키 민독당 총재가 초대 대통령으로, 토노키야 코시로가 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미군정은 정식으로 종결되고 아라시아 제1공화국이 공식 출범하였다.

아라시아 제2공화국

1972년 7월 23일 아라시아 공화국의 육군총장이었던 이와키 카즈타카 육군대장이 7.23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6] 이와키 카즈타카는 먼저 차기 선거부터 부통령직을 폐지하기호 하고, 국무총리직을 신설하였다. 본인이 직접 국무총리에 올랐다.

그후 자신을 위원장으로하여 국민혁명위원회를 창설하였다. 창설 즉시 군인들로 하여금 행정부처의 역할을 대신하게 됨으로써 내각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당시 무라세 카이타 정부는 이전 정부와는 달리 매일 계속되는 시위와 집회에 손수무책이었고 제대로된 국정운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서 의외로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쿠데타 세력에 대한 우호도가 높았다.

쿠데타 세력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국가혁명재판원을 설립하여 당시만 해도 사회를 어지럽게 하는 전국 각지의 정치깡패을 잡아들였다.

각주

  1. 2000년대 이후 세대인 이와키 키요코의 대통령 취임 전에는 일본어가 공용어로써 절대적인 우위가 있었으나 이와키 키요코 취임 이후로는 영어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2. 그래서 아라시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대통령이 입헌군주정의 군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3. 당시 사사오 토키노리 대통령의 정치적 몰락을 가지고 오게된 결정적 이유이다. 당시 아라시아 외무부 장관 하타가키 나오야스가 만약 일본이 조약에 자국에 유리한 내용을 한 단어라도 넣는다면 일본과의 화해는 없을 것이다라고 강경한 자세로 나온 덕분에 청구권에 대해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라는 문장이 빠졌고 청구권 관련 최종내용은 추후 협의하기로 양국이 협의하였다.
  4. 현재 이 섬들은 아라시아 공화국이 실효지배 중이나 일본은 이 섬들을 아라시아 공화국이 불법점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5. 아라시아 자유당의 전신 격의 정당이다.
  6. 한국의 5.16 쿠데타를 보고 계획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