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곧 국가다

개요

L'État, c'est moi.

프랑스 왕국의 왕 루이 14세가 했다는 말로 유명한 문장이다. 1655년 4월 13일 프랑스 고등법원[1]을 굴복시키기 위해 법원을 찾아갔을 때 이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Bély 2005:47)[2] 후술하듯 "짐이 곧 국가다"라는 발언에 대해서는 진위 여부가 의심되지만 이 방문 자체는 역사적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Cette monarchie fut pure et absolue. Elle reposa toute dans la royauté, et la royauté toute dans le roi (…) S'il voulut ménager le sang de ses sujets, ce ne fut ni par devoir ni par pitié, mais par intérêt de propriétaire. (…) Enfin le Coran de la France fut contenu dans quatre syllabes, et Louis XIV les prononça un jour : « L'état c'est moi. »
이 군주제는 순수하고 절대적이었다. 이 체제는 왕족에게 온전히 기초했으며 왕족은 왕에게 온전히 기초했다. (…) 설령 이 체제가 신민의 피를 아끼고자 했다면 이는 의무감 때문에도, 동정심 때문에도 아닌 단지 주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 마침내 프랑스의 쿠란은 4음절로 만들어졌고 루이 14세는 어느 날 이를 말로 내뱉었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피에르에두아르 레몽테(Pierre-Édouard Lémontey)의 에세이(1818:325-327)[3]에서 이 문장이 인용된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쿠란에 비유하고 있는 것에서도 보듯 절대왕정의 왕권이 매우 강력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화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 아래에서도 다루듯 이는 실제 역사와는 매우 다르다.

의미

왕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발언으로 종종 인용된다. 루이 14세가 이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기에 절대왕정과 결부되어 주로 이야기되곤 한다. 그런데 위에서 보듯 루이 14세가 한 말이 아닐 가능성이 높으니 루이 14세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후대의 사람들이 절대왕정에 대하여 가졌던 인식을 보여주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위에서 보듯 피에르에두아르는 절대왕정이 이슬람교쿠란만큼이나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고 이 문장을 집어넣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당시의 실제 정치 상황은 이 문장과 매우 거리가 멀었다. 절대왕정 시절 왕좌는 국가의 표상이었지, 국가 그 자체와 동일시되지 않았다. 국왕의 자리에 앉은 사람은 더더욱 국가와 동일시되지 않았다. 비록 오늘날의 입헌군주제 국가보다는 왕권이 강력했으나, 원칙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서유럽의 절대왕정은 왕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체제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서유럽의 정치학적 전통에서, 백성 전체를 종처럼 부리는 것은 동양식 군주정이라며[4] 부정적으로 보았다. 더 나아가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는 국가란 국민이 스스로를 위해 계약을 체결하여 조직된 체계라고 보기에, 이 발언과 더욱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국가 지도자는 국가와 동일시되지는 않더라도 국가와의 관계가 상당히 밀접한 것은 사실이다. 영국 왕의 경우 해외 순방을 할 때 영국 여권을 지참하지 않는데, 영국 여권은 명목상 왕의 신하인 외무대신이 왕의 이름으로 발급하는 것이기에 영국 왕은 신하의 도움 없이도 그 스스로 신분을 증명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실무적으로는 동행하는 경호원들이 영국 왕의 신분을 보증해주기에 여권의 유무가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국가 원수국민국가를 한 인격으로서 표상하므로 동일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징적으로 국민과 국가를 나타낸다.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행정부의 수반인 총리와 나란히 국왕 혹은 대통령을 굳이 두는 이유도, 하나의 인격으로서 국민과 국가를 표상하는 개인[5]인 고위 공직자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절차가 의전상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대통령이 '국민국가를 표상하는 개인'과 '행정부 수반'을 겸한다.[6] 국가 지도자에 대한 공격 시도는 선전포고와 동일하게 간주되는 것 역시 국가 지도자 개인과 국가가 오늘날에도 매우 깊은 연결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진위 여부


  1. Parlement de Paris. parlement는 오늘날 의회를 연상시키지만 앙시앵 레짐 하에서는 법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래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법원이라고 번역했다. 1661년 '고등법원'으로 직역될 수 있을 Cours Supérieures로 이름이 바뀌었다.# 참고로 현 프랑스 의회는 Parlement français라고 한다.
  2. Lucien Bély(2005). Louis XIV : le plus grand roi du monde. Les classiques Gisserot de l'histoire. Éditions Jean-paul Gisserot. p. 279. ISBN 287747772X. Bely2005. 구글 도서[프랑스어] Bély(2005)에서는 루이 14세가 사냥복 차림에 채찍을 들고 "짐이 곧 국가다"라고 위협한 것은 속설일 뿐이고 실제로는 오랜 설득을 걸쳤다고 이야기한다.
  3. Essai sur l'établissement monarchique de Louis XIV et sur les altérations qu'il éprouva pendant la vie de ce prince 구글 도서 제목을 적당히 구글 번역으로 돌려보면 "루이 14세의 군주제 수립과 그가 왕자였던 시절에 겪은 변화에 관한 에세이"이다.
  4. 물론 러시아든 근동이든 동아시아든 유럽인의 편견처럼 왕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체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럽인이 동방의 체제를 그렇게 해석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페르시아의 강대함에는 감탄하였지만, 페르시아 신왕이 백성을 노예로 부린다고 생각하여 극도로 경멸하였다. 공치제를 발전시킨 스파르타든 민주정을 발전시킨 아테네든 자신의 체제를 페르시아와 다르다고 보았다. 이런 생각은 고대 로마(관념적으론 망할때까지 공화정이었다) 및 중세 자유도시(코뮌)로 계승되었으며, 원칙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국왕을 국가와 결코 동일시하지 않았다. 이는 국가신토와 현인신 및 국체론을 내세워 원훈회의와 중신회의 및 군부가 신민을 무제한적으로 압제한 근대 일본 제국보다 더 권력 분립적인 체제였다.
  5. 참고: 일본국 헌법 제1조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6. 대한민국 헌법 제66조 ① "대통령은 ...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