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왕정

개요

絶對王政 / Absolute Monarchy

중세 후기부터 근세까지 약 3세기간 기존의 봉건제적 관습이 약화되고 왕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을 일컫는 역사학계의 용어다.

본래는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 자본주의 체제에서 구제도를 가리키는 앙시앵 레짐과 같이 군주를 폭정의 핵심으로 지목하면서 사용한 용어이나 후에 역사학계에서 단어를 차용해서 근세에 서구에서 진행된 중앙집권화 경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전제군주제와 비슷하게 여겨지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절대왕정은 본격적인 중앙집권화로 가는 과도기적 체제에 가깝다. 특히 전제군주제 하에서는 군주가 군림하는 것이 법적으로 명문화되어 있지만 절대왕정에서는 왕의 군림이 법적으로 명문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세 봉건제 체제에서 어느날 확 뒤바뀐게 아니라 수백년간 점진적으로 변화해가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체제였기 때문에 귀족층의 권력도 생각보다 많이 남아있었고 작위 계승법도 봉건제의 그것이 거의 그대로 이어져왔다. 이 시기에도 유럽 왕이 후계자 없이 죽었을 경우 그 나라 언어를 할줄도 모르는 외국인 방계 가문 출신이 와서 왕위를 계승받는 일도 빈번했다.

이렇듯 왕권이 강대해지자, 이를 옹호하는 정치 사상이 나오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왕권신수설이었다. 이에 따르면, 왕권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이며, 신이나 국민은 이에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밖에, 프랑스의 보댕은 국왕을 가부장에 비하여 왕권의 절대성을 옹호하였고, 영국의 홉스는 인간의 자연 상태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이며, 사람들은 이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계약을 맺어 주권자에게 모든 권력을 맡겼으므로, 왕권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였다. #

수백년간 진행된 변화이기에 왕조 가문이 단절되지 않고 오랫동안 지속된 프랑스 같은 나라는 전쟁과 결혼을 통해 국왕이 많은 작위를 얻어 안정적으로 직할령을 늘리고 실권과 정통성을 키워 갔기에 절대왕정으로의 전환이 빨랐고, 왕조가 단절되고 먼 방계나 아예 다른 가문으로 교체된 왕국은 가문이 바뀔 때 국왕이 직할령을 일부 상실하면서[1] 국왕의 실권과 정통성이 하락하고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봉건제에 가까운 체제가 더 오랜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동북아시아 사람들이 흔히 연상하는 강력한 왕이 단일 국가를 완전히 통제하는 체제와 사뭇 다르다.[2]

상세

중세 유럽은 수많은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도시 공동체, 장원 공동체, 교회 공동체, 대학 공동체 등이 그것이었다. 이 공동체들은 저마다 외부에 간섭받지 않는 자기들만의 룰을 가지고 있었고, 각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들과 상호 협력하기도 하고 경쟁, 혹은 적대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 중 특히 독자적인 장원을 보유한 교회와 영주들이 중앙 국가권력에 대항해 왕권의 집중을 견제했던 것이 유럽 봉건제의 특징 중 하나이다.

유럽경제가 발전하며 가장 두각을 나타낸 공동체는 도시 공동체였는데, 도시제조업상업을 주 수입원으로 삼는다는 측면에서 봉건 귀족들과, 세속에서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교회갈등관계에 있었다. 도시들은 상공업과 시장의 발달을 보장받기 위해 왕권과 결탁할 이유가 있었으며, 왕권은 정책 수행(전쟁 수행과 크게 다르지 않다)에 필요한 자금을 얻기 위해 도시들과 결탁할 이유가 있었다.

봉건제 하에서 영주군사력을, 교회가 사회질서를 장악하고 왕권견제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최고 권력은 국왕에게 있다는 것은 절대 부정되지 않았는데, 최고 권력이 도시의 상공업 경제력과 결합함으로써 영주의 농업 경제력에 기반한 군사력, 교회의 교회세에 기반한 사회기능을 압도하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중세 전성기 체제가 왕: 수많은 공동체 간의 세력균형 체제라면 절대왕정기의 체제는 왕+도시: 영주, 교회 등 기타 공동체 간의 세력균형 체제라는 것. 왕권을 견제할 수단 중 하나가 왕권과 결합하면서 다른 왕권 견제 수단의 상대적 약화로 이어지고, 그로 인해 기존의 공동체 간의 견제 상황에서 왕권과 시민 계급이 다른 공동체를 압도할 만큼 성장한 것이 바로 절대왕정이다.

따라서 사회 질서에 기반해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왕정의 군주는 권력의 기반을 군주 스스로에게(Auto) 두고 있는 전제군주정(Autocracy)의 군주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전자는 후자와 달리 자의적으로 과세, 재산/토지 몰수, 제도 신설/개정 등을 할 수 없었고, 비록 막강한 권력을 보유했을지언정 그 행동은 교회법, 관습법, 도시 법률 등에 의해 제한받았다. 루이 16세삼부회를 소집해야만 했던 이유도 그것이다.

교황권위에서 각 국가들의 주권이 풀려나는 사태이기에 이것을 근대적 국가 이성의 시작이라고 보는 연구자가 많다.


  1. 왕이 가진 여러 작위의 계승법이 다르거나 각각의 작위마다 계승 서열이 더 가까운 방계 친척이 별도의 인물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
  2. 심지어 프랑스에서도 국왕에게 반역을 시도한 왕족과 귀족들이 사면받았을 정도로 아시아에 비해 왕권이 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