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1세

러시아 제국 초대 황제
표트르 1세
Пётръ I
Peter der-Grosse 1838.jpg
출생 1672년 6월 9일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사망 1725년 2월 8일 (향년 52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묘소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재위기간 루스 차르
1682년 5월 7일 ~ 1721년 11월 2일
전러시아의 황제
1721년 11월 2일 ~ 1725년 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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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로마노프 가문
이름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
(Пётръ Алексѣ́евичъ Рома́новъ)
부모 아버지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어머니 나탈리야 키릴로브나 나리쉬키나
형제자매 드미트리, 예브도키야, 마르파, 알렉세이, 소피야 알렉세예브나, 예카테리나, 마리야, 표도르 3세, 표도시아, 시메온, 이반 5세, 나탈리야
배우자 예브도키야 로푸히나 (1689년 결혼 / 1698년 이혼)
예카테리나 1세 (1712년 결혼)
자녀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 안나 페트로브나[1],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나탈리야 페트로브나
종교 러시아 정교회
신체 203cm

목차

개요

러시아 제국의 초대 황제.

스웨덴 제국과의 대북방전쟁에서 승리하고 급진적인 서구화를 밀어붙여 개혁을 감행한 지도자로, 마침내 전러시아의 황제를 칭하며 루스 차르국러시아 제국으로 탄생시켰다.

정치적으로 러시아를 강국으로 만들었는데, 스웨덴과의 전쟁 대승 등으로 국력을 과시했으며, 아조프발트해 점령으로 발트함대를 창설하여 러시아 해군의 토대를 마련했다. 서구화를 통해 변방의 러시아를 행정적, 상업적으로 발전시키는 큰 업적을 일궈냈다. 한마디로 러시아의 발전을 바닥부터 굳힌 군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높은 세금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등의 대규모 건축 사업으로 백성들에게 반발을 샀고, 귀족들에게 능력주의 관료제를 강행해 많은 불만을 샀지만, 모두 숙청으로 정리하고 많은 전쟁에서 성공적인 대승을 거두어, 러시아유럽의 주요 정치 중심지로 역사책에 당당히 등장했다.

신분보다 능력 중심의 인재 등용으로 17 ~ 18세기 군주로서 굉장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표트르 1세 때 치안을 담당하는 인물이 무려 선박 심부름꾼이었다. 그만큼 능력 중심적이었다. 귀족도 공무원으로 뽑았는데,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귀족이어도 얄짤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가족인 후계자마저도 능력 중심적이기를 바랬고, 새로운 승계법을 1722년에 제정할 정도의 계몽 군주였다.

기술로써는 국가의 부족함을 쿨하게 인정해 서유럽 사절단을 파견해 본인이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14관등 제도를 만들어 러시아에 근대적 관료 체계를 정립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 수도로 삼아 해상 무역이 무려 몇 배로 뻥튀기되었다. 그의 밑에서 제조업이 크게 성장했으며, 표트르 1세는 키릴 문자를 서구화해 글자꼴을 재정립했고 전통 슬라브족 달력[2]을 서양의 율리우스력으로 통일하였다.

표트르베드로에서 따온 이름이므로 문화권에 따라 '피터 대제'(Peter the Great, 영어권), '페터 대제'(Peter der Große, 독일어권), '피에르 대제'(Pierre le Grande, 프랑스어권), '페드루 대제'(Pedro o Grande, 포르투갈어권)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1. 표트르 3세의 어머니
  2. 슬라브력으로는 9월에 새해가 시작했다! 이러니 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