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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_표어_설명=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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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_이름5=[[안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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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1=[[3·1 운동|독립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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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듣기 (도움말·정보), 大韓民國, 영어: Republic of Korea; ROK)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남부에 있는 공화국이다. 서쪽으로는 서해를 사이에 두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동쪽으로는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맞닿아 있다. 수도는 서울특별시이며, 국기는 태극기, 국가는 조국찬가(비공식), 공용어는 한국어와 한국 수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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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color=#0B3AA8> {{{#FFFFFF '''서울특별시 한강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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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color=#FFFFFF> [[파일:Hanriver.jpg|500px]] ||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은 3.1 운동을 통해 독립을 선언하고,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하며 시작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 지역 거주자들의 자유로운 선거(5.10 총선거)를 통하여 1948년 8월 15일에 공식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출범하였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따르면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대한민국은 1948년 12월 유엔 총회 결의 제195호를 통해 유엔으로부터 한반도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탄생한 한반도 유일한 정부로서 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다. 이후 북한의 남침으로 인하여 위기를 맞았으나, 유엔군의 상륙과 더불어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사망,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사망등으로 인해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 북괴가 멸망하면서 북진통일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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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大韓民國, 영어: Republic of Korea; ROK)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남부에 있는 공화국이다. 서쪽으로는 서해를 사이에 두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동쪽으로는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맞닿아 있다. 수도는 서울특별시이며, 국기는 태극기, 국가는 조국찬가(비공식), 공용어는 한국어와 한국 수어이다. 과거 한국전쟁 이후 폐허나 다름없었던 최빈국이었으나,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기적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현재는 아시아를 선도하는 국가 중 하나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민주화와 산업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로, 군부 정권 30년과 최빈국이라는 최악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아시아의 몇 안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자 경제강국으로 성장하였다.
 
 
대한민국은 한국 전쟁 이래 일명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높은 경제 발전을 이룩하며, 1990년대에 이르러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발전하였다. 2015년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 총소득(GDP)은 36,601달러로 세계은행에서 고소득 국가로 분류되었고, 2016년 유엔의 인간 개발 지수(HDI) 조사에서 세계 18위로 '매우 높음'으로 분류되었다. 또한, 국제 통화 기금(IMF)에서는 대한민국을 선진 경제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명목 국내 총생산(GDP)은 2016년 1조 4112억 달러이다. 또한, 대한민국은 주요 20개국(G20),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개발 원조 위원회(DAC), 파리 클럽과 같은 기구에서 회원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호==
 
==국호==
'대한민국'이란 국호 중 대한(大韓)의 어원은 고대 한반도 남부 일대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인 한(韓)에서 유래한다. 마한, 진한, 변한을 합쳐 삼한이라고 불렀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합쳐 삼한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韓)이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고대부터 내려오던 말로서, '하나', '하늘', '크다', '칸'(汗) 등 복합적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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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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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란 국호 중 대한(大韓)의 어원은 고대 한반도 남부 일대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인 한(韓)에서 유래한다. 마한, 진한, 변한을 합쳐 삼한이라고 불렀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합쳐 삼한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韓)이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고대부터 내려오던 말로서, '하나', '하늘', '크다', '칸'(汗) 등 복합적 의미가 있다. 이후 근대 국가의 국호로서 '대한'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선택한 것으로, 제후국이었던 조선과의 차별성을 나타낸다.
대한
 
이후 근대 국가의 국호로서 '대한'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선택한 것으로 새 국호를 정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라는 옛 나라이나 천명을 새로 받았으니 이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삼대(三代) 이래로 황제의 나라에서 이전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쓴 적이 없다. '조선'은 기자가 봉해졌을 때의 이름이니 당당한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다. 대한이란 이름을 살펴보면 황제의 정통을 이은 나라에서 이런 이름을 쓴 적이 없다... 한(韓)이란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나라 이름이며, 우리나라는 고구려·백제·신라 등 원래의 삼한을 아우른 것이니 '큰 한'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다.
 
 
 
작가 겸 시인인 최남선은 자신의 책 《조선상식문답》에서 이를 해설하기를 "대한이라 함은 한(韓)은 한이지만 옛날 같은 작은 한이 아니라 지금은 커다란 한이라는 뜻을 보인 것이다. 이렇게 '대한'이란 것은 두 자가 다 합하여 나라 이름이 되는 것이요, 결코 대명(大明, 명나라)이나 대영(大英, 대영 제국)과 같이 높이는 뜻으로 대자를 붙인 것이 아니며 '한국' 이라 함은 실제 대한을 간단하게 부르는 것이다."라고 했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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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1948년 제헌 국회에서 이 국호를 계승하여 헌법에 명시하였고 다시 1950년 1월 16일 국무원고시 제7호 '국호 및 일부지방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건'에 의해 확정 하였다. 이에 20세기 전반까지도 널리 사용되던 지명으로서의 '조선'이라는 이름은 '대한'이나 '한국', '한(韓)'으로 대체되어 현재 대한민국 내에서는 자주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민은 자국의 국호를 '대한민국', '한국' 등으로 부르며, 자국을 호칭할 때는 흔히 '우리나라'라고 한다.
 
광복 후 1948년 제헌 국회에서 이 국호를 계승하여 헌법에 명시하였고 다시 1950년 1월 16일 국무원고시 제7호 '국호 및 일부지방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건'에 의해 확정 하였다. 이에 20세기 전반까지도 널리 사용되던 지명으로서의 '조선'이라는 이름은 '대한'이나 '한국', '한(韓)'으로 대체되어 현재 대한민국 내에서는 자주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민은 자국의 국호를 '대한민국', '한국' 등으로 부르며, 자국을 호칭할 때는 흔히 '우리나라'라고 한다.
 
일본, 중화인민공화국, 대만, 베트남 등 주로 동아시아에 있는 한자 문화권 국가들은 일상에서 대한민국을 간단히 한국(중국어 간체자: 韩国, 정체자: 韓國, 병음: hánguó 한궈, 일본어: 韓国, かんこく 간코쿠, 베트남어: Hàn Quốc한 꾸옥)이라 부른다. 한반도 자체를 부를 때는 조선(중국어 간체자: 朝鲜, 정체자: 朝鮮, 병음: cháoxiǎn 차오시엔, 일본어: 朝鮮, ちょうせん 조센, 베트남어: Triều Tiên찌에우 띠엔)이라고 한다.
 
  
 
===Korea===
 
===Korea===
 
현재 영어권 국가에서 불리는 국호인 Korea의 시초는 기원전 1세기부터 7세기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방에 존재했던 고구려[Goguryeo]에서 전해온다. 고구려는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로 변경한 바 있으며, 후에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하는 의미로 국호를 고려로 정하였다. 그 후 당시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의 수도인 개성으로 통하는 벽란도를 출입하면서, 고려라는 이름이 Corea로 음역 되어 전 세계에 전해졌다. 그 후 서방에 전해져 프랑스어로 Corée, 스페인어로 Corea, 영어로 Korea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 영어 명칭은 Republic of Korea로서, 약칭 'R.O.K.'로 사용한다.
 
현재 영어권 국가에서 불리는 국호인 Korea의 시초는 기원전 1세기부터 7세기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방에 존재했던 고구려[Goguryeo]에서 전해온다. 고구려는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로 변경한 바 있으며, 후에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하는 의미로 국호를 고려로 정하였다. 그 후 당시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의 수도인 개성으로 통하는 벽란도를 출입하면서, 고려라는 이름이 Corea로 음역 되어 전 세계에 전해졌다. 그 후 서방에 전해져 프랑스어로 Corée, 스페인어로 Corea, 영어로 Korea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 영어 명칭은 Republic of Korea로서, 약칭 'R.O.K.'로 사용한다.
  
대한제국 시절 공식 문서에는 Corea 또는 Korea가 혼용되어 사용되었고, 1900년대 초기(~1910년까지)부터 영어권에서는 Korea가 점점 사용 빈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1892년 외국인이 자주 보는 잡지 〈The Korean Repository〉 5월호에는 “미국 국무부와 영국의 왕립지리학회는 우리가 차용한 이 땅의 이름을 아주 조리 있게 Korea로 표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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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절 공식 문서에는 Corea 또는 Korea가 혼용되어 사용되었고, 1900년대 초기(~1910년까지)부터 영어권에서는 Korea가 점점 사용 빈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1892년 외국인이 자주 보는 잡지 〈The Korean Repository〉 5월호에는 “미국 국무부와 영국의 왕립지리학회는 우리가 차용한 이 땅의 이름을 아주 조리 있게 Korea로 표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1905년 이전까지는 Corea로 한국을 표기하다가 일제강점기에는 Corea나 Korea를 배격하고 Chosen이라는 알파벳 국호를 사용했다.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1905년 이전까지는 Corea로 한국을 표기하다가 일제강점기에는 Corea나 Korea를 배격하고 Chosen이라는 알파벳 국호를 사용했다.
 
 
 
  
 
==연호==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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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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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g>역사:</big> {{본문|가상 대한민국/역사}}
===군정기와 해방 정국===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7월까지 38선 이남에서 사용한 태극기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대한민국은 일제 치하로부터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한반도는 얄타회담에서 이루어진 비공식적 합의에 따라 소련과 미국의 신탁 통치하에 들어갔다. 1945년 9월에는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구 소련군이 포고령을 선포하여 각각 군정을 실시하면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광복 이후 여운형, 안재홍 등은 1944년 설립한 지하조직인 건국동맹을 모태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고, 9월 여운형, 박헌영 등에 의해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1945년 11월 중화민국 쓰촨성 충칭에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임정정통론' 문제로 갈등이 벌어졌고, 미군정은 맥아더 포고령에 따라 인공 내각(조선인민공화국 내각)과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음으로써 인공 내각은 해산되었다.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안 문제를 놓고 한반도 내에는 좌, 우익 세력간 대립이 격화되었다. 곧이어 1946년 5월에는 미소공위가 개최되었으나 양측의 주장이 엇갈려 결렬되었다. 이때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등은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개시하여 미소공위를 재개하고자 하였지만, 한민당과 남로당 등 좌우익세력간에 불참으로 중도파 세력만의 운동으로 축소되었다. 1945년 12월 송진우 암살, 1947년 7월에 여운형 암살 등 해방정국의 잇단 사건으로 좌우합작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미 군정은 온건파인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을 통해 좌우 합작과 협상을 주도하게 했다. 그러나 헤게모니 장악에서 제외된 것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 김구, 윤치영, 박헌영, 허헌 등의 반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후 제2차 미소공위 마저 결렬되어버리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 총회로 이관했고, 총회에서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되었다. 이에 김규식, 조소앙, 김구 등은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협상 등을 추진하여 노력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가고, 남한에서도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한 정부 수립론이 제기되면서 (정읍 발언) 사실상 남북단일 정부 수립은 불가능한 모양새가 되었다.
 
 
 
1948년 1월부터 한반도의 정국은 단독 정부 수립론과 남북 협상을 통한 정부 수립론을 놓고 의견이 갈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1948년 2월 38선 이북에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선인민군을 창건하면서 분단은 사실상 불가피하게 되었다. 5월 10일 38도선 이남에서만 제헌 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탄생하였고, 같은 해 7월 17일에는 초대 헌법인 대한민국 제헌 헌법이 구성되었다. 7월 22일에는 국회의 간접 선거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 이시영이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12월 12일 "유엔 총회 결의 195(III) 한국의 독립 문제"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정부(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임을 선언하였다. 여기서 '그러한'은 대한민국이 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서 주민들 대다수의 자유 의사에 따라 수립되었고, (분단상태를 고려할 때)선거가 가능했던 그 지역에 대한 유효한 지배권과 관할권을 가진 합법정부임을 뜻한다. 이미 48년 9월 9일에 한반도 이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음에 미루어 그 해 12월의 결의는 대한민국만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것이다.
 
 
 
===한국 전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남침을 기도하여 공산주의화 하려는 야망을 실현하고자 준비하였다. 소련의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승인을 받자, 소련에서 지원받은 수십대의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대한민국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침공했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탱크의 공세를 막을 수 있는 방어책이 전혀 없었고 야포와 전투기 등 모든 것이 압도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총만 가진 거의 맨 몸의 한국군은 순식간에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조선인민군이 침략한 3일만에 수도인 서울을 인민군에게 빼앗기게 된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무장한 인민군을 상대하는 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던 한국군은 결국 밀려나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의 배수진으로 정하고 버티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어린 학생들(학도병들)이 무고하게 죽어나갔으며 많은 사상자와 인명피해가 초래되었다.
 
 
 
하지만 UN군이 파병으로 지원하고 UN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9.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벌여 조선인민군에 반격을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은 9월 27일에 서울을 탈환해냈다. 10월 1일에는 38도선까지 수복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 때 유엔 내부에서 맺어진 새로운 결의로 유엔군의 목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완전히 공략하려는 목적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한국과 UN군은 거듭해서 10월 26일에는 압록강까지 올라갔으며, 예상했던 바와 달리 공산측의 주 축인 소련과 중국이 [[스탈린|각자마다의]] [[마오쩌둥|사정 때문에]] 소극적으로, 혹은 아예 지원을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뇌부는 1951년 12월에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서 소련으로 망명을 떠나게 되고, 국군과 UN군은 분단 3년만에 통일을 이룩한다.
 
 
 
한국 전쟁으로 20만 명이 과부가 되었고 10만여 명 이상이 고아가 되었으며 1천만여 명 이상이 이산 가족 신세가 되었다. 한반도 내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된 탓에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가 도래하여 한국의 경제 수준이 떨어졌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으로 인해 통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쪽과 북쪽간의 지역갈등은 심한 편이다.
 
 
 
===제1공화국===
 
 
 
한국 전쟁이 휴전 협정을 맺은 후 1950년대는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전후복구사업을 실시하는 가운데 경제원조체제가 성립되던 시기였다. 제1공화국 정권의 고위 관료는 부패해 국민의 불만을 샀다. 의원 내각제였던 제1대 내각에서 재선이 불가능하다 판단한 이승만은 이범석과 장택상을 비롯한 측근들과 족청계,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부산정치파동(1952년), 사사오입 개헌(1954년)을 일으키고 장기집권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범석, 장택상 등의 성장을 두려워한 이승만은 이들을 제거하고 이기붕 계열을 등용한다. 이기붕 계열은 또한 친 자유당 성향의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등의 정치깡패들을 활용하여 야당 의원의 집회를 탄압, 제1공화국 후반기는 혼란을 거듭했다.
 
 
 
그 와중에 부통령 장면의 피격 사건(1958)과 조봉암 사법살인(1959) 등의 조치까지 겸해졌고 언론의 자유마저 통제당했다. 1959년의 한일회담이 끝나자 곳곳에서 정부의 독재에 저항하는 집회가 시작, 1960년 3월 15일 부통령 선거의 부정을 계기로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4·19 혁명이 발생했고, 마산 앞바다에서 며칠 전 실종되었던 김주열의 주검이 떠오르면서 시위는 격화되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여 제1공화국은 붕괴했다.
 
 
 
 
 
===제2공화국===
 
4·19 혁명 이후 허정 과도 내각을 거쳐 장면을 수상으로 하는 제2공화국이 수립됐다. 제2공화국은 3차 개헌을 통해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구성했고, 언론 자유와 혁신계 정치활동을 허용했다. 제2공화국 당시 각계 각층의 통일 운동과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기도 했는데, 집권 여당인 민주당 사이에서 신파와 구파가 나뉘어버려서 개혁 의지가 미약한 탓에 이러한 요구들을 수용하지 못했다. 곳곳에서 데모가 연이어 벌어졌고, 장면이 단호한 조치를 계획하던 중 1961년 5월 16일 새벽 5·16 쿠데타로 내각 각료들이 체포되면서 장면 내각은 1년 남짓밖에 집권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 뒤 윤보선은 형식적인 민정을 실시하였으나 군사정변 세력에게 구정치인 정화법(1962)으로 정치활동을 정지당하자 여기에 불만을 품고 사퇴(1962.3.22)함으로써 1962년 3월부터 1963년 12월까지 5·16 군사정변 세력이 설립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사법권·행정권·입법권을 모두 장악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제3·4공화국===
 
 
 
1963년 12월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한 박정희 등에 의해 제3공화국이 수립됐다. 야당 후보인 윤보선과의 두 차례의 선거전에서 10만 표 안팎의 근소한 차로 집권하였다. 재임 초반 한일 협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공분을 사 일어난 시위를 무력 진압하며 강행했다. 1960년대 개발 독재의 일환으로 정부는 경공업 중심의 수출 주도형 발전과 한일협정·베트남 전쟁 파병 등을 통한 외화 획득으로 경제 발전을 꾀했다. 19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과 전자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하지만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 저임금 노동과 빈부격차와 같은 문제도 남겼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3선 개헌을 통과시키고 1971년 대선에서 3선에 성공한다. 그런데 대선에서 야당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고 같은 해 총선에서 야당의 의석수가 2배로 늘어나는 선전을 이룬 데다가 제1차 석유 파동 등으로 경제성장도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정권 유지에 위기를 느낀 박정희 정부는 1972년 유신 헌법을 통과시키고, 제4공화국을 선포하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돌풍으로 불안감을 느낀 박정희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통일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10월 유신을 선포해 유신체제를 수립했다. 이를 통해 대통령의 임기를 6년 연임제로 수정하는가 하면 국회의원을 대통령이 임명하게 할 수 있는 법안까지 통과시키는 등 대통령의 권한을 비정상적으로 확대시켰다. 이에 노동운동계, 재야와 학생 세력 등이 민주화를 요구하지만, 정부는 잇따른 긴급조치를 통해 억눌렀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 세력 및 노동운동가의 반발은 계속되었다. 미국이 한국의 '인권 침해'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한미 간 외교적 마찰이 일어났다. 제2차 석유 파동까지 겪으면서 경제위기와 내부 혼란이 크게 가중되었다. 김영삼 의원제명 파동과 YH 무역 농성 사건, 부마 항쟁 등의 사회적 저항이 지속되었다. 부마 항쟁이 더욱 거세져 서울로 까지 시위의 물결이 불어닥치자, 박정희는 1983년을 끝으로 대통령에서 사임하였으며,
 
사임 후 저택에서 은거생활을 하던 도중 폐렴으로 사망한다.
 
 
 
박정희의 사임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선 제 11대 대통령으로 최규하를 선출하였으나,곧 5.23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직 대부분을 꿰차고 있던 신군부, 즉 하나회의 농간으로 최규하를 파면하고, 전두환이 후임으로 제 12대 대통령직에 앉게 되었다.전두환은 취임 직후부터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시위룰 둘오국가보위상태를 확고히 한다는 명목으로 계엄령과 긴급조치를 선포하였다. 때문에 최규하 임기 시작 때 부터 국회와 정부는 유신 헌법을 철폐하기 위한 개헌 논의를 진행했고, 대학생과 재야 세력도 정치 일정 제시와 박정희 퇴진 요구를 바탕으로 민주화 시위를 벌였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확대하면서, 이른바 '화려한 휴가'라고 불리는 포고령을 통해 '정치활동 금지', '보도검열 강화', '휴교령' 등을 선포하고 군병력을 동원해 국회를 폐쇄했다. (5.17 쿠데타) 이 과정에서 신군부는 5·17 쿠데타에 항거한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공수부대 및 특전여단을 투입해 유혈진압을 하고, 정국을 주도해나갔다. 결국 이러한 신군부의 농간으로 인해 유신헌법은 철폐되지 못했으며, 대신 대통령 임기기간이 7년 단임제로만 변경될 뿐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경제 안정에 매진하는 한편, 1981년에는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 등을 유치하기도 했다. 또한 야간통행금지 해제 및 교복 자율화 등의 유화 조치를 내걸어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도 했다. 한편으로 임기 중반부터 3저호황으로 인한 수출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인 독재체제를 성립하고 민주주의 탄압 및 고문·정치사찰·용공조작으로 대변되는 인권 유린행위를 자행했으며, 정경유착·부정축재·친인척 비리가 빈발했다.
 
 
 
1987년 1월 박종철이 고문으로 치사하는 사건이 터지자 정부 퇴진과 민주화 요구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이에 정부는 호헌조치를 취하며 '개헌할 의도가 없음'을 내세웠고,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 빗발쳐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6월 항쟁이 거세지자 정부군은 광화문에 탱크를 들이는 무리수 까지 감행하였으며, 가히 천안문 사태와 비견될 정도의 유혈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이게 바로 6.29 사태 이다. 이러한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시위는 더더욱 거세져 갔으며, 6.29 사태에 질려버린 미국이 전두환 정권을 외면하게 되면서 마침내 전두환 대통령은 민정당 총재 노태우를 통해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국민의 개헌 요구를 수용했다. 국민들은 유일한 민주주의 정부나 다름없었던 제 2공화국 시절의 양원제 의원내각제 공화국으로의 개정된 헌법에 따라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여당 노태우가 당선되었고, 1991년 2월 취임식과 함께 제4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노태우 정부와 국민정부===
 
1987년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총재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여야가 합의하여 대통령 직선제 등을 골자로 한 개헌이 성사되었다. 이로써 야권의 정치 참여가 허용되었으며, 1988년 치러진 제13대 총선에서는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나왔다. 민주정의당은 불리한 여론을 극복하는 돌파구로 3당 합당을 추진해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 또한 전두환 측근에 대한 사법조치를 단행(국정감사)하고 민간인들을 정계에 대폭 고용하기도 했다(과거와의 단절). 외교 면에서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을 추진해 구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 등 관계 개선에 주력했다. 1991년 9월 유엔의 가맹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12월에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또한 1992년에는 지방 자치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태우도 전두환처럼 군인 출신이었고, 12·12 사태를 주도하고 5공 성립 과정에 깊숙히 관여한 인물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의원내각제 임에도  만일의 사태를 위해 둔 최후의 카드인 긴급조치를 남용하면서 사실상 실권대통령으로서 통치하고, 정경유착은 물론 비자금 형성·민간인 사찰·고문 등 5공의 파쇼 정치를 그대로 답습했다(이 때문에 노태우 정권을 군사정권의 연장선으로 이해하는 시각도 있다). 이는 결국 민주화 시위(1996) 등으로 이어졌고, 노태우는 이른바 '6공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을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여당 내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왔으며 설상가상으로 김영삼이 박태준을 이어 국무총리로 당선되자 끝내 김대중을 후계자로 택할 수밖에 없었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함으로써 노태우 정부는 막을 내렸다.
 
 
 
김대중은 집권초기엔 김영삼 국무총리와 사이좋게 국정을 운영해나갔으나, IMF를 시작으로 김영삼 정부에서 여러 실책이 이어지고 이에 따라 여론이 민주정의당으로 기울자 여당인 통일민주당에서 2002년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의 국무총리 연임을 두고 서로 사이가 멀어졌으며, 경선에서 노무현이 승리하자 아예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노태우의 민정당과 손을 잡고 현재 보수정당의 모태가 되는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였다.
 

2019년 1월 5일 (토) 02:23 판

대한민국
大韓民國
Flag of South Korea.png 120px-Emblem of South Korea (1948-1963).svg.png
국기 국장
표어홍익인간(弘益人間)
국가조국찬가
300px
수도서울 북위 37° 34′ 08″ 동경 126° 58′ 36″ / 북위 37.568889° 동경 126.976667° / 37.568889; 126.976667
정치
정치체제공화제, 민주주의, 단일 국가, 의원내각제, 양원제
대통령
참의원장
민의원장
대법원장
국무총리
나시민
공석
공석
공석
안철정
역사
 
 • 독립 선언1919년 3월 1일
 • 임시 정부 수립1919년 4월 11일
 • 광복1945년 8월 15일
 • 헌법 제정1948년 7월 17일
 • 제1공화국 수립1948년 8월 15일
 • 4.19 혁명1960년 4월 19일
 • 제5공화국 수립1991년 3월 1일
지리
면적222,300 km2
내수면 비율0.3%
시간대KST (UTC+9)
DST없음
인문
공용어한국어
인구
2018년 어림81,635,000명
2017년 조사81,422,507명
인구 밀도514.2명/km2
경제
GDP(PPP)2016년 어림값
 • 전체2조 3340억 $
 • 일인당30,538 $
GDP(명목)2016년 어림값
 • 전체1조 9112억 $ (11위)
HDI0.901 (18위, 2016년 조사)
통화 (KRW,₩) (KRW)
기타
ISO 3166-1410, KR, KOR
도메인.kr / .한국
국제 전화+82
서울특별시 한강의 전경
Hanriver.jpg

대한민국(大韓民國, 영어: Republic of Korea; ROK)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남부에 있는 공화국이다. 서쪽으로는 서해를 사이에 두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동쪽으로는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맞닿아 있다. 수도는 서울특별시이며, 국기는 태극기, 국가는 조국찬가(비공식), 공용어는 한국어와 한국 수어이다. 과거 한국전쟁 이후 폐허나 다름없었던 최빈국이었으나,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기적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현재는 아시아를 선도하는 국가 중 하나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민주화와 산업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로, 군부 정권 30년과 최빈국이라는 최악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아시아의 몇 안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자 경제강국으로 성장하였다.

국호

대한

'대한민국'이란 국호 중 대한(大韓)의 어원은 고대 한반도 남부 일대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인 한(韓)에서 유래한다. 마한, 진한, 변한을 합쳐 삼한이라고 불렀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합쳐 삼한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韓)이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고대부터 내려오던 말로서, '하나', '하늘', '크다', '칸'(汗) 등 복합적 의미가 있다. 이후 근대 국가의 국호로서 '대한'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선택한 것으로, 제후국이었던 조선과의 차별성을 나타낸다.

대한민국

여기에 민국(民國)을 더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1919년 3.1운동 직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정한 것이다. 1919년 4월 10일 임시 정부의 첫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정하기 위해 회의를 할 때 신석우 선생이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국호를 정하자고 하니, 여운형 선생이 '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또다시 '대한'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그러자 신석우 선생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라고 부연 설명을 하며 대한제국의 '제국'을 공화국을 뜻하는 '민국'으로 바꾸어 대한민국을 국호로 제안하였고, 다수가 공감함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광복 후 1948년 제헌 국회에서 이 국호를 계승하여 헌법에 명시하였고 다시 1950년 1월 16일 국무원고시 제7호 '국호 및 일부지방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건'에 의해 확정 하였다. 이에 20세기 전반까지도 널리 사용되던 지명으로서의 '조선'이라는 이름은 '대한'이나 '한국', '한(韓)'으로 대체되어 현재 대한민국 내에서는 자주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민은 자국의 국호를 '대한민국', '한국' 등으로 부르며, 자국을 호칭할 때는 흔히 '우리나라'라고 한다.

Korea

현재 영어권 국가에서 불리는 국호인 Korea의 시초는 기원전 1세기부터 7세기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방에 존재했던 고구려[Goguryeo]에서 전해온다. 고구려는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로 변경한 바 있으며, 후에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하는 의미로 국호를 고려로 정하였다. 그 후 당시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의 수도인 개성으로 통하는 벽란도를 출입하면서, 고려라는 이름이 Corea로 음역 되어 전 세계에 전해졌다. 그 후 서방에 전해져 프랑스어로 Corée, 스페인어로 Corea, 영어로 Korea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 영어 명칭은 Republic of Korea로서, 약칭 'R.O.K.'로 사용한다.

대한제국 시절 공식 문서에는 Corea 또는 Korea가 혼용되어 사용되었고, 1900년대 초기(~1910년까지)부터 영어권에서는 Korea가 점점 사용 빈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1892년 외국인이 자주 보는 잡지 〈The Korean Repository〉 5월호에는 “미국 국무부와 영국의 왕립지리학회는 우리가 차용한 이 땅의 이름을 아주 조리 있게 Korea로 표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1905년 이전까지는 Corea로 한국을 표기하다가 일제강점기에는 Corea나 Korea를 배격하고 Chosen이라는 알파벳 국호를 사용했다.

연호

1948년 8월 15일부터 9월 24일까지 대한민국기원으로 1919년을 원년으로 사용하다 같은 해 9월 25일부터 1961년 12월 31일까지 단군기원을 사용했다. 이후 <연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1962년 1월 1일부터 서력기원을 사용한다.

사회 내에서는 서력기원이 일반화된 상태이나, 공문에서는 여전히 1919년을 원년으로 하는 '민국'연호를 사용한다. 이는 중화민국의 '민국'연호와 7년의 차이를 둔다.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