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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려국(大韓麗國, {{llang|en|Kingdom of Great Hanreyo}}, 약칭으로 한국(韓國), 대한(大韓))은 동아시아의 중심부에 위치한 국가이다. 수도는 [[한성특별시]]이며, 국기는 태극기, 국가는 애국가, 공용어는 한국어이다.
대한국(大韓國, {{llang|en|Kingdom of Great Korea}}, 약칭으로 한국(韓國), 대한(大韓))은 동아시아의 중심부에 위치한 국가이다. 수도는 [[한성특별시(CONNECT)]]이며, 국기는 태극기, 국가는 애국가, 공용어는 한국어이다.


대한려국은 급진적으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개방 정책인 [[정조서양문물]]으로 부국강병에 주력한 결과 근대화와 발전을 이룩하였다. 두 차례의  전쟁과 한·러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영주·남유구를 흡수하는 한편 타이완·만주·제를 경략하였다. 1940년대 오월에 침략에 대응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참전하여 승리하였다. 이후 김일성의 난을 겪었지만 한강의 기적이라는 높은 경제 성장을 구가하며 1980년대에 세계적인 일류 선진 강국으로 거듭났다.
대한국은 18세기 초부터 급진적으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개방 정책인 [[대한서양문물개방선언]]으로 부국강병에 주력한 결과 누구보다 빠른 근대화와 발전을 이룩하였다.  


== 국호 ==
== 국호 ==
정식 국호는 '''대한국'''(大韓麗國, Kingdom of Great Hanreyo)으로, [[]] 이후 천자국임을 선포함에 따라 천조만이 가질 수 있었던 외자 국호를 선포하였다. 또한, 한(韓)은 고구려·신라·백제의 삼한을 아울러 이어 받는다는 의미이다. 자부심차게 부르는 별칭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인데 식민제국 시절에 두루 사용되었고 현재에는 과거에 건설한 [[대한제국(단국흥기)|식민제국]]을 일컫는 역사적 용어로 주로 쓰인다. 다만, 외국과의 스포츠 경기 관람 시 등 이따금씩은 제국이라고 호명할 때가 있다. 또한 천조임을 강조하여 '''대한천국'''(大韓天國)이라 일컫기도 한다. 줄여서 한국(韓國)이라고 하며, 정식 국호에 정치체제를 표시하지 않은 것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전통이다.
정식 국호는 '''대한국'''(大韓麗國, Kingdom of Great Korea)으로, [[1770한성선언]] 이후 천자국임을 선포함에 따라 천조만이 가질 수 있었던 외자 국호를 선포하였다. 또한, 한(韓)은 고구려·신라·백제의 삼한을 아울러 이어 받는다는 의미이다. 별칭은 '''대한제국'''(大韓帝國)과 '''대한려국'''(大韓麗國)인데 식민제국 시절에 두루 사용되었고 현재에는 과거에 건설한 [[대한제국(connect)|식민제국]]을 일컫는 역사적 용어로 주로 쓰인다. 다만, 외국과의 스포츠 경기 관람 시 등 이따금씩은 제국이라고 호명할 때가 있다. 줄여서 한국(韓國)이라고도 하며, 다른 명칭으로는 한려(韓麗)라고도 불린다.


== 역사 ==
== 대한려국 간략 역사 연표 ==
{{본문|고등학교 한국사(단국흥기)}}
=== 고조선 ===
=== 근세 전기 ===
  * [[고조선]]
[[세종대왕]]은 수리시설 증대로 수자원을 확보하고, 개량한 수차와 우수한 벼 품종을 보급하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서를 배부하는 한편, 이앙법을 장려하여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하였다.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자 인구밀도도 증가했고, 그에 따라 상품작물의 재배가 등장하고 상·공업이 진흥되는 등 산업의 총체적인 분야에 [[전방연쇄효과]](前方連鎖效果)가 나타났다.
  * [[단군조선]]
  * [[진국]]([[삼한]])
    * [[마한]]
    * [[변한]]
    * [[진한]]


산업 발전에 따라 국부가 증대되었다. 마침 관세가 도입되어 세입도 확연히 증가하였다. 이러한 여유를 바탕으로 조정은 기반 시설 건설, 광산 개발, 국방력 강화에 나서게 되었다. 한편, 명의 쇠퇴로 제한이 없어져 은화·동화 등을 주조할 있었다. 여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유황을 채굴하여 화약 병기를 개발하고, 야금술 등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
=== 원삼국시대 ~ 삼국시대 ===
  * [[부여]]
  * [[동예]]
  * [[북명]]
  * [[옥저]]
  *보라국
  * [[갈사국]]
  * [[한사군]]
  * [[낙랑군]]
  * [[현도군]]
  * [[임둔군]]
  * [[진번군]]
  * [[대방군]]
  * [[요동 공손씨 정권]] - [[낙랑군]], [[대방군]]과 큰 연관을 맺고 있다.
* [[가야]]
  * [[금관국]](금관가야)
  * [[반파국]](대가야)
  * [[안라국]](아라가야)
  * [[벽진국]](성산가야)
  * [[고자국]](소가야)
  * [[고령가야]]
* [[삼한]]
  * [[마한]]
  * [[목지국]]
  * [[사로국#s-2|사로국]]
  * [[신분활국|신분고국]]
  * [[침미다례]]
  *  [[진한]]
  * [[우시산국]]
  * [[독로국]]
  * [[감문국]]
  * [[골벌국]]
  * [[다벌국]]
  * [[비지국]]
  * [[실직국]]
  * [[압독국]]
  * [[초팔국]]
  * [[사로국]]
  * [[변한]]
  * [[감문국]]
  * [[거칠산국]]
  * [[고자국]]
  * [[미리미동국]]
  * [[미오야마국]]
  * [[벽진국]]
  * [[비지국]]
  * [[탁순국]]
* [[삼국]]
  * [[고구려]](BC37?~918) 삼국 시대 때 영토가 가장 넓었던 국가이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 일부에 걸쳐 있는 넓은 국가이다. 특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는 고구려의 전성기라 할 있는 찬란한 시기였다. 정리하자면, 고구려는 삼국 중 영토가 가장 넓었던 국가이다. 그리고 삼국시대때 주도하여 통일을 이끈 첫번째 통일왕조이다.
  * [[백제]](BC18?~660)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전성기를 누린 국가이다. 그리고 삼국 중에서 문화가 가장 발달 했다.
  * [[신라]](BC57~935)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만 가장 늦게 전성기가 열린 국가이다.


세종대에 얻은 4군 6진에 삼남인들을 지속 이주시켜 이를 개척하고자 하였다. 또한, 여진을 우리나라에 종속화시켰다. 제주도에 중앙 권력이 미치게 하고, 영주, 벽랑 등 남방도서들을 본격적으로 개척하였다. 유구와 대마도를 복속하기도 하였다. 강성해진 국력과 명의 쇠락에 기초하여, 외왕내제 체제가 중종대에 이르러 공고화되었다.
=== 제 1 통일왕조(남북국시대) ===
  * [[고구려]](BC37?~918)
  * [[요동국]](530~918)
  * [[남부여국]](500~900)
500년에 최초의 이씨황가가 세운 왕조이다. 남부여국도 많은 문화 유산 등을 남겼다. 대표적으로는 고려 청자와 팔만대장경이 있다. 또 이때는 벽란도에서의 무역이 발달해 다른 먼 국가와의 활발한 교류를 할 수 있었다. 이때 지금 '한국'의 영문 번역어인 '코리아' 가 생겨 났다고 한다.


=== 근세 후기 ===
  * [[대한국(connect)]](900~1897)
조정은 국초(國初)부터 여진과 왜의 침략에 대비하여 강한 군사력을 다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삼포왜란의 경험과 히데요시가 대규모 전쟁을 준비한다는 통신사의 증언을 계기로 일본에 대한 방비를 강건히 하였다. 일본군은 조총을 앞세워 쳐들어 왔다('''임진왜란''', 1592). 하지만, 이순신 제독의 보급로 차단과 북방군의 남하에 고전을 겪었다.
년에 태조 이성계가 세운 왕조이다. 약 500년이나 넘게 지속된 나라이며 한국의 마지막 왕조인 만큼 많은 문화와 유적을 꽃피웠으며 여러 왕을 배출했다. 한국사의 마지막 통일왕조인 만큼 우리가 배울 것도 많으며 한국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가치도 높게 평가받고 있는 재상 중심의 유교 국가였다.임진왜란을 중심으로 대한국 전,후기가 갈라지며 대한국 전기는 근세,대한국 후기는 근대태동기로 나누어 불러진다.


일본군은 마침내 신립에게 격멸 당하여(조령 대첩), 우리나라와 강화하기로 하였다. 이후 도요토미 씨가 몰락하고 에도 막부가 수립되어, 한·일 양국은 국교를 재개하게 되었다.
=== 근대 ===
* [[대한제국(connect)]](1897~1945)


애신각라 씨는 여진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운 후 내부 사정을 타개하기 위해 한반도를 침략했다('''정묘호란''', 1627). 한성부로 직행한 3만 호병(胡兵)은 서북군과 동북군에게 퇴로가 차단 당했고, 삼남군과 경사군이 조총 등 신무기를 동원하여 후금군을 격퇴하였다. 후금은 멸망하고, 해서 여진의 엽혁나랍 씨가 만주국을 건국하였다.
=== [[현대]] ===
  * [[대한국 임시정부(connect)]](1945~1948)
  * [[대한국 제1공화국]]([[이승만(대한국(connect))]]([[1948년|1948]]~[[1960년|1960]]))
  * [[대한국 제2공화국]]([[윤보선(대한국(connect))]]([[1960년|1960]]~[[1961년|1961]]))
  * [[대한국 제3공화국]]([[박정희(대한국(connect))]]([[1961년|1961]]~[[1972년|1972]]))
  * [[대한국 제4공화국]]([[박정희(대한국(connect))]]([[1972년|1972]]~[[1979년|1979]])/[[최규하(대한국(connect))]]([[1979년|1979]]~[[1980년|1980]])/[[전두환(대한국(connect))]]([[1980년|1980]]~[[1981년|1981]]))
  * [[대한려국 제5공화국]]([[전두환(대한국(connect))]]([[1981년|1981]]~[[1988년|1988]]))
  * [[제6공화국|대한려국 제6공화국]][* 1987년 10월 29일 직선제 (9차) 개헌이후 독재 정권이 막을 내리고 생겨난 공화국이다. 이때는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있었고, 언론의 자유화 등등 비로소 많은 것이 자유로워진 공화국이다.]([[노태우(대한국(connect))]]([[1988년|1988]]~[[1993년|1993]])/[[김영삼(대한국(connect))]]([[1993년|1993]]~[[1998년|1998]])/[[김대중(대한국(connect))]]([[1998년|1998]]~[[2003년|2003]])/[[노무현(대한국(connect))]]([[2003년|2003]]~([[2003년|2003]]~[[2008년|2008]])/[[문재인(대한국(connect))]]~([[2009년|2009]]~[[2015년|2015]])/[[이성운(대한국(connect))]]~([[2015년|2015]]~[[2019년|2019 현재]])/[[한성현(대한국(connect))]]


효종대에는 헨드릭 하멜이 제주에 표착한 사건을 계기로 네덜란드와 군산에서 제한적인 무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나전칠기·도자기·홍삼·차·화문석 등이 서구에 소개되었고, 네덜란드를 통해 천리경·의학 같은 서구문물이 유입되었으며, 구황작물이 도입되어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 17세기와 18세기의 한국 ===
 
=== 제2차세계대전 ===
영·정조대에 탕평책을 실시하여 정국이 안정되었으나 붕당이 해체되고 척신들이 득세하여 정조 사후 세도 정치가 발현하게 되었다. 김조순은 뛰어난 정치가였지만, 그 아들 대부터 삼정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국정 농단이 벌어졌다.
=== 두 차레의 세계대전이 끝난 한반도 ===
 
=== 익종 시대(1834~1860) ===
1832년, 영국 상선 로드 애머스트 호가 개항을 요구하였다. 장동김씨 정권은 이에 응하여 부산항을 개방하였으나 사실상 그 이익은 교역 주관 기관인 [[순도서]](巡渡署)를 장악한 세도 정권이 독점하였다.
 
한편, 네덜란드와의 무역 창구로 자리잡고 있었던 군산항을 중심으로 호남, 그리고 영국에의 개항장이 된 부산항을 중심으로한 영남에서 선진 문물에 감화된 선비들이 개화파를 형성하는데, 각각 호남학파와 영남학파가 탄생하였다. 장동 김씨 정권의 이익 독점 행위에 분노한 유사(儒士)들은 세도 정권을 본격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경화세족(京華世族)이 조정을 장악한 형국에서, 벼슬길이 막힌 지방 사림은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고, 이는 장동김씨 정권 타도로 폭발하게 되었다. 1830년대 중반, 개화파 유생들의 공론은 '타도 세가(勢家)'였다.
 
호남학파와 영남학파는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면서 개화를 이끌어 갔는데, 1839년 몰락한 양반 출신의 상인인 [[사마용]](司馬龍)의 주선으로 '''양남동맹'''(兩南同盟)이 결성되고, '''양남만인소'''(兩南萬人疏)가 성공하면서 세도 정권은 몰락하고, 임금 중심의 새 정부가 들어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였다('''익종경장''', 1839).
 
익종은 경장 공신들의 주청에 따라 1842년 연호를 경덕(景德)으로 고치고 새로 환구단을 건립한 뒤 황제에 즉위하여 천조(天朝)인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신 정부는 유럽과 미국에 [[견양사]](遣洋使)를 비롯한 사절단을 파견하여 신문물을 습득하게 했다. 신분제를 철폐하고, 도시개조사업과 철도 부설을 전개했다. 또, 금본위제로 통화 개혁을 하는 한편, 문란해진 조세 제도 및 병역 제도를 바로 잡았고, 상공업을 장려했다. 또, 근대식 학교를 세우고 다양한 서양 문물을 도입하였다.
 
도(道)를 폐지하고 전국을 40여 개의 군(郡)으로 구분하였다. 또한, 그간 중앙 행정력이 미치지 않았던 [[영주]] 지역에 행정구역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할령으로 했다. 유구를 일본과 분할하여 남유구에 유구 군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대만까지도 통치권에 편입하였다.
 
=== 헌종 시대(1860~1871) ===
근대화에 성공한 한국은 영토 확장과 대외 진출에 힘을 쏟았다. 만주국에 대해서는 1860년 '''[[한·만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개항시키고, 보호국으로서의 만주국의 지위를 공고화하여 이를 경략했다. 철도를 부설하여 만주에서 생산된 철강 등의 자원을 한반도로 수송했고, 이는 근대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1964년에는 제(齊) 칭타오 앞바다에 군함 경동호를 보내 무력시위를 벌이고, '''[[교주 조약]]'''을 맺어 개항시켰다. 한국은 한·만수륙무역장정과 교주 조약 체결을 계기로 순과 마찰을 빚었다. 순과의 갈등이 깊어지자, 한국은 군비를 확장하고 꼼꼼하게 전쟁을 준비하였다.
 
한국인 상인이 순나라 경내에서 살해당한 것(연경 사건)의 책임을 묻는다는 명분으로, 당시 박규수 황각(黃閣)은 순에 국군을 파견하여 '''한·순전쟁'''을 일으켰다(1871). 전쟁은 근대적인 신무기를 동원한 한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 맺은 제물포 조약으로 한국은 순에게 본래 순의 제후국이었던 제의 순으로부터의 독립을 확보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받았다. 한·순전쟁의 승리로 한국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였다.
 
=== 고종 시대(1871~1919) ===
러시아는 만주를 탐내어 한국과 갈등을 빚었다. 한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하여 전쟁 대비에 힘을 쏟았다. 백성들의 반러 감정은 들끓었으며, 동일하게 러시아의 남하를 주시하던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마침내 한국은 해삼위에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한·러전쟁'''을 일으켰다(1881년).
 
대한해협에서 이순선 제독의 활약으로 러시아 발틱 함대를 크게 무찔렀다('''동해대첩'''). 이외에도 치열한 접전 끝에 승리가 한국 쪽으로 기울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의 중재로 한국과 러시아는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만주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게 되었고, 화북에서의 우선적 이익 확보를 보장받았다. 이후 한국은 만주국을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제와 갑신조약(1884)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식민지로 만들어 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유럽 상품을 대신하여 아시아 시장에서 면직물 등의 한국 상품이 우세하게 되어 무역은 앞도적인 수출초과가 되었다. 또한, 유럽 지역으로 군수품을 수출하여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의 무기 수출국이 되었다. 유럽에 선박이 부족해지면서 세계 제3위의 해운국으로 거듭나는 등 해운업과 조선업도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나아가 제철업과 화학 공업까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렇게 공업 발전이 이루어져 경기 호황이 지속되자, 농산물의 수요가 늘어 농촌 경제도 크게 성장하였다. 농촌의 주택들이 현대식으로 개량되고, 마을 길이 정비되고, 전기가 설치되는 등 농촌에서도 경제 발전의 혜택을 누리기 시작하였다.
 
=== 순종 시대(1919~1926) ===
산업화와 대외 팽창을 거치며 국가가 부강해지고 민중의 정신적 수준이 향상되었다. 이에 따라 20세기 초반부터 순종 황제 때까지 정치·사회·문화 각 방면에 걸쳐 민주주의적 개혁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융희 데모크라시'''). 그 결과 정당 정치가 근대화되었고, 보통 선거 실시로 민주 정치가 진일보하였으며, 사회주의 운동도 본격화되었다.
 
교육과 학문 면에서도 큰 변화가 있어, 의무 교육과 대학 교육이 확대되었고 자유 분방한 예술 활동이 보장되었다. 민본주의가 제창되고, 정도전과 정여립이 재평가 받았다.
 
1920년, 국군이 개봉에서 순과 충돌하여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개봉 사건'''). 한국은 해군을 동원하여 천진항을 포격하고, 연경을 점령하는 등 전면적인 공세에 나섰다('''제2차 한·순전쟁'''). 압도적인 전력 차로 승리한 한국은 전후 처리를 위해 순과 군산 조약을 체결하여 화북에서의 이권을 확보하였고, 막대한 배상금을 받았다(1922). 제2차 한·순 전쟁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은 순은 결국 1924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멸망하고, 대순 사회주의 연방이 수립되었다.
 
=== 무종 시대(1926~1970) ===
대공황의 영향으로 소비가 위축되고 생산이 급감하고 실업이 급증하는 등 내수기반이 붕괴되자, 한국은 심양 협정을 맺어 보호령과 식민지를 규합해 양(兩) 블록을 만들어 대처하였다. 그리고, 수입품을 규제하기 위해 높은 관세 장벽을 쌓게 되었다. 이러한 블록 경제로 잠시나마 안심할 수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경제 침체를 가속하는 요소가 되었다.
 
경제 침체로 인해 사회가 불안해진 오월에서는 장개석의 국민당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아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였다. 국민당 정권(국부)는 1941년 '''범중화주의'''를 내세워 중화민국을 선포하고 한국령 제·만주와 일본령 민을 침공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과 일본이 오월에 선전 포고를 하였고, 이로써 동아시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오월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한·일 동맹'''이 결성되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한국이 산해관 대첩에서 오월군을 물리침으로써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후 한·일 연합군은 화북에서 오월군을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제를 해방하였다(1943). 이어 복주 상륙 작전을 펼쳐 민을 해방하였다.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국민당 정부는 서쪽으로 파천하기 시작하였다. 한·일 연합군은 서안, 중경을 거쳐 성도까지 파천한 국민당 정부를 포위하고, 파촉 분지를 공습하였다.
 
패배가 거의 확실시되고 포위가 장기화되자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에 대한 서촉 인민들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이에 국부군 내부에서 항복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고, 군민(軍民)의 요구를 거스를 수 없게 된 장개석은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한·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만주에 공산 국가가 수립되자 국내에서는 공산주의가 빠르게 스며들었고, 김일성 등 공산당 계열 군인들은 소련과 순, 만주의 도움을 받아 반역을 모의하였다. 1950년 6월 25일, 공산당 반도(叛徒)들이 평양을 점거하면서 반란이 시작되었다('''김일성의 난''').
 
이승만 황각은 일단 황실을 모시고 파천한 후 미국과 일본에서 급파한 원군과 힘을 합하여 공산군을 물리쳤다. 순·만주의 개입으로 후퇴하기도 하였지만 우세한 전력을 바탕으로 반란군을 토멸하였다. 이후 반공주의가 확산하게 되었다.
 
이승만 황각은 장기 집권과 독재를 꾀하였다. 이승만 황각과 여당인 자유당은 총선거 승리를 위해 온갖 선거 부정을 저질렀다(기해부정선거, 1960). 선거 당일부터 마산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 도중 실종된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4월 19일, 경성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부정 선거에 하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포졸들이 행진하는 시위대에 총을 쏘아 1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4월 25일에는 유림 대표들이 황제에게 이승만의 탄핵을 상소하였다. 마침내 다음 날 이승만은 영의정의 직책에서 물러났다. '''기해의거'''는 학생과 시민의 힘으로 부패한 장기 독재 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한국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승만 황각 붕괴 후 실시된 총선거에서 민본당이 크게 승리하여 장면을 영의정으로 하는 의정부가 출범하였다(1960). 기해의거 이후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정치·사회적 요구가 터져 나왔다. 학생 운동은 물론 농민 운동, 노동 운동과 같은 대중 운동도 일어났다. 그러나 장면 황각은 대중의 각종 요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국민의 반발을 샀으며, 부패하고 무능하여 반정부 여론이 들끓었다.
 
1961년 5월 16일, 민본당 황각의 실정이 계속되는 가운데 중수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무사들이 반공과 경제 재건을 '구국 공약'으로 내세우며 무신 정변을 일으켰다('''경자정변'''). 무인 정부는 모든 정당, 사회단체와 국회를 해산하고 '''방국재건기무도감'''(邦國再建機務都監)을 만들어 군정을 실시하였다. 방국재건기무도감은 재상 중심제로 홍범(洪範, 헌법)을 개정하였고, 이어 승상에 박정희가 선출되었다.
 
박정희는 '''경제 부흥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제2차 세계대전과 김일성의 난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해결하고, 우리 경제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시켰다.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정책으로 한국은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매년 평균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지속하며 미국에 버금가는 경제 대국으로 거듭나갔다. 또, 산업 구조의 고도화가 추진되면서 무역 수지 흑자에 힘입어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게다가, 근면·자조·협동의 3대 원칙에 기초한 농촌 근대화 운동인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여 도시보다 낙후된 농촌을 개발하고 개선하고자 하였다. 새마을운동의 성과로는 하천정비·교량건설·수리시설확충·농경지확장 등을 통한 식량자급기틀 마련, 농어촌 전화(電化), 농가소득 증대 등을 들 수 있다. 이후 박정희는 상국(相國)이 되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엄청난 권력을 누렸다.
 
한편, 박정희 황각(黃閣, 의정부)은 미국의 요청으로 국군을 월남에 파병하였다. 한국군의 참전은 동아시아에서 한국·미국·일본을 중심으로 한 반공 연대를 강화하였다. 또한, 전쟁 기간 중 한국 기업이 월남에 진출하고 한국 상품이 수출되면서 많은 외화를 벌어들였다. 그러나 월남 파병으로 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희생되었다.
 
=== 혜종 시대(1970~2005) ===
박정희 황각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응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국회를 해산하고 또다시 홍범을 개정하였다('''임자변법''', 1972). 변법 홍범은 재상을 '''어민공동회'''(御民共同會)에서 선출하게 하고, 승상의 연임을 제한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승상(상국)의 영구 집권이 가능해졌다. 또한, 승상에게 긴급 조치권이라는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다. 이후 변법 체제에 반대하는 시위와 개헌 청원 상소가 전개되자, 박정희 황각은 잇달아 긴급 조치를 발표하며 이를 탄압하였다.
 
1979년에는 부산과 마산 등지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유생들과 시민들의 만인소가 일어났다('''부·마만인소'''). 박정희 황각은 비상계엄과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그러던 중 권력 내부의 갈등이 일어나, 박정희가 판상무원사 김재규에게 총살당함으로써 변법 체제는 막을 내렸다('''순화방의 변''')
 
순화방의 변 이후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높아졌다. 하지만, 전두환과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기미군란''', 1979.12.12). 1980년 5월, 대학생들이 신군부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신군부는 이를 구실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였다.
 
광주에서는 신군부의 조치에 맞서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었다. 신군부는 5월 18일부터 공수단을 투입하여 광주 지역의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 이에 분노한 광주 군민들은 시민군을 결성하여 계엄군에 맞섰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광주군청에서 저항하던 시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광주항쟁''').
 
민주화 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민주화를 주장하던 교수와 언론인, 교사 등을 해직하였다. 또한, 홍범을 개정하여 전두환이 선거원(選擧院)의 간접 선거로 임기 7년의 승상에 당선되도록 하였다. 전두환 황각은 민주화 운동을 강력히 탄압하는 한편, 과외 금지, 중·고등학생의 두발과 교복 자율화, 야간 통행금지 해제 등의 정책을 통해 국민의 마음을 얻고자 하였다.
 
1987년 승상 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학생, 시민은  승상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6월 10일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를 규탄하고 개헌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전국에서 동시에 열렸다('''정묘항쟁'''). 전국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자, 황각과 여당은 이에 굴복하여 승상 직선제를 수용하였다('''정묘민주화선언''').
 
직선제 개헌 이후 실시된 승상 선거에서 야당의 분열로 여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노태우 황각은 경성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공산 국가들과의 국교 수립에 적극 나섰다. 또한, 당시 국회는 국민의 요구에 따라 광주항쟁의 진상을 규명하고 전두환 황각의 비리를 조사하기 위한 청문회를 열었다.
 
1990년, 노태우의 안국당, 김영삼의 위민당, 김종필의 신협화당이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합당하여 보국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총선거에서 승리하여 과반 의석을 차지한 보국당은 김영삼을 영의정으로 추대하였다. 문민 황각을 표방한 김영삼 황각은 금융 실명제를 도입하고, 지방 자치 단체장·의회 선거를 실시하여 본격적인 지방 자치를 복구했다.
 
1997년 총선거에서 민본당이 집권하여 김대중이 영의정에 선출되었다. 60년 만에 여·야 간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국민의 황각을 표방한 김대중 황각은 왕정이 복벽된 만주와 경제 협력 사업을 벌여 경제 성장을 도모하였다. 민본당이 재집권하고, 노무현이 영의정을 맡게 되었다. 참여 황각을 표방한 노무현 황각은 시민 사회와의 소통에 힘썼다.
 
=== 상지재위(上之在位, 2005~) ===
2007년 총선거에서 보국당이 승리하여 이명박 황각이 집권하였다. 이명박 황각은 세계 일류 국가 건설을 국정 지표로 내세우며 출범하였다.


== 정치 ==
== 정치 ==
{{본문|대한국의 정치}}
입헌군주제 국가로서 현재의 군주는 [[이원(단국흥기)|이원 황제]]이다. 대의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대한국 공회]]는 중추원과 민의원이 있는 양원제로 임기는 각각 4년이다. 6부상서를 비롯한 재상들은 영의정부사에 의해 지명되며 6부는 이·호·예·병·형·공부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의 영의정은 [[문재인(단국흥기)|문재인]]이다. 대금오와 고등금오에 각 지방금오와 간이금오가 속해 사법권을 행사한다. 판관은 영대금오사와 형부상서의 추천으로 황제가 임명한다. 헌법재판소는 없으며 법률의 합헌 여부는 대금오에서 가린다.
== 행정구역 ==
== 행정구역 ==
대한국의 현 행정구역 제도는 익종경장에서 기인한다. 익종은 경장 과정에서 이전까지 사용되었던 8도 체제를 철폐하고 국토를 40여 개의 군으로 구분하였다. 이후 영주 편입, 남유구 병합 등을 거쳐 제도가 정비되어 현재의 부군제(府郡制)에 이른다. 2018년(무위 13) 기준 경성부, 평양부, 부산부의 3부와 수원군, 양주군, 대구군, 울산군, 의주군, 동영주군 등 49개의 군이 있다. 부의 지방장관을 부윤(府尹), 군의 지방장관을 군수(郡守)라고 한다. 부 아래에는 부(部)-방(坊)-계(契)-동(洞)이 있고, 군 아래에는 시(市)-방-계-동 또는 읍-면-리-동이 있다.
==군사==
==군사==
{{본문|대한국 국군}}
대한국은 근대의 팽창 정책 및 주변국과의 대립으로 일찍부터 군사력을 증강시켜 왔다. [[대한국 병부]]가 '''국군'''(國軍) 또는 '''천군'''(天軍)이라고 불리는 [[대한국 국군|대한국의 군]]을 지휘하고 있다. 2017년 8월 기준 병력 규모는 현역이 약 1,305,000명으로 세계 4위, 예비군은 약 9,200,000명으로 세계 1위이다.
==경제==
==경제==
대한국은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통화 단위는 양(兩, ¥, Yang, KRY)이다. 국내총생산의 규모비로는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으로, 한국의 경제 동향은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준다. 국내총생산은 명목상 4조 9,429억 미국 달러,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5조 742억 미국 달러에 달하며, 구매력 평가 기준 일인당 국내총생산은 39,254 미국 달러로, 선진국으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
===역사===
한국의 경제 대국 역사는 근세 초기 세종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은 이앙법을 도입하는 등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하였다.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자 인구밀도도 증가했고, 그에 따라 상품작물의 재배가 보편화되고 상·공업이 진흥되는 등 산업의 총체적인 분야에 전방연쇄효과(前方連鎖效果)가 나타났다. 또한 효종조에는 하멜 표착한 사건을 계기로 네덜란드와 제한적인 무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나전칠기·도자기·홍삼·차·화문석 등이 서구에 소개되었고, 네덜란드를 통해 천리경·의학 같은 서구문물이 유입되었으며, 구황작물이 도입되어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 때, 한국인이 만든 우수한 품질의 공예품과 회화들이 서구에 전래되어 서구 예술계에서 한국주의(Koreanism)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제국 시대의 한국 경제는, 익종조의 "부국 강병"(富國強兵)정책에서 시작되었다. 익종황제 당시 조정은 외국인 강사 (고용 외국인)를 초빙하여 철도의 건설과 서양식의 공장 건설을 추진했다. 제국 시대에는 비단이 외화 획득 산업으로 중요시되고, 군함 보유 수가 경제 지표가 되어 있었다. 또한 공업이 경제 기반인 지역도 있었다. 근대화 이후 영토에 편입한 영주는 자원이 풍부하여 산업화의 촉진제가 되었다.
한국은 근대화에 착수한 지 반세기 후에도 여전히 농업에 경제를 의존하는 농업국이었다. 1870년, 한국 인구의 70%는 여전히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GDP의 40%는 1차 산업으로부터 창출되었었다. 그러나 전쟁의 지속적 수행 결과로 중공업과 운수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1910년에는 농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까지 떨어졌다. 1920년의 제2차 한·순전쟁 이후로 대한 제국 내의 타지역에 대한 투자가 늘어났다.
한·러 전쟁 이후로 전쟁물자 원료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자 대규모의 석탄 개발이 남몽골·북지나 등에서 이루어졌으며, 석유 수급이 만주에서, 식량자원 수급이 제와 대만 등에서 이루어지는 등 대한 제국의 동아시아에서의 경제적 개발과 수급이 박차를 가했다.
동아시아 전쟁과 김일성의 난을 극복한 후 대한국은 경제 재건에 매진했다. 베트남 전쟁과 월·순 전쟁 특수에 기초하여 경제 부흥 5개년 계획과 새마을 운동을 필두로 "Made in Korea"와 "한국의 다국적 기업"이 세계를 석권하고, 한국이 "경제 대국"으로 올랐다. 이후 양극화로 대변되는 사회적 불평등이 가시화되어 큰 문제로 부상했다.
===산업===
===산업===
한국의 산업은 2차대전 후, 국민소득에서 제1차 산업의 비중은 급속히 저하되고, 제2차 산업·제3차산업의 비중은 높아져서 고도의 선진공업국이라 할 수 있을만큼 높은 지위에 있다. 한편 산업구조의 중핵인 제조업에서 중화학 공업화율(工業化率)은 미국이나 독일에 못지않다. 한국의 주요 산업으로는 자동차산업, 기계산업, 전자산업, 물질산업, 에너지산업 등이 있다.
====농업====
====농업====
한국의 농업은 영세 경작·가족 경영·미작 중심이라는 점들이 제2차 세계대전 전과 본질적인 차이는 없으나, 생산성이나 경영 내용 면에서는 크게 변질·발전되어 있다. 변질·발전의 주된 요인으로는 산업구조 변화와 농산물 시장의 확대를 가져왔다는 점과 농업의 기계화에 따라 생산력이 증대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국은 인구밀도가 높은 동시에 인구 대국이나 농경지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식량을 수입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업경제의 보호를 위해 사회적 비용을 치르면서 자국의 농업 분야를 해외의 농업 메이저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상공업====
====상공업====
공업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발전을 지속하고 있다. 1960년 이후 설비투자의 증대, 기술혁신의 진전에 따라 중화학공업 부문을 중심으로 하는 각종 신흥품목의 공업이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현재는 하이테크 산업(IT, 첨단 전자부품 및 전자제품 등등), 자동차, 광학, 조선, 철강 등의 산업분야에서의 첨단기술이 전 세계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예로부터 상공업이 발전해온 한국에서 서비스업은 국민 총생산의 4분의 3 가량을 차지한다. 한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과 외국과의 무역 거래 확대는 서비스업의 발달을 촉진했으며 금융업도 발달해 다국적 기업이 대한국에 본사 및 지사를 두고 있으며, 외국인들의 투자도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고용===
===고용===
== 사회, 문화 ==
== 사회, 문화 ==
===사회적 약자===
===사회적 약자===
한국은 범인민·범사회적으로, 또한 정부 차원에서 사회적 약자를 긍휼히 여겨 돕고자 한다. 특히 유교가 국시인 만큼 노인에 대한 복지 정책이 잘 되어 있으며 노령 연금은 지속적인 인상을 거쳐 현재 경제 수준에 따라 최대 150만 냥까지 수령할 수 있다. 여성은 예로부터 차별의 대상이었으나 21세기에 들어서 여권 신장 운동이 기세를 얻게 됨에 따라 여성 친화적인 정책이 등장하는 등 개선되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한국에서 짝을 찾지 못하고 구식민지 국가, 일본, 만자(蠻子)권, 캐세이(Cathay)권, 동남아 등 여성들과 결혼하는 남성들이 증가하면서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고 있는 국면이다.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은 한국 문화에 속하면 한국인으로 대우하는 동화정책이다. 귀화한 외국인은 한국식의 성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며, 국문·한자 교육 등 다문화 가정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마련되어 있다.
항산당 집권 기간 동안 노동 권익이 대폭 신장되었다. 사용자는 함부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없게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으며, 우회적인 경로로 희망퇴직을 빙자하여 사실상 내쫓으려는 시도는 호부가 감시하기 때문에 불가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두 거대 노동조합이 있으며, 이들은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중이다. 또한 최저시급이 명확히 규정되어 있는데, 단계적으로 2020년까지 1만 냥으로 인상될 것이라고 정부는 발표하였다.
성적 소수자는 유교적 전통에 의해 배격된 지가 오래이나, 최근 들어서는 이들의 인권을 보장하자는 움직임이 힘을 얻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커밍 아웃'하는 연예인들이 많아지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성적 소수자들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인 보장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장애 등급제 등에 따라 각종 혜택을 국가로부터 얻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주민===
===주민===
한민족이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실상 단일민족 국가에 가깝다.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여진족, 거란족 등 다른 민족의 유입이 종종 존재하였으나 오늘날 동일한 언어와 문화, 동일한 정체성을 공유한 한민족으로 융화되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편입된 영주는 한민족과 남만 제민족 계열의 도래인들이 토착민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한국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한 나라로 동화될 수 있었다. 이외에 대외 팽창 과정에서 만주, 제, 대만 등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다수 있으며, 국제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외국인들의 한국 이주가 더욱 증가하고 있다.
===언어===
===언어===
관습적인 공용어이자 법적인 공용어는 한국어로, 그 계통이 학계에서 확증되지 않은 고립된 언어이지만 많은 학자들이 알타이어족과 연관성 있음을 주장한 바 있고, 특히 많은 한국인 학자들은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표준어가 없고 대신 영국의 용인 발음(RP) 정도에 해당하는 어정음(御定音)이 있다. 어정음은 궁중이나 반가에서 사용해온 격식을 갖춘 한문투의 의고적인 방언이다. 다양한 방언들이 있는데, 그 중 제주 방언과 영주의 방언들은 차이가 심하여 한국어족에 속하는 별개의 언어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한국어 표기에 쓰이는 문자인 언문은 세종이 원로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언문청(諺文廳) 또는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이라는 명칭으로 1446년 반포하였다. 언문은 각 자음과 모음이 하나의 기호로 표시되고, 그 자음과 모음을 모아써서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문자이다. 언문의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뜨고 모음은 천(하늘:ㆍ),지(땅:ㅡ),인(사람:ㅣ)을 나타내는 각 부호의 조합으로 만든,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 창제 원리가 밝혀진 문자이다. 한글 창제 이전에는 삼국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써왔던 한자와 이를 당시의 한국인이 쓰던 입말에 맞는 한자의 소리만 따서 문자로 표기한 향찰, 구결, 이두 등이 한국어 기록 수단이었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줄곧 관공서와 사족층에서 한문을 써왔으나, 근대화 과정에서 언문일치 운동이 득세하면서 언한문혼용체가 공식적인 표기 방법으로 공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처음에는 한문투에 언문으로 토를 달기만 한 정도의 한주언종체였으나, 시간이 흐를 수록 언주한종체로 변모하여 지금은 혼동의 여지가 있는 경우나 중요한 낱말을 써야 하는 경우에 한하여 한자를 혼용할 뿐 언문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국어를 로마자로 표기할 때는 매큔 - 라이샤워 표기법을 사용하되 ㅅ(s)뒤에 ㅣ, ㅑ, ㅕ, ㅖ, ㅒ 등이 오면 sh로 한다. 매큔 - 라이샤워 표기법에서는 ŭ(ㅡ)와 ŏ(ㅓ)가 쓰인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는 영어를 제1외국어로 의무 교육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대한국에서 교육하는 영어는 영국식 영어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중학교에서부터 선택하여 배울 수 있는 제2외국어로는 제(齊)국관화, 만주어, 민남어, 오어, 월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아랍어 등의 11개의 언어가 있다. 고등학교에서도 제2외국어를 배울 수 있으며, 대학수학능력시험때 수험생이 제2외국어를 선택할 수도 있다. 특히 일본어와 제국관화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많이 배우는 제2외국어이기도 하다.
===교육===
===교육===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있는 유아교육기관 외에 6년제의 초등학교, 3년제의 중학교, 3년제의 고등학교로 구성하되, 고등학교는 종류가 보다 다양하다. 고등교육기관은 2, 3년제 전문학교 외 4년제 종합대학, 법정 특수대학, 대학원으로 한다.
모든 인민들에게 동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 무상 공교육을 실시하며, 초등교육과정을 이수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 소정의 장학혜택(융자 등)을 지원한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6.5%를 공공 교육부문에 지출하고 있다. 의무교육 기간은 12년이다.
유치원은 공립 유치원이 약 70%를 점유하는데 단설 유치원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초등학교에 부설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나머지는 사립 유치원이 차지하는데 정부 보조금이 주어져 재정적으로 안정하다. 공립과 사립 유치원은 질적으로 별반 차이가 없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민주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과 교양을 위주로 교육하며, 중학교를 졸업하고나서는 학생의 진로 및 적성에 따라 진학할 고등학교를 선택하게 된다. 중학교 1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자유학년제를 실시하여 자신에게 적합한 진로를 탐색할 수 있게 한다.
고등학교는 분야별로 전문화된 고등 인재의 양성을 위해 세워진 특수목적고등학교, 자율형고등학교, 사범학교 및 예체능계고등학교, 대학 진학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계고등학교, 그리고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실업계고등학교가 있다.
특목고, 자율고, 사범학교의 입시는 교내 활동을 기록하는 포트폴리오(기존의 생기부를 대체, 학생과 교사가 공동으로 기술)와 자기소개서, 심층면접을 토대로 전공적합성과 인성을 중심으로 정성평가하여 선발하며, 교사 추천제는 일체 금지한다. 예체능계의 경우에는 실기 위주로 평가한다. 일반계고등학교와 실업계고등학교는 평준화 선발한다. 고등학교 교육은 과목선택제를 기반으로 한다.
대학교 입시는 특목고, 자율고, 사범학교의 입시와 비슷하게 포트폴리오와 자기소개서를 정성평가하고 심층면접을 통해 선발한다. 단, 예체능 계열 등 특정 학과는 실기를 우선시할 수 있다. 교사 추천제는 역시 금지한다.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직업을 얻어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으며, 대졸자와 고졸자의 연봉이나 사회적 인식에 차이가 큰 것도 아니기에 대학 진학률은 낮은 편이다.
===복지===
===복지===
===종교===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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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지리==
===지형===
===지형===
대한국은 서쪽으로 황해를 사이에 두고 [[제나라|제국]], 동쪽으로 동한국해를 사이에 두고 [[대일본국|일본]], 남쪽으로 벽랑 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만국|대만]], 북쪽으로는 [[만주국(단국흥기)|만주국]]과 맞닿아 있다.
====만주평야====
====한반도====
====한반도====
한반도는 제3기 마이오세 이후에 일어난 단층과 요곡운동의 결과 동쪽으로는 높은 산지가 급경사로 동해안에 임박하고 서쪽으로는 서서히 고도가 낮아진다. 이를 동고서저의 경동지형이라 한다.
====남방도서 지역====
====남방도서 지역====
===기후===
===기후===
좁고 어중간한 국토에 비해 기후대가 매우 다양한 축에 속한다.
쾨펜의 기후 분류에 따르면, 영서 전역과 수도권, [[충청북도]] 대부분, [[충청남도]] 내륙 [* [[금산군]], [[천안시]], [[아산시]]], [[전라북도]] 장수군, 임실군, 남원시 등 남부내륙과 중부 지역 상당수가 [[냉대기후]]권에 속하게 된다. 그 외 남부지방과 제주도는 온대기후권에 속하며 기준에 따라서는 [[제주도]] 일부나 [[서귀포시]] 혹은 중산간 지역을 제외한 모든 [[제주]]지역이 아열대기후권에도 같이 포함되게 되며 이 기준은 쾨펜 분류에는 없는 기준이다. [* 쾨펜의 냉대기후기준은 오리지날은 -3도시이지만 지구온난화나 기후분류상 연관성 때문에 0도시 기준도 많이 사용된다. 위키백과에서도 0도시외 -3도시 기준이 혼용된다. 일전에 아열대기후가 콰펜 뷴류에 속한 것처럼 이야기했으나 아열대기후는 게르거나 트레와다 등 다른 기후학자가 만든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춘하추동]] 즉, [[사계절]]의 변화가 '''매우 칼같이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특징이다. 좋게 말해서 그렇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연교차]]가 커서 [[여름]]은 매우 덥고 [[겨울]]은 매우 춥다는 뜻이다. [[여름]]은 매우 습하고 이 시기에 강수량이 매우 많으며, 반면에 [[봄]]과 [[겨울]]은 매우 건조하여 이 시기에는 강수량이 매우 적다. 그리고 [[가을]] 또한 어느정도 강수량이 있는 초가을 시기를 제외하면 상당히 건조하다. [[한반도]] 전체는 북위 33~43도에 걸쳐 있고 그 중 [[남한]]은 북위 33~38도에 걸쳐 있는데 [[북한]]에 비하면 그래도 겨울이 따뜻한 편이지만 비슷한 위도의 [[그리스]]나 [[포르투갈]], [[스페인]] 등과 비교하면 훨씬 더 춥다. 이들 나라는 우리나라 남부 지방보다도 더 따뜻하다. 연교차도 전체적으로 25~30°C 정도로 큰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다만 최근 5년간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연교차 40~50도를 넘나드는 지방이 대부분이 되었으며, 강원도 홍천같은 일부 산간지방의 경우 연교차 '''70도'''에 가까운 무지막지한 변화를 보이는 지방도 많다. 자세한 사항은 [[한파]], [[폭염]]문서 참조바람.] 북한의 경우는 연교차가 이보다 더 큰 30~40°C까지 벌어진다. 본래는 사계절이 뚜렷했던 나라였지만 요즘은 [[지구 온난화]] 등으로 인해 봄과 가을이 짧아지고 있다. 특히 봄이 매우 짧아져서 어떤 해는 겨울 뒤에 봄 없이 바로 여름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강수량]]은 1,000~1,500mm 정도로 매우 많지만 여름에 매우 덥고 매우 습하다보니 전체 강수량 중 50~70%가 여름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의 여름은 고온다습한 기후가 나타나며 체감온도 역시 높고, 이에따라 불쾌지수가 매우 높다. 그늘에 들어가도 시원함을 못 느낀다. 또 여름에 강수가 집중되다보니 [[홍수]] 피해가 잦고 하천의 하상계수가 커서 안정적인 수자원 확보가 힘들다. 그래서 삼국시대 때부터 [[의림지]], [[벽골제]]와 같은 [[저수지]]를 만들어 수자원 확보를 위해 노력해왔다. 그래도 기온이 높고 비가 많이 오는 여름이 있어 열대성 작물인 [[벼]] 재배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인구 부양력이 높은 벼농사가 가능했기에 한국은 현재 국토에 비해 많은 인구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겨울에는 한랭건조한 기후가 나타낸다. 그래서 [[산불]] 등 화재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강원 영동을 제외하면 대체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가 집중되는 편이다. 유럽에서 온 외국인들이 한국의 겨울 햇빛을 보고 우울증이 낫는다고 할 정도. 사실 한반도 자체가 고기압이 지배적인 곳이라 강수량은 불균등하지만 일조량은 매우 균등해서, 여름 한철을 제외하면 허구한 날 날씨 예보에서 '''"오늘 대체로 전국이 맑은 가운데~"'''란 멘트를 귀가 아프게 들을 수 있다. --오디오가 지원된다--
그런데 현재 [[지구온난화]]로 인해 전통적인 한국의 기후와는 점점 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춘하추동이 규칙적으로 변화했던 것과 달리 최근 들어 봄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고 여름이 길어져서 4월부터 이미 폭염이 오기 시작하며 [[열대야]] 일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요즘은 사실상 4~10월까지가 여름이 되었다.[* 4, 10월의 기후를 서늘하게 느끼는 한국인 입장에선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시기의 평균 기온은 대략 유럽에서 생각하는 여름의 기온과 일치한다.]
이 탓에 연 평균기온도 점점 상승하고 있어 본래는 [[대구광역시]]의 명물인 [[사과]]가 이젠 위도로 2도 정도 북쪽인 [[경기도]] [[파주시]]에서도 잘 자라서 파주시가 사과의 주산지 중 하나가 되었고 [[제주특별자치도]]의 명물인 [[감귤]] 역시 이젠 남해안 일대까지 재배 상한선이 북상했다. [[포도]]도 이젠 [[경기도]] [[연천군]]이 주산지가 되었을 정도다. 이 때문에 한국의 기후가 점점 [[아열대기후]]로 변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동식물===
===동식물===
[[동물]]종과 [[식물]]종 모두 사람의 목숨을 심각하게 쉽게 해치는 [[맹수]]나 독충, [[독초]]가 거의 나지 않는다. 특히 맹수는 [[해수구제사업]] 등으로 다 때려잡은 걸로도 모자라 [[서식지의 파괴|국토 전체를 갈아엎고 개발해서]] 아예 씨가 말랐다. 그 이전에는 '''도성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잡아가는''' 무서운 곳이었지만 [[21세기]]가 된 지금은 모두 옛날 이야기. 단 과거에는 [[중국]]에서 "조선 사람들은 1년의 반은 호랑이를 피해서 도망 다니고, 나머지 반년은 호랑이에게 죽은 사람 문상을 다니는 데 쓴다." 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한다. 이를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해석하자면 그만큼 호랑이가 많았었다는 이야기이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이나 다른 문헌에서 꽤나 잦은 빈도로 [[호환]]이나 호랑이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과거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나 지금은 [[멧돼지]] 정도 외에는 맹수가 없다고 봐도 된다. 하지만 표범이나 늑대 등 다른 맹수 복원문제가 논의되면서 조만간 호랑이도 재도입될 가능성도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산에 다시 풀어놓는 방법은 지역 반발이 꽤나 존재해서.. 굳이 시설내의 정태보존이 아닌 자연에 다시 풀어놓는 동태보존을 하려면 맹수들이 도심으로 내려오거나 아무데나 가서 애꿎은 피해가 나지 않도록 사파리 마냥 철조망으로 산봉우리 몇개 정도를 둘러싸고 풀어놓는 형태가 될 거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민간인 총기소지 불허 국가인데다 다른 호신용품들도 규제가 매우 강력해서 민간인의 자력구제 방법이 매우 한정적이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미국과 달리 이러한 점도 고려는 해 봐야 한다.
그 밖에도 고라니, 너구리나 삵, 족제비와 쥐, 다람쥐 같은 포유류나 개구리, 두꺼비, 도롱뇽과 같은 양서류가 있고 새나 곤충의 수도 다양한 편에 속한다. 조류는 452종, 포유류는 102종 곤충은 136종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조류가 많은 것은 고정적인 활동 영역을 가지지 않는 철새가 있는 것이 이유.
환경의 변화로 [[바다]]와 산간 지방 모두 외래종으로 들어온 독충이나 독초, 독이 있는 동물들이 나타나는 실정이다. 물론 한국 정부는 이 꼴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니 걸리는 대로 뿌리를 뽑아 버리려고 노력한다.
허나 모르는 식물은 되도록 건드리지 말자. 한국에서 자생하는 천남성, [[투구꽃]], 미치광이풀 같은 유독식물은 비록 [[한약재]]로 쓰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당신은 죽을 수도 있습니다|죽을 수도 있다.]]''' 독[[버섯]]도 마찬가지. 가끔 유독식물을 나물로 잘못 먹거나 얕은 지식으로 해 먹었다가 중독되는 사고가 은근히 많다. 어차피 자연에 있는 건 국가 또는 지방 정부의 재산인 경우가 많다. 일일이 잡으러 다니기엔 행정력 낭비기에 안 그럴 뿐이다. 그래도 걸리면 벌금을 물리니 건드리지 말자.
[[나무]] 중에서는 [[소나무]]가 굉장히 많다. 예로부터 소나무를 굉장히 많이 심고 길렀기 때문으로 아직도 [[산불]]이 나서 나무가 없어지면 일단 소나무부터 심는다. 이 때문에 산림 생태계가 부자연스럽다. 지역으로 보자면 [[남산(서울)|남산]]의 소나무 숲이 지금은 신갈나무로 상당히 천이되는 등 세월이 지나서 많이 바뀌긴 하였다. 툭하면 산불이 나는 곳에서 이런 현상이 심하다.
사실 소나무도 잘 골라 심어야 하는데 성장이 빠른 것 위주로 골라 심는다든가 척박한 환경에 자라다 보니 소나무가 재목이 못 된다는 등의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민둥산이 되었던 상황에서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에 대한 것은 [[녹화사업]] 참조.
큰 연교차 때문에 한국산 식물이 원예계에서 인기가 높다. 특히 한파를 견디는 능력이 좋아 겨울에도 잘 얼어죽지 않기 때문이다.
===천연자원===
===천연자원===
== 대외관계 ==

2019년 9월 22일 (일) 13:42 기준 최신판

Great Of Korea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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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표어광명천지 (光明天地)
온 세상을 밝게 하리라.
수도한성특별시
최대 도시평양광역시
정치
정치체제연방제, 대통령제
대통령한 열(connect)
역사
설립1919년 8월 15일
 • 설립1919년 8월 15일
인문
공용어한국어


대한국(大韓國, 영어: Kingdom of Great Korea, 약칭으로 한국(韓國), 대한(大韓))은 동아시아의 중심부에 위치한 국가이다. 수도는 한성특별시(CONNECT)이며, 국기는 태극기, 국가는 애국가, 공용어는 한국어이다.

대한국은 18세기 초부터 급진적으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개방 정책인 대한서양문물개방선언으로 부국강병에 주력한 결과 누구보다 빠른 근대화와 발전을 이룩하였다.

국호

정식 국호는 대한국(大韓麗國, Kingdom of Great Korea)으로, 1770한성선언 이후 천자국임을 선포함에 따라 천조만이 가질 수 있었던 외자 국호를 선포하였다. 또한, 한(韓)은 고구려·신라·백제의 삼한을 아울러 이어 받는다는 의미이다. 별칭은 대한제국(大韓帝國)과 대한려국(大韓麗國)인데 식민제국 시절에 두루 사용되었고 현재에는 과거에 건설한 식민제국을 일컫는 역사적 용어로 주로 쓰인다. 다만, 외국과의 스포츠 경기 관람 시 등 이따금씩은 제국이라고 호명할 때가 있다. 줄여서 한국(韓國)이라고도 하며, 다른 명칭으로는 한려(韓麗)라고도 불린다.

대한려국 간략 역사 연표

고조선

원삼국시대 ~ 삼국시대

제 1 통일왕조(남북국시대)

500년에 최초의 이씨황가가 세운 왕조이다. 남부여국도 많은 문화 유산 등을 남겼다. 대표적으로는 고려 청자와 팔만대장경이 있다. 또 이때는 벽란도에서의 무역이 발달해 다른 먼 국가와의 활발한 교류를 할 수 있었다. 이때 지금 '한국'의 영문 번역어인 '코리아' 가 생겨 났다고 한다.

년에 태조 이성계가 세운 왕조이다. 약 500년이나 넘게 지속된 나라이며 한국의 마지막 왕조인 만큼 많은 문화와 유적을 꽃피웠으며 여러 왕을 배출했다. 한국사의 마지막 통일왕조인 만큼 우리가 배울 것도 많으며 한국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가치도 높게 평가받고 있는 재상 중심의 유교 국가였다.임진왜란을 중심으로 대한국 전,후기가 갈라지며 대한국 전기는 근세,대한국 후기는 근대태동기로 나누어 불러진다.

근대

현대

17세기와 18세기의 한국

제2차세계대전

두 차레의 세계대전이 끝난 한반도

정치

행정구역

군사

경제

역사

산업

농업

상공업

고용

사회, 문화

사회적 약자

주민

언어

교육

복지

종교

예술

문학

음악

미술

언론

놀이·축제

요리

문화재

의복

건축

스포츠

한류

공휴일

지리

지형

만주평야

한반도

남방도서 지역

기후

좁고 어중간한 국토에 비해 기후대가 매우 다양한 축에 속한다.

쾨펜의 기후 분류에 따르면, 영서 전역과 수도권, 충청북도 대부분, 충청남도 내륙 금산군, 천안시, 아산시, 전라북도 장수군, 임실군, 남원시 등 남부내륙과 중부 지역 상당수가 냉대기후권에 속하게 된다. 그 외 남부지방과 제주도는 온대기후권에 속하며 기준에 따라서는 제주도 일부나 서귀포시 혹은 중산간 지역을 제외한 모든 제주지역이 아열대기후권에도 같이 포함되게 되며 이 기준은 쾨펜 분류에는 없는 기준이다. 쾨펜의 냉대기후기준은 오리지날은 -3도시이지만 지구온난화나 기후분류상 연관성 때문에 0도시 기준도 많이 사용된다. 위키백과에서도 0도시외 -3도시 기준이 혼용된다. 일전에 아열대기후가 콰펜 뷴류에 속한 것처럼 이야기했으나 아열대기후는 게르거나 트레와다 등 다른 기후학자가 만든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춘하추동 즉, 사계절의 변화가 매우 칼같이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특징이다. 좋게 말해서 그렇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연교차가 커서 여름은 매우 덥고 겨울은 매우 춥다는 뜻이다. 여름은 매우 습하고 이 시기에 강수량이 매우 많으며, 반면에 겨울은 매우 건조하여 이 시기에는 강수량이 매우 적다. 그리고 가을 또한 어느정도 강수량이 있는 초가을 시기를 제외하면 상당히 건조하다. 한반도 전체는 북위 33~43도에 걸쳐 있고 그 중 남한은 북위 33~38도에 걸쳐 있는데 북한에 비하면 그래도 겨울이 따뜻한 편이지만 비슷한 위도의 그리스포르투갈, 스페인 등과 비교하면 훨씬 더 춥다. 이들 나라는 우리나라 남부 지방보다도 더 따뜻하다. 연교차도 전체적으로 25~30°C 정도로 큰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다만 최근 5년간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연교차 40~50도를 넘나드는 지방이 대부분이 되었으며, 강원도 홍천같은 일부 산간지방의 경우 연교차 70도에 가까운 무지막지한 변화를 보이는 지방도 많다. 자세한 사항은 한파, 폭염문서 참조바람. 북한의 경우는 연교차가 이보다 더 큰 30~40°C까지 벌어진다. 본래는 사계절이 뚜렷했던 나라였지만 요즘은 지구 온난화 등으로 인해 봄과 가을이 짧아지고 있다. 특히 봄이 매우 짧아져서 어떤 해는 겨울 뒤에 봄 없이 바로 여름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강수량은 1,000~1,500mm 정도로 매우 많지만 여름에 매우 덥고 매우 습하다보니 전체 강수량 중 50~70%가 여름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의 여름은 고온다습한 기후가 나타나며 체감온도 역시 높고, 이에따라 불쾌지수가 매우 높다. 그늘에 들어가도 시원함을 못 느낀다. 또 여름에 강수가 집중되다보니 홍수 피해가 잦고 하천의 하상계수가 커서 안정적인 수자원 확보가 힘들다. 그래서 삼국시대 때부터 의림지, 벽골제와 같은 저수지를 만들어 수자원 확보를 위해 노력해왔다. 그래도 기온이 높고 비가 많이 오는 여름이 있어 열대성 작물인 재배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인구 부양력이 높은 벼농사가 가능했기에 한국은 현재 국토에 비해 많은 인구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겨울에는 한랭건조한 기후가 나타낸다. 그래서 산불 등 화재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강원 영동을 제외하면 대체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가 집중되는 편이다. 유럽에서 온 외국인들이 한국의 겨울 햇빛을 보고 우울증이 낫는다고 할 정도. 사실 한반도 자체가 고기압이 지배적인 곳이라 강수량은 불균등하지만 일조량은 매우 균등해서, 여름 한철을 제외하면 허구한 날 날씨 예보에서 "오늘 대체로 전국이 맑은 가운데~"란 멘트를 귀가 아프게 들을 수 있다. 오디오가 지원된다

그런데 현재 지구온난화로 인해 전통적인 한국의 기후와는 점점 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춘하추동이 규칙적으로 변화했던 것과 달리 최근 들어 봄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고 여름이 길어져서 4월부터 이미 폭염이 오기 시작하며 열대야 일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요즘은 사실상 4~10월까지가 여름이 되었다. 4, 10월의 기후를 서늘하게 느끼는 한국인 입장에선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시기의 평균 기온은 대략 유럽에서 생각하는 여름의 기온과 일치한다.

이 탓에 연 평균기온도 점점 상승하고 있어 본래는 대구광역시의 명물인 사과가 이젠 위도로 2도 정도 북쪽인 경기도 파주시에서도 잘 자라서 파주시가 사과의 주산지 중 하나가 되었고 제주특별자치도의 명물인 감귤 역시 이젠 남해안 일대까지 재배 상한선이 북상했다. 포도도 이젠 경기도 연천군이 주산지가 되었을 정도다. 이 때문에 한국의 기후가 점점 아열대기후로 변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동식물

동물종과 식물종 모두 사람의 목숨을 심각하게 쉽게 해치는 맹수나 독충, 독초가 거의 나지 않는다. 특히 맹수는 해수구제사업 등으로 다 때려잡은 걸로도 모자라 국토 전체를 갈아엎고 개발해서 아예 씨가 말랐다. 그 이전에는 도성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잡아가는 무서운 곳이었지만 21세기가 된 지금은 모두 옛날 이야기. 단 과거에는 중국에서 "조선 사람들은 1년의 반은 호랑이를 피해서 도망 다니고, 나머지 반년은 호랑이에게 죽은 사람 문상을 다니는 데 쓴다." 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한다. 이를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해석하자면 그만큼 호랑이가 많았었다는 이야기이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이나 다른 문헌에서 꽤나 잦은 빈도로 호환이나 호랑이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과거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나 지금은 멧돼지 정도 외에는 맹수가 없다고 봐도 된다. 하지만 표범이나 늑대 등 다른 맹수 복원문제가 논의되면서 조만간 호랑이도 재도입될 가능성도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산에 다시 풀어놓는 방법은 지역 반발이 꽤나 존재해서.. 굳이 시설내의 정태보존이 아닌 자연에 다시 풀어놓는 동태보존을 하려면 맹수들이 도심으로 내려오거나 아무데나 가서 애꿎은 피해가 나지 않도록 사파리 마냥 철조망으로 산봉우리 몇개 정도를 둘러싸고 풀어놓는 형태가 될 거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민간인 총기소지 불허 국가인데다 다른 호신용품들도 규제가 매우 강력해서 민간인의 자력구제 방법이 매우 한정적이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미국과 달리 이러한 점도 고려는 해 봐야 한다.

그 밖에도 고라니, 너구리나 삵, 족제비와 쥐, 다람쥐 같은 포유류나 개구리, 두꺼비, 도롱뇽과 같은 양서류가 있고 새나 곤충의 수도 다양한 편에 속한다. 조류는 452종, 포유류는 102종 곤충은 136종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조류가 많은 것은 고정적인 활동 영역을 가지지 않는 철새가 있는 것이 이유.

환경의 변화로 바다와 산간 지방 모두 외래종으로 들어온 독충이나 독초, 독이 있는 동물들이 나타나는 실정이다. 물론 한국 정부는 이 꼴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니 걸리는 대로 뿌리를 뽑아 버리려고 노력한다.

허나 모르는 식물은 되도록 건드리지 말자. 한국에서 자생하는 천남성, 투구꽃, 미치광이풀 같은 유독식물은 비록 한약재로 쓰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버섯도 마찬가지. 가끔 유독식물을 나물로 잘못 먹거나 얕은 지식으로 해 먹었다가 중독되는 사고가 은근히 많다. 어차피 자연에 있는 건 국가 또는 지방 정부의 재산인 경우가 많다. 일일이 잡으러 다니기엔 행정력 낭비기에 안 그럴 뿐이다. 그래도 걸리면 벌금을 물리니 건드리지 말자.

나무 중에서는 소나무가 굉장히 많다. 예로부터 소나무를 굉장히 많이 심고 길렀기 때문으로 아직도 산불이 나서 나무가 없어지면 일단 소나무부터 심는다. 이 때문에 산림 생태계가 부자연스럽다. 지역으로 보자면 남산의 소나무 숲이 지금은 신갈나무로 상당히 천이되는 등 세월이 지나서 많이 바뀌긴 하였다. 툭하면 산불이 나는 곳에서 이런 현상이 심하다.

사실 소나무도 잘 골라 심어야 하는데 성장이 빠른 것 위주로 골라 심는다든가 척박한 환경에 자라다 보니 소나무가 재목이 못 된다는 등의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민둥산이 되었던 상황에서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에 대한 것은 녹화사업 참조.

큰 연교차 때문에 한국산 식물이 원예계에서 인기가 높다. 특히 한파를 견디는 능력이 좋아 겨울에도 잘 얼어죽지 않기 때문이다.


천연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