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시대
1907년 호모 헤이델베르겐시스가 발견되었는데 이로서 독일 지역에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존재했었다는 설이 입증되었다. 중석기 시대에 그들은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조개를 채집하기도 했으며, Sippe 씨족집단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신석기 혁명의 여파는 독일 지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으며, 라이프찌히에서 신석기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입증되었다. 이때부터 씨족 중심의 원시 사회는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했고, 귀족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700년경 소아시아로부터 철이 들어왔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농업과 목축업이 분업되었다. 소아시아로부터 들어온 철기문명은 우선 무기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고, 농업생산력을 발전시켰는데, 이때부터 전쟁으로 생긴 노예가 그 노동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 노예가 로마 제국처럼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고대 시대
게르만족 사회
- 게르만 부족들의 민회를 새긴 부조
-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를 그린 벽화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경에 게르만족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혈통적이라기보다는 경제·사회·문화적 발전에 따른 복속과 통합 과정으로 인해 생겼다. 게르만족은 처음 부족연맹체로써 등장했다. 바이에른족, 알레마니족, 프랑켄족, 튀링겐족, 프리젠족, 작센족 등 같은 부족에 속한 사람들은 관습·종교·문화·법적 전통을 갖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고, 혈족명으로 다른 부족과 구별하였다. 그러나 초기 게르만 부족들에 대한 정확한 생성과 소멸은 알 수 없다. 한 부족과 다른 부족을 구분짓는 종족적 특징들이 반드시 지속되거나 제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부족간 합병이나 분할도 빈번했다. 이때 게르만 전사들은 귀족으로 발전했다. 초기 게르만족에 대해서 그나마 알려주는 사료는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에 일부 나와 있다. 게르만족은 숲 속에서 살았는데 토지는 공유제였다. 경작시 공동체 구성원에게 평등하게 분할되었다. 토지분할이 매해 일어나, 소유권은 영속적이지 않았다. 농업상의 필요에 의해 토지의 사유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지리적 조건 탓에 그들은 사냥과 목축업에 더 주력했던 것 같다. 공동체에서 중요한 일은 민회에서 결정하였다. 독일 역사가들 중에는 이를 귀족사회라고 주장하는 파가 있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 따르면, 북동부의 게르만족은 민회 대신에 "제사장-왕"의 지위가 있었다. 민회는 서부 게르만족의 것이었다. 그들은 평시에는 공동의 행정기관이 없었으며, 전시에 지도자가 선출되기는 했으나, 제도화된 힘은 아니었다. 아무튼, 고대 게르만 사회에서 중요한 계층은 농민 전사층이었다. 귀족 계급도 "요청에 따른 복종"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게르만족의 본격적인 귀족 계급 형성은 로마 제국 멸망 이후이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라인강을 중심으로 로마인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로마는 게르만족을 정복하려고 했으나,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대패한 뒤로는 라인 강을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의 라인강 진출은 게르만족에게 앞선 로마 문명을 전달해주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라인 강 주변의 본, 트리어, 마인쯔, 쾰른 등지에는 로마군이 주둔했으며, 군용 도로가 건설되었다. 게르만족은 조금씩 로마군에 입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로마 제국 말기에 이르면, 게르만족 전사들은 점차 대규모로 로마군에 입대하게 된다. 심지어 부족 전체가 로마군으로 입대하는 사례가 발견되기까지 한다. 로마가 이 지역에서 철수하자 그들은 로마군의 장비와 생산도구들을 불하받아, 급속히 귀족 계급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씨족적인 귀족이었다.
중세 사회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
919년에 작센의 하인리히 공작이 독일국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많은 가신을 보유하고 있었다. 헝가리와 상대로 전쟁을 하여 영토를 확장했으며, 928∼929년에 슬라브(폴란드)를 공격했다. 그는 마자르(헝가리)에 대한 곡물 납부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가 하인리히 1세이며, 그의 아들이 오토 1세이다. 오토 1세는 재차 침입해온 마자르군을 완전히 물리치고 독일 국가 권력의 강화를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교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국가 교회 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주교와 수도원에 토지를 기증하고 성직자들에게 세속적인 관직을, 즉 봉건 영주의 작위를 수여하면서 주교령에 대한 왕의 보호를 약속한다. 왕과 성직자의 이러한 결속은 봉건영주들과 정치적 균형을 가져와 왕권이 강화되었다. 오토는 곧 북이탈리아를 점령했으며, 교황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칭호를 받게 된다. 황제는 로마 교회를 보호하며, 그 대신 교황은 황제가 보유한 이탈리아 내의 영토를 인정한다는 약속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독일 국내의 문제보다는 이탈리아 문제에 더 신경을 많이 쓰게 됨으로써 스스로 왕권약화를 초래하였다. 한편, 슬라브족의 땅을 점령하면 Markgraf라는 공작들을 점령지역(Mark라 호칭함)에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오스트리아도 Ostmark라는 변경의 한 주였다. 이들 슬라브지역은 점령되면 다시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고, 다시 독일이 이들을 점령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Mark는 훗날 프로이센이 되었으며, 뮌헨주변은 훗날 오스트리아로 발전한다.
카노사의 굴욕
교황은 스스로 신의 대리자라 자칭하고 있었고, 주교 임명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황제는 스스로 세속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황제는 독일국가내의 주교들에 대한 서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황제의 서임권은 강력한 황제권의 밑받침이었던 것이다. 그걸 내놓을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은 달랐다. 11세기 무렵의 교황들은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클리뉘 수도원을 중심으로한 개혁운동을 이끌던 이상주의자들이었다. 매우 이상적인 개혁주의자들이었다. 성직자들의 임명권(서임권)을 왜 세속군주가 갖고 있는지에 대해 그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다. 교황은 당연히 서임권을 자신이 행사하겠다고 나섰고, 세속 군주로서는 그것을 교황에게 돌려줄 수 없었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 이른바 서임권 분쟁(the Investiture Contest)이다. 고조되어 가던 교속의 갈등은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 때에 폭발한다. 이것이 1077년에 발생한 저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다. 반(反)황제적인 독일국내의 귀족들이 교황과 결탁하였고, 교황은 서임권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황제는 도시민들의 지원을 받았으나, 안 팎에서 공격을 받게 된 하인리히 4세는 결국 카노사 성에서 교황에게 굴복하였다. 그러나 몇 년 후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를 병사시켰다. 이 사건은 황제와 귀족의 대립이며, 신정 정치 체제와 세속 군주정간의 권력쟁탈전이었다. 결국 두 가지가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것이 바로 '서임권 분쟁(the Investiture Contest)'이었던 것이다.
십자군 전쟁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선동으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서임권 분쟁 이후의 혼란한 상황을 정리하고, 다시 중앙 집권적 권력을 일시적으로나마 강화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도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였다. 독일의 기사들은 십자군 원정으로 동방의 문물을 접함으로써 궁정 문학 등 새로운 문화의 주체로 나서게 되었다. 이는 후일 독일적인 민족 의식을 낳는데 기여했다.
경제적 발전
독일에서도 시장이 나타났으며, 수공업이 조금씩 발전하기 시작했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교역장소는 고작 60∼70여개 였으나, 11세기초에는 라인강과 엘베강근처에 200∼300여개로 늘어나게 되었다. 도시들이 생겼다. 왕과 귀족사이에는 항구적인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도시가 제3의 세력으로서 중요해졌다. 이들은 도시 공동체 코뮨(commune)을 형성하였다. 시장은 단순한 물물교환의 장이었으며, 원거리무역시 쉬어가는 곳에 불과했다. 이러한 지역은 강하류에 발달했고, 영주들에 장악되어 있었다. 도시들이 생겼다. 도시는 봉건적 종속이 약해지고 있었으며, 시민적 도시공동체(commune)을 형성하게 되었다. 11세기에 봉건적 성은 방어시설로서 지배계급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건설된 것이었다. 성과 성(burg)사이에 전쟁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도피처였으나, 점차 방어와 거주가 그 주 목적으로 되었다. 성의 재료도 흙과 나무에서 점차 돌로 바뀌어 갔다. 7인의 선제후에 의해 황제가 선출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3인의 성직자와 4명의 세속제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에 의해 황제가 선출되므로, 황제는 점점 자신의 권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14세기에 룩셈부르크 왕가는 과도한 대외 전쟁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황제권은 더욱 약화되었다. 15세기에는 연방국가가 형성되었다. 급료를 받는 직업관리와 법률가가 등장하여 각 개별 영방국가는 권한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제국 자체는 그러지 못했다. 1413년에 브란텐부르크의 호엔졸레른 왕가가 기사반란을 진압하면서 지역을 통합하기 시작했다. 1442년에는 베를린과 쾰른을 장악하였다. 1437년에는 룩셈부르크 왕가가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갔다(알브레히트 2세). 합스부르크 왕가는 1806년까지 이 종이호랑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한자동맹은 귀족에 저항하면서 도시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13세기말 한자동맹은 상인한자에서 출발했다가, 도시동맹으로 발전했다. 한자동맹의 핵심은 뤼벡지역으로 노르웨이를 상대로 무역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강한 나라였다. 봉건성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며, 다른 한편으로 플랑드르에서 이미 발달한 면공업과 일정한 연관을 맺으며 발달하였다. 자본주의적 관계발전에 진보적 역할을 했다. 이 당시 영국에는 아직 상인계급이 없었다. 한자동맹의 발전은 강력한 경쟁자가 없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자동맹의 진보적 성격은 14세기까지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