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베크 왕국/설정/정치


뤼베크왕국국장.png
본 문서는 뤼베크 왕국의 공식 문서입니다.
문서 반달, 허위사실 기재 등의 편집권 남용을 일체 금합니다.
뤼베크 왕국 국기.png
뤼베크 왕국
관련 문서
[ 펼치기 · 접기 ]

개요

뤼베크 왕국의 설정상 정치사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 실제 카카오톡 가상국가로서의 정치는 뤼베크 왕국/정치 문서 참고.

역사

영방의회 (1574–1677)

초기 영방의회 (1574–1630)

1572년 겨울 당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렌스뵉 가문 및 해당 공작령의 수장 한스 슈벤하임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렌스뵉의 쿠데타로 뤼베크 군정이 수립되고, 1573년 뤼베크 자유시 시의회가 해산된다. 이후 1574년 4월 2일 뤼베크 자유 한자 공국의 건국과 함께 뤼베크의 초대 공작으로 즉위한 한스 1세는 1년 넘게 지속되던 치안령을 해제하고 지역의 유력 귀족 가문과 상인 세력의 요구에 따라 자유헌장(Freiheitsbrief)에 서명한다. 이에 따라 해산되었던 뤼베크 시의회가 뤼베크 영방의회(Landstände Lübeck)라는 명칭의 의회로 복구, 당시 유럽 국가들에서 운영되던 의회 체계와 비슷하게 군주권을 부분적으로 제한하고 각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로서 수립되었다.

프랑스의 삼부회와 유사하게 각 신분별로 대표자들이 존재했으며, 참여하는 신분은 각각 귀족[제1신분], 상인[제2신분], 시민[제3신분]이었다. 이들은 원칙상 공작에 의해 소집되어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뤼베크 공국 자체가 자유시에서 유래한 국가였던 만큼 프랑스와 달리 뤼베크 영방의회는 정기적인 회의를 진행[1]하는 등 더욱 활발히 활동했다.

후기 영방의회 (1630–1677)

1630년 9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복권 칙령 발표와 스웨덴의 참전에 힘입어 신교 측으로 공식 참전한 후 전쟁 수행으로 인해 내정에 어려움을 겪던 제3대 뤼베크 공작 카를 3세에 의해 영방의회의 권한이 대폭 확대되었다. 카를 3세의 이러한 조치는 9월 유신 또는 제2차 자유헌장으로 불리며, 이 조치를 기점으로 영방의회는 행정·재정 등의 분야에서 과거 뤼베크 자유시 시절과 비슷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및 오스나브뤼크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종결된 후 제4대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치세에도 이러한 권한은 유지되었다. 이는 프리드리히 2세가 유력 세력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야망을 실현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의회 (1677–1848)

프리드리히 2세 (1677–1706)

1675년 6월 19일, 제4대 뤼베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가 뤼베크 자유 한자 왕국을 선포, 초대 뤼베크 국왕으로 즉위한다. 이 과정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선왕(카를 3세) 치세부터 이어져온 영방의회의 폭넓은 권한을 보존시켜줌으로써 의회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목표를 순조로이 이룰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보답 겸 의회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2세는 왕국 선포 2년 후인 1677년 5월 영방의회를 국가의회(Reichstag)로 개편, 내정 전반에서의 정책 수립을 담당하는 복합적 내정기구로 그 권한을 더욱 확대시키며 자신은 최종 결정권자로 남아 내정의 일선에서 발을 뺀다.[2]

이렇듯 당황스러울 정도로 시대를 앞선 급진적 조치에 대해서는 프리드리히 2세가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위해 권한을 위임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스스로 내정에 대한 왕권을 의회에 위임하며 결과적으로 의회의 힘을 강화시켜 준 카를 3세와 프리드리히 2세는 공통적으로 대외적인 야망이 큰 군주들이었다.[3] 그러나 이들은 모두 내정에는 관심이 없었던 데다가 자신이 원하는 대외정책의 수행을 위해 의회의 지지와 재정 승인이 필요했기에, 내정 전반을 의회에 위임하여 대내정책 수행의 부담을 줄이는 한편 자신들이 추진하는 대외정책에서 의회의 신임을 얻을 수 있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수립된 국가의회는 프리드리히 2세 치세 동안 내정에 한해 군주와 거의 동등한 지위에 있게 되었고,[4] 이후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하는 1706년까지 30년간 의회가 대내정책을, 국왕이 대외정책을 담당하는 불안한 균형이 이어졌다.

알브레히트 4세 (1706–1719)

1706년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하고 왕태자가 제2대 국왕 알브레히트 4세로 즉위하면서 이 균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와 달리 알브레히트 4세는 왕권신수설을 기반으로 내정에 대한 통솔권을 얻길 원했고, 결국 1708년 근왕파 귀족 세력들과 연대하여 인사권, 군권 등을 잠식해나가며 프리드리히 2세의 국정위임령 이전 수준으로 되돌리려 한다. 이에 국가의회가 반발하여 조세 승인 거부, 내정 협조 중단 등으로 강력히 대응하면서 국왕과 의회 간 갈등이 점점 심해져 간다. 이런 식으로 알브레히트 4세와 의회 간 첨예한 대립이 지속되자 뤼베크 왕국은 대내외적으로 큰 혼란에 빠진다. 결국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1713년경에 이르러 프로이센 왕국이 뤼베크 왕국 남부에서 단일 왕국으로 승격되며 독일의 강자로 부상하자 발트해 무역 안정성에 위협을 느낀 영국과 스웨덴이 공동으로 뤼베크 왕국에 국가 안정화를 촉구하기에 이른다.

결국 알브레히트 4세는 '대외적 압박에 따라 국가를 즉각 정상화시킬 것'이라는 명분으로 친위대를 동원[5]하여 의회의 전복을 기도했으나,(1713년 국가의회 위기) 메클렌부르크 전쟁으로 신규 점령된 로스토크, 슈베린 등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의회파가 득세하며 큰 효과를 보지 못한다. 추가로 왕립군 정규병들이 의회파를 지지[6]하면서 알브레히트 4세의 친위 쿠데타 시도는 완전히 좌절되고, 결국 국가의회의 가장 강력한 힘이었던 재정권을 장악하지 못해 지지 기반을 완전히 상실한 국왕은 1714년 의회와의 협상을 통해 트라베부르크 협정에 동의하게 된다. 이 협정은 뤼베크 권리장전으로도 불리며, 이를 통해 뤼베크 왕국에는 입헌군주정이 타 국가에 비해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각주

  1. ↑ 다만 원칙상으로는 삼부회와 마찬가지로 필요에 따라 공작이 소집하는 형태였다.
  2. ↑ 이는 1677년 국정위임령 또는 제3차 자유헌장으로 불린다.
  3. ↑ 이는 선대 프리드리히 1세가 유지해 온 대외중립 정책을 폐기하고 스웨덴을 따라 30년 전쟁에 참전한 카를 3세의 사례와 뤼베크 왕국 선포를 주도하고 재위 말기에 메클렌부르크 전쟁까지 일으킨 프리드리히 2세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 이는 영국 의회의 권리장전(1689년)보다도 앞선 일이었다.
  5. ↑ 이 '친위대'라는 것이 바로 알브레히트 4세가 의회를 정면으로 무시하고 군권을 행사해 만든 개인 사병 집단이었다.
  6. ↑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재정권을 장악해 월급을 주고 있는 주체가 의회였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