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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제국의 제후국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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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왕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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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기 | 국장 | |
| 상징 | ||
| 국가 | Preußenlied 프로이센의 노래 | |
| Borussia 보루시아 | ||
| Heil dir im Siegerkranz 그대에게 승리의 왕관을 | ||
| 영토[1] | ||
| ▲ 1870년 영역 | ||
| 1701년 1월 18일 ~ 1918년 11월 9일 (217년 9개월 21일) |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 바이마르 공화국 프로이센 자유주 | |
| 프로이센 공국 | ||
| 역사 | ||
| 1701년 왕국으로 승격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56년 7년 전쟁 1806년·1809년 나폴레옹 전쟁 1807년 틸지트 조약 1814년 빈 회의 1848년 3월 혁명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1년 독일 통일, 제국 선포 1918년 11월 혁명, 왕국 멸망 | ||
| 지리 | ||
| 위치 | 중부유럽 | |
|---|---|---|
| 수도 | 베를린[2] | |
| 면적 | 348,779km² | |
| 인문환경 | ||
| 인구 | 40,169,219명 (1910년) | |
| 언어 | 독일어 | |
| 종교 | 개신교 (프로이센 연합교회)[3][4], 가톨릭, 유대교 | |
| 민족 | 독일인 | |
| 정치 | ||
| 정치 체제 | 절대군주제 (1701 – 1848) 준입헌군주제 (1848 – 1918)[5] | |
| 국가원수 | 공작[6] → 국왕[7] | |
| 정부수반 | 내각총리대신[8] | |
| 왕조 | 호엔촐레른 가문 | |
| 주요 국왕 | 프리드리히 1세 프리드리히 2세 빌헬름 1세 | |
| 주요 총리 | 오토 폰 비스마르크 | |
| 경제 | ||
| 통화 | 라이히 탈러(1701년 ~ 1750년) 탈러(1750년 ~ 1857년) 베라인스탈러(1857년 ~ 1873년) 골트마르크(1873년 ~ 1914년) 파피어마르크(1914년 ~ 1918년) | |
개요
프로이센 왕국(Königreich Preußen), 통칭 프로이센(Preußen)은 1701년부터 1918년 독일 11월 혁명 때까지 존속한 독일계 왕국이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출발해 독일 민족 최초의 근대적 국민국가인 독일 제국의 성립을 독일 통일을 이루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1871년 제국 선포 이후 정치적 권위부터 국력까지 독일 제국의 소속 국가 중 가장 으뜸이었다.
역사
왕국으로 승격되기 전 동군연합 시절의 역사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프로이센 공국 문서 참조.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하면서 영지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및 동군연합인 프로이센 공국이 통합하여 단일 왕국으로 승격하였다. 사실상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위주의 통합 및 승격이었기 때문에 브란덴부르크가 본체였으나[9],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브란덴부르크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왕국 안에 있는 선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 선제후가 독립적인 국가의 칭호인 '왕(König)'을 사용할 시 독일왕(Rex in Germania)과 구분이 안 되기 때문이다.[10]
프로이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작센 제국관구에 속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신성 로마 제국 권역 바깥의 프로이센 공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 무렵 유럽은 절대 왕정 시대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나 영국 국왕이 될 예정이었던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처럼 군주의 지위와 명성이 중요했다. 1696년부터 칭왕을 계획한 프리드리히 1세는 1701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가 지원을 요청하자 대가로 칭왕을 요구했다. 레오폴트 1세는 고심 끝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칭왕을 수락했지만 한 가지 단서를 달았는데 König in Preußen로 허락한 것이다. in과 of(von)의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였는데, 신성 로마 제국 바깥인 프로이센 안(in)에서는 칭왕을 인정하겠지만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여전히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일 뿐이라는 의미였다. 어차피 신성 로마 제국법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 국경 밖의 프로이센을 왕국으로 통치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칭왕을 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1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이후 프로이센 국왕들은 대대로 이를 껄끄럽게 여겼다. 프로이센 군주가 '프로이센 국왕(König von Preußen)'이라고 국제 사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7년 전쟁 이후였고, 이후 제1차 폴란드 분할으로 서프로이센으로 알려진 왕령 프루시 지역을 획득하면서 확인사살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완전히 프로이센이라 칭하기 시작한 것은 1806년 신성 로마 제국 해체 이후였고, 그 전까지 공식적인 대외 명칭은 엄연히 브란덴부르크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 의회인 세임은 과거 자신들의 봉신국이었던 프로이센 공국의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가 왕을 칭하는 것을 반대하였지만, 정작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자 작센 선제후인 아우구스트 2세는 칭왕에 찬성했기 때문에[11]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 대관식 때 아우구스트 2세는 축하 편지를 보냈다.
프로이센 왕국은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 공국, 베스트팔렌의 클레베-마르크 등 여러 곳으로 떨어져 있는 영토로 성립되어 있기 때문에 각 지역은 개별적인 법률과 신분제 의회를 갖고 있었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의 주도로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중심의 중앙집권화가 완료되면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시대에는 절대주의 국가체제가 확립되었다.
8만 명이라는 거대한 정예 상비군과 세수 중심의 관료기관을 바탕으로 하여 막강한 중앙집권을 이룬 프로이센은 이때부터 북부 유럽의 패자로 돌변하였다. 9만 명의 황제군(Kaiserliche Armee)에 비해서는 적었으나, 프로이센 왕국군은 영토 대비 8만 명을 차지하는 많은 숫자였으며 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자들만 정예 병사로 뽑았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도 금방 제압하고 중앙집권화가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에는 대북방전쟁에 참전, 오데르강 하구의 주요 항구인 슈테틴을 확보하였고 프리드리히 2세 때에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해 합스부르크령 보헤미아의 핵심 영토였던 슐레지엔을 장악하였다.
7년 전쟁에서는 크게 밀리면서 나라가 완전 망할 뻔했지만,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3세가 주도한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으로 인해 기사회생하였다. 어쨌든 프로이센은 여러 차례의 전쟁을 통해 자신이 북독일의 강자임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제1차 폴란드 분할 때에는 서프로이센을 확보하면서 브란덴부르크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연결하는 숙원을 달성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이후에는 추가로 두 차례의 추가적인 폴란드 분할을 통해 바르샤바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프랑스 혁명 전쟁에 참전했다가 가장 먼저 프랑스 혁명정부를 승인하는 조건으로 마인강 이북의 영토 점유를 인정받았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등장한 이후에는 오히려 프랑스 편에 붙어 하노버 선제후국과 브레멘 등을 합병하는 등 크게 세력을 키웠다.
하지만 프로이센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은 알게 모르게 점점 커져갔고, 결국 당대의 먼치킨 나폴레옹한테 도전했다가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패배, 틸지트 조약(1807)으로 그동안 확보한 영토들을 거의 다 잃으며 일시적으로 프랑스 제1제국의 위성국이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으로 몰락하고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벌어지자 다시 동맹군에 가담해 주요 승전국 중 하나가 되었으며, 빈 회의에서 작센 왕국의 북부 지역과 베스트팔렌·라인란트 등의 새 영토를 얻었다.
19세기에는 프로이센에서도 산업 혁명이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독일 연방에서 북독일 관세동맹을 체결하고 철광석과 석탄이 풍부한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 슐레지엔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뒤처진 점이 많았기에 자유주의 세력은 개혁을 꿈꾸었다. 1848년 3월 전 독일을 뒤흔드는 자유주의/민족주의 대혁명이 일어나 의회가 설치되는 등의 진전이 있었으나, 결국 국왕의 외면과 보수파의 진압으로 실패했다. 귀족이 아닌 민족, 다시 말해 국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려던 자유주의는 프로이센뿐만 아니라 전 유럽의 지배 계층인 귀족들에게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비교적 자유주의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독일 황제 추대를 거부하였다(1849).
이후 나타난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의회를 정치력으로 무력화시키고서는 아예 수족으로 부려가면서 통일을 위한 대업을 실시,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1864),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에서 승리하여 1871년 연방 형식으로 독일 통일을 완수, 독일 제국을 수립하였다.
프로이센 왕국은 통일 과정 중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하노버 왕국, 헤센 선제후국, 나사우 공국 등을 병합하며 세력을 크게 불렸으며 이 세력을 바탕으로 독일 제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제국의 면적의 66%, 인구의 60% 정도를 차지하며 실질적인 제국의 중추가 되었다. 이와 같은 독일·프로이센의 이중 구조는 제국이 멸망하고 세워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프로이센 자유주'로 존속하였다.
최초의 중앙집권적 근대 통일 국가를 건설한 국가로서 프로이센은 독일이 가지는 정체성의 뿌리가 되는 나라지만 두 차례의 세계 대전(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 현재의 독일은 옛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 중 절반 이상을 폴란드와 러시아에 할양한 상태이다. 왕국으로 승격될 당시의 영토로만 한정할 경우 베를린과 현 브란덴부르크 주 정도만 제외하면[12] 현 독일에 남아있는 영토가 거의 없다. 다만 상술했듯 프로이센의 본체는 브란덴부르크였고, 호엔촐레른 가문의 유산도 베를린과 포츠담에 모여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상실은 거의 없다.
현대 독일에게 있어 프로이센은 자국사의 일부로 자신들과 연결되어 있는 국가로 여겨지지만, 동시에 단절과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아예 '특수노선(Sonderweg, 존더베크)' 이론에서는 프로이센의 유산을 독일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근대화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독'으로 여겼으며 해당 이론은 20세기엔 나치즘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한 상당히 지배적인 이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사실상 현재의 독일을 만들었다고 여겨지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세 총리들(콘라트 아데나워,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빌리 브란트)부터가 반프로이센 성향이 강한 인물들이었다. 현대에 와서는 그래도 '청산해야 할 악의 뿌리'라는 단색조의 평가에서 벗어나 복합적인 '역사적 자산'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프로이센의 군국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유산은 경계하지만, 계몽주의적 가치나 근대적 관료제, 효율적인 행정, 종교적 관용 등 현대 독일의 긍정적인 이미지에 부합하는 프로이센의 가치는 긍정하는 식이다.
행정구역
프로이센의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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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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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북독일 연방이 출범하면서 외국에 주재하는 외교공관들은 1867년에 타 가맹국들과 통합시켰지만 북독일 연방이 아니었던 남독일 지방의 국가들은 독일 통일 이후에도 일부 국가에 자체 공사관을 둘 수 있었다. 독일 제국 성립 이후에도 자국 내 일부 영방과의 공사관은 남아 있었다. 독일어 위키피디아에 목록이 있는 것을 전재하면 다음과 같다.
- 바이에른 왕국: 주재(1931 폐쇄) / 프로이센(1934 폐쇄)
- 뷔르템베르크 왕국: 프로이센(1933 폐쇄)
- 작센 왕국: 주재(1934 폐쇄) / 프로이센(1924 폐쇄)
- 바덴 대공국: 주재(1918 폐쇄) / 프로이센(1932 폐쇄)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국: 프로이센(1934 폐쇄)
- 헤센 대공국: 주재(1927 폐쇄)
-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주재(1932 폐쇄)
역대 국왕
프로이센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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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위는 왕실의 법에 따라 장자상속 및 부계상속의 법칙에 따라 남계로 세습된다.
프로이센 왕국 헌법 제53조, 1850년 |
| 대수 | 이름 | 생몰년 | 재위기간 | 비고 |
|---|---|---|---|---|
| 1 | 프리드리히 1세 | 1657년 7월 11일 ~ 1713년 2월 25일 (향년 55세) |
1701년 1월 18일 ~ 1713년 2월 25일 | 1688년부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이었음 |
| 2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 1688년 8월 14일 ~ 1740년 5월 31일 (향년 51세) |
1713년 2월 25일 ~ 1740년 5월 31일 | |
| 3 | 프리드리히 2세 | 1712년 1월 24일 ~ 1786년 8월 17일 (향년 74세) |
1740년 5월 31일 ~ 1786년 8월 17일 | |
| 4 |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 1744년 9월 25일 ~ 1797년 11월 16일 (향년 53세) |
1786년 8월 17일 ~ 1797년 11월 16일 | |
| 5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 1770년 7월 3일 ~ 1840년 6월 7일 (향년 69세) |
1797년 11월 16일 ~ 1840년 6월 7일 | 마지막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선제후 |
| 6 |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 1795년 10월 15일 ~ 1861년 1월 2일 (향년 65세) |
1840년 6월 7일 ~ 1861년 1월 2일 | |
| 7 | 빌헬름 1세 | 1797년 3월 22일 ~ 1888년 3월 9일 (향년 90세) |
1861년 1월 2일 ~ 1888년 3월 9일 | 1871년부터 독일 황제 겸임 |
| 8 | 프리드리히 3세 | 1831년 10월 18일 ~ 1888년 6월 15일 (향년 56세) |
1888년 3월 9일 ~ 1888년 6월 15일 | |
| 9 | 빌헬름 2세 | 1859년 1월 27일 ~ 1941년 6월 4일 (향년 82세) |
1888년 6월 15일 ~ 1918년 11월 9일 |
역대 총리
Ministerpräsidenten(내각총리대신)이라 부른다. 프로이센 내각총리대신 참고.
역대 국기
| 1701년~1750년 | 1750년~1801년 | 1801년~1803년 |
| 1803년~1892년 | 1892년~1918년[13] |
각주
- ↑ 진한 초록은 1866년 이후 프로이센 왕국의 최대 영토이고, 연한 초록은 북독일 연방의 구성국이다. 북독일 연방은 프로이센 왕국의 주도로 결성되었고 그 외의 구성국들은 사실상 프로이센의 위성국이었다. 북독일 연방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독일 제국으로 계승된다.
- ↑ 임시수도 : 쾨니히스베르크
- ↑ 국교
- ↑ 개신교 인구의 절대다수가 루터파와 칼뱅파였으며 둘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법령에 따라 1817년 프로이센 연합교회로 통합되었다.
- ↑ 말로만 입헌군주제이지 국왕의 권한이 강대하여 전제군주제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외견적 입헌군주제라고 한다. 오늘날 이슬람 입헌군주제 국가들과 비슷하다.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18년 재상에 취임한 막시밀리안 폰 바덴이 영국식 입헌군주제로 개혁하려 하였으나 11월 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실패로 끝났다. 한국도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영국식 입헌군주제와 독일식 입헌군주제 사이에서 고민하였으나 전제군주제를 선포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은 고종은 전제군주제 국가인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아울러 일본 제국을 만든 유신 지사들이 모범으로 삼은 나라도 이 프로이센 왕국이었는데, 전제군주제인 천황절대주의를 추구하던 유신 지사들한테는 전제군주제 국가였던 프로이센이 모든 면에서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일본 제국의 헌법이나 일본 제국 육군은 다분히 프로이센의 헌법과 육군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
- ↑ 1772년 폴란드 분할 이전까지는 프로이센에서의 왕(외공내왕).
- ↑ 1772년 폴란드 분할 이후 프로이센의 국왕으로 칭왕. 프로이센 왕국 국왕은 1806년 신성 로마 제국 해체 전까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겸했으며 나중에는 북독일 연방 의장과 독일 제국 황제를 겸했다.
- ↑ 일본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의 정식 직책명인 내각총리대신이 비스마르크가 역임한 프로이센 왕국 내각총리대신직에서 따왔다.
- ↑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가 아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호엔촐레른 가문의 군주들이 머물렀던 사실 하나로도 확인 가능하다. 프로이센 왕국 선포 이후에도 쾨니히스베르크는 중요한 도시였지만, 칭왕시 국호를 (동)프로이센으로 했으니 마땅히 그 중심지로서의 대관식 개최지와 유사시 왕실의 피난처 정도의 역할에 머물렀고, 그나마 대관식을 올린 국왕도 딱 2명이었다. 심지어 독일 통일의 주역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고향인 옛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알트마르크(Altmark) 지역(현재의 작센안할트)을 가리켜 프로이센의 요람(Wiege Preußens)이라고 말했다. 빌헬름 2세는 아예 호엔촐레른 가문 이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시절부터 통치한 아스카니아 가문과 비텔스바흐 왕조, 룩셈부르크 왕조의 변경백-선제후 등을 모두 포함한, 직함과 가문(왕조)을 불문하고 베를린 및 그 주변의 브란덴부르크를 다스렸던 역대 군주들을 본인의 선대 군주로 간주하여 동상으로 만들어 기념했지만, 정작 같은 호엔촐레른 일가로서 본인의 방계 조상인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와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는 넣지도 않았는데, 여기에서도 빌헬름 2세를 위시한 독일 제국 시대 프로이센 최상층에서 자국의 직계 전신이 브란덴부르크라는 역사인식은 확고했다고 볼 수 있다.
- ↑ 신성 로마 제국에는 독일왕, 이탈리아 국왕, 부르군트 국왕, 보헤미아 국왕 4개의 왕이 있었는데 독일왕과 이탈리아 국왕은 황제의 당연직이었고 부르군트 왕국은 프랑스 왕실 방계가 영주로서 실효지배하는 것을 통해 실질적으로는 14세기 말에, 명실상부하게는 15세기 말에 소멸했다. 보헤미아 국왕은 1526년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후보자를 배출하여 사실상 준세습화되었다. 나중에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사르데냐 왕국도 왕국의 중심지는 피에몬테와 사보이아였으나 사보이아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라인강 상류 관구(Oberrheinischer Reichskreis), 피에몬테는 이탈리아 왕국에 속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과 관련이 없는 사르데냐 왕국으로 칭하다가 1815년 빈 회의 이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으로 개칭하였다.
- ↑ 프로이센과 이웃한 나라 둘을 동시에 다스리는 입장에서 어떻게든 바짓가랑이를 붙잡았어야 하는 것이 맞고, 찬성하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결국 정력만 뛰어난 암군으로서 역사에 남았다.
- ↑ 1701년 당시 프로이센 공국이었던 동프로이센 지역은 물론, 당시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중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인 노이마르크 지역(왕국 승격 당시 브란덴부르크 본토의 약 1/3)과 힌터포메른까지 상실했다.
- ↑ 사실 가장 유명한 깃발이 이것이다 보니 독일 제국(1871년) 이전의 프로이센에 이 국기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독일 제국 이후에 만든 거라 해당 목적대로라면 쓸 일이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