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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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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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독일 지도.png 남부 독일 지도.png 북동부 독일 지도.png 동프로이센 지도.png
선사
시대
네안데르탈인
호모 사피엔스의 이주와 확산
초기 유럽 농경민
마그달레니아 문화 원시 인류 공동체
아렌스부르크 문화
다뉴브 문화
선형 토기 문화 · 뢰셴 문화 · 미켈스베르크 문화 · 누두형 비커 문화
매듭무늬토기 문화
구상 암포라 문화 · 쇤펠데르 문화 · 바덴 문화
종형 비커 문화
투물루스 문화 우네티체 문화
언필드 문화
할슈타트 문화 루사티아 문화
라 테네 문화 포메란 문화
고대 켈트
켈트의 이주와 확산
로마 공화국 게르마니아
게르마니아 전쟁 토이토부르크 전투


훈족

로마 제국
상게르마니아 하게르마니아
서로마 제국
상게르마니아 하게르마니아
중세 ↓
게르만족의 대이동

슬라브족의 이동
게르만족의 이주와 정착 발트인의 이주와 정착
발트계 부족들
프랑크 왕국
오보트리티 벨레티 소르브
동프랑크 왕국
독일 왕국
(작센 · 바이에른 · 슈바벤 · 로트링겐 · 프랑켄)
프루스인
신성 로마 제국
독일 기사단국
독일 기사단
리보니아 기사단
프로이센 공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 프로이센 공국 동군연합
프로이센 왕국
근대 프랑스 제1공화국
프랑스 혁명 전쟁 뤼네빌 조약
후기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군주국
프랑스 제1제국
라인 동맹
독일 연방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
1848년 혁명

독일 제국 (1848-1849년)
↓
오스트리아 축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북독일 연방 남독일 국가들[1] 북독일 연방
독일 제국
독일 식민제국 제1차 세계대전
현대 바이마르 공화국
라인 공화국 자르 보호령 프로이센 자유주 공산주의 미승인국들
나치 독일
수권법의 통과 라인란트 재무장 오스트리아 병합 주데텐란트 병합
제2차 세계대전

플렌스부르크 정부
세계대전에서의 패전과 항복

연합군 점령하 독일
베를린 봉쇄
독일연방공화국 (서독)
자르 보호령
독일민주공화국 (동독) 소련 폴란드
서독의 영유권 포기[2]
독일연방공화국
  1. ↑ 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바덴 대공국, 헤센 대공국 등.
  2. ↑ 1960년대 동방정책의 일환으로 오데르-나이세 선 이서 지역(포메른, 슐레지엔, 프로이센)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사실상 포기하였으며,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완전히 포기하였다. 현재 해당 영토들은 폴란드의 바르민스코마주르스키에, 돌노실롱스키에, 실롱스키에, 오폴스키에, 포모르스키에, 자호드니오포모르스키에, 루부스키에와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주로 구성되어 있다.

독일 제국 국기.svg독일 제국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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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국
Deutsches Reich
독일 제국
Deutsches Kaiserreich
독일 제국 국기.svg 1920px-Wappen Deutsches Reich - Reichsadler 1889.svg.webp
국기 국장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Gott mit uns
상징
국가
(관습상)
라인강의 수비
Die wacht am Rhein
황실 찬가
(비공식 준국가)
그대에게 승리의 왕관을
Heil dir im Siegerkranz
위치
German Empire 1914.svg
1871년 1월 18일 ~ 1918년 11월 9일
통일 이전 멸망 이후
독일 제국 국기.svg 북독일 연방
Flag of Bavaria (striped).svg.png 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국기.svg 뷔르템베르크 왕국
Flagge Großherzogtum Baden (1891–1918).svg 바덴 대공국
헤센 대공국 국기.svg 헤센 대공국
독일 국기.svg 바이마르 공화국
클라이페다 국기.jpg 클라이페다 지역
Flag of Saar 1920-1935.svg 자르 분지 지역
단치히 국기.png 단치히 자유시
Flag of Bavaria (striped).svg.png 바이에른 인민국
적기.png 브레멘 소비에트 공화국
적기.png 엘자스-로트링겐 소비에트 공화국
Flag of Poland (1927–1980).svg.png 폴란드 제2공화국
역사
1871년 1월 18일 제국 선포
1870년대 문화투쟁
1888년 6월 15일 빌헬름 2세 즉위
1890년 3월 20일 오토 폰 비스마르크 사임
1914년 8월 1일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8년 11월 9일 공화정 선포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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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중부유럽
수도 겸
최대도시
베를린
면적 540,857km² (본토)
2,658,161km² (본토·식민지)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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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871년 기준)
41,058,792명
주류 민족 독일인
공용어 독일어
상용어 저지 독일어
이디시어
소르브어
림뷔르흐어
폴란드어
덴마크어
프랑스어 등
종교
(1880년 기준)
개신교 62.63%
로마 가톨릭 35.89%
유대교 1.24%
기타 기독교 0.17%
기타 0.07%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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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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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체제 국가자본주의
통화 골트마르크 (1873–1914년)
파피어마르크 (1914–1918년)

개요

독일 제국(Deutsches Kaiserreich)은 1871년 독일 통일의 결과로서 성립되어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며 해체되기 전까지 중부유럽에 존재한 연방 제정 준입헌군주제 국가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이후 독일 지역에서 등장한 최초의 근대 민족국가이자 오늘날 독일의 모태이다.

공식적인 국명은 독일국(Deutsches Reich)이었으나 같은 국명을 사용하는 후대의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과 구분하기 위하여 '독일 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나치 독일의 영향으로 독일 제국을 제2제국(Zweites Reich)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론

독일은 어떻게 통일로 나아가게 되었는가?[1]

1870년 일어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이 주도하는 북독일 연방이 승리를 거두면서, 수세기 동안 분열되어 있던 독일 지역이 마침내 하나로 통일되었다. 이듬해 1월 18일 프랑스 파리 외곽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공식적으로 독일 제국이 출범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오스트리아 제국 및 리히텐슈타인 공국, 룩셈부르크 대공국을 제외한 모든 독일계 국가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호엔촐레른 왕조의 프로이센 국왕이었던 빌헬름 1세는 독일 황제(카이저)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독일 제국은 연방의 형태로서 4개의 왕국, 6개의 대공국, 5개의 공국, 7개의 후국, 3개의 자유시 및 1개의 제국 직할령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2] 프로이센 왕국이 제국 면적의 3/5를, 인구의 2/3을 차지하고 있었고 헌법상으로도 프로이센 국왕이 곧 독일 황제였기 때문에 연방이라기보다는 사실상 "프로이센 왕국의 영향권"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1870년 이후로 독일 제국은 석탄, 철강, 화학, 철도(수송) 분야에서 특히 강세를 보이며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독일인들이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과 화학 분야에서 이루어낸 업적들은 매우 대단했는데, 전체 노벨상의 1/3이 이 시기의 독일인들에게 돌아갔을 정도였다.[3] 47년 동안 독일 제국은 당대의 산업, 기술, 과학 강국이었고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었으며, 유럽에서 가장 세밀하고 길게 뻗어 있는 철도망, 세계 최강의 군대, 급성장하는 산업 기반으로 단숨에 유럽 대륙의 강대국(열강)으로 도약하였다.

1871년부터 1890년까지 총리로 재임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재임 초기에는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쳤으나 후반기로 갈수록 점점 더 보수적인 정책을 시도하였다. 그가 실시한 여러 개혁, 반가톨릭 성향의 문화투쟁, 폴란드인에 대한 적극적인 동화 정책 등은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도입한 노령 연금, 상해 보험, 의료 보험, 실업 보험 등의 사회 복지 정책은 살아남아 오늘날까지도 유럽 복지국가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유럽 대륙에서 새로운 강대국의 등장이나 커다란 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프랑스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동시에 대영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과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노력하였다(비스마르크 체제).

비스마르크의 재임 후반기에, 독일 제국은 그가 강력하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전세계를 휩쓸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광풍에 편승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쟁탈전에 뒤늦게 뛰어들었으나 독일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3번째로 거대한 식민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으며, 다른 유럽 열강들과 충돌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늘려나가려 애썼다.[4] 1894년부터 1914년까지, 약 20년 동안 독일 제국이 획득한 해외 영토는 독일령 동아프리카,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독일령 서아프리카, 독일령 뉴기니, 독일령 사모아, 키아우초우 조차지, 톈진 조계지 등이 있었다.

1890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사임과 동시에 빌헬름 2세가 새로운 독일 황제로서 즉위하였다. 열렬한 제국주의자였던 그는 공격적인 외교정책, 해외 식민지 획득, 건함 경쟁을 통해서 독일을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바꾸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비스마르크가 애써 구축하고 유지해놓았던 유럽의 균형은, 그의 후임 총리들과 빌헬름 2세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이전까지 독일에게 유화적이었거나 최소한 중립을 유지하던 유럽 국가들도 점차 등을 돌렸다. 그러자 독일 제국은 같은 게르만 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오동맹(1879)를 맺고, 나아가 남유럽의 이탈리아 왕국을 끌어들여 삼국 동맹(1882)을 체결하였으며,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고자 발칸반도의 오스만 제국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로 하였다.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 1914년 7월부터 유럽 전역의 정세가 급격하게 불안정해지자, 이탈리아는 간을 보다가 동맹을 파기하였고 독일은 그 자리를 오스만으로 대신하기로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독일 제국은 슐리펜 계획에 따른 단기 결전만을 목표로 두고 있었다. 이 계획의 주요 목표는 벨기에를 지나 프랑스 북부로 진압하여 수도 파리까지 신속하게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이론상으로는 동쪽의 러시아 제국이 군대를 동원하기 전에 프랑스 정부를 붕괴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총참모장 소 몰트케의 오판과 제1차 마른 전투에서의 패배가 겹치며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서부 전선은 기나긴 참호전의 수렁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동부 전선에서 독일은 여러 차례 성공을 거두었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제정 러시아가 붕괴하자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발트해에서 우크라이나까지 이르는 영토를 점령했다.

몇 년 동안 전황은 교착 상태로 흘러갔지만, 연합군의 해상 봉쇄로 인해 식량과 물자가 부족해지자 점차 독일이 불리해졌다. 1917년 초 독일은 해상 봉쇄에 대응하여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시도했으나 이는 실패했고 오히려 잠자고 있던 사자 미국을 깨우는 결과만 불러왔다. 그렇게 1917년대 들어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전하자 전황은 더욱 나빠졌다. 1918년 10월, 독일의 마지막 노력이었던 루덴도르프 공세(춘계 공세)도 실패로 돌아간 상태에서,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불가리아 왕국마저 항복하자 사기는 더더욱 떨어졌다. 마침내 1918년 11월 킬 군항의 반란을 시작으로 독일 각지에서 혁명이 잇달아 일어나자 빌헬름 2세는 퇴위할 수밖에 없었고, 그와 함께 제정이 폐지되며 독일 제국은 멸망하였다. 이후 협상국과 체결한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배상금, 막대한 초인플레이션과 미국발 대공황으로 무너져내린 경제 상황, 그리고 패전으로 인해 독일 국민들이 겪은 굴욕과 분노는 전간기(1918~1939) 내내 바이마르 공화국을 몸살 앓게 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나치즘을 이념으로 삼은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도록 만들어 나치 독일의 탄생에 기여했다.

상징

국호

공식적인 국호는 독일국(Deutsches Reich 도이체스 라이히)이었으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 제국(Deutsches Kaiserreich 도이체스 카이저라이히)이라는 명칭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와 구분하기 위해 후대에서 붙인 편의상의 명칭이다.[5][6]

흔히 'Deutsches Kaiserreich'라고 하면 본 문서에서 다루는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했던 중부유럽의 독일 민족국가를 의미하지만 'Deutshces Reich'라 하면 이 나라 외의 다른 국가들도 지칭한다. 가령 이전에 존재했던 신성 로마 제국이나 훗날의 나치 독일이 그렇다. 심지어 독일 제국의 멸망 이후 탄생한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국호는 이전과 동일하게 'Deutsches Reich'였다.[7]

이는 Reich(라이히)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 때문이다. 'Deutsches Reich'에는 곧 "독일인의 민족국가"라는 함축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따라서 독일인과 큰 연관성을 지녔다고 볼 수 없었던 신성 로마 제국도 관념상 독일인에게 귀속되었다. 또한 불발된 1848년 혁명에서 자유주의/민족주의자들이 제창했던 민족 국가의 이름 역시 'Deutsches Reich'였다. 비록 혁명은 실패했지만 1871년의 본 국가 역시 이러한 관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념으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은 '첫 번째 라이히/제1제국(Erstes Reich 에어스테스 라이히)'으로 간주되며[8] 독일 제국은 '두 번째 라이히/제2제국(Zweites Reich 츠바이테스 라이히)로 불리곤 한다. 그리고 이 개념을 이은 나치 독일은 스스로를 '세 번째 라이히/제3제국(Drittes Reich 드리테스 라이히)'로 지칭했다.[9] 그러나 1945년 패망 이후부터는 '라이히'라는 명칭 자체가 구시대의 잔재이자 부정적인 단어로 인식되었기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세워진 독일 국가는 '네 번째 라이히'와 같은 식으로 칭하지도 않고, '라이히'라는 단어를 쓰지도 않게 되었다.[10][11]

국기

100%
Schwarz Weiß Rot Flagge[12]

북독일 연방이 수립되면서 국기로 채택되어 독일 제국 패망 시까지 쓰였다. 1848년 혁명과 바이마르 공화국을 거처 현재 독일에서 쓰이는 흑적금 배색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상징한다면 이 흑백적 배색은 제국주의, 군주주의의 상징으로서 전통적으로 프로이센 왕국 내의 보수주의자들이 애용하던 깃발 배색이었다. 물론 독일 제국 시기에 흑적금기가 아예 안 쓰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특정한 영방(발데크피르몬트, 로이스-그라이츠)들의 지역기로 쓰였다.

북독일 연방이 수립되자 연방의 국기로 어떤 국기를 채택해야 하는지 논의가 있었는데 이 논의를 처음 시작한 곳이 바로 무역선에 게양할 상선기를 두고 논의를 연 해운업계였다. 이 당시 북독일 연방의 해운업계는 맹주인 프로이센과 한자 동맹 시절부터 무역으로 이름을 날린 함부르크, 브레멘, 뤼베크의 3개 자유도시가 꽉 쥐고 있었는데 이것을 근거로 함부르크 상공회의소 소장이던 아돌프 조에트베어(Adolf Soetbeer)가 연방의 국기는 프로이센의 상징색(검은색과 흰색)과 한자 동맹의 상징색(흰색과 붉은색)을 조합하여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867년 북독일 연방 헌법이 채택되면서 흑백적 삼색기가 국기로 채택되었다. 프로이센 국왕이자 북독일 연방 의장인 빌헬름 1세 역시 새로운 국기를 보고 만족했다.[13]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인 1918년과 1919년에도 국기로 사용되었으며 1922년부터 1933년까지 외무용으로 사용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동안 흑적금 배색이 쓰이다가 1933년 히틀러가 총리로 취임하고 나서 다시 흑백적 배색이 부활하여 하켄크로이츠 깃발과 1935년경까지 혼용되었다.[14][15] 이러한 역사적 경위 때문인지 지금도 네오나치를 비롯한 극우주의자들이 하켄크로이츠의 대체물로 애용하는 상징들 중 하나가 되었고, 비록 법으로는 금지되지 않았으나 이념적 문제 탓에 터부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몇몇 극우들은 독일 제국의 국기와 더불어 프로이센 왕국 국기를 들고 나온다. 벨기에 학살을 겪은 벨기에의 일부 지역에선 이 국기를 아예 불법으로 여긴다.

여담으로 아프리카의 국가인 부르키나파소가 1984년까지 오트볼타 시절에 사용했던 국기와 색깔 순서가 정확히 똑같지만 양자는 전혀 관계 없다.[16] 또한 독일 제국의 국기를 반대로 뒤집으면 예멘의 국기 모양이 된다.

독일 제국의 깃발들
100% 100% 100%
전쟁기 식민기 선수기

그 외에 수많은 깃발들이 독일 제국 내에서 사용되었으나 대부분은 적색과 백색, 붉은색 바탕이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국가전쟁기라는 전쟁기로 1871년 이래 디자인이 2번 바뀌었다. 위의 전쟁기는 1903년부터 1918년까지 사용한 3번째 버전이다. 전쟁기였으나 1882년부터는 독일의 왕공들, 황실 구성원들, 그리고 한자 동맹 주요 도시의 시장들도 전쟁기를 개인적으로 게양하는 것이 허용됐다. 하얀 바탕에 검은 십자가가 그려졌고 왼쪽 모서리에는 흑백적 삼색기와 철십자가가, 한가운데에는 프러시아 독수리가 있는 모습. 1892년부터는 군대가 쓰는 것이 허가됐고 그 이래로 '제국 전쟁기'라고 불렸다. 두 번째 깃발은 독일 제국의 식민지 기로 독일 제국의 해외 식민지들에서 휘날렸으며 외교용 깃발로도 쓰였다. 세 번째 깃발은 군함 선수에 걸던 선수기. 특별한 행사나 시찰, 축제 등이 열릴 때 게양했다.

황제기

독일 황제기
파일:Kaiserstandarte Version1.svg 파일:Kaiserstandarte Version2.svg 파일:Kaiserstandarte.svg
1871.8.3.~10.15. 1871.10.15.~1888.12.6. 1888.12.6.~1918.11.10.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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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

독일 제국의 황제 문장
파일:Greater imperial coat of arms of Germany.svg 독일 제국 중형 문장.webp 독일 제국 소형 문장.webp
대형 문장 중형 문장 소형 문장
독일 제국의 국장
베르사유 선언 당시 임시 문장.webp 전 독일 제국 국장.webp 독일제국 국장.png
베르사유 선언 당시 임시 문장 1871.8.3.~1888.12.6. 1888.12.6.~1918.11.10.

역사

위키스 상세 내용 로고.svg 자세한 내용은 독일 제국/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헌법

100%
비스마르크 헌법의 첫 번째 장과 마지막 장[17]

독일 제국의 헌법은 Verfassung des Deutschen Reich(독일국 헌법)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설계했다 하여 '비스마르크 헌법'이라고도 불린다. 1871년 4월 발효되었으며, 북독일 연방의 헌법을 독일 통일 이후 남부 4개 왕국의 가입 현실에 맞게 수정한 것이다.

헌법은 많은 부분을 개방적으로 남겨 군주·총리·연방참사원(상원)·제국의회(하원) 간 권한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이는 유연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동시에 낳는 정치 문화를 형성했다.

이 헌법은 전통적 군주 주권과 신흥 자유주의 시민 계급의 인민 주권 요구 사이의 타협물이었다. 법학자 프리드리히 율리우스 슈탈이 제시한 군주제 원칙(Monarchisches Prinzip)이 이론적 기반이 되었으며, 독일 자유주의자들이 통일을 위해 대의제 원칙을 양보하고 이를 수용하면서 입헌주의(Konstitutionalismus) 체제가 성립했다. 이는 의회가 내각을 통제하는 영국식 의회주의와 달리, 군주의 통치권을 인정하되 헌법과 의회가 이를 견제하는 방식이었다. 오토 힌체는 이를 프로이센-독일 특유의 체제로, 에른스트-볼프강 뵈켄푀르데는 군주제와 의회 민주주의 사이의 과도기 체제로 평가했다.[18]

또 다른 과제는 연방주의와 중앙집권의 긴장 조정이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헤게모니를 유지한 제후연합을 구상했고, 그 핵심 기관이 연방참사원(Bundesrat)이었다. 전체 58석(1911년 이후 61석) 중 프로이센 몫은 17석뿐이었지만, 거부권 행사에 14표만 필요해 실질적으로는 프로이센의 우위가 반영되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연방참사원은 위상을 잃고 제국의회(Reichstag)가 부상했다. 비스마르크가 도입한 25세 이상 남성 보통 선거제로 투표율은 1871년 51%에서 1912년 85%를 넘었는데,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이례적인 조기 민주화였다.[19] 다만 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사회주의자법 같은 탄압 정책은 오히려 가톨릭·노동자 세력을 결집시켜 중앙당과 사회민주당이 제국의회 주요 정당으로 부상하는,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제국의회는 정부에 대한 실질적 통제력을 갖지 못했다. 총리는 오직 황제에게만 책임을 졌고, 빌헬름 2세 후반기의 오일렌부르크 스캔들·데일리 텔레그래프 사건·차베른 위기 등은 프로이센의 불평등한 3계급 선거제와 함께 제국 말기 정치 개혁 논의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독일 제국이 의회주의로 발전할 수 있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논쟁적이다. 당대 게오르크 옐리네크·막스 베버 등은 영국식 의회화를 요구했고, 1977년 만프레트 라우는 '조용한 의회화'가 진행 중이었다고 주장했다. 2000년 마거릿 라비니아 앤더슨은 저작 《민주주의의 연습》에서 세계대전만 없었다면 의회주의로 자연스럽게 전환했을 것이라는 낙관적 견해를 제시했으나, 폴커 베르크한 등이 강하게 반박했다. 2020년대에도 헤트비히 리히터(낙관론)와 에카르트 콘체(비판론), 올리버 하르트(제국권력의 의회화론) 등이 이어 논쟁 중이다.

이 헌법은 동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쳐, 일본 제국이 이를 참고해 대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했고[20], 이는 다시 청나라의 흠정헌법대강, 대한제국의 대한국 국제 제정에 참고되었다.

정치

독일제국의 정치형태는 4왕국·6대공국(大公國)·5공국(公國)·7후국(侯國) 및 3자유시(自由市)로 구성된 연방국가였다. 프로이센왕이 황제가 되고, 프로이센 재상이 제국의 재상을 겸임하였다. 황제는 정치권·군사권·외교권 등을 장악하였고, 의회는 상원의원인 연방참의원과 남성중심으로 보통선거에 의한 제국의회가 하원으로 구성되었으나, 하원의회의 권한은 예산심의권을 가지고 있는 것 정도일뿐 권한은 적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막바지인 1918년의 10월 헌법 개혁 이후, 제국 수상은 제15조 개정을 통해 황제가 아닌 제국 의회의 신임을 받으며 내각책임제로 전환되었다.

반면, 각 지방 정부를 대표하는 연방참의원이 상원의 경우는 제국의 중대한 사안에 대해 이곳에서 여러 문제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각 지방 정부들은 각각 종래의 정치제도와 법률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또 행정권도 거의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방정부 형태를 띠었다.

독일 제국의 정부는 황제의 임명과 뜻대로 되었고, 의회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연방국가 형태로 구성된 지방세력들 중 프로이센은 면적과 인구에서 전 독일의 3/5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독일제국은 황제가 직접 지배하는 형태로 그 권한은 막강했다.

또 독일 제국에서는 황제 못지않게 재상의 권한이 컸기 때문에 비스마르크와 같은 유력한 인물이 재상인 때에는 사실상 그의 독재가 되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통일의 의지가 상실되었다.

이처럼 독일제국은 의회가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자유주의적인 성향도 아닌 융커계층, 즉 대지주 혹은 귀족이 군부와 관료의 중심세력을 독점하였기 때문에 근대적인 의식과 개혁은 크게 저해되었다.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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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는 빌헬름 1세
안톤 알렉산더 폰 베르너(Anton Alexander von Werner) 作

독일 황제(독일어: Deutscher Kaiser)는 1871년에서 1918년 사이 독일 제국의 국가원수 직함인 세습군주직이다. 1871년 1월 18일 프로이센 왕국 빌헬름 1세가 취임하면서 신설되었고 1918년 11월 28일 빌헬름 2세가 공식적으로 폐위당하면서 소멸되었다. "독일 황제"라는 표현은 신성 로마 제국의 1512년 이후 공식 국호인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에서 유래했다.

1918년 독일 혁명 이후 독일의 국가원수직은 국가대통령(Reichspräsident)이 맡게 되었고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독일 황제"라는 작위명은 프로이센의 총리이자 북독일 연방의 연방수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심사숙고해서 고른 것이었다. 황제로 추대된 당사자인 빌헬름 1세는 봉건적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한 구시대인이었고 제위를 만들고 오르는 것에 심드렁해했다. 1849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서 제안된 바 있었던 "독일인의 황제" 칭호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다분했기에 왕권신수설의 신봉자로서 자신은 신의 대행하는 군주이지 국민군주가 아니라고 생각한 빌헬름 본인이 기각시켰다. 빌헬름은 "독일의 황제(Kaiser von Deutschland)"를 칭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 칭호는 독일 제국을 구성할 다른 제후국들이 법적으로 완벽히 빌헬름의 신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동의를 얻기 힘들었으며, 외국의 독일어권 영토(오스트리아, 스위스, 룩셈부르크 등)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려 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었다. 그래서 타협적으로 어정쩡한 "독일 황제(Deutscher Kaiser)"가 제시되었고 빌헬름은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보불전쟁에서 승리하고 베르사유 궁 거울의 방에서 독일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면서 북독일 연방은 독일 제국으로 이행했다. 독일 제국은 연방군주제 국가였다. 황제는 국가원수이자 동시에 연방에 가맹한 군주들 중 필두인 의장(president)의 위치에 있었다. 제국 헌법 하에서, 제국은 프로이센 국왕이 의장직을 독점하는 연합국가로 규정되었다. 프로이센 국왕은 헌법에서 "연합 의장(President of the Confederation)"으로 규정되는데, 즉 국가연합의 의장인 황제직은 프로이센 국왕직과 불가분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패전한 이후 빌헬름 2세가 독일 황제에서는 퇴위하나 프로이센 국왕위는 유지하면서 동군연합으로 군주제를 유지하려던 계획은 이 헌법 조항 때문에 불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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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왕궁 베를린 왕궁의 중심인 바이센잘

독일 황제의 법궁은 베를린 왕궁이었으나, 베를린 왕궁 외에도 다양한 궁전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빌헬름 1세는 가을과 봄 사이에는 베를린의 몽비주 궁전에서 살았고, 봄과 여름은 포츠담 근교 바벨스부르크 궁전에서 거주했으며 바트엠스, 바트가슈타인, 바덴바덴 등의 유명한 온천을 찾아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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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수상 관저[21]

제국수상은 프랑크 왕국 시절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직위다. 카롤루스 왕조 때 팔츠 성직자 수장에게 궁정 행정을 맡기며 '재상' 직함을 준 것이 시초로, 루트비히 2세 이후로는 마인츠 대주교가 900년 가까이 실질적 재상직을 겸했다. 1806년 신성 로마 제국 붕괴와 함께 소멸했지만, 이후 오스트리아[22]와 프로이센에는 각각 총리직이 남았다. 이 중 프로이센 총리가 북독일 연방 수상을 거쳐 독일 제국 수상으로 이어졌다.[23]

1867년 북독일 연방의 '연방수상(Bundeskanzler)' 자리를 맡은 유일한 인물이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으며, 그는 프로이센 총리로서 이를 겸임했다. 1871년 제국 성립 후에도 명칭은 그대로였다가, 같은 해 4월 16일 개헌으로 '제국수상(Reichskanzler)'으로 개칭됐지만 실질은 동일해 비스마르크는 재임명 없이 직위를 유지했다.

제국수상은 황제의 최선임 장관이자 상원의장을 겸했다. 하원에서 임명되지도, 하원에 책임을 지지도 않았고 오직 황제에게만 책임을 졌다. 명목상 연방국가였던 독일 제국에서는 엄밀히 따지면 구성국 제후를 대리하는 상원의 특명전권대사(각국 외무장관)들이 오히려 수상보다 서열이 높았다.[24] 비스마르크가 재임 내내 프로이센 총리직을 놓지 않은 것도 이 때문으로, 17표를 쥔 프로이센 총리 자격으로 군소 제후국들을 구슬려 상원을 실질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독일 제국에서 '수상(Kanzler)'은 구성국들이 쓰던 '총리(Ministerpräsident)'보다 격이 낮은 호칭이었는데, 이는 제후들이 완전한 중앙집권적 '제국 총리'직의 등장을 꺼렸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중앙정부 부처들은 '부' 대신 격이 낮은 '청'이라 불렸고[25], 장관급도 수상 한 명뿐이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차관급이었다.[26] 이 모순은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이후 청이 부로, 차관이 장관으로 승격되며 해소됐다.

헌법상 수상의 명시된 권한은 상원 주재뿐이었지만, 실제로는 청장(Staatssekretäre)들을 황제에게 제청해 임면할 수 있는 실권을 가졌다. 다만 그 권력의 원천은 수상직 자체가 아니라 겸임하던 프로이센 총리직에 있었다. 레오 폰 카프리비가 황제와의 갈등으로 프로이센 총리직을 잃자 곧 힘을 잃고 2년 뒤 수상직마저 잃은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궁지에 몰린 정부는 그해 10월 29일 개헌으로 상하원에 수상 해임권을 부여했으나, 며칠 뒤 독일 11월 혁명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혁명 발발 후 막시밀리안 폰 바덴 수상은 11월 9일 수상직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넘겼다. 에베르트는 이후 약 3개월간 사실상의 정부수반으로서 빌헬름 2세 퇴위, 제국 붕괴, 휴전 협상, 국민의회 개최에 이르는 과정을 이끌었지만 정작 재직 중 '수상'이라는 명칭을 쓰지는 않았다. 이 직위는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나치 독일을 거쳐 오늘날의 독일 총리로 이어지는데, 이름(Kanzler)만 같을 뿐 여느 의원내각제 총리와 다를 바 없는 자리로 성격이 바뀌었다.

입법부

연방참사원(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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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사당과 상원 회의 모습

연방참사원(Bundesrat)은 제국의 상원으로, 헌법상으로는 제국의 최고 기관이었다. 제국법 발효에는 상원과 하원 모두의 승인이 필요했고, 상원은 헌법재판소 역할도 겸했다. 다만 실질 권한은 명목보다 약했다. 상원의장은 제국수상이 맡았지만 수상 본인은 상원의원이 아니어서 투표권도 법안 발의권도 없었는데, 관례적으로 제국수상이 프로이센 총리를 겸했기 때문에 프로이센 대표 자격으로 상원에서 발언·투표할 수 있었다. 전체 58석 중 프로이센이 17석으로 최다였지만, 제국 면적의 3분의 2를 차지한 위상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비율이라 수상이 상원을 움직이려면 다른 구성국의 지지가 필요했다.[27]

상원은 입법권과 행정권을 함께 부여받은 기관으로, 법률 제정·예산 심의는 물론 국제조약 체결과 선전포고에도 관여했으며, 황제의 하원 해산에도 상원의 사전 동의가 필요했다. 법규명령·행정규칙 제정권, 공무원 임면 동의권, 구성국에 대한 제국집행 동의권도 가졌으며,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 자치법 반포에도 상원 동의가 필요했다. 별도의 헌법재판소가 없었기에 구성국 간 비사법 분쟁 조정, 구성국 내 헌법 분쟁 결정, 재판 거부 시 사법 지원 등 제한적 사법부 역할도 맡았다.

각 제후국은 최소 1표를 받았고, 한 나라의 대표단은 항상 동일하게 투표해야 했으며 찬반 동수면 프로이센이 결정권을 가졌다. 비스마르크는 구성국들이 국무장관급을 파견하길 바랐으나 실제로는 베를린 주재 관리나 특사가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28] 상원의원은 하원의원을 겸할 수 없어 의원내각제식 융합은 방지됐다.[29]

상원 의석은 북독일 연방 상원(43석)을 계승해 1871년 제국 선포 후 58석으로 확대됐다: 프로이센 17, 바이에른 6, 작센·뷔르템베르크 각 4, 바덴·헤센 각 3, 메클렌부르크슈베린·브라운슈바이크 각 2, 나머지 17개국 각 1석. 1911년 엘자스로트링겐에 3석이 추가되며 61석으로 늘어 제국 붕괴 시까지 유지됐다. 프로이센의 의석 비율은 오히려 1867년 40%에서 1871년 30%, 1911년 28%로 계속 낮아졌는데, 이는 프로이센이 차지한 인구·영토 비중(약 3분의 2)에 비하면 확연히 낮은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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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독일의 제후국들이 선출한 상원 특명전권대사들의 사진[30]

상원 산하에는 육군·해군·관세·무역·철도·사법·회계·외교·엘자스로트링겐·헌법 위원회 등 여러 소위원회가 있었다. 바이에른 왕국은 1870년 가입 조건으로 외교위원회 위원장직을 확보했으나 실질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고, 나머지 모든 위원회 위원장은 프로이센이 겸했다.

비스마르크는 애초 상원을 국가 최고기관이자 사실상의 행정부로 구상했고, 자신이 프로이센 대표로서 상원과 (실권 없는 꼭두각시로 설계한) 수상직을 함께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의회가 이런 구조에서는 정부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우려하자[31] 협상 끝에 수상이 의회에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자리로 조정되었다. 결과적으로 수상 자체의 권한(상원 발언권·법률안 제출권·거부권·의회 해산권)은 거의 없었지만, 제국 수상은 곧 프로이센 총리라는 겸직 구조 덕분에 프로이센 대표 자격으로 상원 발언권·법안 제출권과 17표를 실질적으로 행사하며 상원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수상은 대외적 단결을 보이기 위해 상원을 정중히 대했고, 회의는 비공개로 진행돼 대중의 관심도 낮았다.[32]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인 1914년 8월 4일, 하원은 전시 경제조치에 관한 입법권을 상원에 이양하는 일종의 수권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범위가 애매해 상원은 상당한 권한을 위임받았지만 남용하지는 않았고, 상원이 제출한 비상조례는 대개 무난히 하원을 통과했다. 종전 무렵인 1918년 11월 10일, 혁명 내각 '인민대표평의회'가 하원 해산을 명령했는데 이미 실권을 잃은 상원의 동의는 형식적이었고, 11월 14일에는 상원이 행정권만 유지한 채 나머지 위임 권한은 상실한다는 조례가 발표됐다. 제국상원은 이렇게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상원으로 이어졌다.

제국의회(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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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회

제국의회(Reichstag)는 독일 제국의 하원이었다. 구성국 대표들의 모임이라 연방적 성격이 강했던 상원과 달리, 하원은 통일 국가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상원과 함께 입법권을 행사하고 예산 심의권을 가졌으며, 당대 유럽에서도 손꼽히게 진보적인 방식으로 선출되었다. 처음엔 3년마다, 1888년부터는 5년마다 총선을 치렀고, 25세 이상 모든 건강한 남성에게 투표권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도 개회했으나 1918년 11월 혁명으로 인민대표회의가 개회를 중단시켰고,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하원으로 계승됐다.

제국의회는 북독일 연방 의회와 그 선거법을 그대로 계승했다.[33] 보통·평등·비밀 투표로 25세 이상 남성이면 누구나 투표할 수 있어 당대 기준 매우 폭넓은 참정권이었다. 다만 현역 군인은 피선거권은 있어도 선거권은 없었고, 파산자·무능력자·시민권 박탈자도 제외됐다. 독일 인구의 22.2%(남성 1,444만여 명)가 투표권을 가져 세계적으로도 높은 비율이었다.[34]

선거는 소선거구·과반수 득표제였고,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상위 1·2위가 결선투표를 치렀다. 결선투표 비율은 1874년 11.6%에서 1912년 47.9%까지 늘었는데, 이 제도로 세를 불리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번번이 부르주아 진영의 연대에 밀려 손해를 봤다.[35] 반대로 국민자유당·독일 진보당 등 중도·자유주의 정당은 결선투표에서 유독 강세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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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독일 제국의 선거구[36]

1871년 382석이던 의석은 1874년 엘자스로트링겐 15석이 추가돼 397석으로 고정됐다. 선거구는 약 10만 명 단위로 획정했으나 구성국 국경을 기준으로 나눠 한 선거구가 여러 지역으로 쪼개진 경우도 많았다. 1864년 이후 재획정이 이뤄지지 않아 1912년에는 인구 7만 5천 명 미만 선거구와 40만 명 이상 선거구가 각각 12개씩 존재했고, 최대 선거구인 포츠담 제10선거구는 인구 128만 명에 달했다. 이는 도시 기반 정당에 구조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으나, 정부와 상원의 비협조로 재획정 시도는 실패했다.

의원들은 헌법상 면책특권이 있었고 정부·지방정부 소속자는 겸직할 수 없었다. 전문 정치인의 등장을 막기 위해 무보수였는데, 이는 사실상 부유층만 의정활동이 가능함을 의미했다. 대신 정당·단체가 의원을 지원했다.[37] 1906년부터 연 3천 마르크의 생활비가 지급됐지만 부족한 수준이었다.

의회 진행은 헌법 제22조에 따라 공개됐고 언론이 의사록을 보도했다. 임기는 1888년 3년에서 5년으로 늘었으며, 회기마다 황제가 형식적으로 소집을 선포해야 했다. 상원은 황제 동의를 얻어 하원을 해산할 수 있었으나(해산 후 60일 내 재선거, 90일 내 재소집 의무), 실제 해산은 1878·1887·1893·1906년 단 4차례였다. 의사규칙은 프로이센 하원 규정을 그대로 따랐고, 하원의장이 의제 결정·발언권 부여·발언 제지 권한을 가졌다.[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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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자유당 파벌 사회민주당 파벌

법적 근거는 없었지만 의회 내 정당 파벌은 의사규칙·상임위원회·발언자 결정 등을 좌우하는 핵심 세력이었다. 파벌 지도자들이 모인 원로원이 만장일치로 주요 절차를 결정해 의장에게 전달했으며, 1899년부터는 하원의장이 원로원 의장까지 겸했다.

하원의 핵심 권한은 입법과 예산 심의였다. 법안은 상원과 공동 관할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원의 견제는 약해졌다. 예산은 비스마르크의 3년 주기 심의 요구와 달리 매년 심의로 정착됐고, 의회는 세부 항목까지 통제할 권한을 가졌다. 다만 군사 예산만은 예외로 5~7년 주기 심의에 그쳐 실질적 통제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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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회에서 연설하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

세입·외교 분야는 더욱 제한적이었다. 간접세·관세 심의 간격은 군사 예산보다도 길었고, 새 세금 도입권은 없이 거부권만 있었다. 국제조약 동의는 관세·무역 등 부속 분야로 한정됐고, 동맹 정치나 선전포고는 정부·황제의 전유물이라 하원 동의가 불필요했다.

하원은 30명 이상이 모이면 수상에게 질의할 수 있었지만 수상의 출석은 의무가 아니었다. 1912년 개정으로 모든 의원이 소질의권을 가지게 됐고, 질문에 대한 투표도 가능해져 1913년 자베른 사건[40] 당시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수상에 대한 과반 비난 결의가 나오기도 했다.[41] 법적으로 수상을 임면할 권한은 없었지만, 법률·예산 없이는 국정 운영이 불가능해 수상은 사실상 의회 눈치를 봐야 했다.

수상은 안정적 다수 확보를 위해 애썼으나 다당제 난립으로 쉽지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정당을 능란하게 조종했고, 1879년 이후 의회가 보수화되며 통제가 수월해졌다. 정부는 필요시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에 개입하기도 했지만, 이미 두터운 유권자층이 형성된 이후로는 그 효과가 미미했다.[42]

군사

위키스 상세 내용 로고.svg 자세한 내용은 독일 제국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무 의미 없는 프랑스의 이상주의: 자유, 평등, 그리고 우애에 대하여,

우리는 세 개의 독일적인 현실주의: 보병대, 기병대, 그리고 포병대로 대응한다.

베른하르트 폰 뷜로
이 시대의 가장 위험한 병은 군국주의다. 전 국민으로 하여금 무장을 준비하게 하고, 국가를 거대한 전쟁 기계(Kriegsmachine)로 되게끔 하며, 모든 건강한 시민을 군인으로 만들고, 세금과 비용을 극도로 올리고, 상존하는 전쟁 위험을 야기하며, 사회적인 상황을 파괴하고 재앙을 불러와 걱정 없이는 생각할 수조차 없게 만든다.
19세기 독일 제국의 가톨릭 신학자 게오르크 미하엘 파흐틀러(Georg Michael Pachtler)[43]. 볼프람 베테의 저서 《독일의 군국주의(Militarismus in Deutschland)》에서 발췌.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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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군을 사열하는 빌헬름 2세 독일 제국의 군복

Deutsches Heer. 1871~1918년 존재한 독일 제국의 육군.[44] 총사령관은 황제였고, 구성 제후국의 군대는 대개 프로이센 지휘하에 있거나 프로이센군에 편입됐다. 황제는 평시에도 주둔군 규모·요새 건설·장교 양성 등 군 전반을 총괄하는 최고 통수권자였으며, 군예산만 상원 심의를 거쳤다. 해군과 식민지 방위군은 아예 황제·제국정부 직속이었다. 패전 후 베르사유 조약으로 병력이 10만 명으로 제한됐고, 이후 국가방위군·자유군단으로 계승됐다.

다만 바이에른·작센·뷔르템베르크 왕국군은 평시 자국 군주 지휘를 유지한 예외였다.[45] 바이에른은 3개 군단, 작센·뷔르템베르크는 각 1개 군단을 독자 운용했고 별도의 전쟁성과 사관학교까지 두었다.[46] 전시에는 작센·뷔르템베르크군이 제국군에 통합됐지만 바이에른군은 독자 지휘를 유지했다. 이 3개국을 제외한 소국의 군대는 프로이센군 내 파견부대로 편입됐다.

육군은 황제 직속으로, 군예산은 제국의회 승인이 필요했으나 의회의 실질적 통제력은 약했다. 황제 아래 군사내각·전쟁성·총참모부 3개 기관이 경쟁했고, 특히 총참모부는 헬무트 폰 몰트케·알프레트 폰 발더제 등을 통해 정치에 개입한 전례가 잦았으며 해군에서는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가 그 역할을 했다.

1870년대 통일 이후 육군은 애국심의 상징으로 격상됐지만, 정당들의 견제로 증강 속도는 더뎌 1890년에야 평시 병력 49만 명(인구의 1%)을 채웠다.[47] 1898~1911년에는 대양해군 건설에 예산이 쏠리며 육군 증강이 정체됐으나[48], 슐리펜 계획 준비를 위해 1911년 이후 육군에 예산이 집중됐다. 그럼에도 개전 전까지 계획에 필요한 병력 목표는 채우지 못했다.

장교단은 국가 최고 엘리트로서 군주정에 대한 충성과 반의회적 보수성을 특징으로 했고, 프로이센식 군대 문화는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49] 2~3년의 의무복무는 계층 간 통합과 민족의식 형성에 기여했으며, 290만 회원을 거느린 재향군인회는 군주주의·민족주의 정서와 반사회민주주의 정서를 확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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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의 군단 배치

독일 제국군의 편제는 육군사찰단(Armee-Inspektion)-군단(Armeekorps)-사단-연대 순이었다.[50] 1871년 5개였던 육군사찰단은 1907~1913년 사이 8개로 늘었고, 전쟁 발발 후 '군'으로 재편됐다.

가장 기본적인 조직은 군단으로, 지역 방비와 예비군·란트베어 관리를 겸했다. 1914년 기준 프로이센 21개, 바이에른 3개 군단이 있었고, 별도로 황제 근위 성격의 근위군단이 존재했다. 25개 군단 모두 소규모 육군 항공대(비무장 관측기 6대)를 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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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복원 모습 이탈리아 전선의 독일 제국군

전시에는 군단이 기본 단위가 됐고, 4개의 기병군단도 편성됐다. 군단은 담당 군관구(Wehrkreis)에서 신병·예비군을 충원했는데, 이 원칙은 전쟁 중반까지 유지되다 인력난이 심해지며 무너졌다.

전술 기본 단위는 사단으로, 보병여단 2개·기병여단·포병여단·후방지원연대 등으로 구성됐다. 1914년 기준 근위군단을 제외하고 프로이센 42개(작센 4개·뷔르템베르크 2개 포함), 바이에른 6개 사단이 있었으며, 전쟁 중 총 251개 사단이 편성됐다.

가장 하위 단위인 연대는 신병 모집과 기본훈련을 담당했고, 기병·보병·포병 3개 군종으로 구성됐다. 일부 연대는 16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을 바이마르 공화국·나치 독일 시기까지 유지했으나 1945년 이후 서독·동독 모두 이를 계승하지 않았다.

해군

위키스 상세 내용 로고.svg 자세한 내용은 독일 제국 해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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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 해군

Kaiserliche Marine. 1871년부터 1917년까지 존재했던 독일 제국의 해군. 주로 연안 방어에 그쳤던 프로이센 해군[51]을 모태로 빌헬름 2세 시절에 크게 증강을 거쳤다. 주요 해군사령관으로는 해군의 규모와 질을 크게 늘린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이 유명하다. 함대 증강에 뜻이 맞았던 빌헬름 2세와 티르피츠는 알프레드 세이어 머핸의 해군력 이론을 따라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가며 영국 해군과 건함 경쟁을 펼쳤다. 그 결과 독일 해군은 세계 최대의 해군들 중 하나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때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유일한 주요 교전인 유틀란트 해전은 무승부였고 나머지 전쟁 기간 동안 함대는 항구에 박혀있었다. 대신 U보트 전력이 크게 확장되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펼쳐 영국의 보급줄을 옥죄었지만 결국 미국의 참전이라는 초대형 악재를 불러왔을 뿐이었다.

독일의 항복 직후, 대부분의 함대가 연합국의 요구로 무장을 해제한 채 스카파 플로에 집결해 처분을 기다리던 중 본국의 지시에 따라 승조원들이 대부분의 함정들을 자침시키면서 수장, 소멸됐다. 제국해군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해군으로 계승된다.

외교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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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 체제로 구축한 대프랑스 포위망

독일 외교의 핵심은 프랑스 고립이었다.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을 때 독일 통일이 가능했지만, 실패했을 때는 영국·프랑스·러시아를 모두 적으로 돌려 양면전쟁 끝에 제국이 망했다.

프랑스는 신성 로마 제국 시절부터 독일의 최대 경쟁국이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며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빼앗기고[52]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물었다. 이후 프랑스는 이 굴욕을 잊지 않았고, 비스마르크는 주요 강대국들과 복잡한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것이 비스마르크 체제의 핵심이었다.

1870년대 프랑스의 대독일 외교는 '보복주의'로 불렸으나, 1880년대부터는 현실 정치가 우선시되며 알자스-로렌 문제가 축소되어 양국 관계는 비교적 안정됐다. 그러나 독일의 인구·경제가 급성장하면서 프랑스의 불안감이 재점화됐고, 1904년 모로코 위기로 화해 분위기가 완전히 끝났다. 이후 프랑스는 러시아 제국·영국과 손잡고 독일 고립에 나섰다.

프랑스 국민 대다수와 지식인층은 독일과의 전쟁에 부정적이었으나(대독강경 단체 식민지당의 회원 수는 5,000명에 불과), 고위 정치인·군부는 독일의 성장을 묵과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1890년 비스마르크 축출 후 빌헬름 2세의 외교 실책이 이어지자 프랑스·영국·러시아의 삼국 협상이 결성됐고, 이는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삼국 동맹과 충돌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종전 후 가장 가혹한 조건을 요구한 것도 프랑스였다.[53]

영국

원래 영국과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54] 영국은 프랑스와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프로이센의 독일 통일을 지지했으며, 일부 우려의 목소리(글래드스턴 등)가 있었지만 비스마르크 재임기인 1890년까지는 양국 관계가 대체로 괜찮았다. 비스마르크는 영국과의 충돌을 피하려 해외 확장을 자제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실각 후 등장한 빌헬름 2세가 세계 정책과 건함 경쟁을 밀어붙이며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의 예측과 달리 영국·러시아·프랑스는 오히려 가까워졌고, 독일은 신뢰도 낮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에만 의존해야 했다. 모로코 위기를 계기로 영국과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고, 1914년 전쟁이 터지자 영국은 독일의 반대편에 서서 참전했다.[55]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는 초창기에는 관계가 좋지 않았으나 서서히 개선되었다. 애초에 프로이센의 독일 통일 자체가 기존의 독일 내 패권국인 오스트리아를 쫓아내고 세운 것이었으니 초반에는 관계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오스트리아는 관심을 독일이 아닌 발칸반도로 돌렸다. 독일 역시 같은 뿌리나 다름없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감정이 나쁘지 않아서 갈수록 감정이 우호적인 편으로 변했다. 1882년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이탈리아 왕국까지 끼워서 삼국 동맹을 창설했다. 독일 제국의 베트만홀베크 수상은 1914년 9월 프로그램을 제안,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등 여러 중부 유럽국가들로 구성된 중부유럽 경제연합체 창설을 건의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자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어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함께 사이좋게 망하면서[56] 최후까지 운명을 같이하게 된다.[57]

러시아

독일과 러시아 제국은 처음에는 괜찮은 동맹이 될 것 같아보였다. 비스마르크는 러시아에 접근해 1872년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하나로 묶는 3제 동맹을 만들었고, 프랑스 고립을 위해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맺고자 했다.[58]

하지만 오스만 제국 문제로 충돌이 빚어졌다. 러시아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노리자 열강들이 반발했고, 비스마르크가 중재해 1878년 베를린 회의가 열렸지만 그 결과가 러시아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59] 1887년 재보장조약이 체결되었으나 관계는 물밑에서 계속 악화됐다. 독일은 러시아의 잠재력을, 러시아는 독일의 군사력을 두려워했고, 결국 러시아는 1907년 삼국 협상을 맺어 독일의 반대편에 섰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독일에 맞서 싸웠다.

조선/대한제국

독일 제국과 조선&대한제국 간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1883년 조선전권대사인 민영목과 주(駐) 일본 총영사인 자페 간의 '조독수호통상조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1884년 한양에 한옥으로 된 주(駐)조선 독일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이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도 두 나라는 외교관계를 유지한다. 고종은 아예 독일식 문화를 선호하기도 했으며, 빌헬름 2세가 고종을 카이저 폰 코레아라고 불러줬다고. 1899년 프로이센 왕국의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Albert Wilhelm Heinrich: 빌헬름 2세의 동생)가 방한하기도 했다.[60]

독일은 외교적으로 포위당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그다지 얽히지 않은 조선에 대해서는 우호적으로 해주었다. 1902년 대한제국이 식민지가 될 위기에 처하자 빌헬름 2세가 고종에게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밀서를 보낸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그러나 제 코가 석자인 독일이 한반도를 위해 뭘 해줄 여력은 없었다. 러일전쟁에서도 영국이 프랑스와 독일을 압박하여 지원하지 못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 공관 자체는 을사조약 이후에도 계속 존재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때 일본 제국이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하면서 폐쇄되었다.

이후 일부 한국인들은 독립을 위해 독일 제국과 동맹국과의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김규흥이 벌인 조선인과 독일인의 음모 사건에서 김규흥은 조선인이 시베리아와 만주에서 러시아의 활동을 방해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지원함으로서 협상국이 패한다면, 한국의 독립으로 직결될 거라고 봤다.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은 더욱 과감했는데,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보았고. 이때 반일감정이 심한 중국은 위안스카이를 황제로 세울 것이며, 그렇게 두 제국은 협상국의 일원인 일본을 공격하여 조선을 독립시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에 유동열, 박은식, 신규식 등의 이름높은 운동가들이 참여했고 이들은 독일 제국과 중국 모두 제정일 것이니 일단 고종 황제를 이용하여 제정을 확립하여 독립을 추구하였다. 결국 위안스카이가 쫒겨나고, 독일 제국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기타

독일은 다른 국가들과도 활발히 외교전을 펼쳤다. 이탈리아 왕국과는 동맹 관계였지만, 이탈리아가 같은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트렌토·이스트리아 반도 등 이탈리아계 거주 지역을 노리면서 삼국 동맹 내에서 계속 마찰을 빚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처음엔 중립을 지키다가 1915년 아예 반대편으로 참전해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미국과는 좋은 관계로 시작했으나[61], 미국산 돼지고기 보이콧[62], 사모아 갈등, 독일의 카리브해·베네수엘라 진출로 인한 먼로 독트린 위반 논란 등으로 꾸준히 갈등이 생겨났다. 비스마르크 퇴진 후 빌헬름 2세가 전권을 잡자 미국 내 대독 경계론이 커졌고, 전쟁 초기엔 중립을 지켰으나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과 치머만 전보가 겹치며 결국 참전한다.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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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독일 제국의 무도회

공업화는 독일 제국의 사회 계층과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4계급이라 부르던 노동자들이 대거 성장했고[63], 이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창당된 SPD는 탄압 속에서도 1890년 총선 득표율 1위를 차지하며 유력 정당으로 자리잡았다. 동시에 노동 규제와 사회복지가 확충되며 노동자 권익도 점차 개선되었다.

정치적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지만 부르주아 계층은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해 부르주아적 생활양식을 사회의 "바람직한 기준"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64] 결과적으로 독일 제국은 귀족·부르주아·노동자라는 3개 계급으로 구성되었다.

1895년 독일 1,200만 가구 중 귀족·대지주·사업가·고위 관료 등 상류층은 25만 가구에 불과했다. 중소 지주·기업가·상급 공무원·전문직으로 구성된 중상류층은 약 275만 가구, 소농·수공업자·중급 공무원·숙련 노동자 등 중하류층은 약 375만 가구, 임금근로자·하급 공무원·빈농 등 하류층은 약 525만 가구였다. 계급 간 이동성은 낮아 대개 몇 세대에 걸쳐서만 상승이 가능했다.

산업화에도 불구하고 귀족은 여전히 계급 피라미드 정점에 있었다. 경제적 기반은 약화되었지만 국가·행정·군대의 고위직일수록 귀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부르주아는 단일 계층이 아니어서, 사업가·은행가는 귀족 다음가는 최상류층을, 건축가·엔지니어 등 신흥 전문직과 고소득 근로자·중급 공무원은 확대된 중산층을 이루었다. 이들은 서로 이질적이었지만 하류층과는 선을 그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100%
1886년 독일 노동자들의 파업

최하층인 노동자 수는 1882~1907년 사이 860만 명으로 두 배 늘었지만 결코 단일 집단이 아니었다. 여성·고령자는 임금이 낮았고, 대도시보다 중소 도시 거주자가 많았으며, 농촌적 가치관을 유지한 이들과 숙련도에 따른 격차도 컸다. 다만 긴 노동시간만큼은 공통점이었다. 1914년 주당 노동시간은 55시간으로 줄었으나 노동 강도는 오히려 세졌고, 대기업을 중심으로 엄격한 수직적 사내 문화가 자리잡았다. 실질임금과 생활 여건은 개선되었으나 안정된 삶으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노동자들은 점차 결속해 노동조합을 탄생시켰다. 농업 부문 역시 도시 이주와 농법 변화로[65] 농촌 노동자 수가 계속 줄었다.

인구

위키스 상세 내용 로고.svg 자세한 내용은 독일/인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0%
독일 제국의 인구 증가

독일 제국은 수립된 1871년 약 4,100만 명이던 인구가 1914년 약 6,700만 명으로, 불과 40년 만에 1.5배 이상 성장했다. 이는 다른 나라에 비해 높았던 출산율[66], 지배하던 폴란드 일대에서의 이민 유입, 그리고 의학·위생 발전에 따른 유아·산모 사망률 급감이 맞물린 결과였다.

다만 지역별 편차는 극심했다. 산업화된 서·중부는 인구가 급증한 반면, 농업 위주인 동부·프로이센·폴란드 일대는 오히려 인구가 유출됐다. 베를린·함부르크·브레멘 등 대도시와 라인란트·루르 산업지대, 폴란드계가 많은 오버슐레지엔에서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1870~80년대에는 해외이민이 정점을 찍었다가[67], 1890년 미국 프런티어 소멸 이후로는 국외이민보다 국내 이주가 우세해졌다. 1907년에는 독일인의 48%가 고향이 아닌 타지에 거주할 정도였다.[68]

국내 이주는 주로 프로이센 동부에서 베를린·라인-베스트팔렌 산업지대로 향했다. 1907년까지 동·서프로이센과 포젠에서 194만 명이 유출되어, 해당 지역 출신 인구의 24%가 타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중 40만 명이 루르로, 36만 명이 베를린으로 향했고, 1914년까지 루르로 이주한 프로이센인 45만 명 중 다수는 폴란드어를 쓰는 폴란드계였다. 장거리 이주자는 대개 독신 청년 남성, 단거리 이주자는 여성이 많았으며, 철도 도입으로 이동비가 저렴해지면서 영구 이주 대신 계절 계약직·통근이 늘었다.

도시화도 이민과 맞물려 급진전됐다. 라인-베스트팔렌은 1850~1900년 사이 이민만으로 인구가 7배 늘었고, 도르트문트·뒤스부르크·에센 등은 토박이가 인구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다만 유동성도 커서, 뒤스부르크는 50년간 순인구 9만 명이 늘었지만 실제로는 71만 명이 거주등록·취소를 거듭했다.

1871년 인구 2만~10만 명 도시는 75개, 10만 명 이상 대도시는 8개였으나 1910년에는 각각 223개, 48개로 늘었다. 같은 기간 베를린은 82.6만→207.1만 명, 함부르크는 29만→93.1만 명으로 성장했고, 1914년 뮌헨·라이프치히는 60만, 드레스덴은 55만, 쾰른·브레슬라우는 51만을 넘겼다. 1871년 전체 인구의 64%가 2,000명 미만 소지역에 거주하고 대도시 인구는 5%에 불과했지만, 1890년에는 농촌·도시 인구가 균형을 이루었고 1910년에는 소지역 거주 비율이 40%로, 대도시가 21.3%로 역전됐다.

급격한 인구 유입은 도시 구조도 뒤흔들었다. 특히 루르 신도시들은 정부 개입 이전에 난개발이 이뤄졌고, 저소득층 주택 부족으로 값싼 여관과 공동 주택이 늘었다.[69] 결과적으로 상류·중산층은 공장에서 먼 도심에, 하류층은 공장 인근 우범지대에 거주하는 식으로 도시 내 계층 분리가 뚜렷해졌다.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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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의 민족 분포
독일 제국의 민족 구성 [펼치기ㆍ접기]
독일 제국의 민족 구성
독일어[70] 52,136,049 92.50
폴란드어[71] 3,228,538 5.73
프랑스어 211,679 0.38
덴마크어 141,061 0.25
체코어[72] 107,398 0.19
리투아니아어 106,305 0.19
카슈브어 100,213 0.18
소르브어 93,032 0.16
네덜란드어 80,361 0.14
프리지아어 20,677 0.04
영어 20,217 0.04
러시아어 9,617 0.02
스웨덴어 8,998 0.02
헝가리어 8,158 0.01
스페인어 2,059 0.00
포르투갈어 479 0.00
기타 언어 14,535 0.03
전체 인구 56,367,187 100.00

경제

1862년에 프로이센 재상으로 오른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을 바탕으로 중공업 육성과 군사력 증강 등 국력이 강해지면서 이후 1871년 통일된 독일제국은 기존의 봉건적인 토지귀족 계층이자 보수층인 융커계층 관료들의 후원과 기반으로 1870년대부터 생산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러나, 보수층인 융커계층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산업화 정책은 시장의 규모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경제불황을 맞기도 하였다. 독일제국은 이러한 상황의 극복을 위해, 우수한 기술과 자국의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원료 공급지와 상품 시장뿐만 아닌 자본을 투자할 해외 식민지를 필요로하여 제국주의의 길로 발을 내밀게 된다. 그러나, 대영 제국, 프랑스 식민 제국에 비해 늦게 식민지 정책을 시작하였기에 1890년대 빌헬름 2세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해외 식민지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20세기 초에는 중공업생산에서 세계 제2위의 급속한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해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였다. 전반적으로 독일의 산업화는 경제시장의 변화에 대응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그것을 선도하는 능동적인 자세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결과 독일 사회는 한편으로는 보수층인 융커층 및 그들을 후원하는 자본가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무산층)의 노동자세력으로 양분되어 내부적인 갈등과 분열을 야기했다. 이러한 사회적 대립은 장기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제공했다.[73]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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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의 종교 분포[74]

독일 제국의 종교 분포는 종교 개혁 이후와 거의 변화가 없었다.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한 브란덴부르크, 포메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작센, 튀링겐, 안할트 등 북독일은 개신교가 우세했고 바이에른 왕국을 중심으로 한 바이에른, 베스트팔렌, 바덴뷔르템베르크 등 남독일과 서부, 오버슐레지엔은 가톨릭이 우세했다. 북부와 남부를 기점으로 종교 분리가 심각했기에 교파 간 결혼이 터부시됐으나 결혼, 이주 등으로 조금씩조금씩 종교가 섞여가고 있던 추세였다.[75] 다만 동부에서는 '개신교 = 독일인, 가톨릭 = 폴란드인'이라는 민족적인 구분도 가능했기에 더더욱 종교적 차별이 심했다. 가톨릭 우세 지역들은 가톨릭 정당 독일 중앙당의 표밭이었고 반면 사회민주당은 그나마 루르 지방에서나 간신히 표를 확보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갈수록 제국이 세속화되며 이런 정치적 선호도 약간씩 변하기는 했지만.

독일 제국의 종교 분포
국가 개신교 가톨릭 기타 기독교 계열 유대교 기타
숫자 % 숫자 % 숫자 % 숫자 % 숫자 %
프로이센 왕국 17,633,279 64.64 9,206,283 33.75 52,225 0.19 363,790 1.33 23,534 0.09
바이에른 왕국 1,477,952 27.97 3,748,253 70.93 5,017 0.09 53,526 1.01 30 0.00
작센 왕국 2,886,806 97.11 74,333 2.50 4,809 0.16 6,518 0.22 339 0.01
뷔르템베르크 왕국 1,364,580 69.23 590,290 29.95 2,817 0.14 13,331 0.68 100 0.01
바덴 대공국 547,461 34.86 993,109 63.25 2,280 0.15 27,278 1.74 126 0.01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 305,315 19.49 1,218,513 77.78 3,053 0.19 39,278 2.51 511 0.03
총합 28,331,152 62.63 16,232,651 35.89 78,031 0.17 561,612 1.24 30,615 0.07

구성 제후국

위키스 상세 내용 로고.svg 자세한 내용은 독일 제국/구성 제후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독일 제국의 제후국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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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위키스 상세 내용 로고.svg 자세한 내용은 독일 식민제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괴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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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의 변화

위키스 상세 내용 로고.svg 자세한 내용은 존더베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독일 제국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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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1세와 독일 황제를 신격화하는 작품들

독일국은 독일인의 민족국가를 뜻했다. 내셔널리즘이 고취되던 독일인들에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승리와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독일 제국 선포는 그 꿈의 실현처럼 보였다. 그러나 프로이센 왕국 출신 귀족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일이었는데, 독일 민족의 신화는 귀족이 아니라 중소상공인 등 신흥계급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독일 제국의 성립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베스트팔렌 조약 이래 고유의 독자성을 지켜온 귀족들이 내셔널리즘 세력에 항복한 사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를 통해 보수주의는 점차 내셔널리즘과 결합했고, 중소 부르주아는 관료·군부·기존 귀족과 결탁하며 안정된 체제를 이루었다.

이렇게 오랜 안정을 누렸던 만큼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는 큰 충격이었다. 전제 관료정에 익숙했던 중산층 일부는 전승국이 베르사유 조약으로 강요한 민주주의를 독일 정체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도 독일 제국을 돌아가야 할 이상향으로 여겼다. 실제로 바이마르 공화국은 황제·군부와 국민 대다수가 아직 힘을 갖지 못한 권력 공백 속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이 세운 정체였다.

일부 극단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는 침략의 상징이자 부정의 대상이 되었고, 대신 민주주의 없이 근대를 이룬 독일 제국의 정체성이 독일 고유의 '존더베크'로 자랑스럽게 소환되었다. 이 맥락에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국민적 영웅으로 우상화됐으며, 이러한 경향은 나치 독일(제3제국) 시기 더욱 심화됐다.

나치 패망 이후에도 이 신화는 한동안 이어졌다. 독일인들이 부정한 대상은 아돌프 히틀러의 체제였을 뿐 '독일 제국' 자체는 아니었으며, 나치 집권을 가능케 한 대중 동원력이 민주주의에서 비롯됐다는 인식 속에 독일 제국 특유의 복종·충성 같은 정체성에 대한 숭배가 지속되었다.

평가와 재평가

독일 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68혁명기와 맞물린 1960년대와 1970년대였다. '역사적 사회과학'을 주창하면서 독일의 과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사회사가들은 '독일 제국'의 신화를 깨뜨리려고 했다. 한스울리히 벨러와 볼프강 몸젠, 위르겐 코카로 대표되는 소위 빌레펠트 학파 역사학자들은 존더베크(특수노정)가 지니고 있던 긍정적인 의미를 부정적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들은 정상 궤도상의 근대 국가로 여겨졌고, 독일 근대 국가는 거기서 이탈한 것으로 여겨졌다. 혁명이 없이 탄생해버린 독일 제국의 체제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것으로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아울러 나치 독일의 가능성은 이미 독일 제국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고 두 체제의 동질성을 강조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다시 독일 제국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역사가로는 독일에서는 토마스 니퍼다이가 대표적이었고, 1980년 영국 소장파 역사가들인 제프 일리와 데이비드 블랙번이 출간한 「독일 역사서술의 신화들」(Mythen deutscher Geschichtsschreibung)[76]은 존더베크를 둘러싼 논쟁이 국제적으로 비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일리와 블랙번은 사회사학자들의 독일 제국 비판 자체가 신화라고 보았다. 그들에게는 영국도 완전한 근대 국가가 아니었다. 그들의 연구 결과로서 영국은 여전히 전통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였고, 억압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이나 프랑스가 이상적인 국가 롤 모델이고 '정상적'이라는 관점이 탈피되었다.

또한 독일 역사학계의 전통적 역사주의를 계승하면서도 사회사와 일상사의 방법론을 수용한 니퍼다이는 1983년에서 1992년까지 그의 역작인 「독일사」(Deutsche Geschichte) 3부작을 출간하면서 전통적인 독일의 역사서술과 사회사가들의 비판적 관점의 절충적으로 종합하고자 했고, 아울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일상생활을 아우르는 전체적이고 복합적인 역사상을 제시하고자 했다. 니퍼다이는 독일 제국이 나치즘과의 연속성도 가지지만 바이마르 공화국 및 서독과의 연속성 역시 가진다고 파악했고, 이러한 모습을 '근대성' 자체가 가지는 양면성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독일 제국 시기 발전한 의회주의와 사회 보장 정책들은 바이마르 민주주의와 서독 복지 국가로 이어진 반면, 독일의 군국주의 전통과 반유대주의적 정서는 나치즘으로 발현되었다는 것이며, 이러한 것 자체가 근대성이 갖는 야누스적 측면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단방향적인 역사 발전 모델은 부정되고, 복수의 근대 모델이 제시되었다. 독일 제국도 서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역동적으로 발전을 이루어나가면서 사회 모순을 점진적으로 해소하려는 나라로 그려지는 등의 역사상의 수정이 이루어졌다. 비판에 직면한 사회사가들의 역시 입장의 수정이 이루어졌고, 존더베크 테제 역시 점차 폐기 처분되었다. 사회사의 선봉장인 벨러 역시 1987년부터 2008년까지 니퍼다이에 비견되는 또 다른 역작인 「독일 사회사」(Deutsche Gesellschaftsgeschichte) 5부작을 출간하면서, 19세기 독일사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관점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그간의 논쟁의 성과를 수용하여 상당 부분 수정된 입장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동서독 통일 이후의 경향은 근대성의 양면적 성격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이분법적 평가를 벗어나 독일 제국 및 19세기 독일의 입체적인 면모를 이해하자는 입장이 지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독일 제국에 대한 역사서술의 변화상을 정리한 저서로는 Mattew Jefferies의 「Contesting the German Empire」가 대표적이다. 그 외에 위르겐 오스터하멜과 제바스티안 콘라트를 중심으로 한 지구사(Global History) 경향의 대두와 함께 트랜스내셔널한 관점 역시 현재의 주류 경향 중 하나이다. 관련 내용은 오스터하멜과 콘라트가 편저한 「Das Kaiserreich Transnational」을 참조할 수 있다.

대독일주의의 관점에서

한편 독일 민족주의 관점에서 볼 경우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독일의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할 오스트리아를 빼놓고 통일한 점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오스트리아를 기반으로 한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수백 년 동안 독점했고 비스마르크 시절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가톨릭 독일어권 국가들의 맹주로 대접받았다. 때문에 대독일주의를 표방하던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보자면 독일 제국은 '독일도 아니고, 제국도 아닌 나라'였다. 물론 비스마르크도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독일 제국이 출범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크로아티아 등 비독일계 통치 지역을 포기해야 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은 비독일계 지역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결국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최종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망하면서 생제르맹 조약으로 비독일계 지역을 잃은 결과 다시금 대독일주의가 불거졌다. 아돌프 히틀러 역시 독일계 국가의 대표격이자 본인의 고향이기도 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여(안슐루스) 대독일주의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나치 독일은 다른 여러 가지 행적들과 함께 독일의 거대한 흑역사로 전락했고 그 결과 대독일주의 역시 정치적 금기가 되었다.

역대 황제

파일:Greater imperial coat of arms of Germany.svg
독일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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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이름 즉위년일 퇴위년일
1 빌헬름 1세 1871.1.18 1888.3.9
2 프리드리히 3세 1888.3.9 1888.6.15
3 빌헬름 2세 1888.6.15 1918.11.9

역대 제국재상

대수 이름 임기시작 임기종료 정당
1 오토 폰 비스마르크 1871.3.21 1890.3.20 무소속
2 레오 폰 카프리비 1890.3.21 1894.10.26 무소속
3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1894.10.29 1900.10.17 무소속
4 베른하르트 폰 뷜로 1900.10.17 1909.7.14 무소속
5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1909.7.14 1917.7.13 무소속
6 게오르크 미하엘리스 1917.7.14 1917.11.1 무소속
7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 1917.11.1 1918.9.30 중앙당
8 막시밀리안 폰 바덴 1918.10.3 1918.11.9 무소속
9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1918.11.9 1919.2.11 사회민주당

각주

  1. ↑ 함께하는 세계사의 영상.
  2. ↑ 자세한 것은 독일 제국/구성 제후국 문서를 참조.
  3. ↑ 프리츠 하버의 질소고정법 발견 및 화학비료 제작이 대표적이다. 당시에는 "공기에서 빵을 만들어낸다"며 획기적인 신기술로 칭송받았다.
  4. ↑ 이때 독일 제국의 오점 중 하나인 헤레로 나마 대학살이 일어났다.
  5. ↑ 'Deutsches Kaiserriech'를 살펴보면 deutsch(독일인의/독일의)라는 형용사와 Kaiser(황제) 그리고 Reich(제국/국가)가 합쳐진 단어이다.
  6. ↑ 영어에선 형용사와 명사를 쓸때 형용사에 변화가 없지만 독일어에선 강변화ㆍ약변화ㆍ복수변화 등이 따로 존재한다. 상단의 Deutsches Kaiserreich에서 뒤의 Kaiserreich는 중성명사이고, 형용사인 Deutsch의 앞에 정관사가 없으므로 형용사는 강변화 1격으로 변형되어 뒤에 -es가 붙는다.
  7. ↑ 흔히 Reich가 '제국'으로 번역되기에 오해하는 것이지만, 'Reich'라는 단어 자체는 군주정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공화국인 상태에서도 'Reich'라고 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영어를 번역할 때도 동일하게 제기되는데, 가령 Empire보다는 Realm(연합왕국/연방왕국)이나 Commonwealth가 적절하다는 견해가 있다.
  8. ↑ 'Deutsches Reich'로 간주된 것이 이후 시대라는 것이지, 이때도 공식적인 국호가 Heiliges Römisches Reich였던 만큼 Reich는 일상적으로 사용했다. 예를 들어 Reichskammergericht(제국대법원)이라던지.
  9. ↑ 나치 독일과는 달리 앞의 두 국가는 당대에 'Reich'라는 말은 썼어도 '첫 번째'나 '두 번째'처럼 순서를 매기지는 않았다. 애당초 이렇게 순서를 매겨 '제1제국'이니 '제2제국'이니 하는 개념 자체가 나치 독일이 자신들 '제3제국'을 위한 프로파간다 차원에서 사용했던 명칭이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사용을 삼가려는 경향이 있다. 관련 자료 일단 그렇게 순서를 붙이기 시작한 것 자체는 나치 독일 이전인 1923년 아르투어 묄러 판 덴 브루크(Arthur Moeller van den Bruck)라는 작가가 시작한 것이다.
  10. ↑ 현대 독일의 공식적인 국호는 Bundesrepublik Deutschland(독일연방공화국)이다.
  11. ↑ 일부 창작물에서 유럽연합을 풍자할 때 제4제국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12. ↑ 발음은 '슈바르츠 바이스 로트 플라게'. 흑백적기(黒白赤旗)라고 부른다.
  13. ↑ 프로이센의 상징색인 검은색과 흰색이 들어간 것은 물론 국기에 들어간 흰색과 붉은색이 바로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상징색이었기 때문이다. 또 새로운 독일의 국기에서 금색을 배제한 것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징색인 검은색과 금색을 채택한 오스트리아가 배제된 통일 독일의 상황과 매우 유사했다.
  14. ↑ Flag of Germany (1933–1935).svg 다만 독일 제국의 국기와는 비율이 조금 다르다.
  15. ↑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반대해 소련으로 망명한 독일 공산당원 중심의 '자유독일국민위원회' 역시 흑백적 기를 상징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연약한 바이마르 공화국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옛 독일 제국의 흑백적기를 꺼내들었던 것이다. 또한 자유독일국민위원회가 공산당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선전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16. ↑ 오트볼타 시절 국기의 흑백적 삼색은 각각 흑볼타강, 백볼타강, 적볼타강을 상징했다.
  17. ↑ 1871년 공포된 헌법으로 독일 황제이자 프로이센 국왕인 빌헬름 1세 황제의 서명이 보인다.
  18. ↑ 독일인들은 프랑스식 혁명적 단절 없이 지속적 개혁을 이룬 것에 자부심을 가졌으며, 코젤레크·니퍼다이 등도 이러한 온건한 개혁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19. ↑ 이를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빙클러는 '비동시적 민주화', 마르틴 키르쉬는 '의회주의 없는 불완전한 민주주의'라 표현한다. 영국은 1884년에야 농촌 선거권을, 1918년에야 남성 보통 선거제를 도입해 반대로 '민주주의 없는 의회주의'였다.
  20. ↑ 일부 일본 인사는 영국 헌법을 참고하자 주장했으나, 천황의 전제군주제를 추구한 파벌이 승리해 독일 제국 헌법을 참조했다.
  21. ↑ Reichskanzlei. 1738년경 지어졌고 1869년 비스마르크가 수상 관저 목적으로 사들였다. 이후 독일 제국·바이마르 공화국 수상의 관저로 쓰이다 나치 시대에 히틀러가 '신 제국궁전'으로 확장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22. ↑ 1559년 페르디난트 1세가 빈에 대재상 명의의 제국재상부를 설치했으나 실무는 부재상이 맡았고, 1620년 오스트리아 총리직 신설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요제프 2세 시기를 거치며 유명무실해졌다.
  23. ↑ 1815~1866년 존속한 독일 연방에는 수상직 자체가 없었다.
  24. ↑ 상원의원단 전체가 아니라 제후를 대리할 권한을 가진 특명전권대사에 한정된 이야기다.
  25. ↑ 국가철도청, 국가체신청, 국가법무청, 국가대장청 등이 그 예시다.
  26. ↑ 프로이센·바이에른·작센 등 구성국에서는 정작 장관 호칭을 그대로 사용했다.
  27. ↑ 다만 프로이센은 군사·해군·특정 관세 분야에서 거부권을 가졌고, 17표는 개헌 저지에 필요한 14표를 웃돌았다.
  28. ↑ 구성국들은 개별 해외 사절단을 둘 만큼 상당한 자치를 누렸다.
  29. ↑ 1917년 하원 정치인이 국무장관이 된 뒤에도 하원의원직은 유지했지만, 이 조항 때문에 상원 진출은 불가능해 실권에서 배제됐다.
  30. ↑ 이들은 상원에서 전권을 가지고 해당 구성국들을 대표했다. 가운데에 제국 수상이자 프로이센 총리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보인다.
  31. ↑ 여기서 '책임'은 오늘날처럼 내각 총사퇴를 뜻하는 게 아니라, 불가침의 존재인 황제 대신 정부가 법령 부서(副署)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한다는 의미였다.
  32. ↑ 비스마르크가 회의 공개를 고려하기도 했으나, 통일 독일에 관심이 컸던 대중의 시선은 어차피 황제와 하원에 쏠렸을 것이라는 평가다.
  33. ↑ 북독일 연방 선거법 자체는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선거법에 뿌리를 둔다.
  34. ↑ 동시대 미국은 28%, 영국은 16%였고, 같은 제국 내 바이에른·작센 왕국조차 이보다 참정권 제한이 까다로웠다.
  35. ↑ 1912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190개 결선투표 중 120개에 참여했지만 45개만 승리했다.
  36. ↑ 전체 397석. 프로이센 236, 바이에른 48, 작센 23, 뷔르템베르크 17, 바덴 14, 튀링겐 일대 12, 헤센 9, 메클렌부르크슈베린 6, 한자 도시 5, 올덴부르크 3, 브라운슈바이크 3, 기타 소국 6, 엘자스로트링겐 15.
  37. ↑ 사민당은 1876년부터 의원에게 급여를 지급했고, 1898년 기준 소속 의원의 40%가 당에, 15~20%가 노조에 고용돼 있었다.
  38. ↑ 다만 실제 발언 순서는 회의 전 원로원 내 계파 협의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
  39. ↑ 상원의원은 발언 제지 대상에서 예외였고, 수상도 통상 상원의원을 겸직해 하원에서 발언할 수 있었다.
  40. ↑ 프로이센 제99 포병연대가 엘자스로트링겐 일대에서 주민들을 모욕하자 큰 시위가 일어났던 사건. 정부와 군부는 이를 덮는 데에 급급했다.
  41. ↑ 다만 이는 조례 규칙에 근거한 것이라 법적 구속력은 없었다.
  42. ↑ 투표율은 1871년 51%에서 1912년 85%까지 상승했으며, 1907년을 제외하면 정부에 유리한 결과가 드물었다. 다만 정당 간 대립 심화로 의회의 정부 견제력은 갈수록 약해졌다.
  43. ↑ 아누아리우스 오세크(Annuarius Osseg)란 필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44. ↑ 옛 독일 연방군과 구분하기 위해 제국군(Reichsheer)이라는 명칭도 헌법에 혼용됐다.
  45. ↑ 이미 북독일 연방 가입 당시부터 합의된 사안이었다.
  46. ↑ 전쟁성은 각각 뮌헨·드레스덴·슈투트가르트에 위치했다.
  47. ↑ 같은 비율이 서독 0.9%, 동독 1.5%, 현대 독일 0.3%였음을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오히려 적은 수준이었다.
  48. ↑ 총참모부는 비귀족 출신 장교 증가를 우려해 증강 속도조절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49. ↑ 초창기 장교는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고, 이후 비귀족 장교가 늘어도 귀족적 사고방식에 동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50. ↑ 전시에는 야전군 사령부가 구성됐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여러 야전군을 묶은 집단군까지 운용됐다.
  51. ↑ 1867년부터는 북독일 연방 해군이었다.
  52. ↑ 수상 비스마르크는 처음엔 프랑스 여론을 고려해 알자스-로렌 강탈에 부정적이었으나 민족주의자들의 요구에 밀려 결국 빼앗았다.
  53. ↑ 서부전선의 주전장이 프랑스였기에 최대 피해국 중 하나였다. 프랑스 여론은 라인란트를 독립국가로 분리하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천문학적 배상금을 물려 독일을 통일 이전 상태로 되돌리고 싶어했다.
  54. ↑ 영국 왕실은 독일 혈통과 깊이 얽혀있었다. 하노버 왕조의 시조 조지 1세는 독일인 출신 하노버 선제후였고,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와 남편 앨버트 공도 독일인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빌헬름 2세의 외할머니이기도 했다.
  55. ↑ 영국은 독일이 제2의 나폴레옹이 되려 한다고 보아 견제했으며, 독일의 벨기에 침공을 훗날 영국 해협을 건너올 전조로 판단해 참전했다.
  56. ↑ 여기에 더해 적이기는 하지만 러시아 제국도 러시아 혁명으로 멸망해 19세기 동유럽을 주름잡던 3개의 제국은 20세기 초입에 모두 멸망했다. 그 밖에 오스만 제국 등 수많은 군주제가 소멸하는 등 제1차 세계 대전 자체가 군주국의 처형대에 가까웠다.
  57. ↑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망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의 독일인들은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세워 바이마르 공화국과 통일하려 들었지만 강력한 통일 독일의 출현을 경계한 열강들이 대번에 막아서며 실패했다. 통일이 성사된 것은 이후 1930년대 다른 열강들이 대공황으로 비틀거릴 때 나치 정부의 무력 통일에 의해 성사되었다.
  58. ↑ 이 시기가 오늘날까지 독러관계가 가장 좋았던 때였다. 이후 양차 대전에서 독일은 항상 러시아와 적국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냉전으로 이념 대결이 이어졌다. 바이마르 시기·탈냉전 시기 등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때도 있었지만 동맹에 준하는 사이는 아니었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로는 냉랭한 사이가 되었다.
  59. ↑ 보스포루스 해협은 영국의 역린이었고, 독일의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도 러시아의 발칸 진출을 견제하고 있어 비스마르크로서도 러시아 편을 들어주기 어려웠다.
  60. ↑ 개화기 최초의 국빈방문으로, 하인리히 왕자는 지금의 소공동 부근 대관정(大觀亭)에 머무르며 군대 퍼레이드 참석과 경운궁과 창덕궁을 방문했고, 2박 일정으로 독일이 투자한 강원도 당현광산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기록을 남겼다.
  61. ↑ 독일 통일 당시 미국은 중립을 지켰지만 여론은 독일을 지지했다.
  62. ↑ 연간 1억 달러 상당의 값싼 미국산 돼지고기 13억 파운드가 무차별적으로 쏟아들어오자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등이 함께 추진한 보이콧. 미국이 독일산 사탕무 수입을 금지하겠다고 협박하자 결국 해제됐다.
  63. ↑ 프랑스의 제3계급 개념을 비튼 표현이다. 프랑스에서 제1계급은 성직자, 제2계급은 귀족, 제3계급은 시민이었다.
  64. ↑ 토마스 니퍼다이는 19세기 초반부터 이미 독일 사회에 부르주아 헤게모니가 자리잡았다고 본다.
  65. ↑ 공장과 가까운 농촌 주민은 겸업이 가능했지만, 먼 지역 주민은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팔고 도시로 완전히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66. ↑ 특히 제1적국 프랑스와 대비된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러시아 다음가는 인구 대국이던 프랑스는 19세기 내내 출산율 저하로 인구가 정체되어 제3공화국 당국이 고심할 정도였고, 이후 한동안 독일·영국에 인구로 밀렸다가 1970년대 이후 이민 수용과 출산율 상승으로 다시 따라잡았다.
  67. ↑ 주로 영국·러시아 등 유럽과, 멀리는 미국·브라질로 이주했다.
  68. ↑ 유럽 내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이주 규모였다.
  69. ↑ 다만 숙련 인력이 필요했던 광산업 도시는 예외적으로 노동자용 장기 거주지·아파트를 제공했다.
  70. ↑ 개중 독일어와 외국어를 동시에 모국어로 구사하는 인구가 252,918명, 전체 인구의 0.45%가 포함된다.
  71. ↑ 개중 폴란드어의 방언인 마수리아어가 142,049명으로 전체 인구의 0.25%다.
  72. ↑ 개중 모라비아에서 쓰는 체코어 방언인 모라비아어 64,482명으로 전체 인구의 0.11%였다.
  73. ↑ <<세계의 역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p392
  74. ↑ 주황색은 개신교 절대다수, 푸른색은 가톨릭 절대다수, 짙은 보라색은 개신교 우세, 옅은 보라색은 가톨릭 우세 지역이다.
  75. ↑ 특히 루르나 베스트팔렌 등 원래 가톨릭 대도시였으나 동부에서 몰려온 개신교도 이민자들 때문에 종교구성이 극적으로 변화한 지역들도 있다.
  76. ↑ 1984년에 내용이 더욱 확장되어 The Peculiarities of German History라는 제목의 영어판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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