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왕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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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선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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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효종 현종
소헌왕후 인선왕후 명성왕후
조선 국왕의 왕비
명성왕후ㅣ明聖王后
조선 숙종의 왕세자빈
세자빈 김씨ㅣ世子嬪 金氏
조선 숙종조 대비
헌렬대비ㅣ顯烈大妃
왕후 김씨.jpg
출생 1609년 8월 5일
조선 김소령 사저
본관 경주 김씨
이름 소윤
재임기간 조선 왕세자빈
1633년
조선 왕비
1633년 8월 5일 ~ 1645년 8월 7일
국왕 수렴청정
1645년 8월 7일 ~ 1454년
조선 대비
1645년 8월 7일 ~ 1460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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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친 김소령
모친 정경부인 한씨
배우자 현종
자녀 장녀 명선공주
장남 숙종
차남 창녕대군
종교 유교(성리학)

개요

조선 현종 왕비. 명선공주와 숙종, 창녕대군의 모후.

생애

어린 시절

왕후 김씨는 김소령과 한씨 부인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품행이 단정하여 주변의 기대를 받았으며, 훗날 왕비 간택 후보에 올라 궁에 입궁하게 되었다.

왕비 시절

왕후 김씨는 국왕의 왕비로 간택되어 내명부와 외명부의 수장으로서 국모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웃전을 넘보지 않고 예법과 품위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여 신하들과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국모로서의 위엄을 갖추어 궁중 질서를 바로 세웠다.

또한 음식과 조리에 관심이 많아 첨정 이학수가 올린 요리를 직접 살펴보고 높은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한편, 이국인 김알도가 조선에 들어온 이후 일부 신하들이 영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자, 왕후는 좌의정 한신에게 조선어를 가르쳐 조선의 언어와 예법을 따르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결국 무단으로 조선을 탈출했던 이국인 김알도가 다시 국왕의 명을 받아 입궐하였다. 이때 왕후 김씨가 김알도를 꾸짖으려 하자, 김알도는 "이국인을 꾸짖어 내보내시옵소서."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후 김씨는 이를 무례한 대꾸로 여기고 크게 노하였다.

그러나 이후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자 왕후 김씨는 국왕에게 자신을 유폐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하지만 국왕이 "이미 지난 일이니 더는 문제 삼지 않겠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왕후 김씨는 자신의 뜻을 밝히기 위해 며칠 동안 수라를 들지 않았으며, 소복을 입고 근정전 앞에 머물렀다고 한다.

하지만 끝내 국왕은 왕후 김씨를 유폐하지 않았으며, 대신 교태전에서 15일 동안 자숙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왕후 김씨는 이에 반박하며 끝까지 자신을 유폐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국왕은 이를 끝내 거부하였다.

그럼에도 왕후 김씨의 의지는 굽혀지지 않았으며, 자신의 뜻을 거둘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고 한다. 이후 국왕은 왕후 김씨의 폐위를 기각하며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하였다. 그제서야 왕후 김씨는 국왕의 뜻을 받아들여 교태전으로 돌아갔다.

1641년 8월 6일, 품고 있던 아기씨를 출산하였다. 장남인 경안대군 이후 6년 만에 태어난 적통 왕자였으며, 국왕은 그 아들에게 창녕대군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이후 중전으로서의 위엄이 드러난다. 여러 백성들 가운데 이국인 김알도와 파희미아 등 그 자들을 엄히 꾸짖으며, 중전으로서의 위엄을 보인다.

김소령이 국왕께 망원총의 도입을 청하자, 왕후 김씨가 곁에서 “성능이 좋다면 마땅히 들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를 들은 김소령은 “우리 따님이 참으로 영특하구나”라며 기특해하였다.

대비 시절

1645년 8월 7일, 국왕의 병세가 심각해지자 왕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하였으며, 이로써 왕후 김씨는 대비가 되었다. 그러나 왕세자는 갑작스러운 양위에 불만을 드러냈고, 이에 왕후 김씨는 국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며 왕세자를 타일렀다고 전해진다.

이후 창녕대군이 면요리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자, 왕후 김씨는 자신 또한 면요리를 좋아한다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말년

1460년 8월 7일, 향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오랜 기간 국모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쌓인 심신의 부담과 말년의 건강 악화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평가

왕후 김씨는 예법과 품위를 중시하며 국모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왕비로 평가된다. 내명부와 외명부를 엄정하게 다스렸으며, 웃전을 넘보지 않는 겸손한 태도와 궁중의 질서를 바로 세우려는 모습으로 신하들과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왕후로 재임하는 동안 자신의 잘못이라 여긴 일이 생기자 스스로 유폐를 청하고, 수라를 거부한 채 소복을 입고 근정전 앞에서 석고대죄하는 등 강한 책임감을 보였다. 국왕이 끝내 이를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일화는 왕후의 엄격한 성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전해진다.

또한 음식과 조리에 관심이 많아 궁중 음식의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외국 문물에 대해서도 무조건 배척하기보다는 조선의 언어와 예법을 우선하도록 하는 등 전통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녀들에게도 왕실의 품위와 예법을 엄하게 가르쳤으며, 대비가 된 이후에도 국왕의 뜻을 받들고 왕실의 안정을 위해 힘쓴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왕후 김씨는 강직한 책임감과 높은 도덕성을 갖춘 왕비이자, 왕실의 예법과 품위를 지켜낸 국모로 평가받는다.

가족관계

친정

  • 부친: 청풍부원군 김소령
  • 모친: 정경부인 한씨

시댁

배우자 및 자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