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연합(대한제국)

한국의 명망가 정당
대한민족청년단
(김종필계 합류)
→ 자유민주연합 → 현재
신민주군주당
(당명변경)
자민련 누끼 신로고.png
자유민주연합
自由民主聯合 | United Liberal Democrats (ULD)
약칭 자민련(自民聯)
표어 원대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지방자율자치제로 지방 부흥을!
슬로건 새로 태어나는 자유민주연합
1차 등록일 1995년 4월 3일 대한민족청년단에서 분당
1차 등록일 1998년 5월 31일 신민당과 신설 합당 [1]
통합 정당 신민당 (신설합당)
연립여당 대한민족청년단
주소 한성부 마포구 창전로 70
이념 충청 지역주의
지방 분권
내부계파
우익 대중주의
한국식 입헌군주주의
자유지상주의
보수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
정치적 스펙트럼 우익 ~ 극우
총재 김종필
부총재 이한동
간사장 강창회
총무회장 정우택
정무조사회장 조부영
선거대책위원장 이완구
국회대책위원장 류근찬
민의원
50석 / 480석 (10.4%)
참의원
17석 / 240석 (7.08%)
당색 초록색 (#1B5B40)
연두색(#289020)
정책연구소 자유민주연합 정책연구소
당원 수 652,149명
당가 자유민주연합 당가
자유민주연합 당기.svg
자민련 2000년 11월 포스터 화질1.png
2000년 11월 포스터 - 새로 태어나는 자유민주연합.

개요

자민련 당 포스터.png
뼈를 깎는 노력으로.

1995년부터 존재하는 대한제국의 제 3지대 보수정당. 지역정당의 대명사이다. 대한제국 정치사에 흔하지 않은 최장기 연립여당으로 기록을 갱신중이다. 약칭은 자민련(自民聯: 자유민주연합).

김종필을 중심으로 창당한 정당으로, 사실상 충청 지역주의에 기반한 정당이었다. 이후 충청권 보수정당의 대표주자이자 헌정 사상 존재했던 제3지대 정당 중에서 가장 성공하는 당 중 하나로 꼽힌다. 이념적 성향은 자유민주주의, 보수주의이다.

역사

창당과 제 22대 총선거의 돌풍

김종필이 창당한 신민주군주당이 대한민족청년단으로 2당 합당을 하였으나, 결국 청구동계[2]가 당내에서 입지가 너무 작았고, 대한민족청년단의 민주계 소속 인사들이 김종필을 '개혁 정권에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 인사' 라고 몰아세웠으며 김종필 입장에서는 당시 총리였던 김영삼 마저 외면하자 이에 반발하여 신당을 창당하게 된것이 지금의 자유민주연합이다.

자민련은 당시 김종필 총재의 '당대표 쫓아내는 게 세계화냐', '다른 지역에서 충청도를 핫바지로 보고 있다' 등의 말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충청도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핫바지론'과 '문민정부는 사이비 보수, 내가 원조보수다'라는 '원조보수론' 등을 무기로 강원도와 수도권 보수층의 민심을 얻어냈다.

하지만 결국 대한민족청년단에서 상도동계[3]가 이회창계의 의해서 당에서 쫓겨나다시피[4] 하자 자민련과 족청은 관계회복에 나섰다. 당시 김영삼은 전두환을 비롯해서 보수정당에서는 사실상 국부로 취급받는 박정희, 이범석까지 건들이자 이에 반발한 이회창계와 반김영삼계가 항의하여 김영삼이 하야하게 된것이다.

1999년에 열린 제22대 총선거에서 자민련은 충청도와 대전에서 압도적인 격차로 승리하고 의석을 석권하여 휩쓸면서 신민주군주당에 이은 충남권의 맹주가 부활했음을 증명해냈다. 다만, 이때도 신민주공화당 시절과 비슷하게 충청도 북부지역에서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대전과 충청도 남부의 의원 선거에선 각각 63%, 67%의 득표율로 대한민족청년단과 새천년민주당을 가볍게 제쳤지만 충청도 북부에서는 겨우 36% 득표에 그쳐 고작 10%대 격차로 승리하였고 의원 선거는 아예 11곳 중 청주와 청원 단 2곳밖에 승리하지 못하였다.

이외에도 당선인을 내진 못했지만 경기 지역에서 어느 정도 선전했고 대구에서 대한민족청년단을 제치고 무소속 후보에 이은 2위를 차지하면서 차기 총선거에서 자민련의 녹색 바람을 예고했다.

제 23대 총선거와 전성기의 시작

2003년 제23대 중추원 의원 선거는 가히 자민련의 전성기였다. 충청권 가운데 대전에선 7석을 모두 싹쓸이했고, 충남에선 13석 중 12석을 석권했으며, 충북에서도 8석 중 5석을 획득하면서 전체 충청권 의석 중 28석 중 24석을 쓸어담았다. 지난 총선에서는 대전과 충남에서만 확실한 승리를 거뒀지만 이번엔 충북 지역까지 크게 선전하면서 더 이상 충남권에 한정되지 않은 충청권의 맹주로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이미 충분히 50석을 넘겼던 자민련은 통일국민당과 선거연대를 진행, 사실상 60석[5]을 얻으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23대 총선에서 자민련의 대선전은 충청권의 석권만이 이유가 아니었다. 당시 반족청 비민주 정서가 팽배했던 TK 지역에 자민련은 원조보수론을 내걸며 지지를 호소했다.

이에 이회창 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던 대구광역시에서 녹색 바람이 불었고 13석 중 8석을 휩쓸어 1당 자리를 차지했다. 다만, 경상도 북부는 자민련의 바람이 그렇게 거세지 않았고 대한민족청년단이 24석으로 무난히 1당을 차지하면서 자민련은 경상도에서 1석밖에 획득하지 못했다. 그외 지역에서는 경기와 강원에서 의석을 배출해냈다. 경기도에서는 신민주군주당 시절부터 지지세가 있던 지역들을 잘 지켜내면서 5석을 얻어 선전했고 강원에서는 1회 지선보다 상대적으로 부진했지만 2석을 확보해냈다.

자민련 소속 인사들을 보면 대다수가 민정공화계이거나 관료, 군인 출신들이 많았다. 23대 총선 당시 자민련의 구성을 살펴보면 총재 김종필을 주축으로 한 공화계, 민정계, 관료 출신, 유명인사, 지역 유지 출신 등을 위주로 이루어졌고, 극히 일부의 이원범 같은 민주계 인사가 가담한 경우가 있었다.

그나마 황학수, 이상만, 김고성 정도가 신진 인사였다고는 하는데, 황학수는 국회의원 당선 후 1년도 안 되어 자신의 보스인 최각규 당시 강원도지사와 함께 대한민족청년단으로 이탈했고, 이상만과 김고성은 2000년 초에 김용환을 따라 희망의한국신당으로 이탈한다. 보면 알겠지만 과거 운동권에서 종사했던 인물이나 젊은 인물들은 전혀 없었다. 그나마 젊은 사람이 44세의 정우택이었을 정도로 고령화된 정당이었으니 장기적으로 생존하기에는 힘들어보였다.

제 24대 총선거 대패와 당분

당시 새천년민주당과 노선 차이로 인해 창당된 열린우리당이, 이회창의 아들병역비리 문제가 터지면서 보수권 전체가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보수권 전체가 총선거에서 참패하는 결과를 맞이했고, 자민련은 고작 민의원에서 10석, 참의원에선 8석을 얻으면서 대패했다.

충청권에서 또한 석권하지 못했고 대부분 열린우리당이 돌풍을 일으키며 충청도 북부지역을 점령했으며 충청도 남부와 대전부 일부에서만 의석을 확보했다. 간간히 의석을 얻던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 조차 열린우리당에게 경기도 의석을 빼앗겼고, 이회창의 연임을 바라던 강원도가 족청으로 돌아서면서 타 지역에서도 완전한 참패를 맞이했다.

이 당시 자민련 총재인 이한동은 이 상황에서 대한민족청년단과 연정을 끊고 각자도생하자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고, 열린우리당과 연정을 시도하려 하자 이에 반발한 공화계 ~ 김종필계는 이한동 총재를 당에서 제명하는등 자민련 이한동 파문까지 발생하면서 당분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 25대 민의원 선거에서의 약진과 당권 안정

격화되는 진보정당들의 갈등속에서 자민련은 다시 반등을 시작했다. 10석까지 줄어든 의석은 18석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충청도 남부와 대전에서는 완전히 입지를 굳혀 의석 확보가 시작되었으며, 김종필이 당권에 다시 뛰어들면서 신진계[6]의 분당 추진을 막아냈다.

심지어 노무현 정권 말기, 민주노동당이 노무현 정권과 갈등이 수차례 빚어졌고[7] 이로 인해서 열우당이 일방적으로 민주노동당과의 연정 붕괴를 고했다. 사건 이후 민노당 황해도와 평양지역에서의 지지도까지 상실당하고 있었다.

이때 자민련은 기존 민노당과 열우당 입지가 쎈 전주 일대에서 지지도를 확보하는데 성공했고, 다음 26대 총선거에서..

제 26대 총선거에서의 부활 신호탄

당시 25대 국회때, 야당이 야합하여 노무현 정권에 대한 내각불신임결의안으로 인해 치뤄진 선거였고, 당시 노무현은 부동산 폭등과 더불어 세종으로의 수도 이전을 외치면서 중도 유권자들에게서 표심을 잃으면서 열우당이 약화되고 있었다, 제 26대 총선거에서 27석을 얻으면서 부활을 밝혔다. 전주에서 대한민족청년단과 함께 의석을 사실상 점령하다시피 했으며, 충청 북부 지역 일부에서 의석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노무현 총리는 선거와 더불어 정권 연임 의양이 없다면서 정계은퇴를 발표, 이후 노무현계의 문재인이 정권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문재인 게이트가 터지면서 대격변을 맞이하는데.

강령및 정책

우리는 근대화로 이룩된 광복 50년의 국가저력을 바탕으로 하여 합의제민주정치를 확립하고 민족 재도약의 웅대한 역정을 펼쳐야 할 신세기 앞에 다가서 있다. 여기, 우리 자유민주연합은 이 시대의 소명을 수행할 가장 책임있는 정치세력으로서 의회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이념을 토대로 모두가 훈훈하고 보람있게 사는 선진문화 복지국가를 건설하고 민족 대통합의 위업을 이루어 낼 것을 다짐하면서 우리의 강령을 밝힌다.
1. 우리는 합의제 민주주의를 추진하여 권력의 독선과 전횡을 막고 의회의 권능을 확립하여 주권재민의 참된 책임정치를 실현한다.

2. 우리는 완벽한 지방자치의 실시로 주민자치의 시대를 열고 지방의 특색과 토양에 맞는 생활정치를 실천한다.
3. 우리는 질 높고 안정된 성장 속에서 중산층의 권익을 보호∙신장하고 농어민∙노동자 및 저소득층 모두의 중산층화를 위하여 지원과 복지를 확충한다.
4. 무한경쟁시대에 대응하여 국제경쟁력 강화를 도모하고 정보화시대, 고도지식산업사회에 부응키 위하여 과학기술을 획기적으로 진흥시킨다.
5. 우리는 도덕과 신의가 지켜지며 자율과 책임이 강조되는 사회를 건설하여 모두가 서로 믿고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게 한다.
6. 우리는 교육의 기본을 인성의 함양에 두고 교육의 자율화로 개성과 창의를 제고하며 문화예술의 창달에 진력한다.
7. 우리는 민족에 대한 존엄과 사랑을 견지하는 가운데 자유민주체제를 토대로 한 평화통일을 차분하게 추구한다.
8. 우리는 안보를 굳건히 하고 평화와 번영을 위한 능동적 외교로 국제사회에서 성숙한 성원이 된다.

기본정책 10개.

책임정치의 실현

경제정의의 실현
중소기업의 육성
국제화, 개방화를 대비한 농림수산업의 진흥
교육 개혁과 문화의 창달
창조적인 연구와 과학기술 진흥의 지원
국토개발의 질적 전환과 균형 있는 지방사회 발전
안정된 복지사회 구현
환경복지와 환경창조의 사회 실현
외교주권의 확보와 동북아 정세 안정화

제 22대 국회 의석

대한제국 중추원 휘장.svg 제22대 중추원 민의원
원내 구성
제22대 민의원 1999년 6월 4일 ~ 2003년 6월 5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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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립여당
대한민족청년단 신로고 새천년.png
276석
자유민주연합 신로고.png
50석
야당
새천년민주당 당기.svg
136석
희망의한국신당 로고.png
6석
민주국민당 당기.svg
11석
무소속 1석
의장 ・ 이만섭
재적 480석
22
  1. ↑ 신민당이 자민련에 흡수합당된 것이 아니고, 신민당과 신설합당을 하여 "자유민주연합" 이름을 유지한 채 새로운 정당을 만든 것이다.
  2. ↑ 김종필계·공화계·청구동계
  3. ↑ 김영삼계
  4. ↑ 하나회 파문으로 인한 김영삼의 내각총사퇴
  5. ↑ 자민련 51석, 통일국민당 9석
  6. ↑ 이한동-신진계 신당 파문
  7. ↑ 심상정 머리채 사건. 이정희 의원이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인 심상정의 머리를 잡고 국회에서 한미 FTA에 관해 몸싸움을 벌였던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