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


조선 제4대 국왕
세종ㅣ世宗
태종9.png
출생 1397년 5월 15일
한성부 북촌 정안대군 사저
즉위 1418년 9월 18일 (21세)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450년 4월 8일 (향년 52세)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
능묘 영릉 (英陵)
재위기간 조선 충녕군
1397년 5월 15일 ~ 1400년 12월 7일
조선 원자
1400년 12월 7일 ~ 1406년 12월 7일
조선 왕세자
1406년 12월 7일 ~ 1418년 9월 18일
조선 국왕
1418년 9월 18일 ~ 1450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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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휘 도 (裪)
부모 부왕 태종, 모후 원경왕후
배우자 소헌왕후 (1406년 혼인)
후궁 명빈 박씨
자녀 슬하 2남 1녀
종교 유교 (성리학)
신장 176cm
봉호 충녕군 (忠寧君)
묘호 세종 (世宗)
시호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개요

國之語音◦異乎中國◦與文字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予爲此憫然◦新制二十八字◦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耳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이러한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게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기 편하게 할 따름이다.

조선의 제4대 국왕.

태종의 적장자이며, 부왕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올랐다.

조선의 공용 문자 한글의 전신인 훈민정음을 창제한 인물로 조선사 최고의 군주로 평가받는다. 후임자 문종과 함께 조선이라는 국가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수많은 분야의 업적으로 조선사에서 길이 남을 위인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치세

선대왕인 태조, 정종, 태종은 재위 기간 내내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주장했으나, 세종은 왕권을 우선시하며 일명 공포 정치를 조성하였다. 즉위 초에 모후인 왕대비 원경왕후가 국사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세종은 혹시 모를 역모에 대비해 주변을 경계하였다. 그 결과, 세종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일부 원로 대신들이 자신의 친동생인 익녕대군과 함께 난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즉위년에 익녕대군을 처형하고 일부 원로 대신들을 처벌하는 옥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즉위 10년 후인 1428년엔 자신의 모후인 왕대비 원경왕후를 왕권의 권위를 넘본 역모죄로 몰아 대비의 지위에서 삭탈시켜 궁 밖으로 내쫒기까지 하였다. 또 옥사를 통해 원로 재상 목인덕과 주요 원로 대신들을 유배 보내고 국왕에게만 충성하는 새로운 인사들로 조정을 채웠으며, 벌하고 자비를 베푸는 등 이러한 방식으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붕당인 관학파가 훈구파로 변질하였다. 이에 자신의 적장자이자 후임자인 문종이 안정스럽게 왕권을 계승할 수 있도록, 왕실 어른과 자신의 친동생 및 입김이 강한 대신들을 모조리 내쫒고 벌하여 왕권을 강화 하였다.

이어서 조선의 군사력이 강화되던 시기에 동시에 의금부와 병조의 힘이 막강해지던 상황에서, 판의금부사 한겨울이 1429년에 난을 일으키자 세종은 이를 진압하고 의금부와 병조의 명령 체계를 변경하여 국왕에게만 충성하도록 하였다. 더 하여 전국 출입국제도를 시행하여 왕의 허락 없인 외국에 나갈 수 없게 하였으며, 사병 혁파, 군관제 정비를 통해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고 있던 조선 군사 제도를 바로 잡았다. 그러한 제도를 바탕으로 1449년 이시애의 난을 손쉽게 진압하였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를 통해 백성들에게 언문을 쓸수 있게 하도록 하였다. 또 문학제도를 활성화하여 여러 의궤를 남기도록 명했고, 공신록을 도입하여 나라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보상을 내렸다. 그리고 일명 대간 권한을 확대하여 조정의 비리와 부패를 바로 잡을 것을 명했으며, 행정 절차 법제화를 통하여 국가 회의인 상참을 비롯하여 모든 국사 결정과 각 기관의 권한 사용을 법 질서 안에서 따르게 하도록 하였다.

세종은 양반 특권제 실시, 노비제 확대, 노인 직첩제 및 양로연 실시, 인권, 형벌, 복지, 의료 제도 개선으로 조선의 신분제도를 바로 잡고, 여러 분야를 정비하여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도록 노력하였다. 이어서 궐내각사에 천문각이라는 기구를 세워 농사 직설 반포, 신기전 개발, 양부일구 개발, 측우기 개발을 단행하였다.

여기서 모자라 백아연의 원정으로 동남아까지 조선의 무역로를 확장시켰고, 두 차례의 여진 토벌을 통해 여진을 조선에 복속화시켰다. 또 일본 원정을 단행하였으나, 이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를 통해 세종이 대외 정책에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 보여준다. 32년이 넘는 재위기간 동안 세종은 왕권을 무리수를 두며 강화했으나, 결국 그것이 먹혀 안정된 왕권과 통합된 조정 아래에서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끈 최고 성군이 되었다.

아무도 넘보지 못할 정도로 왕권을 키운 세종은 말년엔 죄인들을 사면해주고, 국사엔 늘 대신들의 뜻을 지지해주는 행동을 보였으며, 폐비 원경왕후를 왕대비로 복위시켜 대규모 궁중 연회를 열어 뒤늦게 효를 다하는 등 온화한 태도를 보였다.

조선왕조.png
조선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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