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본처(정실부인) 외에 데리고 사는, 통상적으로 정실부인보다 신분이 낮은 여자다.
소실(小室), 측실(側室), '작은집'으로도 불리는데 동양에서 황제나 왕의 첩인 경우는 대체로 후궁이라고 칭한다. 본부인의 입장에서 남편의 첩은 순우리말인 시앗이라 부른다. 이런 오래된 표현이 잘 남아있는 속담 중에는 '시앗 싸움에 요강장수'나 "시앗을 보면 길가의 돌부처도 돌아앉는다" 같은 표현이 있다. 본부인의 자식 입장에서는 '서모(庶母)' 혹은 작은어머니라고 부른다. 반대로 측실 소생의 자식은 본부인을 적모 혹은 큰어머니, 그렇게 부르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면 그냥 '마님'으로 불렀다.
정식 부인과 달리 첩은 '혼인한다'기보다는 '들인다', '데려온다'는 확연히 급이 낮은 표현을 쓰고, 첩을 들이는 것을 '축첩'(蓄妾)이라 하며, 처와 첩을 합쳐서 처첩이라고 부른다. 속칭 '세컨드'라고도 부르지만, 사실 영어로 second wife는 어디까지나 이혼이나 사별 후 두 번째로 맞이한 정식 아내로서, 말 그대로 '후처(後妻)'를 뜻하기에 첩과는 다르다. 그러나 현재는 사회통념적으로 애인이나 부인 이외의 외도 상대를 이르는 외래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본래 첩은 신분사회에서 계급간의 계승권 구분을 위해 존재한다. 첩 소실의 자식은 적자에 비해 한 단계 낮은 대우를 받는다. 이를테면
- 첩이 낳은 자식은 본처 자식보다 낮은 신분으로 분류해서 가문을 상속받지 못한다. 대개 첩은 여자의 신분이 낮은 경우이다. 평민 신분인 첩이 낳은 자식을 '서자', 노비 신분인 첩이 낳은 자식을 '얼자'라고 하며 이 둘을 뭉뚱그려 서얼이라고 한다. 조선은 왕의 후궁을 제외하면 평민 이하의 신분이었고, 옆나라 일본은 귀족 출신 여성들도 많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했던 홍길동이 이런 경우다.
- (신분사회가 아니더라도) 정략결혼 등의 이유가 있을 때 처의 신분에 따른 우대 방법의 하나다. 가령 남편이 신분이 낮은 여성을 사랑하게 되어 결혼하고 싶은데, 정략결혼한 본처가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입지를 가지고 있다면 이혼이 힘들어지니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첩의 지위를 주어 격차를 명확히 해두는 것. 조선 정조의 경우 후궁 의빈 성씨와의 로맨스가 유명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실은 효의왕후였다. 덧붙여 아무리 대외적으로 정실을 존중해준다고 해도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만큼 정실과 첩 사이에 감정의 골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의빈 성씨는 항상 효의왕후에게 깍듯했고 효의왕후도 그런 의빈을 많이 배려해주어 둘의 남편인 정조도 신기해했다고 한다. 다만 이런 것도 본처의 신분이 남편보다 낮거나 최소한 동등할 때 얘기지 남편보다 신분이 높으면 첩을 들이는 것 자체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조선시대 공주의 남편인 부마 같은 경우는 축첩은 물론이고 재혼까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지 말라는 건 꼭 하는 인간이 어디에나 있는만큼, 효정옹주의 남편 조의정은 간도 크게 첩을 두었다가 들키는 바람에 첩은 매를 맞아 죽고 조의정은 옹주의 아버지 중종, 오라비들인 인종과 명종의 눈 밖에도 나게 된다. 그나마 부마가 아내를 사별한 뒤에 정실부인이 아닌 첩을 두는 것은 적당히 눈감아줬다고 하는데, 영혜옹주의 남편이었던 박영효가 이런 사례. 고작 12살에 결혼한 지 겨우 몇 달 만에 영혜옹주가 죽는 바람에 평생 첩만 둘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자식들도 모두 서자로 호적에 올랐다.
시대와 국가에 따라서 첩의 자식의 대우는 상당한 격차를 보인다. 이를테면 중국에서는 한국보다 적서차별이 상당히 느슨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서자의 차별이 훨씬 더 적었다.
자녀가 없는 적모가 서자를 친자식처럼 돌봐주기도 했다. 선조의 정실 왕후였던 의인왕후가 임해군, 광해군 두 형제를 그렇게 대했다. 삼국지에서 정부인-조앙이 그러하였고, 영조의 정실 왕후인 정성왕후도 서자인 사도세자를 친자식처럼 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