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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 ||
청일전쟁의 전개도 | ||
| 시기 | 1894년 (메이지 27년) 7월 25일~1895년 (메이지 28년) 4월 17일 | |
| 장소 | ||
| 교전국 | ||
| 주요 인물 |
지휘관 |
지휘관 |
| 병력 | 일본군: 327,991명[1] | 청군: 약 350,000명[2] |
| 피해 | 사상자: 17,069명 - 전사자: 1,417명 - 부상자: 3,758명 - 병사자: 11,894명 |
사상자: 35,000명 |
| 결과 | 일본 제국의 승리 -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 일본 제국의 타이완섬 및 펑후 제도, 요동반도 확보 | |
| 영향 | 청나라의 대 조선 영향력 상실 조선의 청나라로부터 자주-독립 선언 및 조정 내 친일 내각의 수립 일본 제국의 동아시아 패권 장악 양무운동의 실패와 변법자강운동의 시작 | |
개요
청일전쟁(淸日戰爭, First Sino-Japanese War). 1894년 7월 25일~1895년 4월 17일 사이 조선과 청나라 만주, 산둥성 일대에서 벌어진 청나라와 일본 제국의 전쟁.
일본에서는 일청전쟁(日清戦争, 닛신센소), 중국이나 대만 등에서는 갑오전쟁(甲午戰爭, 자우전장)이라 한다.
일본이 승리하면서 청나라의 '상방지권(上邦之權)'을 파기하고 패권을 탈각시켰으며, 조선에 친일 내각을 수립시켰다. 이후 영국-이집트의 전례 등을 참조하여, 갑오개혁 등으로 조선을 보호국화하고자 하였으나 삼국간섭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3개 국가가 개입하며 일본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일본과 러시아가 대립하는 등의 영향으로 조선에서는 수차례 내각이 바뀌고 뒤이어 을미사변,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청일전쟁을 전후로 일본에서는 본격적으로 민족주의가 힘을 얻어 군국주의, 제국주의적 여론이 확산되었다. 승전 후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요동반도 등을 할양받았고 이후 근대화를 더욱 추진하여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는 기반이 되었다. 청조는 청불전쟁과 더불어 베트남과 조선에서의 실패를 반면 교사로 삼고자 했는데, 대외적으로는 티베트 및 몽골 속지의 종주권-주권 문제의 사례로서 활용했으며, 대내적으로는 청 조정이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하였다.
명칭도 청일전쟁이고, 실제 전쟁의 주체도 청과 일본이지만, 실제 청일전쟁의 전투 대다수는 대부분 한반도에서 발생했다.
각주
- ↑ 청일전쟁에 동원된 전체 병력은 약 70만 명으로 일본군은 병력 174,017명, 軍夫 153,974명, 청군은 약 35만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한국학계의 청일전쟁 연구경향과 군사사적 검토-김경록.PDF 10쪽
- ↑ 청일전쟁에 동원된 전체 병력은 약 700,000명으로 일본군은 병력 174,017명, 軍夫 153,974명, 청군은 약 350,0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한국학계의 청일전쟁 연구경향과 군사사적 검토-김경록.PDF 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