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왕

후김 초대 국왕
춘추왕│春秋王
김 7대 국왕
춘추왕│春秋王
출생 37년 9월 6일
김 C. New City CVCC
출생 85년 6월 20일 (향년 48세)
김 3C 백악관
재위 김 중제대군
47년 3월 18일 ~ 61년 6월 24일
김 7대 국왕
61년 6월 24일 ~ 85년 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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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중도 김씨(中都 金氏)
휘 춘추(春秋)
부모 부왕 숭종
모후 부리왕후
배우자 춘추왕후[1]
자녀 슬하 1남
봉호 중제대군(中制大君)[2]
왕호 춘추왕(春秋王)[3]

개요

생애

즉위 전

전제대군이라는 존호로 불렸다. 숭종의 차남으로서 자신의 맏형인 홍색탑군을 따라 다니던 형바라기 동생이었으나, 숭종의 사후 돌연 변해버린 형으로 인해 왕가에서 스스로 자취를 감췄다. 홍색탑군이 일으킨 전쟁이 발발하기 닷새 전, 니카제국으로 망명을 요청. 비밀리에 니카제국의 비왕족 귀빈으로 들어가 극진히 대접 받으며 지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전쟁이 끝나면서 왕위를 계승 받게 되었으나, 한참을 거부하다 왕정복고당의 의해 강제로 끌려가 송환되었다.

즉위

즉위 이후에도 한참을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모든 정치는 왕정복고당을 통해 대신하였으며, 일상 생활 도중에는 곤룡포를 입지 않고 일반 평상복을 입으며 돌아다녔을 정도로 국민들에게 있어 자신이 왕족임을 드러내기 꺼려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애시당초, 니카제국으로 망명을 요청한 이유가 홍색탑군의 계략을 듣고 왕족이라는 것에 수치심이 들어서 였다는 사실이 공화선도당에 의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왕정복고당의 주융의 재임이 끝나며 공화선도당의 주형이 춘추왕과 직접적으로 만나기 시작했고, 이에 따른 정보가 대거 공개되었다. 국내 정사에 참여하지 않아 보인 것과는 다르게 나름 북김과 남김과의 관계 회복을 추진하였으며, 영토 분쟁 또한 가담해 토론을 진행하는 등 여러 행적을 남겼다.

또한 언더 테라에 서식하는 고유종인 서부지하스니퍼(서부해안스니퍼)와 동부지하스니퍼(동부초원스니퍼)와 같은 종들의 밀렵을 허가했었다. 이외에도 유종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리족의 여부와 그 잔해를 수집하여 전시하는 등 여러 업적을 이루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후계 문제

본인이 왕조를 더 이상 이어나갈 생각이 없다 표명했는데, 붕어 선고일 당일 기준 추가로 풀린 정보에 따르면, 팔촌에 달하는 꽤나 먼 후손이 현재로선 왕위 계승 서열 1위라 전해진다.[4] 백악관 정부에 따르면, 홍색탑군의 자손에게 왕위를 계승할 경우 사실상 국제적으로 정세를 흔들 수도 있는 최악의 결정이라 판단하여 사실상 계승 서열 최하위라고 밝혔다. 또한 김시훈의 경우 후술하겠지만 세자 책봉을 거부했다.

사후

사후 약 3개월 가량 대신 정치를 이어간 주민에 따르면, 후계는 정통성을 챙긴 김신덕[5]이 왕위를 계승하게 될 것이라 알렸다. 춘추왕의 자녀인 김시훈의 경우 세자 책봉 및 대군과 같은 이외 존호조차 없었으며, 자신마저 왕족의 계승 서열에서 배제해 달라 밝힌 만큼 유조로 인해 비정통성을 지니게 된 해당 혈통은 여기서 끝날 듯 보인다.

누구의 아들인가?

도종부왕설

홍색탑군의 묘호 취하 이전에 생긴 설이다.

후김 시대에 접어든 이후 왕실의 승계 인원이 사실상 없음에도 왕정복고당은 왕조가 유지 되고 있다 주장하여 생겨난 설들 중 하나로, 김춘추의 부친이 홍색탑군이라는 설이다.

폐비 주씨의 말에 따르면 "홍색탑군이 사하기 전에 아들을 하나 가지긴 했었으나, 출산도 전에 아비가 사했다."라고 밝혀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허나 이 아이가 왕이라면 국가를 통치하긴 커녕 말도 못 땐 미취학 아동에 그치기 때문에 사실상 가설로 치부되고 있다.

주원증손설

김왕의 딸인 록강공주의 장남 주원의 증손이라는 설이다.

20대의 주전이 본관을 변경하곤 왕위를 계승했다는 설인데,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김왕의 현손인 주전은 자신이 왕족의 후계인 사실을 인터뷰 전까진 인지조차 하지 못 했었으며 이딴 나라의 왕이 되긴 싫다 밝혔다.

유조장손설

유조의 딸인 동연의 손자가 아니냐는 의견 또한 존재했는데 동연의 장남인 주후는 실제로 10살이 되던 해인 47년에 중도 김씨로 본관을 변경하였었다.

진실

74년 공화선도당이 공화제로 바꾸기 위해 노력을 가하던 도중 춘추왕의 정보가 풀리게 된다.

그는 숭종의 숨겨진 둘째 아들이었던 중제대군으로 밝혀졌으며, 전쟁 당시 자신의 형을 버리고 니카제국으로 망명했었다는 기록이 추가 확인되었다.

김씨 왕조를 빠져 나와 조용히 살려던 김춘추는 종전 이후 자신이 승계 서열 1위라는 소식에 귀국을 거부하였으나 강제로 송환되었다. 이후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않고 싶어 의원내각제를 택하였고, 총리를 선출해 정치를 대신하게 하였다. 이 모든 기록은 74년 6월 5일까지 비밀리에 편찬된 춘추야사이다.

여담

  • 왕정복고당에서 왕조의 보존을 위해 모든 정보들을 제한하고 있다.
  • 그가 공유릉에 남긴 글 하나로 숨겨졌던 정보 중 일부가 공개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서술 된 문서이다.
  • 74년 8월 17일에 4대 총리 주형에 의해 그의 정보가 풀리기 시작했으며, 공화선도당을 중심으로 국가를 개혁시킬 듯 보인다.정당 폐지 후 공화부흥당 창설 계획까지 있었으니...
  • 왕조와 완전히 거리를 두려 했던 만큼 자녀가 있다 하더라도 왕위를 넘겨 줄지가 미지수이다. 하지만 홍색탑군의 자녀인 김리궁이 박탈된 계승 자격을 다시 이어 받아 군주가 될 가능성이 존재하기에 왕정이 여기서 끝나는 건 아닐 듯. 결국 숭종 기준 팔촌의 관계에 속한 김신덕이 왕위를 넘겨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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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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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왕태자 · 왕태손 · 왕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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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정보가 거의 없다. 자녀 정보만이 밝혀지며 표면적인 정보만이 공개된 상태.
  2. ↑ 군호는 3C의 룡자 명칭인 '중제'에서 따왔다.
  3. ↑ 왕의 이름에서 착안한 왕호다.
  4. ↑ 정통성을 따졌을 때의 기준이다. 공화선도당에서 구석에 숨겨져 있던 혜종야사를 발견하고 국민들을 조사하던 도중 자신의 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서농군이었다는 사람을 찾게 되었다.
  5. ↑ 원래 이름은 김미(金美)다. 하지만 자신의 증조부인 김미(金米)와 동명이인이 되어 왕위에 오른 이후 개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