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바트칼란드 제국/설정상 역사


개요

이 문서는 트바트칼란드의 방 역사가 아닌 설정상 역사를 다룬다.


연위국 시기

연위인의 발흥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거주하던 연위인들은 각각의 부족으로 쪼게져있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300여년경 연위족으로 통합되었고, 기원후 100년경에는 연위국이 건국되었다.

연위인들은 중국의 문화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이끌고 문자를 사용했다. 고조선 멸망 전까지는 고조선과 대적했다.

연위인들의 이동

이후 30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던 연위국은, 중국의 침략을 받아 당시 형제 민족이었던 흉노족과 함께 대이동을 시작했다. 두 민족은 함께 유럽 지역까지 민족 대이동하는데 성공하였고, 연위인들은 360년경 현재의 프렌트킬린에[1] 터를 잡았다.

이때 흉노는 중앙유럽까지 이동하며 두 민족은 헤어져 각자의 길을 걸었다.


고대 ~ 중세

유럽으로의 흡수

프렌트킬린 지역에 자리 잡은 연위인들은 프렌트킬린 지역의 원주민들과 융합하며 친선을 도모했다.[2] 이때 토착 원주민과 완전히 융합한 연위인들은 트바트인으로 바뀌었고, 융합 이후 트바트인으로써의 정체성을 확실히 해나갔다.

슬라브인과의 접촉

5~6세기 무렵 슬라브인들이 유럽으로 대규모 유입되며 트바트인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주해온 슬라브인들 중 일부는 현재의 폴란드 지역에 정착하여 폴란드인 또는 칼란드인 같은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에따라 이들은 트바트인들과의 일종의 경쟁 상대가 되었는데, 특히 트바트인들은 칼란드인들과의 분쟁이 가장 심했다.

중세로의 진입

그러나 10세기경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슬라프 1세가 플렌킬린 영지를 정복하며 플렌킬린 영지를 '플렌킬린 공국'으로 편입시켰다. 플렌킬린의 공작은 트바트인이 맡았으며, 루스는 트바트인의 토속신앙을 존중했다. 그러나 989년 블라디미르 1세가 정교회를 공인하고 루스인 전체의 개종을 요구하며 트바트인들은 대다수 개종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다.

트바트인들이 루스에 흡수되던 시기 칼란드인들은 폴란드 영지로 흡수되어 970년경 완벽하게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루스에 편입된 플렌킬린 공국은 편입 이후부터 공국 간의 분쟁에 참여하지 않고 국력을 키웠다. 루스 공국들은 이러한 플렌킬린 공국을 겁쟁이라고 비판하였지만, 13세기 한 나라의 대규모 침략이 시작되며 비축해둔 힘이 진가를 발휘한다.

몽골의 대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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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코프 2세의 초상화

몽골의 대침략이 시작되며 분열되고 싸우던 루스의 공국들은 하나둘씩 몽골의 침략에 짓밟혔다. 하지만 플렌킬린 공국은 공작인 트라코프 2세의 지도 아래에서 격렬히 저항했다. 분쟁 없이 내치에 집중하던 플렌킬린 공국은 몽골을 상대로 끈질긴 저항을 펼쳤다.

이에 몽골은 플렌킬린에게 엄청난 자치권을 주는 대신 강화하자 하였고 피해가 심했던 플렌킬린 공국은 이를 수용했다. 루스를 정복한 몽골은 이후 폴란드 지역으로 진주하는데, 이때 칼란드인들은 몽골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며 자치권을 보장 받았다.

몽골에서의 이탈

몽골의 간섭을 받던 플렌킬린 공국은 때를 노리다가 1380년, 모스크바 공국의 드미트리 대공이 킵차크 칸국에 대항해 간섭에서 벗어나려하자 기회를 잡은 플렌킬린 공국은 킵차크 칸국을 몰아내며 간섭에서 벗어났다.[3] 칼란드인들은 브와디스와프 1세의 폴란드 왕국에 붙어 몽골의 압제에서 벗어났다.

나라 없는 민족

모스크바-폴란드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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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렌킬린 공국의 전투도

폴란드의 야기에우워 왕조는 모스크바와 분쟁을 빚었고, 1507년 두 세력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플렌킬린 공국은 이 사이에서 요충지대였기에, 무려 1537년까지 약 30년간 폴란드 왕국과 모스크바 대공국의 침략을 받았다.

폴란드의 점령

1537년 폴란드 왕국이 모스크바로부터 승리하자 플렌킬린 공국은 해체되어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편입되었고, 트바트인들은 민족 국가를 잃게 되었다. 이후 156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성립되었다.

카자크 문화의 영향

1600년경 자포로지예 카자크를 시작으로 슬라브-루스계 민족들의 카자크화가 진행되자, 트바트인들 또한 플렌킬린을 중심으로 다시 모여 '트바트 카자크'를 성립하였다. 1649년에는 자포로지예 카자크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불만을 품고 헤트만국을 건국하자, 트바트인들은 칼란드인들을 포섭하여 트바티야-칼 추야크국을 선포했다.[4]

그러나 건국 이후부터 트바티야-칼 추야크국은 사실상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의 자치국 수준이었다.

루스의 정복

1654년, 헤트만국이 폴란드의 치하에서 벗어나 러시아측의 보호령이 되자, 트바티야-칼 추야크국 또한 폴란드를 벗어나 러시아에 협력했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3차에 거친 분할로 해체되었고, 트바티야-칼 추야크국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1764년, 예카테리나 2세가 헤트만국 합병에 이어 추야크국에 대한 합병도 개시하며, 트바티야-칼 추야크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근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물결

1803년, 나폴레옹 전쟁의 시작으로 프랑스와 러시아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1807년 폴란드 지역을 점령한 프랑스는 바르샤바 공국을 세웠고, 이어 1808년에는 프렌트킬린 지역을 점령, 프랑트칼랭 공국을 세웠다. 당시 트바트인들은 프랑스군에게 협조하여 카자크들이 프랑스군을 위해 교전하는 오묘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허나 프랑스군은 패퇴했고, 트바트인들은 러시아에 의해 보복당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맛 보여준 자유와 독립을 되뇌이며 더이상 총칼만을 들던 카자크인으로써의 트바트인이 아닌 독자적인 민족문학을 연구하고 발전 시키는 하나의 민족 공동체가 되었다.[5] 칼란드인들도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민족문화를 형성시켰다. 민족성 발전만이 아닌 저항도 계속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1832년 플렌킬린의 러시아군 병영을 점거하여 약 3개월간 러시아군과 대치한 3월 봉기가 있다.

기회의 도래

중간중간마다 소규모의 봉기준비 및 저항운동이 있었으나, 러시아 제국 당국에 의해 사전 적발 되거나 탄압 당했다. 그러다가 1914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며 기회가 생겼다. 러시아 제국이 협상국 측으로 참전하자 트바트인들과 칼란드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망명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예하에 각각 트바트인,칼란드인 부대인 프렌트킬린 소총대와 3번 소총대를 창설 하였다.

그리고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고, 이어서 전쟁을 유지하려던 러시아 임시정부가 11월 혁명으로 붕괴하며 들어선 소비에트 정권이 독일 제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해 트바트칼란드는 독일 제국에 의해 트바트칼란트 섭정왕국으로 보호령이 되었으나, 이듬해 1918년 11월 독일이 패배하며 민족자결주의에 따라서 독립하게 되었다.

독립 초기

트바트칼란드는 독립 직후 바로 섭정의회를 소집했고, 프렌트킬린 소총대와 3번 소총대를 통합해 지휘하며 자신을 트바트-칼 추야크국의 국왕인 트리 1세의 후손이라 주장하던 트리 4세가 자신의 정통성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1919년 2월 18일, 섭정의회 투표결과 만장일치로 트리 4세가 국왕으로 추대되며 트바트칼란드 왕국 체제가 성립되었다.

대소비에트 전쟁

내부 안정화를 끝마친 소비에트는 자신들의 옛 땅 이었던 서부로 눈을 돌렸고, 이때 보인 나라중 하나가 트바트칼란드였다. 소비에트는 약 30만의 병력으로 트바트칼란드,우크라이나,벨라루스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감행했고 우크라이나가 폴란드에 도움을 요청하며 대소비에트 전쟁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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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방면으로 이동하는 트바트칼란드군

소비에트는 순식간에 벨라루스를 함락했고,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도 점령했다. 이어서 트바트칼란드의 프렌트킬린도 점령하고서는 폴란드로의 진격을 시작하였다. 소비에트군은 폴란드군으로부터 연전연승을 거두며 바르샤바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그러나 이때 폴란드군은 울란 기병대를 남부에서 우회시키며 소비에트군을 포위했고, 이 결과 13만여명의 소비에트군이 전투불능이 되었다. 나머지 17만여명의 패잔 병력은 트바트칼란드와 우크라이나를 지나 후퇴할 계획을 세웠지만, 바르샤바 전투가 끝나기 전에 미리 우크라이나군과 트바트칼란드군은 카자크를 활용하여 기진맥진한 17만명의 패잔병력보다 먼저 퇴로인 키예프-프렌트킬린 방면에 매복했고, 나머지 17만명마저도 뒤에서 추격해오는 폴란드군과 앞에서 급습하는 우크라이나-트바트칼란드 연합군에 의해 포위 당했다.

대규모 포위 소식을 들은 레닌은 17만명의 병력을 보전하고자 총책임자를 트로츠키에서 스탈린으로 넘겼다. 스탈린은 작전권을 받자마자 프로이센에 억류되었던 장병들과 증원병력, 그리고 서부의 모든 지역에 있는 소비에트군의 물자와 병력자원을 동원하고 심지어는 점령지의 민간인들까지 모두 동원하여 20만여명 수준까지 급조 병력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스탈린은 20만의 병력이 모이자 즉각적으로 포위를 해제하기 위해 공세를 가했다. 하지만 공세 첫날부터 강제로 동원된 민간인들이 오히려 우크라이나군과 트바트칼란드군에 접촉했고, 군수부대의 창고마저 이들에 의해 불타버리자 20만 군대는 빠르게 와해 되었고 지원을 기다리던 17만의 포위병력은 전부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소비에트는 폴란드 연합군에 참패를 겪었고, 연합군은 키예프, 벨라루스, 트바트칼란드 일대를 해방시켰다. 소비에트는 결국 굴욕적인 평화협상을 맺을수 밖에 없었고 피해가 심했던 이들도 평화협상을 수용했다. 키예프와 벨라루스 해방에 지대한 공헌을 한 트바트칼란드는 두 국가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고, 이후 두 국가에 각각 우크라이나 자치구, 벨라루스 자치구를 설립하게 된다. 이로서 트바트칼란드는 역대 영토중 최초로 바다를 가지게 되었다.

혼란의 시대

트바트칼란드 왕국의 트리 4세는 트바트인들과 칼란드인들 사이를 조정하는데 힘 썻고, 민족 화합을 힘썻다. 초기엔 민주주의도 도입하려 했으나 잇따른 총리에 대한 테러 행위로 총리들이 사망하자, 트리 4세는 사실상 전제군주정이나 다름 없는 '연위식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며 국명을 트바트칼란드 제국으로 바꾸게된다. 그러나 트리 4세는 1926년, 군 사열식을 관람 도중 칼란드인 민족주의자가 저지른 폭탄 테러에 의해 사망했다.

혼란의 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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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폰 1세의 모습

트리 4세 사후 1926년, 다음 황제로 트리폰 1세가 즉위했다. 그는 트리 4세의 장남이자 트바트인 순혈이었음으로 가장 정통성이 있었기에 손쉽게 즉위하였다.

트리폰 1세는 집권하자마자 트바트인과 칼란드인 사이의 혼란스러운 관계를 안정화 시키길 원했고, 최초의 칼란드인 출신 총리인 레프 알렉산드르를 임명하며 민족간의 대립을 점차 완화해갔다. 이어서 1928년부터 군 신식화 계획 추진을, 1932년에는 소련에 대항한 우크라이나,벨라루스와의 삼중 군사동맹을 더욱 더 공고히했다.

대전기

9월 전역

1938년, 리벤트로프-리트비노프 조약을 통하여 동유럽에 대한 분할이 확정되었고,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선제적으로 침공하며 독일과 소련은 동유럽 분할 작전을 시작했다.

폴란드는 소비에트 전쟁 이후 지출한 자금에 대한 여파와 독일계 기업의 연이은 철수로 경제 자체가 굳어버린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예산도 없이 선군주의만을 내세우던 폴란드군은 개전 초기부터 금방 방어선이 붕괴했다.[6]

동부전선은 더 심각했다. 우크라이나는 안드리 멜니크 자치위원장의 10년 집권기간동안 기근을 겪었고, 내부적으론 국수주의 분위기가 격앙 되어 기존 사회주의자들간에 내분까지 있었다.

벨라루스는 얀 시에라다 의장이 첫 자치위원장이 되었지만, 얀 시에라다 위원장의 하야 이후 표트라 크라체우스키 자치위원장을 지나 바실 자하르카, 야제프 로식 자치 위원장등 위원장이 20년간 6명이 바뀌며 혼란스러웠고, 또한 공업에 관한 정책은 지속적으로 미루어졌다.

그러나 트바트칼란드는 1928년부터 시작된 공업정책을 바탕으로 쌓여진 나름 괜찮은 공업 능력으로 DT-34를 양산하는등, 동유럽 3국중 가장 전력이 괜찮았다.

다시 사라진 나라

트바트칼란드가 그나마 동유럽 3국에서 나았을 뿐이지, 준비된 독일과 칼을 갈고 온 소련군에 비해선 턱없이 부족했다.

트바트칼란드-소련 전선에서는 동유럽 연합군이 우세했으나, 금방 벨라루스 방면,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소련군이 침투하며 후방이 붕괴, 트바트칼란드군은 프렌트킬린에서 저항하거나 폴란드나 벨라루스를 거쳐 리투아니아로 퇴각했다. 우크라이나 자치구의 타라스 보로베츠 장군이 빈니차-르비우 방어선을 만들고 저항을 시도했으나, 독일군의 이른 서부 우크라이나 진주로 실패했다. 이어서 폴란드의 바르샤바도 함락 당하며 동유럽 분할은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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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모인 세 정상들[7](르 피가로 신문)

이후 폴란드 이그나치 모시치츠키 대통령은 브와디스와프 라치키에비치에게 대통령직을 넘기며 프랑스로 건너간 브와디스와프 라치키에비치의 망명정부 수립을 승인했다. 트바트칼란드의 트리폰 1세도 초기에는 프렌트킬린에 남고자 했으나, 당시 육군 총감이었던 쿠즈네초프 니키타 장군의 만류로 결국 훗날을 도모하며 프랑스의 파리에서 브와디스와프 라치키에비치의 폴란드 망명정부, 트리폰 1세의 트바트칼란드 망명정부, 스테판 반데라의 우크라이나 자치구 망명정부가 본토 회복 직전까지 서로간 군사행동에 즉각적으로 협조 할것을 약조하는 <파리 각서>를 체결했다.

본토에선..

소련이 장악한 트바트칼란드에선 매우 끔찍한 일들이 발생했다.

프렌트킬린을 방어하고 투항한 3만여명의 방어군들중 1만여명을 프렌트킬린 북부 숲인 플레니차 숲으로 끌고가 집단총살했다.[8] 집단총살은 기관총 난사로 이루어졌고, 기관총 난사에 죽지 않은 자들은 소련군이 내던진 불길에 천천히 산채로 타들어갔다.
그외에도 우차에서 민간인 500여명, 코프카에서는 군인과 민간인 700여명이 총살 당했다.

서부는 더 심각했는데, 칼란드 민족주의자 단체들이 본격적 활동에 돌입했다. 이들은 리투아니아 방면으로 퇴각하는 트바트칼란드군 패잔병들을 소규모씩 습격하여 잔혹하게 살해했다. 소련군이 칼란드인 지역까지 진주하고 나서야 소강되었다.

점령 이후 약 3개월간의 대학살과 약탈 끝에 트바트칼란드는 트바티야 SSR과 칼슈 SSR로의 분할 통치가 시작되었다.

= 저항의 시대

각주

  1. ↑ 고대 ~ 중세 시기 명칭은 '플렌킬린' 이었다.
  2. ↑ 현대엔 의견이 분분한데 당시 남아있던 일부 고트족으로 추정된다.
  3. ↑ 모스크바 공국을 진압하는데 힘을 다 쓴 킵차크 칸국이 플렌킬린까진 당도하지 못했다.
  4. ↑ 국명에 헤트만을 넣지 않고, 부족회의나 의회를 뜻하는 '추야크'를 넣은 이유는 카자크가 아닌 칼란드인들과의 융합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5. ↑ 이 시기에 기존 루스인들이 부르던 플렌킬린에서 프렌트킬린으로, 트바트인들이 독자적으로 부르는 명칭이 생겨났다.
  6. ↑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 원수가 안 그래도 나약한 전력을 1중 방어선, 2중 방어선으로 나누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하였으며, 타데우시 쿠트셰바 장군은 개전 초기에 우치에만 머물며 17만명의 병력이 우치에 가만히 있다가 포위까지 되었다. 심지어 개전 초기 통신에 지장이 생겨 여러 부대가 발이 묶였다.
  7. ↑ 오른쪽부터 스테판 반데라,브와디스와프 라츠키에비치,트리폰 1세
  8. ↑ 당시 플레니차 숲에는 30가구의 부락이 있었는데, 학살직전 이 부락에 살던 30가구의 주민들도 집단 학살했다. 부락 주민들에게는 총알이 아깝다는 이유로 온갖 부락의 농기구 및 도끼, 야전삽과 단검등으로의 가학 행위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