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경국

대경제국의 역사
History of the Korean Empire
大敬帝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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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경국
大敬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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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가이나라, 이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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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청성부
정치
정부 형태전제군주제->입헌군주제
입법의정부->대경국 의정원
역사
연력 
 • 개국
석명사 사건
봉은사 사건
임인해화
갑자해화
을축민란
병인해화
남북조시대 개막
구유의 난
남북조 통일, 신조정 출범
기유정변
기축옥사
임진왜란
연환대
이인좌의 난
경자정변, 제1차 경자개혁
정봉개혁
제2차 경자개혁
경술개혁
병진남정
계유개혁
황국제제
1392년
1398년
1464년
1482년
1504년
1505년
1506년
1511년
1520년
1533년
1549년
1589년
1592년
1689년~1727년
1728년
1780년
1781년
1840년
1850년
1856년
1873년
1890년
지리
1700년 어림 면적1,039,606.3km2
내수면 비율약 2%
인구
1800년 어림3915만 2000명
기타
국교유교, 애가, 가톨릭, 개신교, 불교, 등
통화기융전->태평전->유윤전->
현재 국가대경제국 대경제국

개요

대경국(大敬國)은 동북아시아에 존재하던 왕국이다.

국호

역사

국가 개괄

정치

틀:대경국 중앙통치기구틀
대경국 초기에는 재상 중심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가 후기로 가면서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대경국의 국정은 '의정부'가 총괄했으며 예하에 '기원국', '정무원', '인무사'를 두어 세부 업무를 보게 한다. 의정부의 수반은 대경국의 정부수반[1]을 겸하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있었지만 1735년에 총리대관(總理大官)이 조정의 수장이자 의정부 수반이 되고 정승제가 페지된다. 1755년에 총리대관을 보좌할 좌무대관(左務大官)과 우무대관(右務大官)이 신설되며 삼정승(三政丞)제가 폐지되고 삼대관(三大官)제가 성립되었으며 의정부가 국무원으로 개칭되자 의정부수반 총리대관은 국무원의 '국무대신'으로 개편되고 좌·우무대관들이 폐지되었으며 19세기 중반에 국무원은 국왕 직속기구로 귀속되고 내각이 국정 총괄 기구로 등장하며 내각의 수장은 '총리대신'이 되었다.
최고의결기관(의정부 서사제에 한하여)인 의정부 아래에는 집행기구 겸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10좌우가 존재했으나 6조로 개편되었고 호조의 재정 업무가 탁지원으로 대부분 이관되면서 실질적으로 5조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 국무원이 설치될때도 국무원 예하로 정식적으로 5조로 명칭이 개칭되었다가 10아문으로 개편되었다가 내각이 설치되자 내각각부로 기능에 따라 편입된다.[2]
왕을 견제하는 3사는 원래에는 사헌부, 사간원, 좌인관이었고 세종때 집현전이 비공식 3사 기관으로 있다가 좌인관과 집현전이 세조때 홍문관으로 합쳐지면서 3사가 정립된다. 이후에 왕의 재정 업무를 감찰하고 자문하는 경원국이 홍문관에서 떨어져 사실상 독주 기구가 되었지만(4사) 국무원이 설치되자 국무대신 직속의 '감찰원'으로 통합되어 편입되고 자문 업무의 홍문관은 독립기관인 원로원의 좌녀국으로 편입된다.
국왕 직속기구에는 승정원, 의금부만 존재했지만 태종때 의금부를 사법기관으로 기능을 축소시키고 군사업무를 금군부로 이관시켜 의금부, 금군부, 승정원의 3원 체제가 시작된다. 세종때 3사에 껴있던 집현전이 존재했지만 세조때 금군부가 군사업무를 담당하던 삼군부와 6조의 병조로 찢겨져 합병되고 집현전은 홍문관으로 통합되며 승정원, 의금부만 남았다가 조행개혁 시절 재정업무를 담당하는 탁지원이 국왕 직속기구로 설치되어 2원 1부 체제가 성립되고 이 체제는 19세 초까지 유지된다. 19세기 중기에는 모조리 국무원 예하에 궁내부로 편입되고 의금부만 군사업무가 따로 시위대로 편입되었으며 내각이 설치될때는 내각 예하의 궁내부로 이전되고 시위대도 궁내부 예하 근위대의 정예부대로 편입된다.
역사 업무를 담당하던 춘추관은 19세기 중기에 국무대신 직속기구인 '사록국'으로 편입되고 내각이 설치될때는 내각 각의정무대신의 직속기구인 '사의부'로 편입된다.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은 18세기 말기에 여러 사립대학과 관립대학, 민립대학이 세워지며 최고교육기관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국립대학'이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걸고 '궁육원'으로 개칭된다. 19세기 중기에 '황립 학술원'으로 개칭되고 황립 학술원이 될 시절에는 내각의 과학기술부 소속기관이 된다.

철저한 관료제 국가 수립, 허나....

대경국은 붕당정치로 전기에 엄청난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이는 고스란이 경오시대로 이어진다. 이후 명종은 철저한 관료제에 입각한 나라로 대경국을 개조했다. 이는 보다 효율적인 국가 운영과 항명(抗命), 반란들도 억제가 가능했다. 하지만 너무 중앙정부가 경직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긴급한 상황에 제대로 대처를 못하다가 결국은 임진왜란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낸다. 이후 경종이 유동적 관료제를 도입하면서 이 상황은 나아진다.

경제

대경국은 조행개혁(1545년) 이전까지는 쌀본위제를 실시했지만 조행개혁 실시 이후 연은분리법이 전국 은광에 보급되면서 막대한 은이 전국에서 채광되기 시작하자 은본위제로 교체한다. 이후 명나라가 만력제의 황제 파업이라는 희대의 막장짓과 탐라신라노토백제의 몰락이 가속화 되면서 대경국이 국제 무역허브로 성장한다. 대경국은 인천과 대련, 남포, 목포, 동래(현재의 부산)에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상인들의 무역을 허가했으며 은본위제는 금광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며 금의 물량이 급속도로 높아지는 제1제국 19세기 말에 금본위제가 실시되면서 폐지된다.
대경국은 이전 왕조인 고려조선이 상공업에 대한 장려 정책을 유지시켰다. 초기 정몽주의 개법파와 정도전의 한당파 양당의 연립정부는 실리적 경제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후 세종 시기에 구국이 대경국에 예속되면서 순지 평원이 대경국의 주요 농업 지대로 성장한다. 혜종 시절 현덕대비의 수렴청정 시기 집권한 개법파는 중농주의 정책을 펴 혜정 평원의 관개수로를 도입해서 훗날 조행개혁과 성종이 혜정 평원 농지 개간에 큰 기반이 되준다. 하지만 중농주의 정책은 개법파가 실각하고 다시 한당파가 집권하는 세조의 치세에 접어들어 폐지되고 다시 중상주의 정책이 도입된다. 그리고 세조는 상업과 수공업 발전에 막대한 재정지원을 하였으며 홍문관 예하에 '경원국'을 설치해 경제 자문책을 전문화 시켰고 특조주제를 실시하여 경제 발전 자금 지원이 많았고 상공업 발전에 초점이 맞춰진 '상공특조주(商工特助州)'에 청경, 명경, 개경, 영경, 성경, 헤경, 동래, 정주, 대련을 설정하고 농지 개간과 농업 발전, 농업 경제 발전에 자금 지원 초점이 맞춰진 '농간특조주(農墾特助州)'에는 군산, 나주, 익산, 전주, 혜경, 정주, 영산'을 설정해 '계획경제'를 연상케 하는 경제 정책을 시행했다. 남북조시대를 거치며 여러 거상들이 출현하며 중소상인들을 압박하자 조광조는 '소상경혜령'을 내려 중소상인들을 보호하였고 실리적 경제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유교적 이상 사회를 구축하려 시도했지만 조광조의 생각과는 달리 그를 지지한 중종의 사망 이후에 즉위한 인종, 명종이 유교적 이상 사회 보다는 실리정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던 애가를 수용하면서 유교는 잠시 정계에서 물러나게 된다. 전국적으로 소작농의 비율이 늘어나던 명종 치세에 명재상 김락이 제시한 정전법이 실시되어 '수조권'이 국고수조지에만 적용되도록 하여 국가 재정을 탄탄히 하는 한편 국고수조지로 경작한 대량의 농지를 소작농들에게 분배하여(애전법) 농업생산량을 늘린다. 명종 시절에 모내기법을 보급하고 북부 농경서로 '이원농록', 남부 농경서로 농사직설을 보급했다. 그리고 명종은 조행개혁때 국왕 직속 재정기관인 탁지원의 권한이 강화되고 호조 예하에 광산국으로 하여 국고광업지를 완전 관리케 하며 왕이 직접 재정 업무를 다스릴 수 있게끔 하면서 재정업무의 효율성이 극대화 된다. 또한 명종 시절 외국과의 교류가 많아지면서 각지에 외국과의 무역권을 전담하는 전권대사를 파견하여 교역의 효율성을 높이는 한편 지방의 무역권을 관장하는 전권대사를 감시하는 업무를 향시사에 맡긴다. 명종은 이외에도 재정 제도 개혁, 지방 상향소 권한 강화, 항만도시 무역관 설치, 외수사 설치, 경원국 및 농책원 자문기관 승격, 매매경장록제 시행으로 대경국의 기본 경제 질서를 확립하며 이 제도들은 대부분이 다 갈아엎어진 제1차 경자개혁까지 유지된다. 명종 시절 경제적 질서 및 제도가 확립되자 성종은 본격적으로 은본위제를 장려하였으며 '왕영상단'이라는 국립 상단들을 설치해서 제1차 경자개혁 까지 왕실 물품 납품 업무를 맡겼고 은의 물류망을 관리하는 '관은국'이 설치되어 대경국의 경제적 질서 및 제도가 완성된다.

풍성했던 경제력

대경국은 두 번의 경제호황기가 있었는데 성종 시대에 경제호황인 상주중흥·정종 시대의 경제호황기인 정정중흥이 있다. 전기 경제호황기인 상주증흥 시절에는 북정군을 통해 북방 첼라놉스크족의 침략이 호전되고 수군의 발달로 왜구의 위협이 대거 사라지면서 급격히 발달한 남방무역, 주변 경쟁자들의 몰락[3]이 겹치면서 무역 산업이 엄청난 성장을 이룬다. 특히 서양과의 교류가 많아지면서 조총과 같은 여러 서양 문물들이 유입되고 이와 함께 은이 유입되면서 대경국은 연은분리법으로 자체적으로 채굴한 은과 외국에서 유입된 은을 바탕으로 은본위제를 이룬다. 대경국의 주요 화폐였던 태평전이 대표적인 은화(銅錢)다. 무역업의 성장과 함께 상공업의 발전도 동반되었는데 성종 시기 실시된 애전법으로 국가에서 경작한 토지를 소작농에게 나눠주는 한편, 소작료 상한선을 제정하여 소작농을 지원해준다. 이에 따라 부유해진 양민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이들의 소비 심리도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상공업이 발전된 것이었다. 이렇게 상주중흥때, 경제호황은 임진왜란으로 파괴됐던 국토에 대한 재건금 마련에 큰 도움이 된다. 경제호황 덕분에 약탈도 많았다.

교통

세종 시절과 문종, 혜종, 세조에 항만이 있는 해안 도시들의 항만 시설들과 각지의 수로망과 도로망을 재정비·증축하면서 전국적으로 물류망이 통합되어 그 유명한 10로 285도 68노청이 정립되었다.[4] 대경국의 대표적인 항구도시로는 대련, 남포, 인천, 군산, 목포, 동래(부산), 강릉, 혜경이 존재했다.

사회

문화

교육

사립학교인 서당(書堂)과 조행개혁 당시 설치됐던 지방 관립학교인 '이학당(移學堂)', 국가가 운영하는 '신학당(新學堂)'이 초등교육기관으로서 존재했다. 중·고등교육기관에서 지방에는 향교(鄕校)라는 관립학교와 지국(地局)[5]이 운영하는 학정원(學正院)이 있었다. 중앙에는 4부학당이라 불리는 사학(四學)이 있었다. 이후 과거제를 통해 문관이나 무관이 될 수도 있고 기술관에 오를 수도 있다.

과거제

군사

행정 구역

신분제

대경국 초기에는 양천제에 입각한 천민-상민-중인-양반의 4신분제가 자리잡았다. 경국대전이 반포되자 반중상천제가 법제화되었지만 전란을 겪은 이후에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6] 공명첩과 납속책을 실시하여 신분 상승을 대가로 자금을 확보하기 시작했으며 양민 대다수가 상공업과 농업 때문에 공역과 부역이 힘들자 공노비들을 해방시켜 노동력으로 쓰기 시작했으며 사노비들이 공역에 투입될 수 있도록 법이 바뀌고 그 대가로 사노비들도 임금을 받게 됐는데 이때 돈을 많이 벌은 부노(富奴)층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시절에 중앙의 붕당정치로 인해 양반들이 몰락하고 그 자리를 중인과 다시금 급격한 대발전을 시작한 상공업의 상인 및 수공업자들과 농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농상들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하였으며 제1차 경자개혁으로 공노비들이 모두 해방되고 제2차 경자개혁으로 노비제도가 폐지되고 사노비들의 해방령이 내려지면서 양민들이 늘어난다. 대경국 말기인 19세기 말에 양반 대다수가 몰락하고 양민과 중인 계층이 그 공백을 매꾸게 되었으며 철종이 극소수 생존한 측근 양반들을 귀족으로 서임하면서 양반층은 귀족으로 탈피하고 양민과 중인 계층이 통합돼 평민이 된다.

역대 국왕 및 연호

대수 이름 묘호 시호 존호 연호 재위 기간
1대 이성계(李成桂)→
이단(李旦)
태조
(太祖)
위무대왕(位務大王)→
성문신무정의광덕효고황제(聖文神武正義光德孝高皇帝)
효대왕(孝大王){명나라}(폐지)
공명유민대왕(共明由民大王)→
위민태성황제(委民太成皇帝)
위무선명대왕(位務線明大王){명나라}(폐지)
조원(朝元)
{1392년 개원}→
명치(明治)
{1394년 개원}→
경요(炅曜)
{1398년 개원}
1392년~1400년
2대 이방석(李芳碩)→
이휴(李烋)
정종
(定宗)
경무대왕(暻務大王)
신의왕(臣宜王){명나라}
공무선원청대왕(公務宣援淸大王) 원화(元和)
{1401년 개원}→
순의(順義)
{1404년 개원}→
명덕(明㤫)
{1408년 개원}
1400년~1410년
3대 이제(李禔) 태종
(太宗)
연성효무대왕(然晟孝務大王)
호무왕(護務王){명나라}
경명조무대왕(暻明朝務大王) 대의(大意)
{1411년 개원}→
공평(共平)
{1414년 개원}→
승원(昇元)
{1416년 개원}
1410년~1418년
4대 이도(李祹) 세종
(世宗)
영문예무인성명의무대왕(英文睿武仁聖明義務大王)
장헌왕(莊憲王){명나라}
금원영무대왕(錦源營務大王) 문경(文暻)
{1419년 개원}→
정성(正性)
{1425년 개원}→
유진(由眞)
{1430년 개원}→
이덕(利德)
{1433년 개원}→
영력(瑛歷)
{1440년 개원}→
복견(福遣)
{1443년 개원}→
경공(輕恐)
{1448년 개원}
1418년~1450년
5대 이향(李珦) 문종
(文宗)
금문자효대왕(金文子孝大王)
대효왕(大孝王){명나라}
인숙광무대왕(仁肅光務大王) 경효(暻效)
{1451년 개원}
1450년~1453년
6대 이홍위(李弘暐) 혜종
(惠宗)
정헌강덕대왕(正憲强悳大王)
헌위왕(獻位王){명나라}
대헌경무대왕(大憲更務大王) 중정(中整)
{1454년 개원}→
장위(長爲)
{1457년 개원}→
정덕(正悳)
{1461년 개원}
1453년~1464년
7대 이유(李瑈) 평종
(平宗)
승천열무대왕(承天劣務大王)
혜장왕(惠莊王){명나라}
제도강무대왕(製道强務大王) 경무(敬務)
{1465년 개원}→
송덕(頌悳)
{1468년 개원}→
무희(務熙)
{1470년 개원}
1464년~1471년
8대 이현(李琄)→
이요(李嶢)
공종
(恭宗)
제오윤무원의대왕(際旿尹務元毅大王)
보언왕(補言王){명나라}
숭정태무대왕(崇正跆務大王) 자덕(慈悳)
{1472년 개원}→
자예(資睿)
{1480년 개원}→
명소(明昭)
{1488년 개원}→
환휘(奐輝)
{1491년 개원}
1471년~1494년
9대 이융(李隆) 연산군
(燕山君)→
연산대군
(燕山大君)
목종
(穆宗)
정친왕(正親王)→
진성봉민대왕(眞晟逢民大王)
양헌왕(讓獻王)→
현소왕(炫昭王){명나라}
신성소무대왕(申成昭務大王) 정문(正文)
{1495년 개원}→
신정(申政)
{1500년 개원}→
요희(曜熙)
{1502년 개원}
1494년~1504년
10대 이훤(李暄) 덕조
(德祖)
영위체평금무대왕(營爲替平昑務大王)
예영왕(例領王){명나라}
조은공무대왕(造恩供務大王) 도문(道文)
{1504년 개원}→
성계(聖鷄)
{1507년 개원}
1504년~1508년
11대 이역(李懌) 중종
(中宗)
휘문소무흠인성대무대왕(徽文昭武欽仁誠大務大王)
공희왕(恭僖王){명나라}
휘무대왕(輝務大王) 명치(明治)
{1509년 개원}→
명휘(明輝)
{1513년 개원}→
기순(氣順)
{1538년 개원}→
호혜(浩慧)
{1544년 개원}→
진무(陳撫)
{1547년 개원}→
경공(輕恐)
{1550년 개원}
1508년~1549년
1550년~1551년
12대 이호(李峼) 인종
(仁宗)
장숙흠성헌문의무대왕(章肅欽省獻文懿務大王)
영정왕(榮靖王){명나라}
인무대왕(仁務大王) 건평(建平)
{1552년 개원}→
흥휘(興輝)
{1555년 개원}→
유의(由宜)
{1560년 개원}→
혜명(慧明)
{1564년 개원}
1551년~1569년
13대 이환(李峘) 명종
(明宗)
영운헌의광숙경효대왕(領運獻毅光肅敬孝大王)
공헌왕(恭憲王){명나라}
제일옹무대왕(製逸邕務大王) 태원(太元)
{1570년 개원}→
대원(太元)
{1570년 개원}→
명측(明側)
{1573년 개원}
1569년~1574년
14대 이연(李昖) 성종
(成宗)
경명신력영천배흠진태소명효원대왕(暻明新力營遷排欽眞太蘇明孝元大王)
명경왕(明暻王){명나라}
당무대왕(當務大王) 명원(明元)
{1575년 개원}→
보성(保性)
{1586년 개원}
1574년~1592년
14대 이혼(李琿) 유종
(裕宗)
제도성천인렬영서백무대왕(製道晟天仁劣瑛瑞白務大王) 정천애무대왕(正川愛務大王) 함평(咸平)
{1593년 개원}→
경덕(炅悳)
{1560년 개원}
1592년~1623년
15대 이희(李凞) 열종
(劣宗)
의애금흥태평수부제친호영경명무대왕(義愛昑興太平守府諸親好領暻明務大王) 영무대왕(領務大王) 주강(主强)
{1624년 개원}
1623년~1626년
15대 이준(李準) 백종
(白宗)
명원찰평원치대흥서무대왕(明元察平元治大興瑞務大王) 봉무대왕(逢務大王) 경력(慶曆)
{1627년 개원}
1626년~1659년
16대 이숙(李淑) 현종
(賢宗)
경의자숙소휴연경순문숙무대왕(暻意慈淑昭休衍慶純文肅務大王) 인원전무대왕(仁援全務大王) 단평(端平)
{1660년 개원}
1659년~1674년
17대 이순(李焞) 숙종
(肅宗)
현의광륜예성영렬영운홍인준덕경정신의대훈장문헌무대왕(顯義光倫睿聖英烈永運洪仁峻德耿正神毅大勳章文憲務大王) 인무자효대왕(仁務慈孝大王) 경의(炅儀)
{1675년 개원}
1674년~1720년
18대 이윤(李昀) 경종
(景宗)
덕문순인정명문창익무대왕(德文純仁正明文彰翼務大王) 기의민유대왕(企義民有大王) 명덕(明悳)
{1721년 개원}
1720년~1724년
19대 이금(李昑) 영종
(瑛宗)
문인무인장휘숙명강언통무대왕(文人武人長輝淑明强言統務大王) 영천신무대왕(煐大王) 정덕(炡悳)
{1725년 개원}
1724년~1776년
20대 이산(李祘) 정종
(正宗)
경천명도홍덕현희민덕정현무대왕(敬天明道洪德顯熙民悳正賢務大王) 제원금무대왕(製院昑務大王) 숭정(崇禎)
{1777년 개원}
1776년~1814년
21대 이공(李玜) 순종
(純宗)
명친제도무희경정혁무대왕(明親製道武凞暻晶奕務大王) 숭무대왕(崇務大王) 신덕(申禎)
{1815년 개원}
1814년~1827년
22대 이영(李旲) 간종
(簡宗)
연원명문대희사건교홍석지무대왕(硏援明文大熙思建矯弘晳志務大王)->
연원명문대희사건교홍석경위우명휘성시공문영규수희종무효예황제(硏援明文大熙思建矯弘晳炅威祐明輝成施供文瑛揆受熙終務孝叡皇帝)
성무대왕(晟務大王)->성무시원황제(晟務示元皇帝) 유휘(有熙)
{1829년 개원}
1827년~1843년
23대 이환(李烉) 헌종
(獻宗)
인의광숙재면금위선평환성대왕(仁意廣璹在免昑威宣平奐晟大王)->
정명영신제효준지공무사희신시안평효경황제(正明領臣製孝遵之共務事熙信施安平孝敬皇帝)
시무소문대왕(施務昭文大王)->경덕이무황제(敬悳理務皇帝) 의덕(義悳)
{1844년 개원}
1843년~1849년
24대 이변(李昪) 철종
(哲宗)
지운계신양재규봉세평이신윤무대왕(智韻契申亮渽揆奉世平利申尹務大王)->
서인지충명인대훈서장기숙태헌위민경무효명황제(瑞人地沖明璘貸訓胥張氣淑太獻爲民炅務孝明皇帝)
민애진무대왕(民愛陳務大王)->신성경민황제(申晟暻民皇帝) 자덕(慈悳)
{1850년 개원}
1849년~1864년

대경제국 제1제국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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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연표

미디어물에서

기타

각주

  1. 당시 정부인 조정의 수반이라 부르던 정수(政守)라는 직책은 1605년에 제정되었다.
  2. 예로 재정업무를 담당하던 재무아문은 재무부로, 교육업무를 담당하던 학무아문은 교육부로
  3. 명나라만력제의 파업으로 국정이 마비됐고 일본은 알다시피 전국시대를 겪고 있었으며, 탐라신라노토백제는 일본 다이묘들의 침공과 왜구들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퇴한다.
  4. 고려 시절에는 조선, 구국, 고려의 교통망이 엇박자였기에 이 시기에 나뉘었던 물류망이 정리된다.
  5.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로 파견된 지역의 토지 측량 업무를 맡았지만 성종 이후에는 파견된 지역에 교육 업무를 특별히 맡아보는 관직으로 바뀌었다.
  6. 당시 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국고가 죄다 국토 재건에 들어가면서 어느정도 국토가 재건됐지만 자금이 펑크가 나버리자 짜피 향후 국가 운영을 위해서라도 자금의 필요성이 절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