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연방(MOONSTAR)/역사

개요

이 문서는 러시아 연방(MOONSTAR)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빈트제국 이전

적백내전

1917년 10월 25일 볼셰비키 정부군인 적군과 반혁명군인 백군의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시베리아 토볼스키에 있던 니콜라이 2세는 이러한 전쟁이 발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과 함께 은밀히 토볼스키를 탈출하여 백군의 수장을 만나러 간다. 초반 백군은 전쟁에서 승승장구를 하였지만, 병력에 차이가 너무 심해서 전쟁에서 우위를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니콜라이 2세는 1918년 2월 14일에 공식적으로 세상 속으로 드러났고, 니콜라이 2세가 지난 자신의 일을 반성하는 연설문과 앞으로의 러시아제국이 펼칠 정책들을 외신 기자들을 통해 발표하였다. 국민들은 이러한 황제의 모습에 손을 들어주었고, 점점 백군의 수는 늘어났고 곧 이는 전쟁에서 우위를 잡게 되었다. 더불어 다양한 국가에서 백군을 지원하고 있어, 점점 적군은 밀려나기 시작했다.

황실복귀

1921년 3월 27일 카잔에서 백군은 "카잔 대첩"을 성공시킴으로써, 적군의 주요 인사를 포함하여 적군의 다수를 몰살시켜 마침내 황제는 다시 모스크바에 입성을 성공하였다. 니콜라이 2세는 모스크바에 입성하자마자 국민들을 위한 정치 정책을 제공하였고, 모든 국민은 황제의 달라진 모습에 감동하며 "적군은 물러나라"라고 제창했다. 1923년 11월 9일에 적백내전은 실질적으로 마무리했고, 백군은 적군의 잔당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에 성공했다. 황제는 이 날에 황실의 자산을 이용하여, 모스크바 인근에 백성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였다. 이는 다시는 백성들을 무시하지 않겠다는 황제의 의지가 들어난 사건이었다.

빈트귀족의 대두

1928년 7월 2일 니콜라이 2세는 60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곧 국가에서는 대규모 장례가 치뤄졌다. 장례가 끝나는 데로 알렉세이 황제는 24살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알렉세이 황제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사치 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고 대외 순방과 국내 정치 안정을 위해 힘썼다. 더불어 모스크바 출신의 귀족 집안인 "빈트귀족"의 인사를 차례로 등용하여, 러시아 제국의 번창을 위해 힘썼다. 그 결과 러시아 제국은 점차 안정을 되 찾았고, 황실과 국민의 조화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빈트귀족"에 힘이 컸으며, "빈트귀족"을 지원해주고 믿어준 알렉세이 황제의 역할 또한 컸다.

혼란의 수습

1937년 황제는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으며, 죽음의 이유는 혈우병이였다. 혈우병을 어렸을 때부터 앓고 있었던 알렉세이는 결국 장수를 하지 못했다. 알렉세이 황제가 죽은 후 러시아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알렉세이 황제에게는 딸 밖에 없었으며, 알렉세이에게는 누나들 밖에 없었다. 결국 러시아제국은 빈트귀족을 주축으로 소집된 "대책마련위원기구"를 설립하였고, 빈트귀족은 알렉세이의 딸을 여왕으로 초대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은 알렉세이의 딸이 아직 7살이라는 점에서 반대를 하였고, 알렉세이의 첫째 누나인 올가의 남편을 왕으로 초대하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빈트제국은 이에 동의를 하였고, 올가의 남편을 왕으로 초대하여 다시 러시아제국에는 안정이 찾아왔다.

2차 세계대전

1939년에 체결된 러시아-독일과의 불가침 조약을 깬 독일 나치군이 러시아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초반에 전술적 우위를 뺏기기 시작하면서, 1940년 러시아 제국의 영토 중 서쪽 일대를 독일 나치군에게 내주게 되었다. 그 후 러시아제국은 모스크바에서 뼈를 갈면서, 대규모 전차부대와 보병부대를 양성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규모 전투를 진행하였다. 이 때 아군 및 적군의 사상자는 100만명을 넘길 정도로, 엄청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제국은 나치군을 크게 격퇴하였고, 이 과정을 통해 러시아제국이 다시 우위를 잡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러시아제국은 서쪽영토를 되찾았았고, 동유럽을 향해 진격하여 복수의 혈전을 시작하였다. 전쟁은 1945년 베를린 전투를 끝으로 마무리 되었고, 독일의 동쪽은 러시아제국의 군대가, 서쪽은 연합국의 군대가 배치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은 동독과 서독을 만드는데 이바지 하였다. 세계 2차대전에서 승전국이 된 러시아 제국은 한동안 미국과 양대산맥을 이루어 냉전시대를 시작하였다.

냉전시대

러시아제국은 제국주의를 제창하며, 국가가 황제에 의해 단결되어야 한다고 국민들에게 교육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미국과 러시아제국은 서로의 국방과 항공기술을 자랑하며, 정치적인 선동에 이를 이용하였다.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던 러시아제국에는 1987년에 갑자기 큰 위기가 찾아왔다. 황제가 90살이 넘도록 장수하자, 황태자가 자신의 아버지인 황제를 폐위시키고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황태자는 볼고그라드를 기반으로 반란군을 조직하였고, 황제는 이러한 황태자의 모습에 화가 나 계엄령을 선포하고 본격적인 전쟁에 나섰다. 초반 다수의 외신과 국내의 여론은 황제가 황태자를 손쉽게 진압할 거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황태자는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의 독립을 약속하면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간청했고, 곧 이는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지역의 민족이 황태자를 도와 주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러시아제국의 다양한 지역에서 독립을 주창하였고, 황실의 권위는 갈수록 바닥을 쳤다. 이 때 "빈트귀족"은 모스크바에서 빈트혁명당을 조직하였고, 내부 안정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였다.

빈트제국 설립

하지만 이는 시간이 갈수록 효과가 없었고, '빈트귀족은 이대로는 안되겠다라.'고 생각하며 혁명을 준비하였다. "빈트귀족"은 당시 모스크바에 위치하고 있던 친위대와 군인들을 설득하여 비교적 빠르게 자신의 편을 구축하였고, 그 동안 쌓아놓았던 부를 베풀면서 국민들에게 "빈트혁명당"을 우호적인 정당으로 인식될 수 있게 도왔다. 혁명은 4년에 걸쳐 준비되었고, 1992년에 마침 황제가 100살에 가까운 나이로 자연사를 하였고, 혁명은 바로 실시 되었다. 황태자는 황제가 죽자 자신의 세력을 모스크바로 이동시키며 자신의 즉위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빈트혁명당"소속 부대인 "혁명특수군"은 황태자를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80K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황태자를 암살하였고, 황태자의 세력은 자연스럽게 해산되었다. 혁명을 성공시킨 "빈트귀족"은 국민들의 지지속에서 러시아 제국이라는 이름을 빈트제국이라고 개칭하였고, "빈트귀족"의 수장인 이바노프는 국민과 귀족의 열혈한 지지속에서 빈트제국의 제 1대 황제가 되었다.

빈트제국 설립 이후

이바노프 치세

이바노프 황제는 그동안 문제가 많았던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의 독립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총독부를 설치하는 조건으로 다양한 왕국과 공국을 설립해주었고, 이 국가를 지원해주었다. 이로써 점점 빈트제국은 전제군주제의 기반을 잡아가며, 안정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곧 민주계 인사가 국가를 상대로 민주화를 요구하였고 곧 황실은 이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단호하게 처벌을 가했으나 외신들의 비판, 민주주주의 확산은 이를 극복하였다. 결국 빈트제국은 입헌군주제로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국가를 번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바노프 퇴위와 러시아 연방의 등장

한동안 전성기를 맞은 빈트제국은 역대급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무기를 연구 중이었던 이바노프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세계는 실망하였고 이는 빈트제국의 불명예와 직결되었다. 또한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가 마비되었으며 많은 국가가 독립을 요구하였다. 결국 이바노프 황제는 바닥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황실의 금고를 열지만 국민들의 신의를 얻기에는 부족하였다. 이바노프 황제는 큰 혼란과 마비 속에 있는 빈트제국을 살리고 싶었으나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침내 2018년 8월 16일, 이바노프 황제는 유언을 작성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 죽음을 알렸고 곧 빈트제국의 황제는 국민들의 지지 속에서 바뀌게 되었다.

알렉세이 2세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바노프 황제에 이어서 알렉세이 2세 황제가 즉위하였지만, 알렉세이 2세는 이바노프의 죽음과, 국제적 혼란으로 인하여 급성 심장마비가 왔고, 결국 즉위한지 3일만에 사망하게 되었다. 그렇게 빈트제국은 붕괴되어 갔고, 많은 외국인들은 빈트제국이 국제적 고립이 될 것으로 예상되어 빠져 나왔고, 국민들은 국민권을 포기하고 난민으로 다른 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빈트제국 붕괴 이후

빈트제국이 붕괴 된 이후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재건회의 시작

빈트제국이 붕괴된 이후 빈트제국 초기 인물인 마르코는 남아있는 빈트제국의 국민들을 모았다. 세계 각국으로 이 소식이 퍼지게 되면서 다른 나라 인물들도 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난민의회로 재건회의가 시작되었으며 빈트제국의 난민들이 주요 의원들이 되었고, 제 3세계 인물들이 나머지를 이루었다.

정부의 출범

새로운 정부는 빈트제국이 아닌 러시아 제국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체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황제와 총리, 그리고 '난민의회'의 3각 체제였다. 황제는 알렉세이 2세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빈트제국 황족이었던 바실리 표트르 대제였다.

총리는 난민이 되어버려서 황폐해졌기 때문에 전국에서 지원자를 받아 선출했다. 그 결과 미하일 칼리닌이 총리를 맡게 되었다. 최근 들어 이 형식의 총리 선출은 진정한 총리가 아니라는 국민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주권은 난민의회가 가지고 있었고, 황실은 절대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대한국 보호계약 사건

러시아 연방 정부 수립 이후 최대의 사건

그러던 중, 대한국이라는 국가가 러시아 제국에 접근하였다. 대한국은 러시아 제국의 마르코(후에 총리가 되는 그 인물 맞다.)에게 접촉해 회담을 추진하였다. 그렇게 회담에서 대한국의 한비자는 보호계약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보호계약 내용은 아래와 같다.

  • 1. 대한국은 200운드 어치의 대한국 화페인 "양"을 지급한다.
  • 2. 러시아 연방은 파견대사에게 부매니져직위를 부여한다.

보호계약은 러시아 연방의 주권과 "양"을 교환하는 조약이였던 것이고, 많은 국민들이 반발하여 큰 외교적 손실을 안고 계약을 취소하였다.

마르코 정권의 수립

미하일 칼리닌이 총리직을 내려놓게 되자, 칼리닌에 이어 두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마르코가 총리를 맡게 된다.

마르코 정권은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마르코는 국가를 정상적으로 운영하려고 하지 않았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내각을 축소시키고, 러시아 연방UVN 국제연합 가입 역시 반대를 했다. UVN에 가입하지 않으면 교류도 없고 어쩌면 러시아 연방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였을 것이다.

바실리 표토르의 사망과 4대 황제의 탄생

바실리 표토르황제가 사망하게 되면서 그 뒤를 이을 황제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바실리 표토르는 아들과 딸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 투표로 빈트제국과 가장 가까웠던 인물들이 황위를 놓고 겨루었다.

MOONSTAR는 당시 빈트제국에서 빠져나왔다가 러시아 제국의 수립때 변장을 하고 나타났고, 선거때 모습을 드러냈다. MOONSTAR는 당시 국민들이 괭장히 싫어했다. 그 이유인즉슨, 러시아 제국에서 도망가고 재건회의도 오지 않고 빈트제국을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MOONSTAR에 대한 당시 국민들의 반응

빌헬름은 러시아 제국을 버렸다는 MOONSTAR에 비해 국민들에게 확실히 인정받았다. 여론조사에서도 81%의 지지율을 가지고 있었다.

이 둘은 모두 이바노프에 의해 빈트제국 황족으로 충분히 공인되었기 때문에 선거에 나올 수 있었다.

다만 황제 선출 선거에서 아나톨리가 선거글을 폭파하여 빌헬름의 당선이였던 선거가 재선거로 MOONSTAR가 당선되었다. 빌헬름은 "이의 제기가 가능하지만 꺼지겠음" 이라고 발언하였다. 그렇게 MOONSTAR가 당선되었고, Moonstar Alexei Romanov-Bint 황제가 탄생되었다.

다만 황제로 선출되었어도 국민들에게 비호감이였던 것 같다[1]

= 러시아 연방으로 국명을 바꾸다

이하작성중

각주

  1. 이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