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무교
巫敎 | Muism, Korean Shamanism
100%
의식무용 중 하나인 '무당춤'을 추고 있는 무당
창시 자연발생(샤머니즘, 애니미즘, 토테미즘)
시작 시기 기원전 2천년기 이전
신에 관한 사상 다신론
성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왕산 국사당
강원특별자치도 태백시 태백산 천제단
인천광역시 강화군 마니산 참성단
세계관 한국 신화삼교적 요소 등 혼재
규모 무속인 약 30 ~ 50만명

개요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되는 한국의 전통신앙.

무교(巫敎)

무교는 한국의 무속신앙을 타 종교와 대등한 종교 현상으로써 인식할 때 사용하는 명칭이다.[1] 무속(巫俗)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는 무속신앙을 종교로 보지 않고 좀 더 격이 낮은 미신으로 취급하는 역사적 천시의 의미가 내포 되어 있기에,[2] 무속신앙을 종교학의 입장에서 바라 보는 동시에 존중과 배려를 표현하기 위해서 무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무당은 고유어로, 과거에는 한자를 빌려 巫堂으로 적었다. 격覡은 박수라는 뜻으로, 남자 샤먼을 뜻한다.[3][4]

무(巫)·격(覡)이 사용 하는 무구(巫具)로는 장구 자바라 따위 악기 포함 하여 신 내리게 하는 가지인 내림대, 원귀(冤鬼)의 한(한恨)을 달래는 방울, 잡귀(雜鬼)를 쫓는 부채, 칼, 작두 등이 있다.

무(巫)란 무속신앙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표현 하기 위한 또 다른 용어다. 무(巫)의 경우 해당 신앙에 대한 가치표현을 나타내는 표현이 부과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무교나 무속에 비해 가치중립적인 표현으로 해석 되며, 무업에 종사 하거나 무를 신봉 하는 이들에게 주로 쓰인다. 무교가 해당 신앙의 모든 현상을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종교학적인 관점에 한정된 개념이라는 점에서 '무'가 '무교'보다 좀 더 넓은 의미로 해석 될 수 있다.[5]

현대인들은 이 종교를 '무속', '무속신앙', '무교' 등이라고 부르지만 이 종교에 이런 이름이 생긴 것은 지금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일제강점기시기이다. 당시 역사학자 이능화가 수천년간 특정한 이름이 없었던 이 종교에 '무속(巫俗)'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했고 개신교 신학자 유동식이 '무교(巫敎)'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며 인류학자 조흥윤은 '무(巫)'라고 했다. 태고적부터 한민족의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 다양한 형태로 녹아들어 있었던 민속 종교였기 때문에 이 종교에 고유한 이름을 붙이고 엄밀한 하나의 고유 종교로서 구체적으로 재정립한 시기가 비교적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신화

역사

무교의 역사는 고조선 시기에서부터 이미 존재했다. 단군신화에서는 환웅신시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신시는 제왕이 하늘에 제사를 하는 장소이자 굿당으로, 환웅과 단군왕검은 제천의식을 주관 한 무당으로 해석 할 수 있다.[6][7] 상고시대의 무교는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 되었기에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무당들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신라에서는 무당을 왕자의 호칭으로 삼았고(남해 차차웅), 고구려에서는 사무(師巫)라는 명칭이 있었다. 가장 오래 된 대한국 제례나 풍속의 기록으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이 있다. 마한천군·소도, 동예의 무천, 부여영고, 고구려동맹이 모두 당신의 제례다.[8] 원래 그 위상이 높았던 무교는 후세에 문화가 진화하고 거기다 유교·불교·도교를 비롯한 외래 종교들이 들어오자 점차 쇠락하며 다른 종교와 융합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며 특히 공통점이 강한 도교와 융합이 이루어졌고, 불교, 유교와 영향을 주고받았다.

삼국시대에서의 무속은 시조제[9], 농신제[10], 산천제[11]의 모습으로 나뉘어져 전승 된다. 삼국통일 이후로도 신라의 왕들은 새해를 맞이 하여 시조제를 지냈는데, 이는 그들이 하늘의 자손임을 나타내는 의례였다. 국가나 공동체 차원의 제천의식이 아닌, 액운과 질병을 쫓아내기 위한 개인적인 목적의 굿은 통일신라 후기부터 역사서에 처음으로 언급되기 시작하는데, 처용무가 그 예이다.

고려에서도 황실의 안녕과 복을 비는 공적인 제천의식과 예언적 기능을 갖춘 무속이 자리를 잡았다. 두두리와 같은 토착신 숭배도 기록되어 있으며, 헌종, 예종, 인종 때에는 무속인들을 모아서 기우제를 지냈다. 특히 인종 때는 무속인들의 세력이 매우 커졌는지, 무속인의 말을 듣고 왕이 이자겸의 처자식을 우대했다든가 벽골제의 둑을 헐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를 좋지 않게 본 조정의 신료들이 무속인의 세력을 견제하려 한 흔적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충렬왕 때부터는 강신으로 인해 무속인이 된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 곳곳에서 등장하며, 그 당사자는 남녀나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동국이상국집》에 기록된 고려 시대의 굿 묘사는 현대의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조선 전기까지도 국무당을 비롯 한 산천에서 국행 및 내행기은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국가 운영의 주요 이념이 되어 무교도 최소한 권장되지는 않는 것이었고[12] 사회적 영향력이 다소 축소되었다. 그에 따라 민간의 신앙으로만 존속되어 왔다. 일제강점기대한민국 시대에 들어서서는 미신타파라는 이유로 탄압을 받기도 했다. 북한에서도 공산주의 이념과 국가 무신론에 따라 무교는 미신이라며 단속대상이고[13] 연변에서도 무교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중국의 공산주의 이념과 문화대혁명에 따라 미신타파, 구습이라며 탄압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천년 동안 특정한 이름이 없었던 이 종교에 '무속', '무속신앙', '무교'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탄압을 받으면서도 드디어 고유한 이름을 갖추고 하나의 엄밀한 종교로서 정체성을 확립한 것이다. 지금은 전통 문화/종교 보전 의식이 확대되어 탄압을 가하는 경우는 사라지고 연구와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무교는 다른 나라의 모든 종류의 신령을 모실 수 있을 정도로 유연성과 포용력이 높은데, 대표적인 예로는 도교, 불교, 유교의 신령들을 받아들인 것 뿐만 아니라 근대에 이르러서는 예수(!), #조지 워싱턴, #더글러스 맥아더[14], #잔 다르크 등 예수를 믿는 서양 인물들을 무신(巫神)으로 숭배하는 무당들도 있는 모양이다.


  1. 차옥승. 한국인의 종교경험 무교. 서광사. 1997: 15~16.
  2. 조흥윤. 巫와 민족문화. 1994: 95
  3. 무당과 박수의 어원은 불분명하다. 국어학자 서정범 교수는 무당이 '묻-(묻다:問) + -앙(접미사)'에서 유래하였다고 추측하였다.참조 박수는 알타이 제어에서 남자 무당을 부르는 명칭과 흡사하기 때문에 여기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자 무당은 만주어에서 faksi, 나나이어에서는 paksi, 어웡키어에서는 baksi, 몽골어에서는 baksi 혹은 balsi, 튀르키예어에서는 baksi, 키르기스어에서는 baksa로 불린다.참조.
  4. 심방은 무당의 제주도 사투리인데 '신방(神房)'의 자음동화인 것으로 추측된다.참조. 또한 과거에 무당을 부르던 옛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라진 말이다.
  5. 차옥승. 한국인의 종교경험 무교. 서광사. 1997: 15~16.
  6. 박일영. 한국 무교의 이해. 분도출판사. 1999: 22
  7. 해석하자면 제정일치 사회였던 것이다.
  8. 이능화. 조선무속고. 창비. 2008: 71~72
  9. 시조에게 드리는 제사
  10. 풍년을 기원 하는 제사
  11. 산과 강에 드리는 제사
  12. 유교는 이를 괴력난신이라 하여 무교뿐 아니라 불교도 억제하고 중국식 도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여러 조선시대 민속 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종교들을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 같은 경우에는 초기에는 이와 같이 민간 신앙의 영역으로 탄압의 대상이 아니었으나, 제사를 금지하는 등 유교와 정면으로 대치되었고, 이후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역적 행위를 저지른 탓이 크다.
  13. 물론 남한과 마찬가지로 점을 보거나 무당을 찾아다니는 경우는 많다. 비록 몰래지만.
  14. 웹툰 도사랜드에서도 다룬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