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조나당 뒤푸르

샤를 조나당 뒤푸르 (프랑스어: Charles Jonathan Dupours, 1880년 5월 6일 ~ 1956년 1월 20일)는 에마뉘엘 제국, 자유 에마뉘엘의 정치인이다.

생애

아미앵 출신으로 소르본 대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산업부 장관, 에마뉘엘령 인도차이나 총독, 조선국 총독, 에마뉘엘의 거국연랍내각 총리를 지냈다. 본래 국민의회 의원 중에서 총리를 지명해야 하나 거국연립내각 구성을 추진하던 보수당<!—프랑스 공화당 포지션—>과 사회당 양당의 갈등으로 차질이 빚어져 상원으로 넘어갔고, 상원의원들의 추천을 받은 뒤푸르는 최초로 비(非)의원 출신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병탄과 무제한 군비확충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1939년 나치 독일이 에마뉘엘 침공을 감행하자 에마뉘엘 제국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노르망디 철수 작전 당시 영국군의 보호를 받아 런던으로 피신, 샤를 드 골 장군 등과 함께 자유 에마뉘엘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뒤푸르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자유 에마뉘엘군 조종사로 참전한 외아들 장이 목숨을 잃었다.

본토 수복 이후 고향 아미앵에서 여생을 보냈다. 드 골 총리가 여러번 연락을 취해 “지난 날의 과오를 만회하자”며 중직을 맡기고자 하였으나 본인의 고사와 국민의회의 반발로 수포로 돌아갔다.

손자인 앙투안 조나당 뒤푸르는 패션 브랜드 뒤푸르의 창업자이다.

조선국 총독

1927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국 총독을 지냈다. 이 시기 조선국 총독부의 방침은 친임 인사의 양성과 여론 획책으로 대표되며 훗날 민족 분열 통치로 불리우게 되는데, 뒤푸르는 이와 같은 분열 통치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식산 정책 또한 병행하여, 광활한 프랑스 평야에서 잘 자라는 밀과 벼 종류들을 호남평야에 파종해 쌀 생산량을 늘리고자 하였으나 이는 군량미를 늘리기 위한 것으로 한반도 민중들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정책이었다. 그리고 석회질 토양인 유럽 지역에서 잘 자라던 곡류들은 한반도 토양에 정착하지 못하였고, 개간지를 늘린다는 명목 하에 산지 훼손만 심해진 채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뒤푸르는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 참고인으로 출석해야 했다. 본인 임기의 정책들은 “식민지에서의 권한 행사”라는 식으로 해석되었으나, 후임자인 루페르 앙리 드 퐁자크 총독이 무단으로 에마뉘엘 제국을 배신하고 비시 프랑스나치 독일을 지원하였기 때문에 (대소비에트 총동원령, 조선국 유대인 추방령 등) 이와 관련하여 뒤푸르의 지시가 있었는지, 나치와의 접촉이 있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상술한 조선국 총독부와 나치 간의 연합이 드 퐁자크의 독단적 판단으로 결론내려지면서 뒤푸르는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한동안 그는 나치와 손을 잡았느냐에 대한 의혹에 시달려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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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 총독
Gouverneurs de Coré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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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2대3대4대5대
드 토르슈
(1866 ~ 1875)
랑페르주
(1875 ~ 1883)
뮈라
(1883 ~ 1890)
브누아
(1890 ~ 1895)
그리솜
(1895 ~ 1903)
6대임시, 7대8대9대10대
베르텔레트1
(1903 ~ 1909)
가스통1
(1909 ~ 1917)
드 카페
(1917 ~ 1919)
드 부르봉
(1919 ~ 1927)
뒤푸르1
(1927 ~ 1938)
11대
드 퐁자크2
(1938 ~ 1945)
: 임기 중 사망, 1: 에마뉘엘 왕국 총리 역임, 2: 나치 독일에마뉘엘 점령 (1939년) 이후 비시 프랑스 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