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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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ישוע | Ἰησοῦς Χριστός | Iesus Christus
예수.webp
하기아 소피아의 모자이크
〈전능하신 그리스도(Χριστὸς Παντοκράτωρ, Christos Pantokratōr)〉[1]
출생
기원전 7~2년 추정[2]
로마 제국 헤로데 왕국 베들레헴
(現 팔레스타인 베들레헴)
사망
서기 30년 4월 7일
또는 서기 33년 4월 3일[3] (향년 33세)
로마 제국 유다이아 속주 예루살렘 골고타
(現 이스라엘 예루살렘 골고타)
부활
서기 30년 4월 10일
또는 서기 33년 4월 6일
로마 제국 유다이아 속주 예루살렘 정원 무덤
(現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묘교회[4])
승천
서기 30년 5월 19일
또는 서기 33년 5월 15일
로마 제국 유다이아 속주 예루살렘 감람산
(現 이스라엘 예루살렘 감람산)
가족관계
외조부
요아킴
외조모
성 안나
아버지
성부 하느님[5]
나자렛의 요셉
어머니
성모 마리아
형제자매
예수의 형제 야고보[6]
요세(혹은 요셉)
유다[7]
시몬[8]
신원 불명의 두 명의 자매[9]

개요

예수서력기원 무렵 로마 제국팔레스티나 지역에서 태어나고 활동했던 이스라엘의 현자[10]이자, 예언자[11]이며,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창시자이다.

각 종교에서 보는 예수

  • 그리스도교에 의하면 온 인류의 구세주(메시아)이자 성부(聖父), 성령(聖靈)과 다른 위격(페르소나)이되 본질(essence) 및 본성(nature)은 같은 자로, 그의 실체(substance)는 이다.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선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진 책의 진(眞)주인공이며 책의 전반부 자체가 이 사람의 등장에 대한 복선이다.[12]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100% 거짓 없는 신이면서 또한 100% 거짓 없는 인간이며, 창조되지 않은 자,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6일 만에[13] 창조한 자이다. 그는 창조주임에도 피조물들을 위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어 죽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론. 물론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초기 그리스도교 종파도 있었지만 일찍이 사라졌다.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그리스도교 종파들은, 서방의 가톨릭이든, 동방의 정교회이든, 이집트의 콥트 교회이든, 에티오피아 정교회이든, 네스토리우스파의 후예인 아시리아 동방교회이든 간에 구체적인 해석은 갈릴지언정, 삼위일체의 기본 개념, 즉 세 페르소나가 한 실체를 이룬다는 교리는 공유한다. 또한 이 기본 개념에 대한 정의도 콘스탄티누스 1세 때 나온 것이라 늦은 감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엄밀한 정의가 늦게 나왔다는 뜻이지, 삼위일체 개념 자체가 갑툭튀한 것은 아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성부와 동질성을 가진다고 해석될 구절이 많았고, 반대로 구분을 암시하는 듯한 구절도 많았다. 여기서 양극단[14]을 우선 쳐내고, 그리스 철학을 통해 복음서의 고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고 한 결과물이 지금의 삼위일체 정의이다.
  • 이슬람에서는, 24번째(마지막 예언자 이전 최후)의 신성을 가지지 않은, 신도 신의 아들도 아닌 인간인 위대한 예언자로 묘사된다. 쿠란에 따르면 예수는 다만 특별히 죄가 없는 인간이며, '하늘로 승천하였다'라고 하지만 이슬람교에선 이를 신이 영광스럽게 했다고 해석한다. 이슬람에서 예수는 무함마드와 같은 급의 위대한 예언자로 존경받지만 결정적으로 그리스도교와 다른 점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한다는 점. 이슬람에 의하면 신에게는 부모도 아들도 없고 딸도 없다.[15]
  • 그리고 유대교에서는 거짓된 예언자로 간주한다. 타나크(히브리 성서) 신명기에 '거짓 예언자'에 대한 묘사가 있다. 세속적 의미에서 세상을 평정하고 유대인들을 구원할 구세주로서 메시아를 기대하는 유대인들 사이에선 이단 중의 이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과거의 경우 유대인들에게서의 예수는 그저 사기꾼 정도로 여겨졌으나, 현대에는 사정이 조금 나아져서 개혁에 실패한 젊은 사상가 혹은 랍비로 보는 경향이 생겼고, 심지어 예수를 본받는 랍비 및 메시아주의 유대교 분파도 있다. 실제로 예수를 유대교에 도전한 혁명가로 볼 수 있지만, 살인, 간음, 이혼, 맹세, '귀에는 귀, 눈에는 눈'을 가리키는 유대교모세 율법에 대해서 예수가 새로운 해석과 명령을 제시하므로[16] 타나크(히브리 성서)의 율법을 철폐하지 않으면서도(율법의 연속성) 율법을 완성한다고 본다. 하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현지에서 예수가 서서히 재평가되는 것과 별개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차별이 매우 심하고, 예수에 대해 그나마 긍정적인 해석을 하는 유대인들도 예수를 메시아로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 메시아주의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교리 하나 때문에 메시아주의 유대인들은 스스로 유대인을 자처함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에서나 그리스도교에서나 둘 다 그리스도교에 더 가까운 존재들로 생각하고 있다.
  • 바하이 신앙에서는 예수를 인정하나, 하느님의 아들로는 인정하지 않고 예언자이자 현시자로 정의한다. 이는 이슬람의 관점과 동일하다. 그가 신약을 전한 것도 인정하며, 십자가에서 죽은 것과 부활, 그가 행한 기적들도 인정한다.
  • 다신교인 힌두교에서 예수는 에아사(Easa)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칼리 유가가 3000살이 되던 해 후나에서 태어났으며,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신의 아들로 인정하며, 유대 민족의 메시아로 인정하고 있다. 힌두교 내에서 예수에 대한 관점은 다양하며, 어떤 이들은 예수를 수많은 신 중 하나로 숭배하기도 하지만 일부는 그저 인간으로서 신의 아들일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본 예수의 정체

그리스도교는 탄생 시점에는 일단 예수를 메시아, 그리스도로 보았다. 하지만 이조차 기존 유대교메시아 관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유대교의 메시아는 세속적인 군주, 정확하게는 '유대 민족을 이끌 정치적인 지도자 혹은, 압제받는[17] 유대 민족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영웅'이었는데, 그리스도교에서는 세상의 종말 때 이 세상을 심판할 구세주의 개념으로 바라본 것. 이 때문에 초기부터 정통 유대교 신학과 마찰이 있었고, 사도 바울로에 의해 헬레니즘 세계에 그리스도교가 퍼질 때는 신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기존 그리스 신화에서 흔히 나오는 반인반신과 혼동이 되어 또 마찰이 있었다. 심지어 "예수는 마리아와 로마 병사 판테라 사이에서 난 사생아다."라는 주장 역시 그때 생긴 주장이다. 어쨌건 그에 따라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다구리를 맞았고, 예수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받았다. 이를 희랍 철학적 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한 것이 바로 삼위일체론이다.[18]

그리스도교에 의하면 온 인류의 구세주이자 성부, 성령과 다른 위격(persona)이되 본질(essence) 및 본성(nature)은 같은 자로, 그의 실체(substance)는 하느님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묘사하는 예수는 100% 거짓 없는 하느님이면서 또한 거짓 없는 인간이며, 창조되지 않은 자,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한 자이다. 그는 창조주임에도 피조물들을 위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어 죽었고, 재림하여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론. 물론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아리우스파와 같이 초기 그리스도교 종파들도 존재했지만, 이들은 일찍이 사라졌다.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그리스도교 종파들은, 서방의 가톨릭이든, 동방의 정교회이든, 이집트의 콥트 교회이든, 에티오피아 정교회이든, 네스토리우스파의 후예인 아시리아 동방교회이든 간에 구체적인 해석은 갈릴지언정, 삼위일체의 기본 개념, 즉 세 위격이 한 실체를 이룬다는 교리는 공유한다. 또한 이 기본 개념에 대한 정의도 콘스탄티누스 1세 때 나온 것이라 늦은 감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엄밀한 정의가 늦게 나왔다는 뜻이지, 삼위일체 개념 자체가 갑툭튀한 것은 아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성부와 동질성을 가진다고 해석될 구절이 많았고, 반대로 구분을 암시하는 듯한 구절도 많았다. 여기서 양극단[19]을 우선 쳐내고, 그리스 철학을 통해 복음서의 고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고 한 결과물이 지금의 삼위일체 정의이다.

교부(敎父)들을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일치 안에서 한 분이시며 같은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데, 그는 신성(神性)에 완전하시며, 동시에 인성(人性)도 완전한 분이시고, 참으로 하느님이심과 동시에 참으로 인간이시며, 또한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계시며, 그의 신성은 성부와 같은 본질을 지니고 계시며, 그의 인격은 우리와 같은 본질을 지니고 계시는데, 죄로부터는 떨어져 있으나 모든 측면에서 우리와 같으시고, 그의 신성에 관해서는 역사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출생하셨고, 그러나 그의 인간적 출생에 관해서는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어머니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한 분이시고 동일한 그리스도, 성자, 주님,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그는 2가지 본성으로 인식되는 바, 혼돈 없이, 변화 없이, 구분 없이, 분리 없이 계신 분이며, 본성들의 차이는 결합으로 인해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 오히려 각 본성의 특징들은 보존되고, 한 위격과 생존을 형성하기 위하여 함께 오며, 두 위격으로 분리되거나 나눠짐 없이 한 분 같은 성자요 독생자이시며, 말씀, 하느님, 주 예수 그리스도시며 이와 같은 사실은 심지어 가장 최초의 예언자도 그에 관하여 말씀하셨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셨고, 교부들의 신조로도 우리에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칼케돈 신조[20]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하느님에게서 나신 참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의 복음서 1장 1-14절.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6-8절.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예수의 정체를 유추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은 요한 복음서이다. 요한 복음서는 예수는 한처음에[21] 하느님과 같이 있었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문장에서 예수는 하느님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22]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말로, 예수가 인간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요한 복음서의 이 구절 때문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가 100% 인간이면서[23] 또한 100% 하느님이라고 본다. 또한 예수가 하느님이면, 그리스도교가 어째서 유일신교가 되냐는 의문이 나오자 삼위일체론으로 이것을 설명했다. 즉 성부는 하느님이고, 예수도 하느님이며, 성령도 하느님이지만, 성부 = 예수 = 성령은 아니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한 분이라는 것이다.

특히 다음 구절들을 보면 이 뜻은 더 명확해진다.[2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God replied to Moses: I am who I am. Then he added: This is what you will tell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

출애굽기(탈출기) 3장 14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He said to them, “You belong to what is below, I belong to what is above. You belong to this world, but I do not belong to this world. That is why I told you that you will die in your sins. For if you do not believe that I AM, you will die in your sins.” So they said to him, “Who are you?” Jesus said to them, “What I told you from the beginning. I have much to say about you in condemnation. But the one who sent me is true, and what I heard from him I tell the world.” They did not realize that he was speaking to them of the Father. So Jesus said (to them), “When you lift up the Son of Man, then you will realize that I AM, and that I do nothing on my own, but I say only what the Father taught me. The one who sent me is with me. He has not left me alone, because I always do what is pleasing to him.” Because he spoke this way, many came to believe in him.

요한의 복음서 8장 23-30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Jesus said to them, “Amen, amen, I say to you, before Abraham came to be, I AM.”
요한 복음서 8장 58절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고백하는 초월자를 뜻하는 말인 야훼는, '나는 있다', '나는 나다' 등의 뜻이며 영어로 하면 'I AM'이 된다. 그런데 인용한 구절들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I AM으로 소개하는 독특한 방식을 통해 자신을 야훼라고 드러냈다.[25]

문제는 이 교리는 인간의 논리로는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는 점이며, 초기 그리스도교의 분열은 대부분 이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이거 때문에 초대 교회에서 아리우스파,[26] 네스토리우스파,[27] 오리엔트 정교회[28] 등이 떨어져 나갔으며, 급기야 초대 교회 자체가 가톨릭[29] 정교회[30] 찢어져 버렸다.

성경의 텍스트에서도 예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31] 성경 텍스트의 그리스도론은 '한 줄 요약' 식으로 과격하게 요약되지 않고, 여러 설명들이 마치 칼케돈 신경에서처럼 긴장 관계를 이루며 예수를 논한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는 예언자이지만 예언자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고, 메시아이지만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며,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의 아들이며, 모세의 역할과 하느님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32]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으나 종의 모습을 취한,[33] 하느님과 함께 있는 하느님,[34] 한 분이신 주님이다.[35]

한편 같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유대교이슬람에서는 바로 이 삼위일체론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다신교라고 디스한다.

혈통

성경에 따르면, 즉 마태오 복음서 1장에서 기록된 예수의 계보에 따르면 예수가 아브라함다윗의 후손이라고 나온다.[36] 루카 복음서 마찬가지로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계보를 서술했지만, 마태오 복음서의 족보와는 서로 일치하지 않으며 이 족보의 차이는 신학계에서 자주 다뤄진 떡밥이었다.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해당 서술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관념인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나온다는 생각과 메시아 탄생 때에는 특별한 하느님의 표징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서술로 추측된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사야서 7장 14절을 인용하며 나자렛의 요셉에게 성모 마리아의 잉태를 알리는데, 해당 이사야서의 히브리어 원문은 동정녀가 아닌 '(결혼하지 않았을 정도로) 젊은 여인'이다. 그런데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역 성경에서는 그것을 동정녀로 옮긴다.[37]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느님의 특별한 표징' 중에는 처녀 잉태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현대 신학계에서는 족보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두 복음서가 같은 자료를 기반으로 서술되었지만 서로를 참고하지 않고 서술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는 족보를 아브라함까지 거슬러가고, 루카 복음서는 아담과 하느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마태오 복음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인 복음서여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서술한 것이며, 루카 복음서는 전 인류를 대상으로 쓰인 복음서여서 모든 인류의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 서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구약 성경의 예형론

흔히 예수가 구약의 율법을 폐지하였다고 표현되지만, 이 표현에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예수 자신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오의 복음서 5장 17절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가 보는 구약의 율법은, 예수가 폐지한 것이 아니라 완성한 것이다. 또한 같은 원리로, 신약은 구약을 폐지하지 않는다.

그때에 예수께서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 하시고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며 "성서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루가 24장 25-27절, 44-46절(공동번역)

오히려 율법을 포함한 구약 성경은 예수를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하는 근거로 사용되었지, 폐기되고 사라져야 할 무언가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리스도교가 자신의 바탕으로서 이스라엘의 성경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실제로 찾아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리고 그분을 통한 하느님의 종말론적 역사役事에 관한 소식을 이해시키기 위해, 거듭 책―이스라엘의 성경―을 자구대로 인용하거나 관련 제재題材들을 들여온다. '율법과 예언서'는 신약성경의 그리스도 증언을 해석하고 정당화해 주는 지평이다. …… 교회가 이스라엘 성경을 자기 성경의 첫째 부분으로 삼은 것은 강령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 성경의 문서들은 이론의 여지 없는 계시 주장을 담고 있다. 그래서 예수 제자들은 자신들의 예수 선포에 범주적 전달 가능성, 설득력,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 문서들을 되잡았다. 신약성경 문서들이 이스라엘 성경에 터하여 쓰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성경 독해의 해석학적 단초는 분명해진다. 신약성경은 이스라엘 성경(또는 그냥 구약성경)의 빛 안에서 읽혀야 한다. 자주 인용되는 고대 교회의 성서학자요 번역자인 히에로니무스의 말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를, '구약성경을 알고 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살짝 바꿔 말할 수 있겠다.
-Erich Zenger 씀, 이종한 옮김, 《구약성경 개론》 22-23쪽[38]

물론 구약 율법 전체를 2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자구적으로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구약을 어떻게 수용하여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이다. 율법을 '시효가 지난' 텍스트로 보는 것은 신약 성경 본문의 자기 이해에도 전혀 부합하지 않으며, 따라서 신약이 구약을 부정한다고 오독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독법이다.[39] 그렇기에 그리스도교는 상술했다시피 구약에서는 예수와 관련하여 예형론적으로 읽는다. 이를테면 이사야서의 다음 구절을 보자.

가톨릭 성경개신교 개역개정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던가?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40]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사야서 52장 13절-53장 12절[41]

이 구절은 이른바 '야훼의 종'으로 불리는 이에 대한 구절로, 타인의 악행과 죄악을 짊어지고는 재판을 통하여 죽는다. 그러면서도 이 종은 초월자에게 벌받은 자로 여겨지며,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다. 예수는 바로 이 '야훼의 종'의 행적을 자신의 삶을 통해 실현하였고, 그렇기에 스스로가 구약에 이미 예고되어 있는 그리스도(메시아)임을 주장하였다.[42] 또한 예수는 나자렛에서는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가의 복음서 4장 18-19절

라며 이사야 61장 1-2절을 칠십인역에 따라 자유롭게 인용하여, 자신이 구약에 예고되어 있는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강조했다.[43] 그 밖에도 자신이 요나의 기적을[44] 보여주겠다고 말하고, 빵으로 장정 5천 명 이상을 먹인 기적에서는 출애굽기의 만나 및 예언자 엘리사의 기적을 자신에게 연관시킨다. 또한 신명기에는 모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구절이 있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 신명기 18장 15절

그런데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서 모세가 수명을 마치고 난 후, 후일담 격으로 나오는 구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이 있다.

그 후로 이스라엘에는 두 번 다시 모세와 같은 예언자, 야훼와 얼굴을 마주보면서 사귀는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다
- 신명기 34장 10절

모세는 하느님이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보내줄 것이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였는데, 정작 신명기의 저자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시대까지 모세급 예언자는 알려진 바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명기는 이 떡밥이 회수되지 않은 상태로 끝난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하느님과 (부자(父子) 관계로 표현되는) 매우 특별하고 각별한 관계를 이루며, 자신을 보는 사람은 곧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며, 자신이 아버지와 어떤 동일함을 공유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자신이 '야훼와 얼굴을 마주 보면서 사귀는 사람'이라는 모세급 예언자의 조건을 충족하면서도, 동시에 그 조건을 뛰어넘는 예언자임을 표현한다. 그 밖에도, 예수는 전술한 바와 같이 자신이 구약에 예고되어 있고, 복선이 뿌려져 있는 자라는 점을 계속 강조한다. 그렇기에 구약을 예수에 대한 복선과 떡밥을 찾으며 읽는 것은, 그리스도교에서 매우 권장하는 독서법이다.

주의를 주자면, 그렇다고 해서 구약 본문의 1차적인 의미를 등한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인 독자가 구약의 내적 역동성의 종착점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이것은 소급적인 인식이며 그 출발점은 본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선포된 신약의 사건들에 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본문 안에서 선포된 내용을 보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비추어, 그리고 성령 안에서 본문 안에 숨겨져 있던 잉여 의미(surplus de sens)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교황청 성서 위원회(위원장: 요제프 라칭거),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Le peuple juif et ses Saintes Écritures dans la Bible chrétienne)》, 제2부 가.6. 씀.[45]

신약 성경의 원시 그리스도론

예수의 죽음 이후 그의 제자들은 '부활 체험'을 하였는데[46] 이는 선험하는 어떤 심리적인 기대와도 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47] 다음은 불어권 주석학자들의 논문 모음집[48]의 머리말과, 거기에 실린 논문 발췌이다.

자크 슐로셔(Jacques Schlosser)는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증언하는 체험을 어떤 수준으로 분류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은지를 찾고 부활하신 분의 발현과 관련된 신약 성경의 자료들을 연구한다. ... 그는 심리학, 역사학, 문학적 지시들을 모두 수렴하면서, 역사학자가 초세기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보고하는 경우 이 지시들만으로 충분한가를 자문한다. 달리 말해, 이 체험은 주관적 체험에 속하는가? 또 만일 그렇다면, 파스카 신심은 하느님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 보통 기준에 입각하여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파스카 신심을 말하기 위해, 종교사에서 반향을 찾을 수 있는 주변의 본보기들에서 표현을 끌어온 것인가?
슐로셔는 파스카 체험이 독특한 표시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이 체험을 보충적인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한다. 그는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제자들에게 들이닥친 위기와 급변에 대한 역사적 상황을 살펴본다. 제자들에게 예수가 살아 계시다고 확신하게끔 하는 무엇인가가 일어났던 것일까? 슐로셔는 중요한 증언인 1코린 15,3-8을 개략적으로 살피면서 '오프테'(ophthē) 동사 형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이어서 그는 체험의 특성이 들어 있는 추가 지시들을 수집한다.
슐로셔는 연구를 마치면서 제자들이 눈으로 본 것이 심리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거나 또는 그것이 파스카 이전에 제자들이 기대했던 것들로 형성된 어떤 것일 뿐이라는 견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그는 그것을 "특별한 체험 ... 무엇인가 아무 이유 없이 뜻밖의 방식으로 외부에서 그들에게 들이닥친 것"이라고 말한다.
- Odette Mainville · Daniel Marguerat 등 지음. 안영주 옮김. 《부활》 머리말 18-19쪽.
마르코는 체포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끝낸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 여기서 '그들'은 명백히 예수의 동료들을 말한다. 의인이 친구들에게 버림받는 것은 "고통받는 의인" 이야기에 나오는 전통 모티브라 하더라도, 이 간단한 진술을 십중팔구 당시에 일어났던 일과 일치한다. ... 광야의 예언자인 요한에게 일어났던 것과는 달리, 예수에게 맞선 소송은 하느님 백성의 고위성직자들이 추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은 하느님께서 예수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어쨌든 매우 다양한 파스카 이야기에는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 이야기들이 증언하는 것은 제자들이 어찌할 수 없이 보이는 것 앞에서 체념했으며, 부활이 완전히 "뜻밖의 사건" (논문 내 주석)R. Penna, I ritratti originali di Gesù il Cristo. Inizi e sviluppi della cristologia neotestamentaria. I. Gli inizi (Studia sulla Bibblia e il suo ambiente), Milan, san Paolo, 1996. pp. 180-181 참조.으로 소개된다는 것이다. ... "실패라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환상 곧 집단적 강박관념의 산물로서 부활을 만드는 것은 텍스트들의 분명한 방향을 거스르는 일이다." (논문 내 주석) D. Marmuerat, "Cequ'ils n'ont pas dit de Pâques", MB 25 (marsavril 2000), pp. 31-35(p.32). ... 뮐러 자신도 인정하듯이, 예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의 새출발은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렇게 돌변한 강력한 동기를 추정케 한다. 뿐만 아니라 슈트라우스는 이미 같은 말로 문제를 제기했다. 제자들의 돌변은 "만일 그 사이에 특별히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곧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가 다시 살아났다고 그들을 확신시켰을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논문 내 주석)R. Pesch, "La genèse de la foi en la résurrection de Jésus. Une nouvelle tentative", dans M. Nenzerath, A. Schmid et J. Guillêt èds. La Pâque du Christ, Mystère de salut. Mélanges F. X. Durrwell (Lectio Divina 112), Paris, Cerf, 1982, pp. 51-74(p.54)에서 인용.
-Jacques Schlosser. 〈환시, 무아경 그리고 부활하신 분의 발현〉 (위 책 215-217쪽)
파스카 체험은 보통의 환시들과는 달리 선행된 기대나 신앙의 결실로 보이지 않는다.
같은 논문(위 책 236-237쪽)

즉 '부활 체험'은 심리적인 기대를 위해서 고통을 이겨냈다거나, 예수의 죽음을 재해석한 결과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가 죽었을 때 제자들은 정말로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생각했고, 바로 그런 상황에서 제자들조차 하지 않았던 뜬금없고 충격적인 사건으로서의 '부활 체험'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제자들은 곧이어 원시적인 그리스도론, 곧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굳힌다.

이러한 원시적인 그리스도론은, 공관 복음서가 아직 작성되지 않았던 1세대 교회에서도 이미 확인이 되고 있다. 가령 필립비서에서는 예수가 '선재하는 하느님'이자 '사람이 되신 분'으로 고백되고 있었다.

6ὃς ἐν μορφῇ θεοῦ ὑπάρχων
οὐχ ἁρπαγμὸν ἡγήσατο
τὸ εἶναι ἴσα θεῷ,
7ἀλλ’ ἑαυτὸν ἐκένωσεν
μορφὴν δούλου λαβών,
ἐν ὁμοιώματι ἀνθρώπων γενόμενος·
καὶ σχήματι εὑρεθεὶς ὡς ἄνθρωπος
8ἐταπείνωσεν ἑαυτὸν
γενόμενος ὑπήκοος μέχρι θανάτου,
θανάτου δὲ σταυροῦ.
9διὸ καὶ ὁ θεὸς αὐτὸν ὑπερύψωσεν
καὶ ἐχαρίσατο αὐτῷ τὸ ὄνομα
τὸ ὑπὲρ πᾶν ὄνομα,
10ἵνα ἐν τῷ ὀνόματι Ἰησοῦ
πᾶν γόνυ κάμψῃ
ἐπουρανίων καὶ ἐπιγείων καὶ καταχθονίων
11καὶ πᾶσα γλῶσσα ἐξομολογήσηται ὅτι
κύριος 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
εἰς δόξαν θεοῦ πατρός.
[가톨릭 새번역]
6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개신교 새번역]
6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필립비서 2장 13절-53장 12절[49]

물론 이는 후대의 세계 공의회들처럼 헬라스 철학의 용어[50]를 사용한 삼위일체론 정의는 아니다. 그러나 초기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의 위치로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위의 필립비서 2장의 그리스도 찬가에서도,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으나 사람의 모습을 취한' 예수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선포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유다인들이 피조물에게는 결코 쓰지도 않았고, 써서도 안되는 표현이었다. 또한 이 찬가는 바울로가 창작한 것도 아니며, 전해 받은 찬가를 바울로가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유다계 그리스도교에 기원을 둔 전례적 기법의 운율을 가진 찬가이다. ... 찬가의 어휘는 바오로의 것이 아니다. 특히 예수의 하강에서 상승으로 이어지는 사고의 움직임은 "하강했다가 승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높여진"(사도 2,33; 5,31) 예수에 대한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도식에 근거하고 있다.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씀, 《초대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 주석학적 그리스도론》Jésus, Christ et Seigneur des premiers chrétiens, 백운철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11-312쪽

공관 복음서 전에 작성된 바울로 친서인 고린토 1서에서도 예수에게 예사롭지 않은 고백을 한다.

ἀλλ’ ἡμῖν _εἷς θεὸς ὁ πατὴρ_ ἐξ οὗ τὰ πάντα καὶ ἡμεῖς εἰς αὐτόν,
καὶ _εἷς κύριος 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_ δι’ οὗ τὰ πάντα καὶ ἡμεῖς δι’ αὐτοῦ.[51]
[가톨릭 새번역]
우리에게는 _하느님 아버지 한 분(heis)이 계실 뿐입니다._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_주님(kyrios)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heis)이 계실 뿐입니다._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개신교 새번역]
그러나 우리에게는 _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heis)이 계실 뿐입니다._ 만물은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_한 분(heis) 주님(kyrios)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_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고린토 1서 8장 6절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유일한 주님'이라는 표현은 1세기 유다인들이 하느님 외에게는 쓰지도 않고, 써서도 안 되는 표현이었다, "주님은 X 한 분이 계실 뿐"이라는 말에서 X에 들어갈 말이 뭐냐고 물으면, AD 1세기 유다인들은 당연히 '하느님'이라 답변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1세대 교회가 예수를 유다인 나름의 표현 방식을 통해 하느님의 위치로 설명한 것은 분명하다.[52]

또한 일견 사소해 보일지라도 고린토 1서 8장 6절이 예수를 "유일한 주님(heis kyrios)"으로 표현하는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

사소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성서에서 희랍어 heis(유일한)나 monos(홀로)는 하느님께 주로 부여되는 표현이다.(마태 23,8~9; 로마 3,30; 요한 8,41). "들어라 이스라엘" 기도에서 고백하듯 하느님은 유일하시다. 한편 1코린 8,6에서 "유일한"이라는 수식어는 하느님과 주님에게 공히 적용된다. 더욱이 이 구절은 어떤 다른 신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유일하신 분(4절)만이 존재한다는 선언 다음에 나타난다.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씀, 《초대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 주석학적 그리스도론》Jésus, Christ et Seigneur des premiers chrétiens, 백운철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31쪽

이런 표현들은 "1우시아(본질) 3휘포스타시스(위격)의 하느님", "1휘포스타시스(위격) 2우시아(본질)의 그리스도"라는 이후 교부 신학의 철학적 설명은 아니지만, 1세기 유다인이 하느님에게만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 이미 1세대 유다계 교회에서 예수에게 적용된 것이다.[53] 이들 1세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하느님의 위치로 고백한 것은 "유다 표징세계의 근본 원칙에 모순되지 않았다. 오히려 거기서 귀결되는 필연적인 '확장'이자 '완결'이었다."[54] 하느님의 오른쪽에 좌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고백한 이들은 "이방인들이 아니었다. 유다인들이었다. 이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유다이즘의 유일신주의를 저버린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완성시킨다는 의식을 가졌다."[55]

이슬람의 관점에서 본 예수

l-masīḥu[56]ʿīsā[57]ub'nu[58]maryama[59]rasūlu[60]l-lahi[61]wakalimatuhu[62]alqāhā[63]ilā[64]maryama[65]warūḥun[66]min'hu[67]

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선지자로써 마리아에게 말씀이 있었으니 이는 주님의 영혼이었노라

Christ Jesus the son of Mary was (no more than) a messenger of Allah, and His Word, which He bestowed on Mary, and a spirit proceeding from Him
쿠란 4,171

이슬람에서의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 메시아 예수(المسيح عيسى ابن مريم / al-masīḥ ʿĪsā ibn Maryam, 알마시흐 이사 이븐마르얌)'로 불리며, 24번째(마지막 예언자 이전 최후)의 신성을 가지지 않은, 하나님(알라)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도 아닌[68] 인간인 위대한 예언자로 묘사되어 공경받는다.

이슬람이 그리스도교와 적대한다는 이미지 때문에 이슬람에서 예수를 나쁘게 볼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슬람에서도 예수는 매우 중요하고 공경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슬라모포비아를 부추기려는 일부 목사들이 이런 잘못된 정보를 의도적으로 퍼트리는 경우도 있으며, 사실 아무리 공경한다고 해도 예수를 "하느님이 아닌, 그저 위대한 인간"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교리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와의 차이점

이슬람에서 예수는 모세, 무함마드와 같이 하나님이 인류에 내린 예언자 중 하나이다. 이슬람에 대한 무지로 인해 이슬람이 그리스도교의 적이니 예수를 싫어할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뿌리가 같다. 기본적인 연대기와 행적, 기적 등은 그리스도교와 같지만, 몇 가지 결정적인 그리스도교와의 시각 차가 있다. 결정적으로 그리스도교와 다른 점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한다는 점. 이슬람에 의하면 하나님에게는 도 아들도 없고 딸도 없다고 한다.[69]

우선 이슬람에서는 예수는 위대한 예언자 중 하나로, 무한히 신성한 존재가 아니다. 정확히는 이슬람에서는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신성을 가지지 못한다. 무함마드나 예수가 인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예언자인 건 맞지만 그들은 모두와 같이 생로병사가 있는 인간이며, 그 이상은 될 수 없다.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를 '숭배'하는 것은 엄연히 금지되며 무함마드 본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버지도 아들도 없이 홀로 계신 분이다. 즉, 예언자건 누구건 간에 아들이란 있을 수 없다. 즉 삼위일체론을 인정하지 않는다.[70]

그리스도교의 영향

무함마드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건 분명하다. 꾸란의 예수 관련 구절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정경 복음서와 외경 복음서 등을 의식한 흔적이 발견되며, 가령 꾸란 3장에서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마리아와 가지는 인간관계, 마리아의 어린 시절은 외경인 야고보 원복음서에서 강력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꾸란의 예수 탄생 이야기는 7세기 초 저작물인 차명-마태오 복음을 연상시키며, 예수가 진흙으로 참새를 만들었다는 꾸란 3,49의 이야기는 외경인 토마 유년기 복음서에 나온다. 나병 환자를 살리고 눈먼 이를 보게 했다는 꾸란 속 기적 묘사는 당연 정경 복음서에도 나온다. 곧 어떤 식으로든 아라비아의 (그것도 풍부한 외경 전승을 간직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한때 거상이던 무함마드가 접했음은 분명하다.

이 공동체로는 네스토리우스교, 아리우스주의 등 여러 후보가 거론되지만 확실하진 않다.

가장 널리 알려진 후보는 네스토리우스교이다. 네스토리우스교는 예수 안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엄격히 구분된다고 주장한다. 제도 교회의 핍박으로 동쪽으로 쭉 도피한 네스토리우스 교회들은 파르티아 지방으로 흩어지면서 8세기 초 이슬람 세력이 북상할 무렵 중요 도시에 발판을 마련하고 아랍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학교수도원이 결합된 제도로서 흩어져 있던 네스토리우스 신자들에게 어려운 환경에도 생존할 수 있는 지식과 신앙심을 부여하고 공동체적 연대 의식을 가지게 해 주었다.

만약 정말로 이슬람네스토리우스교의 예수 이해가 반영된 것이라면, 무함마드가 어린 시절 삼촌과 같이 시리아에 무역을 하러 가던 중 어느 늙은 수도자에게서 환영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일화에서의 수도자가 네스토리우스교의 수도자일 수도 있게 된다. 또한 무함마드가 히라산 동굴에서 첫 번째 계시를 받은 이후 찾아간 사람인 '와라카 빈나우팔(ورقه بن نوفل)'은 그리스도인이었다.[71] 와라카(ورقه, 아랍어로 '종이')라는 이름을 보면 그리스도교 교리에 지식이 어느 정도 갖춰진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수와 신을 분리해서 본 아리우스파유니테리언과도 상당히 유사하다. 반면 단성론과는 상극이다. 이집트는 이슬람주의의 박해가 극심한 지금까지도 비칼케돈 합성론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이다. 반면 카르타고는 단성론이 번성하던 이집트시리아보다 무슬림에게 늦게 정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72] 바로 카르타고가 위치한 이프리키야가 도나투스파[73]의 집산지였던 데다 반달 왕국의 영향으로 아리우스파의 영향력 및 아타나시우스파 사이의 긴장이 강했기 때문이다. 도나투스파 VS 정통 칼케돈 교리와 아리우스파가 난립하던 혼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과거 동로마 제국 영토 중에서 가장 빠른 개종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74]

생애


  1. 동방의 유명한 이콘 양식이다. 예수의 손가락은 ΙΗϹΟΥϹ ΧΡΙϹΤΟϹ(그리스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양을 하고 있다(검지가 Ι, 중지가 Ϲ, 약지와 엄지가 Χ, 새끼손가락이 Ϲ).
  2. 서력기원의 정의에 따르면 AD 원년(1년)이어야겠지만, 서력기원이 원년을 정의할 때 오차가 있었다. 오늘날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출생 연도는 기원전 4년이다. 학자들에 따라, 어떤 기록을 사용하냐에 따라 생년이 들쭉날쭉하는데, 이는 예수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크게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교에서는 이후 부활 및 승천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 두 날을 주님 부활 대축일(부활절) 및 주님 승천 대축일로 기념한다.
  4. 다만 개신교는 이 장소를 인정하지 않는다.
  5.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예수는 본성(natura)적으로 하느님의 외아들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을 하느님의 자녀라고 부를 때에는 은총(gratia)에 의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 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바로 이 때문에 ‘말씀’은 인간이 되시고, 하느님의 아들은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과 친교를 맺고, 자녀 됨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성자께서 인간이 되셨다.”(성 이레네오, 이단 반박, 3, 19, 1)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성 아타나시오, 육화론, 54, 3)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성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성무일도 제2독서: Opera omnia, 29권(파리, 1876), 336면.)」
    -가톨릭 교리서 제460항

    또한 예수가 하느님의 외아들이라고 해서 그것이 나자렛의 요셉과의 가족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루가 복음서 2장 33절에서는 요셉을 아버지(patēr)라 명시하고 있으며, 신약이 예수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도 예수와 요셉의 가족 관계를 전제할 때 성립된다.
  6. 동복동생인지, 이복동생인지, 혹은 형제라 불릴 정도로 친밀한 친족인지는 논란이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성경에서는 형제라는 표현으로 수식된다. 이외 나머지 형제들도 그렇다.
  7. 전승에 따르면 유다서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며 예수를 배신한 유다 이스카리옷과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다.
  8.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의 뒤를 이어 2대 예루살렘 주교가 되었다고 한다.
  9. 역시 예수의 형제들이 그렇듯이 동복자매인지 이복자매인지 친척인지 학설 차이가 있지만, 성경에선 자매로 표현된다.
  10. 이 관점은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할 때 특히 마태오 복음서에서 두드러진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는 제자들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할 것을 요청하며 다음 대당명제(율법에 대한 새로운 개념) 등을 제시한다: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마태 5,21-26)"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마태 5,27-30) ③ "아내를 버리려면 이혼장을 써 주어라" → "불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내를 버리지 말라"(마태 5,31-32)
  11. 이 관점은 특히 루가 복음서에서 두드러진다. 24장에서 제자는 예수의 신원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현대의 역사적 예수 담론에서도 예수를 '종말론적 예언자'로 본다. 일찍이 알베르트 슈바이처에 의해 주장된 이 관점은 샌더스(Ed Parish Sanders), 마이어(John Paul Meier) 등 수많은 후학들에 의해 지지되어, 오늘날 역사적 예수 연구의 기본 키워드로 통한다.
  12. 다만 유대교에서는 이 책의 후반부동인지로 치부한다.
  13. 그리스도교에서 창세기의 6일 창조를 문자 그대로 6일의 시간 동안 이루어진 창조라고만 보는 것은 아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와 종교 개혁자 장 칼뱅#은 문자 그대로의 시간적 의미라고 보지 않았다. 가톨릭에서는 시간적 의미의 6일이라는 해석을 하지 않으며#, 개신교에서도 근본주의 진영의 주장으로 일축하는 경우가 있다. 로널드 L. 넘버스의 『창조론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해석은 정통 개신교의 역사적-신학적 산물이 아니라 20세기 초엽의 안식교에서 생성된 것이다.
  14. 동질성에 대해 완전히 부정하는 아리우스파, 구별을 완전히 부정하는 단일신론파
  15. 부모와 아들은 그리스도교를 저격한 것이고, 딸은 아랍의 전통 다신교를 저격한 것이다.
  16. 마태오 복음서 5~7장 산상 수훈 참고.
  17.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18. 다만 삼위일체론에 대한 구체적 용어 정립은 후대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예수에 대해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다신론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AD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던 생각이다. 자세한 건 아래의 '예수의 사상과 그리스도교' 부분 참조.
  19. 동질성에 대해 완전히 부정하는 아리우스파, 구별을 완전히 부정하는 단일신론파
  20. 영어 번역본을 중역하되, 이 문서에서는 person(페르소나)은 위격으로, nature는 본성으로, essence는 본질로 번역했다.
  21. '한처음'은 라틴어로 In principio. 창세기에서도 사용된 말로, 단순히 시간상으로 처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단순한 시간을 넘어서 '근본적으로, 근원적으로' 정도의 의미이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단어인 '한처음'이라는 요상한 말로 번역한 것도 이것 때문이다. 타입문 세계관의 근원이라는 말이 떠오를 수도 있는데, 사실 진짜로 그것과 비슷한 의미이다.
  22. 라틴어로 caro. 번역에 따라 이를 육신이 아니라 사람으로 의역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한국 가톨릭 번역판 성경. 그런데 라틴어에서 사람을 뜻하는 말은 homo이고, 그렇기에 요한 복음서에서 굳이 homo 대신 caro를 택한 것은 꽤 주목할 만하다. 굳이 이 구절에서 복음서가 caro라는 말을 쓴 것은, 예수가 단순히 인간의 형상을 취한 것이 아니라, 나약한 육신을 지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었다는 뜻으로 적은 것이다.
  23. 원죄가 없다는 점 때문에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람은 원래 원죄가 없는데 아담하와의 죄 때문에 원죄에 시달리는 것이다. 즉 예수가 원죄가 없다고 해서 그가 사람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24. 인용한 국역 성경영어 성경은 각각 가톨릭 성경과 New American Bible Revised Edition(새 미국 성경 개정판, NABRE)이다. I AM의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이 역본들을 인용했다. 또한 NABRE에서 I AM을 대문자로 강조한 것도 그대로 인용했다.
  25. 참고로 흔히 성부를 지칭하는 용어로 알려진 야훼는, 성부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삼위 전체를 모두 지칭한다. 그렇기에 가톨릭 성경 등에서 야훼를 성부가 아니라 주님(Dominus)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애초에 야훼는 엄밀히 말하자면 제우스, 오딘 같은 이름이라기보다는 존재 방식의 표현에 가까운 어휘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말 그대로 I AM이다. 예수가 야훼라고 하는 게 양태론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양태론은 예수가 성부라고 하는 것이지 야훼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26.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며, 하느님이 창조한 반신급 피조물이다'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파가 세력을 얻은 곳은 중동 지역인데, 훗날 이슬람에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이슬람이 이해하는 예수는 아리우스파의 관점과 비슷하다.
  27. '예수 안에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분리되어 있다'고 보았다. 정통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여 보지 않는다. 위의 칼케돈 신조에서 보듯이, 정통 신학에서는 예수에게 인성과 신성이 혼돈 없이, 변화 없이, 구분 없이, 분리 없이 있다고 본다.
  28. 예수에게는 신성만이 존재하거나, 인성만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29. 성령은 성부와 예수에게서 발한다고 보았다.
  30. 성령은 성부에게서만 발한다고 보았다.
  31.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바보가 아니며, 예수에게 신앙 고백을 하면서도 유일신 신앙을 지키는 건 그들에게도 당연히 중요했다.
  32. 1테살 4,16-17
  33. 필리 2,6-7
  34. 요한 1,1
  35. 1코린 8,6. 사소한 것처럼 보이겠으나, 성서에서 희랍어 'heis'(유일한)나 'monos'(홀로)는 하느님께 주로 부여되는 표현이다.
  36. 그러므로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가 14대이고, 다윗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까지가 14대이며, 바빌론으로 끌려간 다음 그리스도까지가 또한 14대이다. 마태오 복음서 1:17(공동번역성서)
  37. 사실 결혼도 하지 않은 여인이 처녀라는 사실은 (최소한 고대의 상식으로는) 자명한 것이다. 따라서 처녀 잉태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38. 볼드체는 책에서 강조된 것.
  39. 일찍이 마르치온 같은 경우 "구약 폐지하고 신약으로만 가시죠?"라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교회에 수용되지 않았다.
  40. 개역한글판에서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가 앞에 붙지만 개역개정판에선 생략했다.
  41. 왼쪽은 가톨릭 성경, 오른쪽은 개신교 개역개정 성경. 워낙 중요한 구절이다 보니, 번역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맛깔나는 번역을 한다. 굳이 양쪽 번역을 다 인용한 것도 이 때문.
  42. 루가 22장 37절 참고. 단 주의를 주자면, 이사야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을 반드시 예수로 해석해야'만' 그리스도교 신학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로마 15장 21절에서는 이사야 52장 15절을 사도 바울로에게 적용되는데, 이를 통해 신약 성경이 이 구절을 예수에게'만' 적용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확장해서 말하자면, 이 '야훼의 종'을 '이스라엘'로 이해하는 유대교식 해석법도 그리스도교에서 배제되지는 않는다. 신약 성경에 의하면 '교회'는 '새 예루살렘'이자 '예수의 신부新婦'이며(묵시 21,2), 때로는 예수와 동일시된다.(사도 9,4-5)
  43. 칠십인역의 이 구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구약 본문은 다음과 같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44. 예언자 요나는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나왔고, 이후에 이민족인 아시리아에 유대교 신앙이 전파된다. 이에 대비되어 예수는 죽은 지 셋째 날에 부활하고, 이후에 민족 신앙적 요소를 완전히 탈피한 그리스도교가 세계로 퍼진다. 여기서 눈썰미가 빠른 사람은, "요나는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이었고 "예수는 셋째 날에" 부활이므로 날짜가 하루 차이 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시대에 따른 어휘 변화가 반영된 것으로, 복음서는 이 어휘 변화의 과도기로 학계에서 추정되고 있다. 이를테면 루가의 복음서에는 예수의 부활이 '사흘 만에'로 표현되고, 루카의 복음서에는 '사흗날에'라고 표현된다. 그러나 공관 복음은 모두 예수가 금요일에 사망하여 주일(일요일)에 부활했음을 고백한다.
  45. 번역은 도미니코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9-1: 이사야서 1-39장》, 바오로딸, 2016, 137쪽-138쪽에서 인용. 다음 링크에서 각 언어 번역을 볼 수 있다: #
  46. 부활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이들이 어떤 특별한 체험을 했으며 예수의 부활을 진심으로 믿었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때문에 역사학적/주석학적 차원에서는 부활 체험(Experience)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이는 직접적인 신앙 고백이 아니면서도, 동시에 "제자들이 어떤 무언가를 체험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심으로 믿었음"을 함의하는 표현이다.
  47. 예수의 제자들은 '믿음'을 통해서 현실을 이겨내고 재해석할 만큼의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십자가형 당시 스승을 버리고 도망칠 정도였으며, 복음서는 부활을 제자들조차 기대하지 않았다고 진술한다. 여기에 대해 '제자단에 대한 묘사는 부활을 부각시키려고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럽게 각색된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오히려 복음서의 텍스트는 제자단을 그래도 덜 한심하게 묘사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베드로와 동료들은 십자가형 당시 예루살렘에 머무른 게 아니라 아예 갈릴래아까지 도주했으며, 갈릴래아로 도주한 핵심 제자들과 예루살렘에 머문 여제자들이 별개의 루트로 부활 체험을 한 것이다.(참고: Gerhard Lohfink 《예수 마음 코칭 - 평신도를 위한 역사 비평학》Jesus von Nazaret - Was er wollte, wer er war 제18장.) 즉 역사적으로 제자단은 복음서 텍스트보다 더 소시민적이고 더 우스꽝스럽고 더 한심한 모습이었을 것이며, 이런 제자단의 '내면'이 아닌 '외부'에서 어떤 충격적인 체험이 온 것이다.
  48. Odette Mainville · Daniel Marguerat 등 지음. 안영주 옮김. 《부활》
  49. 필립비서는 역사 비평적으로 AD 55년쯤에 작성된 바울로 친서로 여겨진다.
  50. 1개의 우시아(본질)와 3개의 휘포스타시스(위격)의 하느님; 1개의 휘포스타시스(위격)과 2개의 우시아(본질)의 예수.
  51. all hēmīn _heis theos ho patēr_ ex hou ta panta kai hēmeis eis auton,
    kai _heis kyrios Iēsous Christos_ di hou ta panta kai hēmeis di autou.
  52. 그 외에, 글의 구성에서 보더라도 의도적으로 '한 분 하느님'과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대응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3. 상기한 성경 인용들은 의도적으로 헬레니즘적 텍스트들과 요한 복음서를 배제하고 발췌한 것이다.
  54. Gerd Theißen, 《Die Religion der ersten Christen. Eine Theorie des Urchristentums》, Gütersloh 42008, 73쪽.
  55. Theißen, 같은 책, 같은 쪽
  56. 메시아
  57. 예수
  58. 아들
  59. 마리아의
  60. 선지자(였다)
  61. 하나님의
  62. 그분의 말씀
  63. 그분이 주신
  64. 에게
  65. 마리아
  66. 그리고 영(靈)
  67. 그분으로부터의
  68. 이슬람에서의 유일신인 알라는 부모 자식이나 형제와 같은 가족이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69. 부모와 아들은 그리스도교를 저격한 것이고, 딸은 아랍의 전통 다신교를 저격한 것이다.
  70. 다만 예수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영'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사용한다.(꾸란 3,45;4,171) 물론 이 말을 그리스도인과 같은 의미로 쓰는 건 아니다.
  71. 무함마드는 첫 번째 부인인 하디자 빈트후와일리드의 친척이다.
  72. 오늘날 튀니지에는 극소수나마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남아있는데 바로 프랑스 식민 지배의 영향이다.
  73. 성령의 강림 없이는 예배가 무효가 된다고 주장하던 고대 그리스도교 분파
  74. 다만 이건 예전까지의 정설이었고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14세기까지, 길게는 15세기 말까지 튀니지에 그리스도교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14세기면 콥트교 다수 국가였던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콥트교가 이슬람에게 다수를 허용한 시기이다. 튀니지에서도 그리스도교가 상당히 오래 버텼다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