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안 왕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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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ㅁ 올리비안 왕국

2018년 8월, MCAC에서 '오이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가상국가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현재 국명은 '올리비안'으로 개칭되었다.

올리비안 왕국의 역사 (History of Olivian)
고전중세르네상스근대현대
오이리 족오이리 족포르투갈령포르투갈령대영제국령
포루투갈령오이리 공화국오이리 왕국올리비안 왕국올리비안 왕국 (파타나샤정권) 올리비안 왕국 (민주의회) 올리비안 왕국 (민주의회)


오이리제도의 탄생.jpg


제도의 탄생

지리학자들에 의하면 오이리 제도는 기원전 6000년경에 해저화산의 거대한 폭발로 형성되었다고 보는데 화산이 6회에 걸쳐 폭발하면서 자연적으로 봉우리가 소실되었다. 오이국립공원 지하로 봉우리가 소실된 화산이 묻혀있으며 현재 그 근처로 왕궁과 정부건물이 들어섰다. 마뮤트 화산은 사화산이다. 오이리 제도로 원주민들이 유입된 때는 500년 즈음으로 보인다. 가뭄의 심화로 바다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 중 몇몇이 바다를 건너 오이리 제도로 들어왔다고 인류학자들은 보고 있다.

1502년

AC 1502년, 원주민들이 살던 *오이리 제도에 포르투갈인들이 발을 들이면서 오이리제도는 180도로 달라졌다. 농경사회가 주를 이루던 부족 소국가는 유럽과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를 동시에 연결하는 남대서양 가운데에 위치한 오이리제도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포르투갈군의 군사적 요충지로 발전했고 원주민들과 포르투갈인들은 서로 협력하며 200년간 비교적 평화롭게 살았다. 원주민들은 신문물과 새로운 포르투갈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그들은 포르투갈로부터 생필품 및 여러 도서들을 얻는대신 포르투갈군에게 군량을 지급했다.

1711년 ~

그러나 전염병의 발생으로 포르투갈군은 긴급히 본국으로 철수했고 1711년, 전염병이 가고 영국군이 들어오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인과 다르게 영국인은 오이리제도의 원주민들에 적대적이었다. 영국군은 포르투갈군이 건설해놓았던 군사기지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을 강제로 노동시켰고 오이리제도의 이점을 잘 알고 있던 영국은 급기야 원주민들을 기존의 마을에서 해안가로 몰아내 원주민보호라는 명목으로 수용소와 다름없는 곳에서 생활하게 하였다. 그리고 많은 영국인들이 섬으로 들어오면서 점차 섬은 쓰레기로 넘쳐났고 해안가에 부족한 식수로 인해 매년 평균 50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더러운 물을 마시고 사망했다. 이는 2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원주민들은 자체 포르투갈인으로부터 배워온 군사기술과 문물을 활용하여 오이리 독립군을 조직했다.

이때 포르투갈은 영국이 무단으로 자국의 땅을 앗아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오이리 제도의 원주민들이 불만을 품고 독립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내었다. 이에 포르투갈은 몰래 오이리 제도의 원주민들을 지원하게 되는데 포르투갈인에 우호적이던 오이리 제도 사람들이 영국군을 성공적으로 몰아낼 경우 포르투갈군을 다시 환영하고 포르투갈에 충성을 다할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1714년 5월, 영국군의 일부가 해적소탕을 위해 카르보니아 제도로 출발했을때 당시 독립군의 대장이던 '알 포테데르'는 영국군을 기습공격하기로 한다. 그러나 영국군은 독립군의 예상보다 훨씬 강했고 더군다나 군사기지 안으로 들어갈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포르투갈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청했고 포르투갈은 그들에게 몰래 대포와 포탄을 지원했다. 대포 앞에 성벽은 무용지물이었다. 영국군의 강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카르보니아 출격으로 절반정도가 자리에 없는 상태에서 독립군의 강렬한 공격으로 영국군은 항복했다.

(한편 현재의 스텔리아 시 위치에 영국인이 형성한 사우스 조지아 타운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훗날 스텔라연방공화국의 수도로 발전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국은 강한 분노를 느끼고 프리깃함 6척을 출격시켰으나 앤 여왕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작전은 취소되었다. 이후 포르투갈군이 다시 상륙했는데 독립군으로부터 환영받았지만 오히려 일반 오이리 사람들은 포르투갈을 환영하지 않았다. 포르투갈도 영국과 다름없는 유럽국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715년, 포르투갈은 결국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군량도 받지 않기로 했다. 대신 포르투갈은 군사기지가 해당하는 땅은 포르투갈땅임을 분명히 했다.

이후로 146년간 오이리 제도는 사실상 유럽과 다른 지역 국가들로부터 포르투갈 땅임을 인정받았다. 독립군은 경비대로 바뀌어 치안을 담당했고 사람들은 더 이상 원주민이 아닌 포르투갈에 속한 오이리 자치시민으로써 살게 된다. 오이리 제도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포르투갈풍 주택이 즐비했고 길은 깨끗한 조약돌길로 깔렸으며 2개의 항구가 새로 들어서면서 남대서양 인근 국가들 중에서 가장 발전했다.

1861년

그러던 1861년, 유럽의 정세가 복잡한 가운데 브라질이 독립을 앞두고 미국이 남북전쟁을 시작하면서 오이리 제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포르투갈군의 보호를 받던 오이리 제도의 시민들은 포르투갈이 철수하게 될때 민족의 존속이 위태해질 것을 염려하여 당시 오이리 민족의 전통을 고수하는 동시에 신문물을 꾸준히 받아들이면서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는 세력 (온건적 근대화파)의 지도자인 '엘니치 하파시'의 주도 아래 오이리 의회 설립을 추진했으며 포르투갈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를 결성하고자 하는 독립의 열망, 의지가 넘쳐났다. 포르투갈은 1862년, 오이리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4월 14일, 오이리 의회가 개원, 헌법이 동시에 제정, 의회가 '엘니치 하파시'를 1대 총리로 선출하면서 오이리 공화국이 선포된다.

1868년

그러나 1868년, 왕정파가 힘을 받고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합병 제국을 선포, 러시아 제국, 일본 제국 등 제국주의가 만연하자 자국내에서 우리도 세계적으로 지위를 높이기 위해 유럽과 같이 왕정을 선포해야 하지 않느냐하는 의견이 등장했고 의회에 입헌군주제안을 상정, 통과되면서 오이리공화국에 1대 국왕이 등장하는데 총리가 국왕으로 즉위, 새로운 총리가 재선출되어 왕과 총리가 동시에 존재하는 지금으로 보면 영국과 일본 등과 같은 입헌군주국으로 발전한다. 당시 국왕은 행정부 수반, 총리는 입법부 수반으로써 서로 견제하면서 통치하는 형태였다.

사우스조지아 혁명(1872년)

오이리 공화국이 입헌군주국 체제로 다시 변화하면서 사우스조지아의 사람들은 이에 매우 불만적이었다. 당시 시장이었던 화이트필드(Whitefield)는 공화정을 추구했는데 영국의 군주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오이리 왕국의 새로운 왕을 섬길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를 매우 불쾌했기 때문이다. 시장은 즉각 반대하고 사우스조지아의 사람들을 선동하여 1872년 3월, 혁명을 일으켰다. 이를 '사우스조지아 혁명'이라고 한다.

당시 미국은 사우스조지아를 지원했고 영국도 사우스조지아를 지원하기에 이르면서 오이리 왕국은 재빨리 사우스조지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브라질이 이를 계기로 군사를 상륙시킬까봐 두려워했고 사우스조지아에 영국인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약간의 이질감이 작용했기도 했다. 사우스조지아 사람들은 6일만에 끝난 혁명에 당혹하기도 했지만 오이리 왕국의 독립승인아래 정부를 부랴부랴 꾸리고 1872년 6월, 스텔라공화국을 선포한다. 이때 벤타나 시민의 일부와 북메레니치 구가 스텔라공화국에 참여하면서 스텔라연방공화국이 결성되었다.

1901년

이후 1901년, 미국과 브라질, 영국이 다시끔 오이리 제도의 전략적, 교통적 요충지로써의 이점을 알아보고 군사적 동원을 통해 자국으로 무력으로라도 편입시키기 위한 준비를 각자 가하고 있던 와중 3대 국왕 '코스타 하파시'는 포르투갈과의 왕실결혼을 발표한다. 200년간 우정을 서로 쌓아온 포르투갈과동맹을 굳건히 하여 외세를 견제하고자 하는 것에 따른것이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공화정파 세력의 반란 등으로 국내정세가 혼란스러웠고 포르투갈은 왕실결혼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1910년 10월, 그러나 포르투갈에 혁명의 발생으로 입헌군주제가 폐지, 민주공화제가 들어섰고 포르투갈 왕실은 동맹국이었던 오이리로 피신한다. 하파시 왕조는 포르투갈의 마지막 왕족을 받아들였고 그들을 극진히 우대했다. 코스타 국왕은 국호를 '올리비안'으로 개칭하고 포르투갈 왕족과 하파시 왕족을 서로 합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미국, 영국 등은 이를 주목했다.

1912년

1912년 2월, 코스타 국왕이 병사하고 4대에 즉위한 '파타나샤 하파시'는 강력한 국가를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고 시민들에게 호소했으며 '강력한 왕실, 왕실 보좌 의회'을 국가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당연 의회는 이것을 헌법에 위반하며 의회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그런데 당시 군부는 왕실의 편을 들었다. 상대적으로 권력이 없던 군부가 외세의 힘으로 침략자들을 몰아내려는 의회세력을 달갑지 않아했기 때문이다. 군부는 왕실과 함께 쿠테타를 준비했다. 그리고 이듬해 9월, '9.15 군사쿠테타'가 발생한다. 의회는 해산되었고 절대군주제로 정부가 변화하였다. 군부는 단숨에 국왕 바로 아래의 절대권력세력으로 성장했다. 미국, 영국 등의 강국들은 이에 반발했다. 그리고 이를 민주주의에 대한 훼손, 의회, 헌법주의에 대한 부정으로 규정하고 미국은 올리비안 왕국을 압박해나갔고 영국은 영유권을 주장하며 무력도발을 강행한다.

1913년

1913년 1월, 영국의 아이언 듀크급 전함 2척이 오이리만에 등장했다. 올리비안군은 해안포로 경고발포했으나 오히려 영국 전함은 오이리만을 폭격해 9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오이리만 사건'이 발생한다. 영국의 올리비안 왕국 폭격에 파타나샤 국왕은 영국에 강력히 항의했고 국제사회에 영국의 부당함을 알렸으나 묵살당했다. 이후 영국은 포르투갈 정부와 영유권 갈등을 빚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이리 제도는 영국령임을 골자로 하는 강제편입안을 의회에 통과시켰고 군사를 동원하여 오이리 제도를 침략한다.

올리비안-영국 전쟁(1913년)

영국은 오이리 제도의 전략적, 교통적 이점을 알고 아프리카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더더욱 오이리 제도를 갈구했다. 당시 영국의 총리인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는 오이리 제도에 대해 "영국의 전성기를 10년 앞당길 땅"으로 표현하고 의회에 오이리 제도의 무력편입을 강력히 설득했다. 결국 의회는 올리비안 왕국에 전쟁을 선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올리비안 왕국은 당시 군부를 적극 지원하고 있었고 무기를 최대로 적재해두고 있었다. 외세의 침략은 1901년부터 코스피 국왕과 의회로부터 예고되었다. 이를 대비하고 있던 것은 당연했다. 영국은 오이리만을 군함을 통해 사전조사했고 오이리만을 통해 상륙하고자 했다. 영국은 1913년 11월, 8000여명의 군사들과 군함 4척을 끌고 올리비안 왕국에 선전포고한다. 영국군은 성공적으로 오이리만에 상륙했다. 군함은 왕국을 포위했고 올리비안 왕국이 스스로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파타나샤 국왕은 영국군에 결코 굴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강렬하게 저항했다. 영국군은 드가드시와 수도인 오이리시를 점령했으나 게릴라전투의 발생으로 수많은 영국군이 부상을 당하거나 전사했으며 식량지대를 점령하지 못해 본국으로부터 식량지원이 올때까지 군사들이 굶는 처지에 놓여 8천명의 군사들중 5천여명이 전투를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영국군은 수도를 무력으로 7개월 이상 점령, 식민지화하는 계획을 세워 실제 실행에 옮겼으나 본국과 너무 멀고 해적의 잦은 출몰로 지원로가 매번 끊기는 일이 발생했고 결정적으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국제정세가 혼란스럽자 결국 무승부로 하는 평화협정을 채결, 영국군은 철수했다. 1914년 8월 18일이었다. 파타나샤 국왕은 이를 승리로 규정하며 자축했으나 수도가 영국군에 의해 쑥대밭이 되고 항구 1개가 완전히 파괴되는 등 경제적 손실이 만만치 않았으며 이로써 국왕의 지지율은 30%까지 떨어졌다.

1915년

미국은 올리비안 왕국이 영국군을 물론 승자없는 전쟁으로 결론났지만 몰아내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미국은 오이리 제도를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건덕지가 전혀 없었지만 하와이 제도 등처럼 흡수편입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그러나 영국군의 철수에 미국은 무력편입계획을 철폐하고 동맹을 통해 미국군을 주둔,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지역의 영향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친화정책을 수립했다. 말이 친화정책이지 사실상 동맹관계를 악이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올리비안 왕국은 이번 일로 외세에 대한 경계를 더욱 강화했다. 미국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은 1915년인데 영국군이 철수한 후 겨우 1년이 넘었던 때였다. 미국의 동맹제안을 거절하고 파타나샤 국왕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국이던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남서유럽과 브라질 등 남아메리카 국가들과 친밀하게 지내고자 했다. 하지만 포르투갈과 브라질은 더 이상 올리비안을 우호국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조그만한 영토에 백만명이 조금 안되는 인구를 가진 올리비안 왕국을 변방의 작은 약소국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고 포르투갈의 경우 특히 포르투갈 왕족을 받아준 올리비안 왕국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민들은 파타나샤 국왕의 외교적 노력이 성과가 없으며 또 다른 전쟁을 야기할 것이라고 우려했고 국왕이 자리에서 자진해서 물러나라며 시위를 전개하기까지 이르렀다.

파타나샤 국왕 암살(1916년)

올리비안 왕국의 운명이 바뀐 해였다. 외교실패,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올리비안 왕국은 총체적 난국 상황이었다. 전후복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왕국 사람들은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는 모두 국왕의 탓으로 생각되었다. 시민들은 거리에 나와 국왕의 하야를 요구했고 국왕의 열렬한 지원을 받던 군부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러던 1916년 5월 18일, 나미차시에서 군부의 무력진압으로 40여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절반이 어린이이였다. 이에 분노한 나미차 시민들은 왕궁으로 시위행진했고 이에 여러 사람들이 동참하면서 국민의 약 10%가 왕궁을 애워싸고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5월 22일, 파타나샤 국왕이 한 시민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상황은 종료되었다. 시민들은 즉각적으로 의회를 구성하고 왕의 권한을 낮추는 입헌군주제의 부활을 요구했으며 다음에 즉위한 '알고레이 하파시'는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올리비안 왕국은 다시끔 민주의회 재구성에 성공했으며 군부가 이에 반발하며 반기를 들었지만 내외적으로 모두 어려운 상황에서 군인들은 시민들을 무력진압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더 이상 따르지 않았다.

+ 파타나샤 국왕 암살사건 논란
위에서는 한 시민이라고 언급했는데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던 이는 파타나샤 국왕의 미용사였던 '메리 왓슨(Merry Watson)'(영국인)이었다. 영국이 올리비안 왕국을 흡수하는데 실패하자 국가적 자존심을 크게 훼손당한 영국의 여인이었던 메리 왓슨이 미용가위로 그를 암살하고 왕궁을 몰래 빠져나갔다는 얘기인데 이는 지어낸 이야기라며 현재까지도 논란이 분분하다. 올바른 역사교육의원회에서 주장하는 암살자는 '그레이드 엘반', 오이리 대학의 평범한 학생이었다. 실제로 그의 노트에서 국왕암살계획이 적혀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이를 근거로 이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올리비안 왕국 교육부의 올리비안 역사협회(OHA)는 여전히 암살자를 메리 왓슨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파타나샤 국왕의 암살자가 메리 왓슨으로 규정된 것일까? 이후 즉위한 알고레이 국왕은 암살자가 메리 왓슨이라고 직접 시민들 앞에서 밝혔다. 그런데 올바른 역사교육의원회에서는 알고레이 국왕은 왕족이었지만 파타나샤 국왕을 지지했던 친파타나샤 세력이며 그를 후원했기 때문에 시민이 죽인 것이 아니라 파타나샤 국왕의 미용사로 용의자를 바꿔치기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안위가 걱정됬던 알고레이 국왕이 일반시민이 암살했다고 발표하면 시민들이 봉기하여 왕정이 무너질 것을 염려하여 영국을 교묘하게 국내 정치에 이용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알고레이 국왕의 보좌관이던 '모토나 알리모아'는 그가 그의 백성들을 두려워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다른 근거는 없는 상태고 결국 여태까지 논란으로 남는다.

+ 모토나 알리모아
알고레이 국왕이 올바른 정치를 이끌수 있도록 지도한 여성 보좌관, 알고레이 국왕의 아내의 동생이기도 하여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알고레이 국왕이 민주의회를 구성할 수 있도록 도왔고 경제발전계획 수립에도 참여한 보좌관인데 일부에서는 국왕의 정치에 크게 간섭하여 알고레이 국왕이 허수아비로 전락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컸고 그녀를 왕실에서 끌어내리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역사학자들은 그녀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녀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보좌관을 52세의 나이에 관두고 54세에 알리모아 보건대학교를 올리비안 왕국에 설립하여 이 보건대학이 훗날 올리비안 국립대학에 합쳐져 올리비안의 보건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마리아 총리때 보건대학이 올리비안 국립대학에 의대로써 편입되었다.

1922년

알고레이 국왕(5대 국왕)과 샤드리아 베넨 엘레마더스 총리(민주의회 1대, 13대 총리)는 1922년 각각 행정부 수반, 입법부 수반을 맡았고 경제발전계획을 수립, 중개무역과 관광경제를 활성화하는 정책을 폈다. 또한 미국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미국과 동맹관계를 채결하되 미국군의 주둔을 허용했고 군사기지 건설 등 주둔에 필요한 것은 미국이 100% 부담하되 식량 및 식수를 50% 이상 올리비안 왕국에서 지원하기로 하였다. 미국은 전후복구를 위한 경제적 지원도 약속했고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했다. 아프리카 해적들이 미군에 의해 소탕되고 주변의 위협이 없자 해외 투자자들도 몰렸다. 특히 올리비안 왕국의 자원탐색에 미국이 투자하여 인광석과 금광석을 발견하여 자원을 수출, 올리비안 사람들은 돈방석에 앉았다.

1939년

마리아 덴 에리치와, 최초의 여성총리가 탄생했다. 전 총리의 병사로 의회는 새로이 총리를 선출해야했고 당시 경제평화당의 최고의원인 마리아가 여성총리로 최초로 선출된 것이다. 그러나 여성총리가 탄생하자마자 9월, 2차 세계대전이 발발, 국제정세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때 올리비안 왕국은 미국과 동맹인 상태였고 물론 미국은 유럽에서 벌어진 2차 세계대전에 군수물자를 수출할뿐 참전 생각은 없었지만 올리비안 왕국은 세계에서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연합군국으로써 참전하는 것을 고려했다. 알고레이 국왕은 이에 부정적이었다. 마리아 총리는 이에 참전을 보류했다. 한편 미국 문화가 주둔하는 미국군을 통해 유입되면서 경제-문화가 서로 대등하게 발전했다. 의료법도 미국의 영향으로 제정되었고 청바지, 콜라 등 미국의 문화가 끊임없이 유입되면서 점차 남유럽 문화와 미국의 문화, 오이리 원주민의 남아있는 문화와 혼합되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1940년

스텔라연방공화국을 최종 흡수통일하면서 영토가 확장되었다. 스텔라 시의 시민들은 이를 매우 환영했다.

1942년

마리아 총리는 1942년 1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일본에 미국과 함께 전쟁에 임할 것을 시사, 선전포고했다. 의회 의원의 63%가 찬성했고 알고레이 국왕이 이를 승인했다. 이로써 올리비안 왕국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연합국 계열에 섰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마리아 총리는 국방력강화에 크게 노력했다. 최초로 올리비안형 소형전투함을 설계했고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구입*배치하는 등 국방의 힘을 길렀다. 한편 도박 문화와 마약이 유입되면서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기도 했다.

1945년 ~

1945년 8월, 마리아 총리가 재선에 성공하고 두번째 임기중, 미국에 군량 지원, 프랑스에 1100명 군사파견 등으로 비록 소규모이지만 적극적으로 연합국측으로 참전해 승리하면서 독일과 일본으로부터 각각 배상금을 받아냈다.

1949년, 프랑스와 동맹을 채결했다.

1950년, 캐나다와 동맹을 채결했다.

1951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미군이 일부 철수했다.

1952년, UN에 가입했다.

1955년, 인구가 3백5십만명을 돌파했다.

1958년, 금광의 50%가 고갈되었다. 의회는 자원의존도를 낮추고자 경제개혁을 실시했다.

1960년, 영국과 공식으로 화해하고 영국대사관 설치를 허용했다.

1962년, 지리적으로 아프리카와 더 가깝지만 문화적으로 남유럽, 미국과 매우 가깝고 인종도 흑인이 아닌 유럽계이므로 유럽국가로 인정받고자 했으나 유럽대륙과 거리가 너무 멀어 유럽연합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63년, 마리아 전 총리가 사망했다.

1964년, 알고레이 국왕이 병사했다. 알고레이 국왕은 자녀가 없어 하파시 왕조는 막을 내렸다. 조나단 왕조가 탄생했으며 조나단 왕가는 살아남은 포르투갈 왕가에서 이어져 내려온다. 에이하바람 조나단 국왕이 즉위했다. (6대 국왕)

1966년, 엘베스 아나타브 총리가 선출되었다.

1967년, 수도를 확장했다. 이로써 영토의 1/3이 수도영역이 되었다.

1968년, 오이리 국제공항이 건설되었다. 드가드 비행장은 폐쇄되었다.

1969년, 지하철 건설을 시작했다. 인구가 4백만명을 돌파했다. 엘베스 총리가 재선에 성공했다.

1972년, 30층 규모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마천루가 즐비하기 시작했다. 엘베스 총리는 역대 최고의 총리로 꼽힌다. 이때 올리비안 왕국은 세계 30위권 경제대국으로 크게 성장했다.

1974년, 올리비안 왕국의 사기업이자 세계적 기업인 길버트 그룹이 창설되었다.

1981년, 석유매장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1984년

기니비사우 공화국이 총리제를 폐지하고 국민평의회를 구성한 해, 급작스럽게 올리비안 왕국과 기니비사우 공화국은 혈연동맹관계를 선언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두 국가 모두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았고 언어도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며 기니비사우에서 오이리제도로 넘어와 부족국가를 구성했던 원주민들이 오이리족이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매우 끈끈했다. 올리비안 왕국과 기니비사우 공화국은 서로 혈연동맹관계임을 선포했고 이듬해 올리비안 기니비사우 연방이 출범했다. 다만 경제적, 문화적으로 올리비안 왕국이 기니비사우에 비해 매우 선진국이었기 때문에 연방은 올리비안 왕국이 주도하게 되었다.

한편 석유매장이 확인되어 해상 유정 건설이 계획되었다.

1985년 ~

1985년, 브라질 군함이 올리비안 왕국의 영해를 무단으로 침범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에 미국과 올리비안 왕국은 브라질에 항의하고 국제법 위반을 이유로 브라질을 국제헌법재판소에 기소했다. 브라질은 곧바로 사과했지만 브라질이 의도적으로 올리비안 왕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려는 것이 아니냐하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올리비안 왕국이 참가, 올림픽에 최초로 참가하게 되었다.

1989년, 지하철이 우여곡절 끝에 완공되었다. 지하철 착공 무려 20년만이다. 인구가 5백만명을 넘어섰다. 경제적 발전을 이룩한 왕국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간 자원과 수공품, 중개무역으로 경제를 성장시켰지만 선박의 발달에 따른 중개무역 감소와 자원의 고갈임박 등으로 경제적 쇠퇴가 시작되었다.

1990년, 에이하바람 조나단 국왕이 노환으로 별세했다. 에이하바람 국왕의 아들인 바라나달 국왕이 즉위했다.

1991년, 세르겐데이 벨 데바나르 총리가 선출되었고 경제부활을 약속했다.

1992년, 2차 산업 집중투자계획을 발표했지만 너무 늦은 계획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매우 컸고 의회에서 다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총리권한으로 강행하여 국왕의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드가드시와 그라나군에 대규모 산업단지가 착공됬다. 한편 브라질이 2차 도발을 강행했다. 브라질은 이로 인해 미국으로부터 비난당했으나 도발은 이후에도 2주간 길게 이루어졌다. 이는 자주국방정책을 강화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의회는 이에 부정적이었지만 브라질의 도발 이후로 점차 자주국방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다.

1993년, 기니비사우 공화국과 합병하자는 의견이 의회에서 나왔고 긍정적으로 검토되었으나 기니비사우 공화국의 대통령이 어처구니 없는 상상이라며 선을 그었다. 이 발언으로 올리비안 기니비사우 연방이 한때 위태로웠다.

1995년, 세르겐데이 총리가 재선에 실패했고 에나바드 아벨 엘리고 총리가 선출되었다. 에나바드 총리는 산업육성은 올리비안 왕국을 부활시킬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라고 단언할 정도로 산업육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1996년, 오이리 국제공항이 확장되었고 인구가 5백5십만명을 넘어섰다. 아프리카 난민 등이 꾸준히 유입되어온 결과였다. 과인구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커 결국 이민법이 제정되었다. 인구성장률이 급감했다.

1997년, 에나바드 총리가 스텔리아 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이는 수도의 포화상태를 막기 위한 결정이었다.

1998년, 제철소 단지, 화학공업단지 등 여러 산업단지들이 차례대로 완공되었고 화이트필드 타운 건설계획이 발표되었다. 관광업 증진을 통해 경제를 살리고자 하는 정부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길버트 몰타워, 메가타워 등이 착공되었다. 모뷔뭰토 군이 개발되어 인구가 유입되면서 일찍 시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모뷔뭰토 군이 아직 도시를 형성하지 못하였으므로 군으로 남아야 한다고 본다.

1999년, 에나바드 총리가 재선에 성공했으나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에나바드 총리가 막말논란을 겪으면서 야당의 정치적 공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11월, 국왕은 허수아비다라는 발언이 결정적이었고 결국 에나바드 총리는 사퇴했다.

2000년, 바라나달 국왕이 병사했다. 가비오이 조나단이 8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MCAC 출범)

2015년, 남대서양전쟁이 발발하였다. 또한 국방부 쿠테타(2015)의 발생으로 국가가 한때 전복될 위기에 처했지만 이후 기니비사우 지역을 얻어 합병했고, 부당히 퇴위되었던 국왕이 다시 복위한다. (자세한 사항은 남대서양전쟁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