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시 (한정모)

한정모 경기도 휘장 White.png
경기도
기초자치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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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모 성남시 CI White.png 경기도 성남시
일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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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구
수정구 중원구 분당구
시청 소재지: 중원구
경기도 신 휘장 (한정모).png 경기도의 특례시
한정모 성남시 CI.png 성남시
城南市

Seongnam City

한정모 성남시 시청 지도.jpg
시청 소재지 중원구 성남대로 997 (여수동)
광역자치단체 경기도
하위 행정구역 3구 50행정동
면적 141.63㎢
인구 1,024,332명[1]
인구밀도 7,242.72명/㎢
시장 자유민주당 글씨.png 박성배 (재선)
시의회 자유민주당 글씨.png 18석
민중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16석
도의원 자유민주당 글씨.png 4석
민중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4석
국민원 의원 자유민주당 글씨.png n석
민중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n석
상징 시화 철쭉
시목 은행나무
시조 까치
시가 성남시민의 노래
지역번호 031
홈페이지 www.seongnam.go.kr
SNS 네이버 블로그 아이콘.png 인스타그램 아이콘.png 페이스북 아이콘.png 트위터 아이콘.png 유튜브 아이콘.png
성남시 위치.png

성남시의 위치
성남 시정테마.png 성남시 시정구호.png
슬로건 시정구호
성남 마스코트.jpg
마스코트 새남이·새롱이
성남시청.jpg
서현역 야경.jpg
성남시청 서현역 주변 야경

개요

경기도 중앙부에 위치한 시. 경기도에서 수원시, 고양시, 용인시에 이은 인구 4위의 도시이며 경상남도 창원시를 포함해 전국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은 기초자치단체다.[2] 남으로는 용인시, 서로는 청계산을 능선으로 과천시[3], 의왕시, 더 넘어가면 제2경인(안양-성남) 연결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안양시, 광명시, 서울특별시 구로구, 동으로는 광주시, 북으로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및 하남시에 접하고 있다.

수도권에서 제일 먼저 계획적으로 개발된 위성도시로[4] 원래 초기엔 서울특별시 옥수동, 금호동, 답십리에 있던 무허가 천막촌에서 살던 사람들을 서울 근교로 분산하기 위한 대단위 거주지로 개발되었다. 처음 광주대단지가 설치되었을 적에는 성남시가 아니었고, 경기도 직할 광주군 성남출장소였다.[5]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으로 광주대단지가 조성되었으나, 당초 정부가 이주민들에게 했던 약속은[6]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이주민들의 삶의 질은 점차 하락하기 시작했다. 1971년 8월에 와서는 참다못한 시민들이 일자리 확충과 독립시 설치를 강력하게 요구하며 봉기했고, 심각성을 느낀 박정희 내각에서는 서울특별시장[7][8]내무부장관을 내려보내어 주민대표들에게 사과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광주대단지에 실태에 대해 조사/대처하기 시작했고, 1973년에는 주민들의 요구가 반영되어 성남시가 출범하였다.[9]

그러다 1990년대 이후 신도시 개발 열풍에 따라 중원구 남부지역에 분당신도시가 조성되어 분당구로 분구되었다. 이어서 2000~10년대에는 판교신도시와 판교테크노밸리가 조성되었다. 이로써 성남시는 서울시에 일방적으로 종속된 베드타운에서 벗어나서[10] 자체적인 생활권을 이루기에 이른다.[11] 마지막으로 2020년대 현재까지도 위례신도시가 조성/분양되면서 꾸준히 세가 확장되었다. 즉, 사실상 성남시 전체를 신도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12]

역사

성남시 행정구역 변천사
광주군
중부면, 대왕면
돌마면, 낙생면
경기도 직할
성남출장소
(城南出張所, 1971)
성남시
(城南市, 1973)
수정출장소
(壽井出張所, 1988)
수정구
(壽井區, 1989)
중원출장소
(中院出張所, 1988)
중원구
(中院區, 1989)
중원구
분당구
(盆唐區, 1991)

성남이라는 지명은 남한산성의 성곽 남쪽의 일원에서 본딴 것으로 성곽 남쪽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남한산성의 동서남북의 관문 중 남문 앞쪽을 제외한 나머지는 경기도 광주시가 관할하고 있고, 유일하게 남문 앞 지역만이 성남시 관할로 있는데 실제로 남한산성 남문 앞쪽은 성남시 지역에 속한다. 한자 역시 城南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옛 광주군에서 분리되었던 때부터인 1973년에 시로 승격되면서 성남이라는 지명이 공식 사용되었다.[13]

1914년 이전의 역사는 광주시의 역사를 참조. 1914년까지는 광주군 세촌면, 대왕면 남부, 돌마면, 낙생면 일대였다. 그러다가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세촌면이 중부면(현 남한산성면)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구 세촌면 지역의 행정적 불편함으로 인하여 1946년 구 세촌면 지역에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성남'은 남한산성(城)의 남쪽(南)에 있다는 의미로 지어졌으며, 이때부터 성남이란 지명이 공식적으로 행정상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14] 1964년 중부면 성남출장소가 광주군 직할 성남출장소로 확대되었다. 1971년 광주군 직할 성남출장소가 중부면 일부뿐만 아니라 잔여 대왕면, 돌마면, 낙생면까지 포괄하는 경기도 직할 성남출장소로 확대되었다.

1960~70년대에 서울의 빈민들을 집단 이주시키기 위한 광주대단지가 성남출장소 지역에 조성되었으나, 미흡한 도시계획과 생업의 어려움, 정부의 외면 등 각종 문제점이 노출되어 결국 1971년 광주대단지사건이 발발하였다. 이 때 광주대단지 주민들의 요구사항 중 하나가 성남출장소의 성남시 승격이었고, 서울시가 광주대단지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전부 들어줌에 따라 1973년에 광주군 성남출장소(중부면 일부, 대왕면, 돌마면, 낙생면)가 성남시로 승격되었다.

1988년 수정출장소와 중원출장소를 설치하고, 1989년 5월 1일에 구제(區制)를 실시하여 두 출장소를 수정구, 중원구로 승격 설치하였다. 1991년 9월 17일에 분당신도시를 관할로 하는 분당구를 중원구에서 분리하여 신설하였다.

1996~1997년에 시명을 변경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지리

도시 행정

교통

경제

생활문화

정치

군사

하위 행정구역

여담

대중문화 속의 성남

출신 인물

자매도시

하위문서

둘러보기

  1. 2028년 행정안전성 주민등록인구 통계
  2. 그러나 화성시의 무서운 추격으로 전국 6위, 수도권 5위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3. 과천시로 연결되는 도로는 없어 과천시로 갈려면 의왕시와 안양시를 경유해야 한다.
  4. 실제로 80년대 후반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는 성남이 서울의 인구분산을 위해 만든 도시라고 서술되어 있었다. 인천과 수원은 원래는 자체 생활권을 지닌 도시였고, 부천과 안양, 의정부는 인위적으로 형성된 위성도시라기보다는 자연발생적인 위성도시였다. 즉, 성남시는 수도권에서 최초로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위성도시인 것이다. 성남시 뒤를 잇는 인위적 위성도시로는 광명시가 있다(1981년 승격). 참고로 광명시는 광명 지역의 서울 편입이 무산되어서 생겨난 행정구역으로의 도시다.
  5. 중부면 남한산성 서쪽 지역, 돌마면, 낙생면, 대왕면.
  6. 공단설립, 무상에 가까운 토지분배
  7.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철거민들을 반강제적으로 이주시키는데에 김현옥 서울시장이 개입하였다. 해서 후임 양택식 시장이 광주대단지로 사과하러 내려온 것.
  8. 당시에는 관선시장으로 정부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내무부 소속 고위 공무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9. 그래서인지 시민들이 성이 나서 생긴 성남시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여담이지만 시 승격 이전에는 면으로만 이루어진 곳이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년도순으로 과천시, 안산시, 동광양시, 화성시, 계룡시 순으로 발생했다.
  10. 그럼에도 베드타운적인 성격이 짙긴 하다. 판교테크노밸리 등으로 인해 매우 발전한 지역이기는 하지만, 국내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인 강남 옆에 붙어 있다는 점이 크다.
  11. 성남만의 자체적인 산업기반으로, 경강선을 통해 광주시와 수인분당-신분당선으로 용인시 북부지역을 성남 생활권으로 편입하였다.
  12. 기도청에서 발간한 경기도 및 산하 시·군 소개 책자에서 성남시를 이렇게 소개하기도 했다.
  13. 유사한 지명인 서울특별시 성동구와 성북구의 경우 이들 지역은 한양도성의 동쪽과 북쪽 성곽에서 유래된 지명이라 남한산성의 지명과는 관련이 없다.
  14. 조선시대 때부터 삼평동 중 금토천 서쪽 지역의 마을 이름이 '성내미'였는데, 지금 성남의 행정구역명과는 관계가 없다. 성내미란 지명은 동판교 백현동에 있는 성내미터널과 서판교 판교동에 있는 성내미육교 등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