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НСССР)/역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국장 2 (НСССР).png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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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이 문서는 소련의 역사를 2022년 10월부터 다루고 있음을 알리고자 한다.

페르빌 파르니예프 (1)

이 시기는, 페르빌 파르니예프가 당대표일때, 매흠을 가입시킨 시기부터, 매흠서기장 취임 이전까지 기간을 말한다. 매흠소련으로 오면서, 공산당은 나치에 대한 규제를 행하였다.

매흠

매흠은 즉시 스탈린을 "소련을 망친 독재자"라고 발언하며 스탈린 사진에 대한 제제를 시행하였으며, 장관회의의 폐지, 여러 가상국가에 진출하여 세계혁명주의를 바탕으로 합법적 사회주의 투표를 통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해나갔다.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등으로, 토론을 즐겨하였으며 네덜란드 사회주의 공화국, 프랑스 사회주의 공화국, 소비에트 연방(타국)의 2대 서기장직을 겸임하면서, 최고소비에트를 정비하였다.

일신상의 문제로 사임이전까지, 사회주의ㆍ제국주의 상관없이 정계에서 주목을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페르빌 파르니예프 (2)

이 기간은 매흠 서기장의 사임 이후부터 붉은평화의 집권 이전의 기간을 설명한다.

매흠 서기장의 사임 이후, 파르니예프장관회의 부활, 최고회의 무기한 연기등을 시행하는등 이전체제 복고에 힘을 썼으며, 나치 사진을 제외한 모든 사진 및 정치적 발언에 대한 제제를 해금하였다.

이 시기를 레닌에서 스탈린이 권력을 위임받았다고 일부 평가가 있었다.

또한, 당시 성적인 요소가 있다하더라도, 수위가 청소년관람불가라도 되지 않는 이상, 규제를 하지 않았다.

이 시기를 (신) 소련브레즈네프 시대라고 평가한다.

당시, 인민들은 이 시기를 가장 좋았던 시기로 체감하기도 한다.

붉은평화(페르빌 파르니예프)1

이 시기는 붉은평화의 유입직후부터 헌법 백지화까지의 기간을 설명한다.

붉은평화, 혹은 쇼스타코비치 고양이가 소련에 유입하면서 즉시 임시 최고권력기구인 장관회의를 폐지하고 최고소비에트를 만들었다. 최고 소비에트 대의원은 7인으로 구성되었으며, 붉은평화 헌법을 토대로 갖추었다.

이후, 붉은평화는 스탈린 서기장 집권기의 맑스레닌주의로 하여끔 의원들을 설득하였고, 끝까지 반대한 한국 출신 김영삼과 스탈렌을 제외한 나머지 5인을 토대로 정책을 이행하기로 결의한다.

이에, 김영삼 의원은 최고 소비에트 대의원직을 사임하였고, 이후 정책을 펼쳐 제국주의 국가와의 단교, 제국주의ㆍ자본주의ㆍ종교주의 프로필 추방, 그리고 소련 내의 반대사상 매흠주의를 위해 반매흠주의를 외치는등 스탈린맑스레닌주의로 무장하면서 냉전이 일부 기획되었다.

당시, 미국이 미 제국주의로 연루되면서 추방되었는데 이걸 빌미로 소련에 들어와 난리를 피우면서 미ㆍ소간의 상태가 과열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소련의 입지가 커지는데 성공하였다.

이 사건으로, 당시 최고 운영자간의 회담을 통해, 미국이 내부적으로 사과를 하는것 및 표면적으로 일단락되었으며 이후 미국은 강경적 대통령이 선출되며 향후 제 1차, 2차 충돌에 자국내의 이익에 공헌한다.

소련이 반사회주의적 반동분자 추방 정책을 하자, 여러 국가들이 동조하거나 주시하였으며, 몇몇 제국주의 국가 언론사는 신문을 통해 소련의 행보에 주목하였고 카카오톡의 사실상 최고 기득권 단체나 다름없는 라인에 의해 2차 테러를 당하게 된다.

이후, 소련의 인구는 다시 80%까지 회복되었으나, 최고 기득권 단체의 견제에 의해 다시 인구 회복은 어려워 보였고, 소련의 당대 서기장최고회의 임시주석은 소련의 국경을 폐쇄하였지만 내부 감소가 지속되거나, 소련의 자칭 구성국이 침략당하는등 1차 사과문을 발표하여 인구회복에 주력한다.

НСССР 수립이후, 2번째 다당제[1]가 시행되었으며 수정주의적 노선을 타는등 미 제국주의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미 제국주의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 이때, 소련 민주당(향후, 소련 국민위원회로 개칭)등이 창당되었으며 소련 민주당이 집권하는등 최초의 여야집권이 이루어지는등 여러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소련의 다당제는 기존과 다른 방식이였는데 1명당 1당이 아닌, 1명이 여러 정당에 가입할수 있었고, 소련 공산당이 선거에 출마하지 않자 민주당으로서 활동하다가 사실상 재집권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소련 국민위원회는 여당으로서 활동하였고 차후 소련의 다른 정당이 부정투표를 통해 요직을 차지하자, 많은 사람들이 정부에게 항의하였지만 당시에 소련서기장은 사실상 헌법에 의해 최고권력이 아니었으므로, 최고회의 정식 주석으로 선출된 쇼스타코비치 고양이에 의해 "선거법이 없어 처벌할수 없다."라는 입장을 발표한다.

이에, 많은 국가 및 인민들이 항의하였으며, 그중 캐나다 이민자 스탈린은 부정투표 논란중심자, 리넛에 의해 영구추방을 당하였고 리넛은 이 사건을 계기로 사임한다. 이후에는 사실상 최고 소비에트 대의원이 쇼스타코비치 고양이밖에 남지 않으면서 모든 권력이 집중된다.

한편, 미국인이 대량으로 일본으로 넘어가 정치활동을 펼쳤는데, 여기에 대해 주변국들이 내부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는데 이는 과거 반일을 연상케 하게 되었고, 추후 당대 서기장, 페르빌 파르니예프가 일본 정치인의 발언의 처리에 자문하였고, 명목상 서기장이 자리를 비운사이 쇼스타코비치 고양이는 일 제국주의를 외치며 일본출신 정치인, 언론사를 추방하고 1차 추방때처럼은 다르게 맑스레닌주의가 아닌, 맑스레닌마오주의로 무장하여 2차 추방을 한다.

붉은평화(페르빌 파르니예프)2

(글이 길어서 이곳에 이어서 서술한다.)

이후, 소련 서기장의 성격을 평소 잘알고 있는 유니온등이 현재 상태를 알렸고, 소련 서기장, 페르빌 파르니예프는 1차 추방을 직접하긴 했지만 회의감을 느끼고 있던 터라, 이게 명분이 되었고 무력으로 헌법 백지화를 2023년 8월 12일에 선언하였고, 이에 쇼스타코비치 고양이가 반발하였으나, 결국 직접 소련 공산당 출당, 소련 자진 이민행을 하면서 소련의 대부분 사건은 종결된다.

페르빌 파르니예프 (3)

이 시기는 붉은평화의 출당이후부터 현재까지의 기간을 설명한다.

출당이후, 서기장은 2차 사과문을 전달하였고, 일본과의 불평등조약 체결을 하려 하였으나, 소련의 인민들이 일 제국주의라고 비난하자 일본측은 정당하다고 반박하였으나, 여러 국가들의 비판 및 대한 연방 공화국의 최고지도자에 의해 전쟁 우려까지 예측되면서 일본은 대통령이 만든 조약을 파기 및 동등한 조약을 다시 내면서, "우리는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니까 이렇게 한다."를 재차 강조하면서 조약을 체결한다.

이후, 소련의 정치는 크게 바뀌는데, 소련 공산당이 다시 여당이 되고, 일당제로 복고, 최고회의 무기한 중단, 장관회의 대신의 권력기구 인민평의회 폐지를 하였으며, 종교 및 파시즘 국가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간의 외교를 맺었고 사회주의 외교를 적극 재 시행하였다.

한편, 2차 추방 당시, 러시아 제국의 힘을 빌린적이 있어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대화에 간섭하였고 소련정부는 힘이 없어 잠자코 지켜보던 도중, "러시아어는 도움이 안되니 영어나 하라."라는식의 주장에 의해 대화가 과열되자 이 사건을 기준으로 소련 정부가 적극 개입하며 황제의 입지를 줄이는데 성공하면서, 모든 간섭세력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소련은 구성국 구체화를 실시, 15국 수립 및 몽골, 만주 수립 추후, 위성국등을 만드는등 НСССР 세력권을 확대하고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힘쓰고 있다. 소련의 공휴일을 지정 및 확대하며 소련 중앙텔레비전을 확대하거나, 영향력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레닌

2024년 2월 1일부터 전대 서기장의 사임에 따라, 새로운 서기장으로 선출된 상태였으나 2024년 2월 14일 일신상의 문제로 사임하였다.

이오시프 스탈린

2024년 2월 14일, 갑작스레 서기장으로 선출된 상태였다. 재해 복구에 힘을 쏟아부어 어느정도 회복시켰으나, 일신상의 문제로 페르빌 파르니예프를 선출하고 사임하였다.

페르빌 파르니예프 (4)

2024년 2월 21일, 재선출되었고 이전 서기장의 정책을 유지하다가 2024년 5월, 제10대 최고소비에트 분기에 신 헌법을 제작하고 다른 법률을 구체화중이며, 현재는 인터내셔널을 재정비하여 바야흐로 가상국가의 침체기인 현재에 사회주의자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