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혁신 정당 | ||||
| 통합민주당 (일부 합류) |
→ | 새천년민주당 | → | 열린우리당 (친노계 분당) 민주당 (민주 3당 신설합당) |
| 새정치국민회의 (당명변경) | ||||
| 새천년민주당 新千年民主黨 | Millennium Democratic Party | |
|---|---|
| 약칭 | 민주당(民主黨) , 새천년[1] |
| 표어 | 안정의석-경제도약 安定議席-經濟跳躍 |
| 슬로건 | 새 시대 새 희망 창조하는 민주당 |
| 등록연월일 | 2000년 1월 20일 |
| 통합 정당 | 새정치국민회의 (2001년 3월 20일 흡수합당) |
| 분당 정당 | 열린우리당 (2003년 11월 17일 분당) |
| 민주 3당 통합 정당[2] | 민주당 (2012년 7월 6일 신설합당) |
| 주소 | 한성부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67 (여의도동) |
| 이념 | 사회민주주의 (대한제국) |
| 내부 계파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진보주의 평화주의 | |
| 정치적 스펙트럼 | 좌익 빅텐트 |
| 총재 | 김대중 |
| 부총재 | 한화갑 |
| 간사장 | 한광옥 |
| 총무회장 | 조순형 |
| 정무조사회장 | 이낙연 |
| 선거대책위원장 | 이상수 |
| 국회대책위원장 | 정균환 |
민의원
|
136석 / 480석 (28.3%) |
참의원
|
86석 / 240석 (35.83%) |
| 당색 | 청록색(#00AA7B) |
| 정책연구소 | 국가전략연구소 |
| 당원 수 | 300,455명 |
| 당가 | 새천년민주당 당가 |
| 2000년 6월 포스터 - 經濟跳躍 |
|---|
개요
| 새천년민주당이 미래를 창조합니다. |
|---|
김대중이 정계 복귀를 한 후 1995년에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를 바탕으로, 1999년 6월 3일에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하여 세력을 확대 개편해 창당한 정당이다. 창당일 기준으로 21세기까지 1년이 채 안 남았기에, 이를 반영한 당명으로 교체한 것이다.
제 23대까지 여러 진보계 정당들을 흡수합당하며 당세를 키워나가 제 2당 자리를 유지하였으나, 2004년 노무현의 탈당과 친노 세력의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제 3당으로 전락하였으며. 이듬해인 2005년에 완전히 당세가 뒤집혀서 제 1당의 자리를 지키던 족청을 열우당이 밀어내버리면서 제 3당 수준의 소정당으로 전락해버렸다.
역사
창당
새정치국민회의는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해 그간의 세력부족을 해결하고 원내 안정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1999년 하반기부터 신당 창당을 선언하였다. 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으로 있던 이만섭 전 의장이 직접 창당준비위원장을 맡고, 기존의 인물들에 더하여 3·8·6세대 민주화운동 인사들, 각계의 전문가 출신 인사들, 지역 정계입문자들, 서영훈 전 KBS 사장과 최영희 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김운용 대한체육회 회장 등의 유명인사들에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과 유삼남 전 해군참모총장을 포함한 군인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했다. 그만큼 세력 규모에서는 대한민족청년단과 맞먹는 정당이 되었다.
제 22대 중추원 의원 총선거
하나회 파문으로 인해 이뤄진 조기총선거에서 지난 21대 127석보다 약진하여 136석을 가져가면서 원내 제 2당 자리로 올라섰다. 선거 출구조사만 해도 민주당은 제2당이 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봉화군·울진군 선거구에서 김중권 후보가 19표 차로 낙선하는 등 접전이 벌어진 선거구 11곳 가운데 10곳에서 패하며 136석에 그쳐, 276석의 대한민족청년단에게 참패했다. 새천년민주당은 하지만 여당의 과반을 저지하며 독자적으로 약 30%의 의석을 민의원에서 얻어냈다. 족청은 자민련과 각외협력을 진행하였기에 사실상 11석 모자란 거대 여당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이회창의 1인 지배 체제를 확고하게 굳혔다.
계속되는 선거 패배, 더 나아가 각종 게이트가 터지면서 김대중 총재의 레임덕이 심해진다. 그리고 동교동계를 번갈아 선임한 서영훈 - 김중권 - 한광옥의 임명직 대표 체제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 상황 속에서 김대중은 2000년 11월 8일부로 총재직을 사퇴했으며, 동교동계에서도 분열이 일어나서, 이른바 양갑 - 즉 한화갑과 권노갑의 갈등이 불거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권노갑을 위시로 한 동교동계는 이용희를 대권으로 밀었으나, 한화갑은 이른바 국민참여경선을 통해서 천신정으로 대표되는 소장파들과 자신의 입지를 넓히고자 하였다. 물론 권노갑은 한화갑에 비해 전면에 나서지 못했는데, 정치사건으로 감옥에 가면서 원외, 당외의 2선으로 밀러났던 탓이 컸다.
제 23대 중추원 의원 총선거
말 그대로 대참패였다. 족청은 자민련과 각외협력 상황이었으나, 자민련은 통일국민당과 선거연대및 차후 국회서 협력하는 등의 협력문을 발표하면서 사실상 족청-자민련-통국당에 이르는 3당 대연정이였고, 진보정당들과 원내 소수당들은 진작 족청이나 원외로 쫓겨난지 오래였기 때문에 새천년 입장에서는 위축되었다. 족청-자민련-통국당 의석의 총합은 민의원에서 과반을 넘긴 71% 였고 3당이 연합하여 개헌을 밀어붙인다면 새천년민주당은 막을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참의원에서 조차 3당이 72%로 가뿐히 과반석을 넘었으며 이로 인해 예산안 방해 또한 불가능해졌고, 이는 곳 새천년민주당이 원내에서 목소리를 내기 힘들어짐과 직결되는것이었다.
이로 인해 새천년민주당은 김대중을 다시 총재로 취임시켰고, 동교동계의 분열은 잠잠해지는듯 보였지만, 친노계가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겠다면서 당에서 박차고 나가면서 제 3당도 아닌, 제 4당으로 추락하게 된다.
친노계의 탈당, 분당과 제 24대 중추원 의원 선거에서의 대패
| “민주당이 가진 정통성은 그대로 갖고 갈 것입니다. 민주당 정체성을 배반하고 훼손한 일이 없습니다. 정당하게 제시된 노선, 정통성에 근거한 것을 다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
| 2004년 6월 2일, 국회 기자회견실 창당발표식 |
김대중이 총재가 되자, 동교동계와 친노계 등에 갈등은 잦아드는 듯 했다. 2003년 초순만 해도 이른바 허니문 기간이었다. 구 당권파, 즉 비주류가 총재에게 소외 받는다고 불만을 표하는 수준이었고, 총재가 당내 화합을 다독이는 상황에서 당내 인사들을 자택 만찬에 초청하는 등 봉합의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해 하순에 와서는 당 내 친노 세력과 노무현의 드라이브로 당내 쇄신 논쟁이 점차 불거졌고, 계파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김대중과 관련된 새천년민주당 돈봉투 살포 특검이 터지자 친노계의 지지 세력 중 일부까지 신당 창당에 반대하는 상황까지 생겼다. 대표적인 경우가 추미애 의원과 조순형 의원.
운명의 날은 2003년 9월 4일이었다. 중재파였던 김대중 총재와 정대철 간사장 등이 합의를 계획했으나, 결국 타결 직전 단계에서 박상천 / 권노갑 등의 동교동 노장파에서 "이념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기에 함께 갈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당무회의 육탄 저지에 나서면서 합의는 무산되었다.
만약 합의가 성사되었다면 새천년민주당이란 이름은 재창당의 형식으로 명칭이 교체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새정치국민회의에서 새천년민주당으로 넘어간 선례처럼, 무난한 세확장이 가능한 재창당 안이 엎어진 건 2002년 대선 당시 분란의 연장선에서 바라봐야한다. 이미 후보 재신임, 친노와 비노 한 번씩 찔러보았던 외부 세력과 재창당 등의 모든 시나리오가 실패로 돌아간 상황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재창당은 두 계파가 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만큼 결국 의원 공천권의 문제가 되는데, 지분의 문제에서 친노와 비노는 합의가 불가능했다. '공천학살'이란 뒷말이 나올지언정 한 쪽이 온전히 승리하기엔 힘이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당시만 해도 지구당 위원장의 지위가 보장되는 시기였는데, 이들이 자리를 내놓지 않는 상황에서 경선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더불어 제2의 '호남맹주'를 노리는 구 동교동계 거물들과 아예 '호남정당'의 이미지를 표백, 제거하려고 하는 친노의 입장이 일치할 리가 없었다.
2003년 9월 21일, 정대철 대표를 포함한 37명의 의원이 '국민참여 통합신당(가칭)'을 구성하며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다. 또한 친노 인사들도 이미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기 위해 선도 탈당한 상황이었기에, 분당은 현실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새천년민주당은 친노계와 노무현이 희대의 배신을 했다며 강력하게 비난 성명을 냈다. 잔류 민주당은 구(舊)주류의 박상천 최고위원이 대표직을 승계하고 뒤이은 11월 전당대회에서 김대중 대표를 재선출하면서 재정비에 나섰다.
2004년 1월 28일, 결국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었다.
제 25대 중추원 의원 선거 이후
호남 정당으로서 의석은 매 선거마다 얻으며 원내진입에는 성공했지만 100석의 단위를 웃돌던 새천년민주당은 고작 10석 안팎의 의석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친노계가 창당하자마자 정권을 잡는것을 보고 새천년민주당은 이를 아득바득 갈기 시작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당시 당내에 있던 PD계와 NL계가 지속적으로 극좌 노선으로 걸어가는 행보를 보이면서 당 내에서 분열이 일어났고, 결국 NL-PD계가 민주노동당을 창당하며 점점 진보정당들이 협력하지 못하기 시작했으며 결과적으로 2010년대에 들어서는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몸싸움을 국회에서 벌이는 새천년-열우당 국회 폭력 사태를 일으켰고, 열우당과 민노당은 이정희 의원과 심상정 의원이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지경에 이르면서 2009년부터 제기되던 노무현 내각 불신임이 결국 통과되었고 열우당에서 노무현이 하야하게 되었다.[3]
열우당과 민노당으로 인해서 호남,황해,평양에서 얻던 의석들을 지속적으로 상실하면서 15석 안팎의 의석은 5~7석까지 잃게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고, 나중에는 정동영계에 의해 새천년민주당이 해체되고 통합민주당으로 신설창당하게 되면서 새천년민주당의 역사가 끝나게 된다.
제 22대 의석
| |||||||||||||||||||||||||||||||||||||||||||||||||||||||
| 제22대 민의원 1999년 6월 4일 ~ 2003년 6월 5일 (예정) [ 펼치기 · 접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