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카페가국)

大韓國
대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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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표어광명천지
국가애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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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경성부 북위 37.568889° 동경 126.976667°
정치
황제이원
영상김종필
역사
개국1392년 8월 5일
 • 익종경장1839년 10월 4일
 • 제국 성립1842년 10월 12일
 • 홍범 제정1871년 5월 15일
지리
면적290,500㎢ (75위)
내수면 비율0.4%
시간대KST (UTC+9)
DST없음
인문
공용어한국어, 한국 수어
인구
2016년 어림121,571,582명
2015년 조사121,515,399명 (12위)
경제
GDP(PPP)2016년 어림값
 • 전체5조 742억 $ (3위)
 • 일인당39,254$ (29위)
GDP(명목)2016년 어림값
 • 전체4조 9429억 $ (2위)
HDI0.901 (18위, 2016년 조사)
통화대한국 양 (KRY) (화폐 단위:¥}
기타
ISO 3166-1410, KR, KOR
도메인.kr / .한국
국제 전화+82

대한국(大韓國, 영어: State of Korea)은 동아시아의 중심부에 위치한 국가로, 약칭은 한국(韓國), 대한(大韓)이다. 서쪽으로는 황해를 사이에 두고 제국이, 동쪽으로는 동한국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이 있고, 남쪽으로는 벽랑 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만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만주국과 맞닿아 있다. 수도는 경성부이며, 국기는 태극기, 국가는 애국가, 공용어는 한국어이다. 공용 문자는 한자와 언문이다.

대한국은 급진적으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개방 정책인 익종경장으로 부국강병에 주력한 결과 근대화와 발전을 이룩하였다. 두 차례의 한·순 전쟁과 한·러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영주·남유구를 흡수하는 한편 타이완·만주·제를 경략하였다. 1940년대 오월에 침략에 대응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참전하여 승리하였다. 이후 김일성의 난을 겪었지만 한강의 기적이라는 높은 경제 성장을 구가하며 1980년대에 세계적인 일류 선진 강국으로 거듭났다.

국호

정식 국호는 대한국(大韓國, State of Korea)으로, 익종경장 이후 천자국임을 선포함에 따라 천조만이 가질 수 있었던 외자 국호를 선포하였다. 또한, 한(韓)은 고구려·신라·백제의 삼한을 아울러 이어 받는다는 의미이다. 자부심차게 부르는 별칭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인데 식민제국 시절에 두루 사용되었고 현재에는 과거에 건설한 식민제국을 일컫는 역사적 용어로 주로 쓰인다. 다만, 외국과의 스포츠 경기 관람 시 등 이따금씩은 제국이라고 호명할 때가 있다. 또한 천조임을 강조하여 대한천국(大韓天國)이라 일컫기도 한다. 줄여서 한국(韓國)이라고 하며, 정식 국호에 정치체제를 표시하지 않은 것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전통이다.

역사

근세 전기

세종대왕은 수리시설 증대로 수자원을 확보하고, 개량한 수차와 우수한 벼 품종을 보급하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서를 배부하는 한편, 이앙법을 장려하여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하였다.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자 인구밀도도 증가했고, 그에 따라 상품작물의 재배가 등장하고 상·공업이 진흥되는 등 산업의 총체적인 분야에 전방연쇄효과(前方連鎖效果)가 나타났다.

산업 발전에 따라 국부가 증대되었다. 마침 관세가 도입되어 세입도 확연히 증가하였다. 이러한 여유를 바탕으로 조정은 기반 시설 건설, 광산 개발, 국방력 강화에 나서게 되었다. 한편, 명의 쇠퇴로 제한이 없어져 은화·동화 등을 주조할 수 있었다. 여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유황을 채굴하여 화약 병기를 개발하고, 야금술 등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

세종대에 얻은 4군 6진에 삼남인들을 지속 이주시켜 이를 개척하고자 하였다. 또한, 여진을 우리나라에 종속화시켰다. 제주도에 중앙 권력이 미치게 하고, 영주, 벽랑 등 남방도서들을 본격적으로 개척하였다. 유구와 대마도를 복속하기도 하였다. 강성해진 국력과 명의 쇠락에 기초하여, 외왕내제 체제가 중종대에 이르러 공고화되었다.

근세 후기

조정은 국초(國初)부터 여진과 왜의 침략에 대비하여 강한 군사력을 다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삼포왜란의 경험과 히데요시가 대규모 전쟁을 준비한다는 통신사의 증언을 계기로 일본에 대한 방비를 강건히 하였다. 일본군은 조총을 앞세워 쳐들어 왔다(임진왜란, 1592). 하지만, 이순신 제독의 보급로 차단과 북방군의 남하에 고전을 겪었다.

일본군은 마침내 신립에게 격멸 당하여(조령 대첩), 우리나라와 강화하기로 하였다. 이후 도요토미 씨가 몰락하고 에도 막부가 수립되어, 한·일 양국은 국교를 재개하게 되었다.

애신각라 씨는 여진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운 후 내부 사정을 타개하기 위해 한반도를 침략했다(정묘호란, 1627). 한성부로 직행한 3만 호병(胡兵)은 서북군과 동북군에게 퇴로가 차단 당했고, 삼남군과 경사군이 조총 등 신무기를 동원하여 후금군을 격퇴하였다. 후금은 멸망하고, 해서 여진의 엽혁나랍 씨가 만주국을 건국하였다.

효종대에는 헨드릭 하멜이 제주에 표착한 사건을 계기로 네덜란드와 군산에서 제한적인 무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나전칠기·도자기·홍삼·차·화문석 등이 서구에 소개되었고, 네덜란드를 통해 천리경·의학 같은 서구문물이 유입되었으며, 구황작물이 도입되어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영·정조대에 탕평책을 실시하여 정국이 안정되었으나 붕당이 해체되고 척신들이 득세하여 정조 사후 세도 정치가 발현하게 되었다. 김조순은 뛰어난 정치가였지만, 그 아들 대부터 삼정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국정 농단이 벌어졌다.

익종 시대(1834~1860)

1832년, 영국 상선 로드 애머스트 호가 개항을 요구하였다. 장동김씨 정권은 이에 응하여 부산항을 개방하였으나 사실상 그 이익은 교역 주관 기관인 순도서(巡渡署)를 장악한 세도 정권이 독점하였다.

한편, 네덜란드와의 무역 창구로 자리잡고 있었던 군산항을 중심으로 호남, 그리고 영국에의 개항장이 된 부산항을 중심으로한 영남에서 선진 문물에 감화된 선비들이 개화파를 형성하는데, 각각 호남학파와 영남학파가 탄생하였다. 장동 김씨 정권의 이익 독점 행위에 분노한 유사(儒士)들은 세도 정권을 본격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경화세족(京華世族)이 조정을 장악한 형국에서, 벼슬길이 막힌 지방 사림은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고, 이는 장동김씨 정권 타도로 폭발하게 되었다. 1830년대 중반, 개화파 유생들의 공론은 '타도 세가(勢家)'였다.

호남학파와 영남학파는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면서 개화를 이끌어 갔는데, 1839년 몰락한 양반 출신의 상인인 사마용(司馬龍)의 주선으로 양남동맹(兩南同盟)이 결성되고, 양남만인소(兩南萬人疏)가 성공하면서 세도 정권은 몰락하고, 임금 중심의 새 정부가 들어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였다(익종경장, 1839).

익종은 경장 공신들의 주청에 따라 1842년 연호를 경덕(景德)으로 고치고 새로 환구단을 건립한 뒤 황제에 즉위하여 천조(天朝)인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신 정부는 유럽과 미국에 견양사(遣洋使)를 비롯한 사절단을 파견하여 신문물을 습득하게 했다. 신분제를 철폐하고, 도시개조사업과 철도 부설을 전개했다. 또, 금본위제로 통화 개혁을 하는 한편, 문란해진 조세 제도 및 병역 제도를 바로 잡았고, 상공업을 장려했다. 또, 근대식 학교를 세우고 다양한 서양 문물을 도입하였다.

도(道)를 폐지하고 전국을 40여 개의 군(郡)으로 구분하였다. 또한, 그간 중앙 행정력이 미치지 않았던 영주 지역에 행정구역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할령으로 했다. 유구를 일본과 분할하여 남유구에 유구 군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대만까지도 통치권에 편입하였다.

헌종 시대(1860~1871)

근대화에 성공한 한국은 영토 확장과 대외 진출에 힘을 쏟았다. 만주국에 대해서는 1860년 한·만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개항시키고, 보호국으로서의 만주국의 지위를 공고화하여 이를 경략했다. 철도를 부설하여 만주에서 생산된 철강 등의 자원을 한반도로 수송했고, 이는 근대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1964년에는 제(齊) 칭타오 앞바다에 군함 경동호를 보내 무력시위를 벌이고, 교주 조약을 맺어 개항시켰다. 한국은 한·만수륙무역장정과 교주 조약 체결을 계기로 순과 마찰을 빚었다. 순과의 갈등이 깊어지자, 한국은 군비를 확장하고 꼼꼼하게 전쟁을 준비하였다.

한국인 상인이 순나라 경내에서 살해당한 것(연경 사건)의 책임을 묻는다는 명분으로, 당시 박규수 황각(黃閣)은 순에 국군을 파견하여 한·순전쟁을 일으켰다(1871). 전쟁은 근대적인 신무기를 동원한 한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 맺은 제물포 조약으로 한국은 순에게 본래 순의 제후국이었던 제의 순으로부터의 독립을 확보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받았다. 한·순전쟁의 승리로 한국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였다.

고종 시대(1871~1919)

러시아는 만주를 탐내어 한국과 갈등을 빚었다. 한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하여 전쟁 대비에 힘을 쏟았다. 백성들의 반러 감정은 들끓었으며, 동일하게 러시아의 남하를 주시하던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마침내 한국은 해삼위에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한·러전쟁을 일으켰다(1881년).

대한해협에서 이순선 제독의 활약으로 러시아 발틱 함대를 크게 무찔렀다(동해대첩). 이외에도 치열한 접전 끝에 승리가 한국 쪽으로 기울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의 중재로 한국과 러시아는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만주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게 되었고, 화북에서의 우선적 이익 확보를 보장받았다. 이후 한국은 만주국을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제와 갑신조약(1884)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식민지로 만들어 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유럽 상품을 대신하여 아시아 시장에서 면직물 등의 한국 상품이 우세하게 되어 무역은 앞도적인 수출초과가 되었다. 또한, 유럽 지역으로 군수품을 수출하여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의 무기 수출국이 되었다. 유럽에 선박이 부족해지면서 세계 제3위의 해운국으로 거듭나는 등 해운업과 조선업도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나아가 제철업과 화학 공업까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렇게 공업 발전이 이루어져 경기 호황이 지속되자, 농산물의 수요가 늘어 농촌 경제도 크게 성장하였다. 농촌의 주택들이 현대식으로 개량되고, 마을 길이 정비되고, 전기가 설치되는 등 농촌에서도 경제 발전의 혜택을 누리기 시작하였다.

순종 시대(1919~1926)

산업화와 대외 팽창을 거치며 국가가 부강해지고 민중의 정신적 수준이 향상되었다. 이에 따라 20세기 초반부터 순종 황제 때까지 정치·사회·문화 각 방면에 걸쳐 민주주의적 개혁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융희 데모크라시). 그 결과 정당 정치가 근대화되었고, 보통 선거 실시로 민주 정치가 진일보하였으며, 사회주의 운동도 본격화되었다.

교육과 학문 면에서도 큰 변화가 있어, 의무 교육과 대학 교육이 확대되었고 자유 분방한 예술 활동이 보장되었다. 민본주의가 제창되고, 정도전과 정여립이 재평가 받았다.

1920년, 국군이 개봉에서 순과 충돌하여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개봉 사건). 한국은 해군을 동원하여 천진항을 포격하고, 연경을 점령하는 등 전면적인 공세에 나섰다(제2차 한·순전쟁). 압도적인 전력 차로 승리한 한국은 전후 처리를 위해 순과 군산 조약을 체결하여 화북에서의 이권을 확보하였고, 막대한 배상금을 받았다(1922). 제2차 한·순 전쟁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은 순은 결국 1924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멸망하고, 대순 사회주의 연방이 수립되었다.

무종 시대(1926~1970)

대공황의 영향으로 소비가 위축되고 생산이 급감하고 실업이 급증하는 등 내수기반이 붕괴되자, 한국은 심양 협정을 맺어 보호령과 식민지를 규합해 양(兩) 블록을 만들어 대처하였다. 그리고, 수입품을 규제하기 위해 높은 관세 장벽을 쌓게 되었다. 이러한 블록 경제로 잠시나마 안심할 수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경제 침체를 가속하는 요소가 되었다.

경제 침체로 인해 사회가 불안해진 오월에서는 장개석의 국민당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아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였다. 국민당 정권(국부)는 1941년 범중화주의를 내세워 중화민국을 선포하고 한국령 제·만주와 일본령 민을 침공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과 일본이 오월에 선전 포고를 하였고, 이로써 동아시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오월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한·일 동맹이 결성되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한국이 산해관 대첩에서 오월군을 물리침으로써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후 한·일 연합군은 화북에서 오월군을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제를 해방하였다(1943). 이어 복주 상륙 작전을 펼쳐 민을 해방하였다.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국민당 정부는 서쪽으로 파천하기 시작하였다. 한·일 연합군은 서안, 중경을 거쳐 성도까지 파천한 국민당 정부를 포위하고, 파촉 분지를 공습하였다.

패배가 거의 확실시되고 포위가 장기화되자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에 대한 서촉 인민들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이에 국부군 내부에서 항복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고, 군민(軍民)의 요구를 거스를 수 없게 된 장개석은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한·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만주에 공산 국가가 수립되자 국내에서는 공산주의가 빠르게 스며들었고, 김일성 등 공산당 계열 군인들은 소련과 순, 만주의 도움을 받아 반역을 모의하였다. 1950년 6월 25일, 공산당 반도(叛徒)들이 평양을 점거하면서 반란이 시작되었다(김일성의 난).

이승만 황각은 일단 황실을 모시고 파천한 후 미국과 일본에서 급파한 원군과 힘을 합하여 공산군을 물리쳤다. 순·만주의 개입으로 후퇴하기도 하였지만 우세한 전력을 바탕으로 반란군을 토멸하였다. 이후 반공주의가 확산하게 되었다.

이승만 황각은 장기 집권과 독재를 꾀하였다. 이승만 황각과 여당인 자유당은 총선거 승리를 위해 온갖 선거 부정을 저질렀다(기해부정선거, 1960). 선거 당일부터 마산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 도중 실종된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4월 19일, 경성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부정 선거에 하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포졸들이 행진하는 시위대에 총을 쏘아 1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4월 25일에는 유림 대표들이 황제에게 이승만의 탄핵을 상소하였다. 마침내 다음 날 이승만은 영의정의 직책에서 물러났다. 기해의거는 학생과 시민의 힘으로 부패한 장기 독재 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한국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승만 황각 붕괴 후 실시된 총선거에서 민본당이 크게 승리하여 장면을 영의정으로 하는 의정부가 출범하였다(1960). 기해의거 이후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정치·사회적 요구가 터져 나왔다. 학생 운동은 물론 농민 운동, 노동 운동과 같은 대중 운동도 일어났다. 그러나 장면 황각은 대중의 각종 요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국민의 반발을 샀으며, 부패하고 무능하여 반정부 여론이 들끓었다.

1961년 5월 16일, 민본당 황각의 실정이 계속되는 가운데 중수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무사들이 반공과 경제 재건을 '구국 공약'으로 내세우며 무신 정변을 일으켰다(경자정변). 무인 정부는 모든 정당, 사회단체와 국회를 해산하고 방국재건기무도감(邦國再建機務都監)을 만들어 군정을 실시하였다. 방국재건기무도감은 재상 중심제로 홍범(洪範, 헌법)을 개정하였고, 이어 승상에 박정희가 선출되었다.

박정희는 경제 부흥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제2차 세계대전과 김일성의 난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해결하고, 우리 경제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시켰다.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정책으로 한국은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매년 평균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지속하며 미국에 버금가는 경제 대국으로 거듭나갔다. 또, 산업 구조의 고도화가 추진되면서 무역 수지 흑자에 힘입어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게다가, 근면·자조·협동의 3대 원칙에 기초한 농촌 근대화 운동인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여 도시보다 낙후된 농촌을 개발하고 개선하고자 하였다. 새마을운동의 성과로는 하천정비·교량건설·수리시설확충·농경지확장 등을 통한 식량자급기틀 마련, 농어촌 전화(電化), 농가소득 증대 등을 들 수 있다. 이후 박정희는 상국(相國)이 되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엄청난 권력을 누렸다.

한편, 박정희 황각(黃閣, 의정부)은 미국의 요청으로 국군을 월남에 파병하였다. 한국군의 참전은 동아시아에서 한국·미국·일본을 중심으로 한 반공 연대를 강화하였다. 또한, 전쟁 기간 중 한국 기업이 월남에 진출하고 한국 상품이 수출되면서 많은 외화를 벌어들였다. 그러나 월남 파병으로 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희생되었다.

혜종 시대(1970~2005)

박정희 황각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응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국회를 해산하고 또다시 홍범을 개정하였다(임자변법, 1972). 변법 홍범은 재상을 어민공동회(御民共同會)에서 선출하게 하고, 승상의 연임을 제한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승상(상국)의 영구 집권이 가능해졌다. 또한, 승상에게 긴급 조치권이라는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다. 이후 변법 체제에 반대하는 시위와 개헌 청원 상소가 전개되자, 박정희 황각은 잇달아 긴급 조치를 발표하며 이를 탄압하였다.

1979년에는 부산과 마산 등지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유생들과 시민들의 만인소가 일어났다(부·마만인소). 박정희 황각은 비상계엄과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그러던 중 권력 내부의 갈등이 일어나, 박정희가 판상무원사 김재규에게 총살당함으로써 변법 체제는 막을 내렸다(순화방의 변)

순화방의 변 이후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높아졌다. 하지만, 전두환과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기미군란, 1979.12.12). 1980년 5월, 대학생들이 신군부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신군부는 이를 구실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였다.

광주에서는 신군부의 조치에 맞서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었다. 신군부는 5월 18일부터 공수단을 투입하여 광주 지역의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 이에 분노한 광주 군민들은 시민군을 결성하여 계엄군에 맞섰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광주군청에서 저항하던 시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광주항쟁).

민주화 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민주화를 주장하던 교수와 언론인, 교사 등을 해직하였다. 또한, 홍범을 개정하여 전두환이 선거원(選擧院)의 간접 선거로 임기 7년의 승상에 당선되도록 하였다. 전두환 황각은 민주화 운동을 강력히 탄압하는 한편, 과외 금지, 중·고등학생의 두발과 교복 자율화, 야간 통행금지 해제 등의 정책을 통해 국민의 마음을 얻고자 하였다.

1987년 승상 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학생, 시민은 승상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6월 10일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를 규탄하고 개헌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전국에서 동시에 열렸다(정묘항쟁). 전국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자, 황각과 여당은 이에 굴복하여 승상 직선제를 수용하였다(정묘민주화선언).

직선제 개헌 이후 실시된 승상 선거에서 야당의 분열로 여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노태우 황각은 경성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공산 국가들과의 국교 수립에 적극 나섰다. 또한, 당시 국회는 국민의 요구에 따라 광주항쟁의 진상을 규명하고 전두환 황각의 비리를 조사하기 위한 청문회를 열었다.

1990년, 노태우의 안국당, 김영삼의 위민당, 김종필의 신협화당이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합당하여 보국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총선거에서 승리하여 과반 의석을 차지한 보국당은 김영삼을 영의정으로 추대하였다. 문민 황각을 표방한 김영삼 황각은 금융 실명제를 도입하고, 지방 자치 단체장·의회 선거를 실시하여 본격적인 지방 자치를 복구했다.

1997년 총선거에서 민본당이 집권하여 김대중이 영의정에 선출되었다. 60년 만에 여·야 간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국민의 황각을 표방한 김대중 황각은 왕정이 복벽된 만주와 경제 협력 사업을 벌여 경제 성장을 도모하였다. 민본당이 재집권하고, 노무현이 영의정을 맡게 되었다. 참여 황각을 표방한 노무현 황각은 시민 사회와의 소통에 힘썼다.

상지재위(上之在位, 2005~)

2007년 총선거에서 항산당이 민본당과 연립 정권을 수립하여 심상정 황각이 집권하였다. 심상정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전면 철폐하고, '노동이 당당한 나라'를 내세웠다. 재벌 개혁을 단행하여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또한 노령 연금을 인상하고 실업 수당을 신설하는 등 사회 보장 제도 건설에 주력하였다.

2012년 총선거에서 문재인을 수상으로 하는 민본당 황각이 수립되었다. 문재인은 세월호 참사(2014)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으며 메르스 사태(2015)가 전국으로 번지는 등 실정을 반복하다가 자신 사퇴하였다. 2015년 같은 당의 이재명이 수상으로 집권하였다. 이재명은 의료 공영화와 최저임금 1만냥 인상을 시행하였다.

2017년 총선거에서 보국당이 승리하여 김윤문 영의정이 집권하였다. 김윤문 황각은 적극적인 무역 정책으로 경제 발전을 촉진하였으며, 문화 산업에도 관심을 보였다. 단, 김윤문이 실각하면서 좌의정이었던 남인지가 대신 집권하였다. 남인지 황각은 인사 행정을 투명화하였다.

2018년 총선거에서는 한비자라경원이 창당한 민주자유당이 역풍을 일으키며 보국당을 제치고 승리하여 한비자 영의정이 집권하였다. 한비자 황각은 카국계와 밴드계 국가들을 신경쓰며 일대일로 사업을 추진하였고, 10.13 경제대개혁령을 선포하여 문화와 식품산업을 도왔다. 하지만 도중 좌의정이자 영부인, 정치동료였던 라경원이 사망하게 되었고, 그 후 한비자가 돌연 사퇴를 선언하면서 좌의정이었던 김종필이 집권하게 되었다. 김종필 황각은 하였다.

정치

입헌군주제 국가로서 현재의 군주는 이원 황제이다. 대의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고, 대한국 공회는 중추원과 민의원이 있는 양원제로 임기는 각각 4년이다. 좌의정부사과 우의정부사, 11부 대신을 비롯한 공직자들은 영의정부사에 의해 지명되며 11부는 내무·외무·상공·재무·법무·노동·국토·국방·문교·통신·공안부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의 영의정은 김종필이다. 대금오와 고등금오에 각 지방금오와 간이금오가 속해 사법권을 행사한다. 판관은 영대금오사와 형부상서의 추천으로 황제가 임명한다. 헌법재판소는 없으며 법률의 합헌 여부는 대금오에서 가린다.

행정구역

대한국의 현 행정구역 제도는 익종경장에서 기인한다. 익종은 경장 과정에서 이전까지 사용되었던 8도 체제를 철폐하고 국토를 40여 개의 군으로 구분하였다. 이후 영주 편입, 남유구 병합 등을 거쳐 제도가 정비되어 현재의 부군제(府郡制)에 이른다. 2018년(무위 13) 기준 경성부, 평양부, 부산부의 3부와 수원군, 양주군, 대구군, 울산군, 의주군, 동영주군 등 49개의 군이 있다. 부의 지방장관을 부윤(府尹), 군의 지방장관을 군수(郡守)라고 한다. 부 아래에는 부(部)-방(坊)-계(契)-동(洞)이 있고, 군 아래에는 시(市)-방-계-동 또는 읍-면-리-동이 있다.

군사

대한국은 근대의 팽창 정책 및 주변국과의 대립으로 일찍부터 군사력을 증강시켜 왔다. 대한국 병부국군(國軍) 또는 천군(天軍)이라고 불리는 대한국의 군을 지휘하고 있다. 2017년 8월 기준 병력 규모는 현역이 약 1,305,000명으로 세계 4위, 예비군은 약 9,200,000명으로 세계 1위이다.

경제

대한국은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통화 단위는 양(兩, ¥, Yang, KRY)이다. 국내총생산의 규모비로는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으로, 한국의 경제 동향은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준다. 국내총생산은 명목상 4조 9,429억 미국 달러,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5조 742억 미국 달러에 달하며, 구매력 평가 기준 일인당 국내총생산은 39,254 미국 달러로, 선진국으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

한국의 경제 대국 역사는 근세 초기 세종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은 이앙법을 도입하는 등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하였다.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자 인구밀도도 증가했고, 그에 따라 상품작물의 재배가 보편화되고 상·공업이 진흥되는 등 산업의 총체적인 분야에 전방연쇄효과(前方連鎖效果)가 나타났다. 또한 효종조에는 하멜 표착한 사건을 계기로 네덜란드와 제한적인 무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나전칠기·도자기·홍삼·차·화문석 등이 서구에 소개되었고, 네덜란드를 통해 천리경·의학 같은 서구문물이 유입되었으며, 구황작물이 도입되어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 때, 한국인이 만든 우수한 품질의 공예품과 회화들이 서구에 전래되어 서구 예술계에서 한국주의(Koreanism)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제국 시대의 한국 경제는, 익종조의 "부국 강병"(富國強兵)정책에서 시작되었다. 익종황제 당시 조정은 외국인 강사 (고용 외국인)를 초빙하여 철도의 건설과 서양식의 공장 건설을 추진했다. 제국 시대에는 비단이 외화 획득 산업으로 중요시되고, 군함 보유 수가 경제 지표가 되어 있었다. 또한 공업이 경제 기반인 지역도 있었다. 근대화 이후 영토에 편입한 영주는 자원이 풍부하여 산업화의 촉진제가 되었다.

한국은 근대화에 착수한 지 반세기 후에도 여전히 농업에 경제를 의존하는 농업국이었다. 1870년, 한국 인구의 70%는 여전히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GDP의 40%는 1차 산업으로부터 창출되었었다. 그러나 전쟁의 지속적 수행 결과로 중공업과 운수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1910년에는 농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까지 떨어졌다. 1920년의 제2차 한·순전쟁 이후로 대한 제국 내의 타지역에 대한 투자가 늘어났다.

한·러 전쟁 이후로 전쟁물자 원료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자 대규모의 석탄 개발이 남몽골·북지나 등에서 이루어졌으며, 석유 수급이 만주에서, 식량자원 수급이 제와 대만 등에서 이루어지는 등 대한 제국의 동아시아에서의 경제적 개발과 수급이 박차를 가했다.

동아시아 전쟁과 김일성의 난을 극복한 후 대한국은 경제 재건에 매진했다. 베트남 전쟁과 월·순 전쟁 특수에 기초하여 경제 부흥 5개년 계획과 새마을 운동을 필두로 "Made in Korea"와 "한국의 다국적 기업"이 세계를 석권하고, 한국이 "경제 대국"으로 올랐다. 이후 양극화로 대변되는 사회적 불평등이 가시화되어 큰 문제로 부상했다.

산업

한국의 산업은 2차대전 후, 국민소득에서 제1차 산업의 비중은 급속히 저하되고, 제2차 산업·제3차산업의 비중은 높아져서 고도의 선진공업국이라 할 수 있을만큼 높은 지위에 있다. 한편 산업구조의 중핵인 제조업에서 중화학 공업화율(工業化率)은 미국이나 독일에 못지않다. 한국의 주요 산업으로는 자동차산업, 기계산업, 전자산업, 물질산업, 에너지산업 등이 있다.

농업

한국의 농업은 영세 경작·가족 경영·미작 중심이라는 점들이 제2차 세계대전 전과 본질적인 차이는 없으나, 생산성이나 경영 내용 면에서는 크게 변질·발전되어 있다. 변질·발전의 주된 요인으로는 산업구조 변화와 농산물 시장의 확대를 가져왔다는 점과 농업의 기계화에 따라 생산력이 증대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국은 인구밀도가 높은 동시에 인구 대국이나 농경지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식량을 수입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업경제의 보호를 위해 사회적 비용을 치르면서 자국의 농업 분야를 해외의 농업 메이저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상공업

공업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발전을 지속하고 있다. 1960년 이후 설비투자의 증대, 기술혁신의 진전에 따라 중화학공업 부문을 중심으로 하는 각종 신흥품목의 공업이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현재는 하이테크 산업(IT, 첨단 전자부품 및 전자제품 등등), 자동차, 광학, 조선, 철강 등의 산업분야에서의 첨단기술이 전 세계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예로부터 상공업이 발전해온 한국에서 서비스업은 국민 총생산의 4분의 3 가량을 차지한다. 한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과 외국과의 무역 거래 확대는 서비스업의 발달을 촉진했으며 금융업도 발달해 다국적 기업이 대한국에 본사 및 지사를 두고 있으며, 외국인들의 투자도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고용

사회, 문화

사회적 약자

한국은 범인민·범사회적으로, 또한 정부 차원에서 사회적 약자를 긍휼히 여겨 돕고자 한다. 특히 유교가 국시인 만큼 노인에 대한 복지 정책이 잘 되어 있으며 노령 연금은 지속적인 인상을 거쳐 현재 경제 수준에 따라 최대 150만 냥까지 수령할 수 있다. 여성은 예로부터 차별의 대상이었으나 21세기에 들어서 여권 신장 운동이 기세를 얻게 됨에 따라 여성 친화적인 정책이 등장하는 등 개선되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한국에서 짝을 찾지 못하고 구식민지 국가, 일본, 만자(蠻子)권, 캐세이(Cathay)권, 동남아 등 여성들과 결혼하는 남성들이 증가하면서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고 있는 국면이다.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은 한국 문화에 속하면 한국인으로 대우하는 동화정책이다. 귀화한 외국인은 한국식의 성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며, 국문·한자 교육 등 다문화 가정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마련되어 있다.

항산당 집권 기간 동안 노동 권익이 대폭 신장되었다. 사용자는 함부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없게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으며, 우회적인 경로로 희망퇴직을 빙자하여 사실상 내쫓으려는 시도는 호부가 감시하기 때문에 불가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두 거대 노동조합이 있으며, 이들은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중이다. 또한 최저시급이 명확히 규정되어 있는데, 단계적으로 2020년까지 1만 냥으로 인상될 것이라고 정부는 발표하였다.

성적 소수자는 유교적 전통에 의해 배격된 지가 오래이나, 최근 들어서는 이들의 인권을 보장하자는 움직임이 힘을 얻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커밍 아웃'하는 연예인들이 많아지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성적 소수자들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인 보장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장애 등급제 등에 따라 각종 혜택을 국가로부터 얻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주민

한민족이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실상 단일민족 국가에 가깝다.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여진족, 거란족 등 다른 민족의 유입이 종종 존재하였으나 오늘날 동일한 언어와 문화, 동일한 정체성을 공유한 한민족으로 융화되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편입된 영주는 한민족과 남만 제민족 계열의 도래인들이 토착민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한국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한 나라로 동화될 수 있었다. 이외에 대외 팽창 과정에서 만주, 제, 대만 등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다수 있으며, 국제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외국인들의 한국 이주가 더욱 증가하고 있다.

언어

관습적인 공용어이자 법적인 공용어는 한국어로, 그 계통이 학계에서 확증되지 않은 고립된 언어이지만 많은 학자들이 알타이어족과 연관성 있음을 주장한 바 있고, 특히 많은 한국인 학자들은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표준어가 없고 대신 영국의 용인 발음(RP) 정도에 해당하는 어정음(御定音)이 있다. 어정음은 궁중이나 반가에서 사용해온 격식을 갖춘 한문투의 의고적인 방언이다. 다양한 방언들이 있는데, 그 중 제주 방언과 영주의 방언들은 차이가 심하여 한국어족에 속하는 별개의 언어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한국어 표기에 쓰이는 문자인 언문은 세종이 원로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언문청(諺文廳) 또는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이라는 명칭으로 1446년 반포하였다. 언문은 각 자음과 모음이 하나의 기호로 표시되고, 그 자음과 모음을 모아써서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문자이다. 언문의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뜨고 모음은 천(하늘:ㆍ),지(땅:ㅡ),인(사람:ㅣ)을 나타내는 각 부호의 조합으로 만든,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 창제 원리가 밝혀진 문자이다. 한글 창제 이전에는 삼국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써왔던 한자와 이를 당시의 한국인이 쓰던 입말에 맞는 한자의 소리만 따서 문자로 표기한 향찰, 구결, 이두 등이 한국어 기록 수단이었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줄곧 관공서와 사족층에서 한문을 써왔으나, 근대화 과정에서 언문일치 운동이 득세하면서 언한문혼용체가 공식적인 표기 방법으로 공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처음에는 한문투에 언문으로 토를 달기만 한 정도의 한주언종체였으나, 시간이 흐를 수록 언주한종체로 변모하여 지금은 혼동의 여지가 있는 경우나 중요한 낱말을 써야 하는 경우에 한하여 한자를 혼용할 뿐 언문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국어를 로마자로 표기할 때는 매큔 - 라이샤워 표기법을 사용하되 ㅅ(s)뒤에 ㅣ, ㅑ, ㅕ, ㅖ, ㅒ 등이 오면 sh로 한다. 매큔 - 라이샤워 표기법에서는 ŭ(ㅡ)와 ŏ(ㅓ)가 쓰인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는 영어를 제1외국어로 의무 교육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대한국에서 교육하는 영어는 영국식 영어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중학교에서부터 선택하여 배울 수 있는 제2외국어로는 제(齊)국관화, 만주어, 민남어, 오어, 월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아랍어 등의 11개의 언어가 있다. 고등학교에서도 제2외국어를 배울 수 있으며, 대학수학능력시험때 수험생이 제2외국어를 선택할 수도 있다. 특히 일본어와 제국관화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많이 배우는 제2외국어이기도 하다.

교육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있는 유아교육기관 외에 6년제의 초등학교, 3년제의 중학교, 3년제의 고등학교로 구성하되, 고등학교는 종류가 보다 다양하다. 고등교육기관은 2, 3년제 전문학교 외 4년제 종합대학, 법정 특수대학, 대학원으로 한다.

모든 인민들에게 동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 무상 공교육을 실시하며, 초등교육과정을 이수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 소정의 장학혜택(융자 등)을 지원한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6.5%를 공공 교육부문에 지출하고 있다. 의무교육 기간은 12년이다.

유치원은 공립 유치원이 약 70%를 점유하는데 단설 유치원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초등학교에 부설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나머지는 사립 유치원이 차지하는데 정부 보조금이 주어져 재정적으로 안정하다. 공립과 사립 유치원은 질적으로 별반 차이가 없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민주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과 교양을 위주로 교육하며, 중학교를 졸업하고나서는 학생의 진로 및 적성에 따라 진학할 고등학교를 선택하게 된다. 중학교 1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자유학년제를 실시하여 자신에게 적합한 진로를 탐색할 수 있게 한다.

고등학교는 분야별로 전문화된 고등 인재의 양성을 위해 세워진 특수목적고등학교, 자율형고등학교, 사범학교 및 예체능계고등학교, 대학 진학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계고등학교, 그리고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실업계고등학교가 있다.

특목고, 자율고, 사범학교의 입시는 교내 활동을 기록하는 포트폴리오(기존의 생기부를 대체, 학생과 교사가 공동으로 기술)와 자기소개서, 심층면접을 토대로 전공적합성과 인성을 중심으로 정성평가하여 선발하며, 교사 추천제는 일체 금지한다. 예체능계의 경우에는 실기 위주로 평가한다. 일반계고등학교와 실업계고등학교는 평준화 선발한다. 고등학교 교육은 과목선택제를 기반으로 한다.

대학교 입시는 특목고, 자율고, 사범학교의 입시와 비슷하게 포트폴리오와 자기소개서를 정성평가하고 심층면접을 통해 선발한다. 단, 예체능 계열 등 특정 학과는 실기를 우선시할 수 있다. 교사 추천제는 역시 금지한다.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직업을 얻어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으며, 대졸자와 고졸자의 연봉이나 사회적 인식에 차이가 큰 것도 아니기에 대학 진학률은 낮은 편이다.

복지

종교

예술

문학

음악

미술

언론

놀이·축제

요리

문화재

의복

건축

스포츠

한류

공휴일

지리

지형

대한국은 서쪽으로 황해를 사이에 두고 제국, 동쪽으로 동한국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 남쪽으로 벽랑 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만, 북쪽으로는 만주국과 맞닿아 있다.

한반도

한반도는 제3기 마이오세 이후에 일어난 단층과 요곡운동의 결과 동쪽으로는 높은 산지가 급경사로 동해안에 임박하고 서쪽으로는 서서히 고도가 낮아진다. 이를 동고서저의 경동지형이라 한다.

남방도서 지역

기후

동식물

천연자원

대외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