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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신전쟁 戊辰戦争 | |
| 시기 | |
| 1868년 1월 27일 ~ 1869년 6월 27일 (게이오 4년 1월 3일 ~ 메이지 2년 5월 18일) | |
| 장소 | |
| 일본 전역 | |
| 원인 | |
| 쿠로후네 사건 이후, 도막파와 좌막파 간의 갈등 | |
| 교전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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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관[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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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원 세력[7] | |
| 병력 | |
| 120,000명 | 150,000명 |
| 피해 | |
| 양측 총 8,200명 전사, 5,000명 부상 | |
| 결과 | |
| 신정부군 승리, 메이지 유신 개막 | |
| 영향 | |
| 구 에도 막부 세력의 궤멸 및 일본 제국의 성립 | |
개요
1868년부터 1869년에 걸쳐 벌어진 일본의 내전. 1868년이 무진(戊辰)년이었기 때문에 무진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애초에 무진년의 '무진'을 일본식으로 읽어서 '보신전쟁(ぼしんせんそう)'인 것.
보신전쟁이 일어나기 수 년 전부터 꾸준히 있었던 막부 세력과 존황파 세력 분쟁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도막파(존황파)와 구 에도 막부 세력[8][9]간의 전쟁에서 도막파가 승리함으로써, 정국을 조슈 번과 사쓰마 번 세력이 주도하게 되어 메이지 유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즉 일본 구시대 막부의 완전소멸과 근현대사의 개막이라 할 수 있는 전쟁이다. 특히나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큼직한 막부 세력이 이 전쟁을 끝으로 완벽히 몰락하게 되면서 막부는 역사의 한 장으로 사라지게 되었다.[10]
- ↑ 도사 번은 친 도쿠가와 성향의 번주 야마우치 요도가 "(이 전쟁은) 삿쵸와 아이즈, 쿠와나의 사적인 전쟁"이라며 출병을 금지했지만, 도막성향의 상급 무사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삿토 맹약을 근거로 독단적으로 출병했다. 전쟁이 전개되면서 요도는 입장을 번복했다.
- ↑ 사가 번 또는 히젠 번은 사태를 관망하다가 에도성 무혈개성 이후 신정부 군에 가담했다. 위 네 번을 모아 삿초도히라고 한다.
- ↑ 아키(히로시마) 번 등 에도 서쪽의 많은 번들이 신정부에 가담하거나 암묵적 지지를 보냈으며, 쿠보타(아키타) 번처럼 도호쿠에 있으면서도 오우에쓰 열번동맹을 적대하고 신정부를 지지한 번도 있었다.
- ↑ 이하 세 번은 도바 후시미 전투를 전후로 신정부 군에 합류했다.
- ↑ †표는 전사, ‡표는 처형, +표는 병사.
- ↑ 사실상 바지사장 역할이었고 실권은 없었다. 오히려 메이지 천황 본인은 고메이 천황처럼 히토츠바시파 막부를 더 선호했다.
- ↑ 영국이 신정부를 지원했다는 낭설이 많지만, 영국 정부는 중립이었으며 공사 파크스는 오히려 요시노부의 편에 가까웠다.
- ↑ 대정봉환으로 에도 막부는 해체되었으니 이 시기에는 구막부라고 표현해야 한다.
- ↑ 도막(倒幕)파의 반대 세력으로, 좌막(佐幕)파라고 부른다.
- ↑ 보신 전쟁 이후 살아남은 극히 일부의 구 막부 세력이(주로 막부 아래에 있던 하급 사무라이들) 막부 체제의 부활을 위해 활동했다고는 하나 구심점도 없고 변변 찮은 힘으로는 비대해진 메이지 정부에 그다지 타격을 주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