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제2대 국왕 정종ㅣ定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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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357년 7월 26일 | ||||||||||||||||||
| 동북면 함주목 귀주동 이성계 사저 | |||||||||||||||||||
| 즉위 | 1398년 10월 22일 (41세) | ||||||||||||||||||
|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 |||||||||||||||||||
| 사망 | 1419년 10월 24일 (향년 62세) | ||||||||||||||||||
| 한성부 경복궁 장안전 | |||||||||||||||||||
| 능묘 | 후릉 (厚陵) |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자 | ||||||||||||||||||
| 1392년 8월 13일 ~ 1398년 10월 22일 | |||||||||||||||||||
| 조선 국왕 | |||||||||||||||||||
| 1398년 10월 22일 ~ 1400년 12월 7일 | |||||||||||||||||||
| 조선 상왕 | |||||||||||||||||||
| 1400년 12월 7일 ~ 1418년 9월 18일 | |||||||||||||||||||
| 조선 태상왕 | |||||||||||||||||||
| 1418년 9월 18일 ~ 1419년 10월 2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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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내가 덕이 부족한 몸으로서 일찍이 세자의 자리에 있어 오직 뜻을 공경히 이어 받들지 못함을 두려워하였는데, 부왕(父王) 전하께서 명을 내리시기를, ‘내가 병이 들어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하여 만기(萬幾)의 중함을 생각하니, 더욱 마음에 병이 된다. 너에게 정사를 부탁하고 한가롭게 있으면서 병을 잘 조리하겠다.’ 하시기에, 내가 두세 번 굳이 사양하였으나 할 수 없어서 승락하고, 이날에 마지못해 대위(大位)에 올랐다. |
조선의 제2대 국왕. 묘호는 정종(定宗). 휘는 방과(芳果)
조선 건국 후에 왕세자로 책봉된 뒤, 부왕 태조의 선위를 받아 조선의 제2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아버지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도우면서도 왕위를 탐하지 않아 효도를 다했다. 또한 격동의 시기였던 여말선초에서 천수를 누린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치세
왕위에 재위하면서 학문 기관인 규장각, 의료 기관인 내의원을 설치하며 상왕 태조의 뜻을 이어받아 조선의 기반을 닦았다. 또 천거제를 시행하여 관직의 공백을 최소화 시켰으며,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약탈을 저지함으로써 사대 교린의 이념을 국가의 외교 정책으로 삼았다.
무엇보다 삼종지도, 내훈, 가문법을 반포하여 고려 때부터 크게 보장된 여성의 권리를 크게 축소하여 남성 중심의 국가를 개창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런 원인이 제공된 이유는 왕비 정안왕후가 내전에서 잦은 소동을 벌여 내명부와 외명부의 권한을 줄이는 과정에서 조선 전체 여성의 권리도 함께 줄어든 것이다. 이후 동생 태종에게 양위 후 상왕으로 물러났으며, 세종이 즉위하자 태상왕이 되어 편안한 여생을 보내다가 승하하였다.
조선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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