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요제프 폰 크뢰펠린


뤼베크 왕립해군 총사령관
카를 요제프 폰 크뢰펠린
Karl Joseph von Kröpelin
카를 요제프 폰 크뢰펠린.png
출생 1879년 9월 15일[1]
독일 제국 뤼베크 왕국 비스마르 주 비스마르 프리덴스호프
사망 1964년 11월 27일 (향년 85세)
뤼베크 왕국 비스마르 주 비스마르 벤도르프
국적 뤼베크 왕국 국기.png 뤼베크 왕국
재임기간 뤼베크 왕국 국기.png 뤼베크 왕립해군 총사령관
1940년 3월 17일 ~ 1945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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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크뢰펠린 남작가
학력 뤼베크 왕립해군사관학교 (졸업)
종교 개신교 (루터교회)
임관 뤼베크 왕립해군사관학교 (1901년 임관)
복무 뤼베크 왕국 국기.png 뤼베크 왕립해군
1897년 ~ 1945년
최종 계급 원수 (뤼베크 왕립해군)
주요 참전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주요 서훈 뤼베크 왕국 국기.png 백엽성검 기사십자 금십자장
영국 국기.png 대영제국 훈장 대십자 기사 (GBE)

개요

카를 요제프 폰 크뢰펠린은 제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뤼베크 왕국의 해군 제독이다.

뤼베크 왕국의 설정상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이다.

생애

1879년 뤼베크 왕국 비스마르에서 하급 귀족 가문이었던 크뢰펠린(Kröpelin) 남작가에서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하급 귀족이라 해도 나름 귀족가의 자제였던 만큼 큰 부족함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897년 4월 만 17세의 나이로 수도 뤼베크의 왕립해군사관학교에 입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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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축함 KMS 호헨펠테[2]의 함장으로서 항해를 지휘하는 크뢰펠린 (1908.09.10)

왕립사관학교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후 뤼베크 왕립해군 소속 구축함에 생도 신분으로 승선하여 순항훈련을 치렀으며, 1901년 소위로 임관한다. 그 후 꾸준히 진급하여 1907년 소형 구축함의 함장으로 첫 지휘봉을 잡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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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뢰전대장 임명 직후 승선하여 수병들의 경례를 받는 크뢰펠린 (1916.07.09)

이후 1차대전 직전인 1913년에는 소령이 되었다. 소령 진급 직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뤼베크 왕립해군 소속 소대장으로 구축함 2~3척 규모의 소대를 지휘하였으며, 이후 1916년 독일 제국 황립해군과 함께 치른 유틀란트 해전에서 지휘력을 인정받아 중령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제3수뢰전대장[3]의 자리에 오른다. 이후 종전까지 해당 직위를 유지하였다.

킬 군항의 반란

이 시기의 크뢰펠린은 무엇보다도 종전 직전인 1918년 11월 3일 킬 군항에서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의 행보가 유명한 편인데, 그가 해군 지휘관 중 가장 먼저 10.24 명령에 불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10.24 명령은 통칭 1918년 10월 24일 해군 명령으로 불리우는 실제로 있었던 명령으로, 독일 제국의 해군 전쟁지휘부가 대양함대에 내린 영국 해군과의 최후 결전 명령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템즈 강 하류를 공격하고, 그 후 플란데런에서 다시금 영국 해군과 마지막 일기토를 뜬다'라는, 사실상 자살 특공에 가까운 명령이었으며, 이는 빌헬름스하펜과 킬 등에서의 항명과 파업을 불러왔다.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독일 제국의 몰락을 앞당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18년 11월 3일 당시 뤼베크 왕국과 프로이센 왕국이 철도선을 기점으로 동·서로 나누어 영유하고 있던 킬 시 전역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하자, 그곳에 정박해 있던 제3수뢰전대의 전대장 크뢰펠린은 지휘관 중 최초로 10.24 명령에 대한 항명을 결정하였으며, 이후 이를 상부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당시 뤼베크 왕국 정부 또한 기존부터 만연하던 독일 제국 중앙정부와의 갈등과 국왕 한스 3세의 결정에 따라 "시위대를 적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뒤였기에 이에 대해 따로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전간기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뤼베크 왕립해군은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에 대한 견제용으로서 영국 등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크뢰펠린은 주력함 함장·왕립해군 본부 국장 등의 직위를 지내며 해군 내에서의 입지를 높인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상급대장으로 진급하여 왕립해군 내 서열 2위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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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진급 직후 왕립해군 기함 KMS 프린츠 페마른을 배경으로 찍은 기념사진 (1940.03.18)

이후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치 독일의 위협이 점점 거세지자 당시 충분한 실전 경험과 해군본부에서의 전술적 지휘관 경력까지 골고루 갖추고 있었던 크뢰펠린이 1940년 3월 17일 왕립해군 총사령관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직후 국왕 프리드리히 5세에 의해 해군 원수 계급을 수여받는다.

1940년 4월 9일 나치 독일에 의해 뤼베크 침공이 발발하자 영국 해군과의 공조로 왕립해군 탈출 작전을 수립하고 총지휘했으며, 1940년 4월 11일 왕실과 정부 주요 인사, 해군 전력 대부분을 보존하여 스카게라크 해협을 통해 영국으로 탈출한다. 이후 영국에 수립된 뤼베크 왕국 망명정부 및 망명정부 산하 왕립해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전쟁 내내 활약했다. 뤼베크 본토에서 탈출해 연합군에 합류한 뤼베크 왕립해군 함대의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던 만큼, 크뢰펠린은 전쟁 기간 동안 연합군의 주요 해군 장성들과 동급의 대우를 받기도 했다.

전후

전후 망명정부 장성 자격으로 국왕 프리드리히 5세 등과 함께 조국 뤼베크 왕국으로 귀환, 1945년 말까지 총사령관직을 유지하다 12월 1일 퇴임, 전역하고 고향인 비스마르로 돌아가 여생을 보낸다.

퇴임 후 사망 이전까지 베를린 봉쇄(1948), 6.25 전쟁(1950), 쿠바 미사일 위기(1962) 등 냉전의 수많은 사건사고들을 접했고, 이에 대한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밝히기도 하는 등 말년에도 나름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이후 1964년 11월 27일 그는 비스마르 만[4]이 내려다보이는 비스마르 벤도르프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편안히 사망한다.

평가

명실상부 뤼베크 왕국 역사상 최악의 위기였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뤼베크 왕립해군의 총사령관이자 뤼베크 왕국 망명정부의 최고위 장성[5]으로서 뤼베크 왕국의 전후 독립 유지에 지대한 공헌을 한 영웅적 인물로 평가되며, 현재까지 뤼베크 왕국에서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여담

• 본 문서 상단 틀에 삽입된 프로필 사진은 1942년 9월 15일, 자신의 63번째 생일을 맞아 런던에 위치해 있던 뤼베크 왕국 망명정부 임시 청사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각주

  1. ↑ 날짜는 이 인물의 설정이 제작된 2026년 9월 15일에서 따왔다.
  2. ↑ KMS Hohenfelde
  3. ↑ 당시 뤼베크 왕립해군은 독일 제국 황립해군의 체계에 따라 구축함 함대를 수뢰대대-수뢰전대-소대라는 체계로 편성하였다. 1개 소대는 약 2~3척, 1개 전대는 약 5~6척, 1개 대대는 약 10~11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되었다.
  4. ↑ 뤼베크 침공에서 가장 격렬했던 해전인 비스마르 해전이 벌어진 곳이다.
  5. ↑ 망명정부가 현실적으로 제대로 운용할 수 있었던 전력이 해군뿐이었기에 탈출에 성공한 육·해·공 총사령관 중 해군 총사령관 크뢰펠린이 사실상 가장 높은 지위의 인물로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