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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공화국에는 9개의 국제 공항과 22개의 국내 공항이 있다. 항공 교통은 사하콘 그룹에서 운영하는 [[방콕항공]]이 민영으로 운영하며, 시가 총액으로 국영 항공사인 [[타이항공]]을 넘어서는 급속한 성장세를 보였다. 공항 운영은 국영 기업인 태국 공항 공사에서 전담하며, 일부 공군기지로도 사용되는 공항의 경우에는 공군에서 운영하기도 한다. 일부 소규모 국내선 공항의 경우에는 민영사에서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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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공화국에는 7개의 국제 공항과 22개의 국내 공항이 있다. 항공 교통은 사하콘 그룹에서 운영하는 [[방콕항공]]이 민영으로 운영하며, 시가 총액으로 국영 항공사인 [[타이항공]]을 넘어서는 급속한 성장세를 보였다. 공항 운영은 국영 기업인 태국 공항 공사에서 전담하며, 일부 공군기지로도 사용되는 공항의 경우에는 공군에서 운영하기도 한다. 일부 소규모 국내선 공항의 경우에는 민영사에서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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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 공화국 국제 공항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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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므앙 국제공항 (중부 논타부리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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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4일 (수) 01:09 판

타이 공화국
Republic of Thailand
타이공화국.png
타이 공화국의 국기
국가공민의 노래
수도방콕
공용어태국어
정치
정치체제공화제, 대통령중심제, 단원제
대통령수라윳 호티디엠 (타이 민주당)
부통령아파싯 아치차웨 (자유당)
집권여당타이 민주당 - 자유당 연립 정권
역사
  • 수코타이 왕조
  • 1238년 - 1368년
  • 아유타야 왕조
  • 1350년 - 1767년
  • 딱신 왕조
  • 1767년 - 1782년
  • 짜그리 왕조
  • 1782년 - 1949년
  • 타이 공화국 정부 수립
  • 1949년 11월
    지리
    면적514,000㎢
    시간대UTC (UTC+7)
    DST없음
    인구
    2015년 어림64,004,000 명
    인구 밀도109명/㎢
    경제
    GDP2015년 어림값
  • GDP
  • $ 6,400억
  • 일인당
  • $ 9,846
    인간개발지수0.690
    통화바트 (THB)
    종교
    최대 종교상좌부 불교
    종교 분포상좌부 불교 94%
    이슬람교 5%
    기독교 0.9%
    힌두교 0.1%
    기타
    ISO 3166-1764, TH, THA
    국제전화+66

    타이 공화국(Republic of Thailand), 또는 태국가상국제연합 공동세계관 제3채널의 국가로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본래 짜그리 왕조에 기반을 둔 입헌군주제 국가였으나, 1933년 쿠데타로 군국주의자인 쁠랙 피분송크람이 정권을 잡으며 일본과 화친하고, 추축국과 동맹을 맺는 친파시즘 외교를 펼쳤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며 왕당파의 역쿠데타로 실각하였고, 국외로 망명했던 라마 8세가 귀국하는 '왕정 귀환' 사건이 있었다. 그러다 1947년 국왕인 라마 8세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쁠랙 피분송크람 당시 육군야전사령관이 '2차 쿠데타'를 일으키며 왕정은 폐지되었고 대통령 중심제를 골자로 한 헌법이 통과되면서 현재의 공화국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피분송크람 정부 하에서 공화국 체제는 제대로 뿌리내릴 수 없었고 잇다른 국내외 혼란 속에 사릿 타나랏 장군이 쿠데타를 통해 피분송크람 정부를 축출하고 전권을 잡게 되었다. 타나랏 정부는 강력한 군부의 통제력에 기반한 치안 유지 정책으로 공포 정치를 펼치며 반대파를 축출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비판이 있지만, 반대로 중앙집권화를 통한 정책 추진력을 통해 성공적으로 경제 발전을 위한 초석을 닦았다는 평을 받는다. 또한 타나랏 정부 시기에 적극적인 친미 외교 정책을 펼치며 동남아시아의 교두보 역할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이후 1980년대, 타놈 끼티카존 대통령의 대통령 7년 임기 개헌을 두고 반발이 거세던 중, 정부가 야권의 민주화 투사였던 수라윳 호티디엠과 민주화 세력 일당을 잡아 들이기 위하여 대낮에 조직폭력배를 동원하여 이들을 기습한 것이 알려지면서 방콕 시내는 타이 민주화 운동의 최전선이 되었고, 끼티카존 정부가 개헌 철폐 및 야당의 정치 활동을 허가하면서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뿌리내렸다.

    타이 공화국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대대적인 경제 계획을 수립, 시행하였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신흥공업국'으로 불리우고 있다. 동남아시아 전체에서도 결코 영향력이 작지 않다. 그러나 여전한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하여 태국의 경제는 본인의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다. 2000년대 초반, 민주화 이후 집권한 수라윳 호티디엠 1기 정부는 군정장교제(정치장교제)를 도입하면서 군부의 문민에 의한 통제를 본격화하였으나, 계파와 인물 중심으로 움직이는 군부에는 큰 효력을 거두지 못했고, 현재까지 호티디엠 정부가 20년에 가까운 장기 집권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군부 내 특정 계파와의 결탁 때문이라는 추측이 나올 정도이다.

    국호

    태국이라는 명칭은 타이(ไทย)의 중국어 발음을 한자로 음역한 명칭으로, 헌법 상의 공식 명칭은 타이 공화국이다. 본래 1939년 이전에는 시암이라는 국호가 사용되었는데, 1933년 쿠데타 이후, 1938년 총리로 집권한 쁠랙 피분송크람은 시암이라는 국호가 전근대적이고 과거로 퇴보하는 이름이라는 명분으로 타이라는 명칭으로 바꾸도록 결정하였다.

    일본에 굴욕적인 외교 조약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에 참전했던 피분송크람 정부가, 패전과 함께 왕당파의 쿠데타로 실각하면서 국호 문제가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었다. 당시 왕당파였던 쁘리디 파놈용 총리는 국외 망명 중인 라마 8세를 국왕으로 추대하면서 다시 왕정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옛 명칭인 '시암'이 필요하다며 국호를 다시 되돌리자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1946년 2월, 시암으로 되돌려졌으나, 왕정 복고 후 2년도 안되서 쫓겨났던 쁠랙 피분송크람이 다시 쿠데타로 재집권함에 따라 타이 공화국로 바꿔져 현재의 국호로 이어지고 있다.

    국기

    타이 공화국의 국기는 라마 6세 재위 시기인 1917년에 채택된 국기로 청색, 흰색, 적색의 3가지 색으로 구성된 뜨라이롱기(ธงไตรรง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후 1946년 2월, 공화국 정부 수립과 함께 국기에 '국가의 권위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을 추가하였으며, 이에 따라 국기의 의미도 변경되었다. 중앙의 청색은 자유를 상징하고, 흰색은 불교를 상징하며, 적색은 국민의 피를 상징한다. 태국의 국기는 자유와 불교, 국민을 표현하며, 이들을 바탕으로 국가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국가

    타이 공화국의 국가는 『공민의 노래』로 사릿 타나랏 대통령 집권기인 1960년에 정식 국가로 채택되었다. 그 이전에는 태국 육군행진곡을 국가로 사용하고 있었다. '공민의 노래'는 쩐반 첸두리양이라는 무명의 베트남 출신 사회운동가가 작곡하였다고 알려졌는데, 이 이야기에 의하면 첸두리양은 1910년대 반왕정 운동을 전개했던 인물로, 가도 행진을 위해 동지들과 부르기 위해 쓴 곡이 '공민의 노래'라는 것이다. 국가의 가사는 1910-20년대 활동하며 '태국 현대 시의 기틀을 닦았다'고 평을 받는 시인 꼰 후타싱(ก้อน หุตะสิงห์)이 생전에 쓴 시를 사용하고 있다.

    역사

    차크리 왕조

    라마 1세

    1782년 차크리 장군이 라마 1세로 즉위하며 차크리 왕조가 수립되었다. 19세기, 유럽의 식민주의 대두로 시암은 영국, 미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엿고 서양 열강과 친선 관계를 긴밀하게 다졌다. 이러한 외교와 근대화는 시암이 유럽 열강들로부터 식민지화를 피하고 동남아시아에서 독립을 유지한 국가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1909년 영국-시암 조약을 통해 현재 말레이 반도에서의 국경이 정해졌고, 이때 파타니 주, 얄라 주, 나라티왓 주, 사툰 주가 시암령으로 속하게 되었다.

    세계대전기

    쁠랙 피분송크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32년, 쁠랙 피분송크람과 태국 인민당이 주도로 쿠데타를 일으키며, 의회의 역할을 하던 시암 인민위원회는 해체되었고, 왕정은 국외로 망명을 가며 형식상의 의원내각제 체제로 진입하게 되었다. 새로운 정부는 파혼 폰파유하세나를 총리로 추대하는 한편, 반공법 제정을 통해 공산주의 세력을 대거 축출하였다.

    태국의 정국이 안정화되며 1938년에는 쿠데타를 주도했던 피분송크람이 총리직에 올랐고, 자신이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와 같이 태국을 근대화, 서양화하여 더욱 발전시킬 것을 밝혔는데, 이 시기에 태국의 문화, 의복, 주거 양식 등 사회 전반면을 서양화하는 '태국 문화명령'을 추진하였다. 또한 시암이라는 국호가 전근대적이라며 태국으로 국호를 변경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에는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으로 국경을 넘어 태국 본토로 침입하는 일이 발생하자 일본과 굴복적인 동맹을 맺으며 추축국에 합류하였고 헌법 개정을 통해 왕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공화제를 시행하였다. 피분송크람은 이런 와중에도 히틀러나 스탈린 같이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에만 몰두하였다.

    일시적인 왕정복고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고, 추축군의 일원으로 참전하던 태국에 미국의 폭격이 이어지자 피분송크람은 반대 세력의 쿠데타로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고, 신흥 쿠데타 세력은 망명 중이던 라마 8세를 국왕에 추대하며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왕정 복고가 이루어지며 다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지만 신 정권은 피분송크람을 비롯한 이들에 대한 처벌은 오히려 국정 혼란을 더욱 부추길 것이라며 형식상의 처분만 이루어졌고, 피분송크람은 다시 군에 복직하여 야전사령관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되었다.

    군사정부 시기

    1946년 국왕인 라마 8세가 자신의 침실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총리였던 쁘리디 파놈용은 '라마 8세 붕어사건 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사건을 조사하였지만 '타살 가능성이 있다'라는 추측만 내놓은채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현직 국왕의 의문스러운 사망을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중적인 비난이 쏟아지며 쁘리디 파놈용 내각은 총사퇴를 하며 새로운 내각이 들어섰다. 그럼에도 사회의 공분과 혼란은 가시질 않았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피분송크람은 야전사령관의 자리에서 쿠데타를 모의하며 자신 휘하의 장교 20여 명을 동원하며 구체적이고 치말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렇게 1947년 11월, 그는 임시행정위원회를 자처하며 휘하의 군을 통솔하여 조직적으로 정부 기관을 장악하였고,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임시행정위원회의의 이름으로 혁명선언문을 발표하였다.

    피분송크람은 임시행정위원회 위원장의 자격으로 헌법의 효력 정지와 왕정의 폐지를 골자로 한 제1, 2 임시조치령을 발표하였고, 뒤이어 1948년 임시행정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왕정 폐지와 대통령중심제 정부 수립을 골자로 한 헌법을 통과시키면서 1949년, 직선제를 통해 초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며 다시 한번 타이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첫 쿠데타 당시와는 달리 1947년에는 왕정의 인기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헌법 개정은 오히려 반발을 불러왔다. 이는 왕정 복고 세력들에게 또다른 빌미를 안겨준 셈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51년, 왕정복고파 해군 장교들에 의해서 해군을 시찰하던 피분송크람 대통령이 그대로 납치되어 이들에게 나포된 순양함에 억류되었고, 이와 동시에 시내에서 몇 차례 교전이 발생하였다. 이 쿠데타는 공군과 육군에 의해 대통령이 구출되면서 마무리 되었으나, 또다른 왕정 복고 세력들에게는 가능성과 동기부여가 된 셈이었다.

    한동안 계엄령이 선포되었지만 정국은 테러와 소규모 교전이 이어지며 굉장히 어수선했고, 민심은 극에 치닫고 있었다. 정부는 대대적인 우민화 정책을 시행하며 프로스포츠 리그를 적극 도입하며 이 시기에 '타이 프로축구 리그' (1954)와 '타이 프로야구 리그' (1956)가 설립되는 한편, 교육 예산 감축을 통해 의무 교육 기간을 초등 교육 4년을 축소, 학비 지원 제도를 폐지하고, '출판 장려 정책'으로 각종 스포츠, 성인 잡지 출간을 장려, 언론 통제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또다시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사릿 타나랏은 본래 피분송크람의 최측근으로, 1947년 쿠데타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1951년 쿠데타를 비롯한 여타 쿠데타 시도들을 막은 공으로 피분송크람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 덕분에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영향력이 확대되며 쿠데타를 방지한다는 목적으로 군을 움직이는 것 또한 가능해지는 위치에 올랐다. 그러던 중 1957년 총선거에서 부정 선거 의혹이 제기된 것이 큰 전환점이었다. 투표함 교체를 통한 부정 선거 의혹이 야당을 통해 제기되면서 가까스로 조용해졌던 정국은 다시끔 혼란에 빠졌다. 이 와중에 사릿 타나랏에게 접근한 것은 왕당파 세력이었다.

    결국 1958년, 사릿 타나랏은 왕당파 세력과 연대하여 쿠데타를 개시, 숱한 쿠데타가 있었음에도 간신히 유지되었던 송크람 정부는 허망하게 무너졌고, 새로이 사릿 타나랏 정권이 들어섰다. 쿠데타 성공 이후 타나랏은 송크람을 비롯한 유력 인사들을 추방하며 사전에 싹을 잘라내는 모습까지 보였다.

    1985년 방콕 민주화 운동

    경제 성장과 대중적 이미지로 1958년부터 71세인 1977년까지 5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며 장기 집권을 한 사릿 타나랏은 그의 5번째 임기에서 고령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타놈 끼티카존이 대통령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의 임기를 7년으로 하며, 대통령 선거를 간선제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추진하다가 의회의 반발을 산 것을 계기로 의회를 해산하였고, 이는 학생 민주 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는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시키고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시위대를 향한 총격까지 허가, 수많은 시민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 이후 정부는 다시 우민화 정책을 적극 시행하였고, 임기 후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현대

    끼티카존 정부 이후 치뤄진 대선에서는 군인 출신인 '산야 탐마삭'이 여당인 태국 공민당 소속으로, 야당 출신 언론인인 '추안 림파이'와 운동가 출신 수라윳 호티디엠이 출마하였는데, 야권의 단일화가 불발되며 어부지리로 '산야 탐마삭'이 당선, 군인 출신 대통령이 다시 한번 탄생하였다.

    ​산야 탐마삭 정부는 기존 군인 출신 정부와는 차별을 두며 중립 외교를 표방하였다.

    자연환경

    타이 공화국 표준 지형도

    타이 공화국은 인도판과 아시아판의 충돌로 형성된 히말라야 산맥이 이어지며 지리적으로 북고남저의 지형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국토 중심의 남북 방향 산맥인 펫차분 산맥을 통해 북동부와 중부가 구분되어 있다. 이에 따라 북부에서 짜오프라야강이 발원하여 국토의 충적 평야를 형성하였고, 운하 및 수운 교통이 발달하는 원인이 되었다.

    태국은 지역적 특성에 따라 지역을 크게 6개로 구분한다. 이 구분법은 실제 법적인 효력이 없으나, 정부나 각 기관에서 각 지역을 묶어서 지칭할 때 주로 통용되는 방법이다.

    • 북부

    북부는 산악 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미얀마와 라오스 지역과 접한다. 남북 방향으로 높은 산맥이 지형의 주를 이루고 있으며, 산맥 사이의 분지에 치앙마이, 치앙라이, 난, 람빵 등의 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하천을 통한 교통로가 발달하였고, 집약적 농업이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 북동부

    동북부는 코랏 고원 지대로 구성되어 있고, 중심지인 중부와는 산맥으로 가로 막혀 경제적 빈곤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메콩강과 접하고 있어 계단식 논을 통해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강우량이 적어 농업이 어려운 편이다.

    • 중부

    중부는 짜오프라야 강이 형성한 짜오프라야 삼각주 지대를 통해 광대한 벼농사 지대를 이루고 있다.

    • 남부

    말레이 반도의 일부를 이루는 남부 지역은, 대부분 산지를 이루고 우기가 긴 것이 특징이다. 농업은 해안을 따라 이루어진 해안 평야를 통해 이루어지며, 고무, 주석 등의 생산도 이루어지고 있다.

    • 동부

    방콕의 동쪽에 위치하여, 캄보디아 지역의 경계로 이어지는 지역으로, 해안이 길게 이어지며 관광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농업과 함께 공업이 해안을 따라 개발되고 있다.

    • 서부

    서부 지역은 미얀마와의 접경 지대를 따라 이어지는 지역으로, 높은 산지와 협곡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로 인해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자연 환경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인문환경

    인구

    타이 공화국의 인구는 약 6,400만 명으로 75%의 순수 태국계와 14%의 중국계, 11%의 말레이계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

    태국어는 태국의 공용어이자, 태국의 다수 민족인 타이족의 언어이다. 카르다이어족에 속하는 언어로 같은 어족인 라오스어와 사촌 관계이다.

    중원 태국어를 표준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아유타야 방언, 동부 방언, 톤부리 방언, 수판부리 방언 등이 지역에 따라 상이하게 사용되는 방언이 존재하며,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하는 방언도 있다. 타이 정부에서는 방콕 및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사용하는 '중원 태국어'를 표준어로 채택하며, 교육 기관에서 표준어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어휘는 고유어와 함께 불교 문화에서 유래한 팔리어, 인도에서 유래한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어휘들이 일상에서 주로 사용된다. 근래에는 중국과 서양에서 유래한 어휘가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으로 국왕과 불교가 국가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언어상으로 경어법이 발달되어 있으며, 이러한 경어는 명사와 동사에서 특수 어휘를 사용함으로 실현된다. 특히 경어 어휘로는 팔리어,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어휘들이 사용된다.

    종교

    헌법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나, 태국 국민의 95% 이상은 불교도인 불교의 국가이다.

    교통

    도로 교통

    타이 공화국의 도로 교통은 산업화와 함께 주도적으로 이루어졌고, 현재까지 정부 주도하에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운용 중인 고속도로 노선은 7개 노선으로 국영사인 '방콕 도로 철도'에서 운영하고 있다. 최장거리 노선은 1번 고속도로인 '방콕-치앙라이 고속도로'로 약 900km에 달한다.

    철도 교통

    타이 공화국의 철도는 수운과 도로 교통으로 인해 후순위로 밀린 상황이다. 대량 수송 역시 도로나 수운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경영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며, 대부분의 철도 경영을 국영사인 '방콕 도로 철도'에서 전담하고 있다.
    현재 운용 중인 철도 노선은 4개로 주로 남부와 동부에 편중되어 있다.

    항공 교통

    타이 공화국에는 7개의 국제 공항과 22개의 국내 공항이 있다. 항공 교통은 사하콘 그룹에서 운영하는 방콕항공이 민영으로 운영하며, 시가 총액으로 국영 항공사인 타이항공을 넘어서는 급속한 성장세를 보였다. 공항 운영은 국영 기업인 태국 공항 공사에서 전담하며, 일부 공군기지로도 사용되는 공항의 경우에는 공군에서 운영하기도 한다. 일부 소규모 국내선 공항의 경우에는 민영사에서 운영한다.

    • 타이 공화국 국제 공항 현황
      • 돈므앙 국제공항 (중부 논타부리 주)
      • 치앙마이 국제공항 (북부 치앙마이 주)
      • 치앙라이 국제공항 (북부 치앙라이 주)
      • 핫야이 국제공항 (남부 송클라 주)
      • 푸껫 국제공항 (남부 푸껫 주)
      • 우돈타니 국제공항 (중북부 우돈타니 주)
      • 쑤랏타니 국제공항 (남부 쑤랏타니 주)

    수운 교통

    교통에 있어서 수운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부 수도권 지역의 경우, 운하가 발달하여 수운 교통이 발달하였고 이로 '동양의 베니스'라는 별칭도 있었으나,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대부분은 도로 건설을 위해 매립되기도 하였다. 수운 교통의 경우 1960년대 정부의 산업화 추진으로 국영 기업인 '시암국민수운사'가 민영화를 통해 '아시아 해양 운송'으로 바뀌며 운송 업종에서 시가 총액 5위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

    타이 공화국은 특별 행정시인 방콕과 75개의 주를 포함하여 76개의 광역 행정구로 구성되어 있다.

    정치

    1949년 타이 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태국은 절대군주정에서 대통령중심제로 변화하게 되었다. 최초의 헌법은 민주 공화국 체제로 대통령을 국가 최고 수반으로 하는 정치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원칙적으로는 삼권 분립을 토대로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가 상호 견제하는 체제이나, 실질적으로 행정부에 권한이 집중된 경향을 보인다.

    과거 군사정부 시절에는 대통령이 사실상 명칭만 다르고, 선거를 실시하는 '국왕'과 다름 없었으나, 민주화 이후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1인 체제를 막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현재 대통령인 수라윳 호티디엠 대통령이 4번의 대통령직을 수행함에 따라 대통령제 개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

         보수주의 정당 /      진보주의 정당
    대통령 득표율 임기 당적
    사진 성명 정부
    1 Plaek Phibunsongkhram.jpg 쁠랙 피분송크람 송크람 정부 제1대 58.1 %
    (제1대 대통령 선거)
    1950년 2월 ~ 1955년 2월 태국 인민당 (1950 ~ 1958)
    제2대 52.8 %
    (제2대 대통령 선거)
    1955년 2월 ~ 1958년 11월
    1958년, 사릿 타나왓의 쿠데타로 하야
    사랏 타나왓 대통령직 대행
    2 Saraht Tahnawaht.jpg 사릿 타나왓 타나왓 정부 제3대 62.8 %
    (제3대 대통령 선거)
    1958년 5월 ~ 1960년 5월 무소속 (1958 ~ 1960)
    태국 공민당 (1960 ~ 1977)
    제4대 69.7 %
    (제4대 대통령 선거)
    1960년 5월 ~ 1964년 5월
    제5대 67.5 %
    (제5대 대통령 선거)
    1964년 5월 ~ 1968년 5월
    제6대 64.3 %
    (제6대 대통령 선거)
    1968년 5월 ~ 1972년 5월
    제7대 66.5 %
    (제7대 대통령 선거)
    1972년 5월 ~ 1977년 1월
    사랏 타나왓 대통령 서거
    타놈 끼티카존 대통령직 대행
    3 Tahnohm Kithicazhon.jpg 타놈 끼티카존 끼티카존 정부 제8대 60.4 %
    (제8대 대통령 선거)
    1977년 4월 ~ 1982년 4월 태국 공민당 (1977 ~ 1987)
    제9대 65.8 %
    (제9대 대통령 선거)
    1982년 4월 ~ 1987년 4월
    4 Shinya Tammahsak.jpg 신야 탐마삭 탐마삭 정부 제10대 34.1 %
    (제10대 대통령 선거)
    1987년 4월 ~ 1992년 4월 태국 공민당 (1987 ~ 1992)
    5 Sourayut Hothidiem.jpg 수라윳 호티디엠 호티디엠 정부
    (제1기)
    제11대 42.8 %
    (제11대 대통령 선거)
    1992년 4월 ~ 1997년 4월 타이 민주당 (1992 ~ 1997)
    6 Chyuan Rimphai.jpg 추안 림파이 림파이 정부 제12대 42.8 %
    (제12대 대통령 선거)
    1997년 4월 ~ 2002년 4월 자유당 (1997 ~ 2002)
    7 Chamlong Srimuang.jpg 참롱 스리무앙 스리무앙 정부 제13대 46.2 %
    (제13대 대통령 선거)
    2002년 4월 ~ 2007년 4월 타이 민주당 (2002 ~ 2005)
    무소속 (2005 ~ 2007)
    8 수라윳 호티디엠 대통령 초상화.png 수라윳 호티디엠 호티디엠 정부
    (제2ㆍ3ㆍ4기)
    제14대 47.4 %
    (제14대 대통령 선거)
    2007년 4월 ~ 2012년 4월 타이 민주당 (2007 ~ )
    제15대 43.2 %
    (제15대 대통령 선거)
    2012년 4월 ~ 2018년 4월
    제16대 48.5 %
    (제16대 대통령 선거)
    2018년 4월 ~ 2023년 4월
    9 쑤다랏 께유팟.jpg 쑤다랏 께유팟 께유팟 정부 제17대 53.2 %
    (제17대 대통령 선거)
    2023년 4월 ~ 타이 민주당 (2023 ~ )

    행정부

    타이 공화국의 행정부는 대통령을 수반으로 한다. 대통령은 5년 연임제로 국민의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대통령은 국회가 통과한 법률이나, 의결된 사안에 대해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거부된 사안은 같은 회기 내에 재의결이 불가하다. 대통령은 또한 국가법원장을 국회에 추천할 수 있고, 3명의 대법관을 임명할 수 있다. 이외에도 조약 체결, 비준권과 선전포고, 강화권, 군 통수권, 공무원 임명권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방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대통령의 보좌기관으로 부통령을 두고 있으며, 부통령은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어 선임된다. 부통령은 대통령의 유고 시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며, 부통령의 유고 시에는 외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 재무부 장관 순으로 권한을 대행한다.

    입법부

    타이 공화국의 입법부는 국회라고 하며, 총 385석의 단원제로 구성되어 있다. 원칙적으로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했던 차크리 왕조 시기의 '인민위원회'를 기원으로 두고 있다. 1949년 최초의 국회인 제헌 국회가 개회된 이후, 매년 1회의 정기회와 30일 이내의 임시회가 열리며, 법안 의결과 예산안 심사, 국정 감사 및 조약 체결 및 비준 동의 등의 활동을 한다.

    타이 공화국 국회의원의 임기는 4년이며, 헌법에 따라 회기 중의 면책 특권과 불체포특권을 갖는다.

    국회의원 선거는 총선거라고도 하며, 총 385석의 의석 중 308석을 중선거구제에 의한 지역구 의원을, 나머지 77석을 정당명부제를 통한 비례대표로 선출하고 있다. '선거행정관리위원회'에서 선거구를 획정하며 선거에 대한 업무를 총괄한다. 선거구는 법적으로 20만명 당 1명의 의석을 배정하도록 되어 있으며, 광역행정구 당 최소 3석의 의석 수를 두도록 되어 있다.

    사법부

    타이 공화국의 사법부는 국가법원이라 하며, 타 국가와 마찬가지로 재판의 3심제를 시행하고 있다. 국가법원을 최고 법원으로 하여 그 아래에 고등법원, 지역법원을 두고 있다. 이외에도 군사 법원과 같은 특수 법원을 설치하고 있다.

    헌법 법원은 국가법원에서 시행하며, 이 경우에는 위헌법률심판, 탄핵심판, 정당해산심판, 권한쟁의심판, 헌법소원심판 등을 심사한다. 국가법원의 대법관은 총 6명으로, 대통령과 국회가 3명씩 선출한다.

    국가법원장은 대통령이 추천하여 국회에서 과반수에 의해 선출한다. 국가법원장 및 대법관의 임기는 법적으로 정해져있지 않으나, 대체로 대통령의 임기와 같이 한다.

    정당

    타이 공화국은 헌법에 따라 정당의 자유로운 결성과 활동이 보장된다.

    현재 타이 공화국 국회는 제19대 국회로, 2020년에 개원하였다. 2023년 기준 여당은 타이 민주당자유당이며 제1야당은 태국 공민당, 기타 원내 교섭 단체(20석 이상 정당)는 신민당, 노동당이다.

    구분 정당 명 존속 제19대 총선 결과 현재 원내 현황
    지역구 비례대표 총계 지역구 비례대표 총계
    교섭단체 태국 공민당 1960년 4월 ~ 117석 21석 138석 117석 21석 138석
    타이 민주당 1984년 1월 ~ 105석 28석 133석 105석 28석 133석
    자유당 1992년 2월 ~ 53석 10석 63석 53석 10석 63석
    신민당 1984년 2월 ~ 21석 10석 31석 21석 10석 31석
    노동당 1993년 8월 ~ 12석 8석 20석 12석 8석 20석

    행정

    경제

    타이 공화국은 신흥공업국 중 하나로, 자유민주적 혼합 경제 체제 하에서 빠르게 발전하여 구매력 평가 지수(PPP) 환산에 따라 약 1조 2,360만 달러의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다. 1985년부터 1996년까지 약 매년 12.4%라는 기록적인 성장률을 보이며 고도 성장을 이룩해왔으며, 1997년에는 통화 정책의 실패로 경제가 주춤하였으나, 1999년을 기점으로 회복되기 시작해 대규모 국책 사업과 내수 증진 등으로 양호한 경제 실적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줄곧 지적되던 정치적 불안으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투자를 꺼려하며 태국 경제는 제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며, 결국 2023년 타이 공화국 쿠데타 사태가 촉발되며 21세기 들어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다.

    농업

    세계 1위의 쌀 수출국으로서 농업은 태국의 주요 산업으로 GDP의 약 10%를 차지하고 있다. 메콩강 유역에서 펼쳐지는 집약적 농업이 이루어지며, 특히 중부 지역에서 농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수산업

    연안을 중심으로한 해양 어업은 다소 미비하나, 하천, 운하, 호수 등지를 중심으로 하는 담수 어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공업

    과거에는 경공업을 주력으로 했으나, 1980년대를 기점으로 외국 자본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공업의 고도화를 이룩하였다. 현재는 자동차 제조업을 주력으로 하는 한편, 컴퓨터, 통신기기 등의 전자 산업이 발전하고 있다. 다만 외국 자본과 기술의 의존도가 높다는 것이 문제로 꼽힌다. 자동차 제조업에서는 타이 스탠더드 일렉트릭과 타이 하밋 하이테크에서 주도하고 있으며 자동차 국산화도 꾸준히 시도되고 있다.

    유통과 무역

    운송업계에서는 특히 화교의 독점이 강하게 나타난다. 최대 육상 운송 기업인 키타나 운송, 최대 수상 운송 기업인 아시아 해양 운송이 화교계 기업이다. 항공 운송은 민영 항공사인 방콕항공, 국책 항공사인 타이항공이 주도하고 있다.

    사회

    교육

    타이 공화국의 교육은 영아교육,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 이상 4가지 분야에 따라 나뉘며, 각 분야에 대한 제도 및 정책을 통해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타이 공화국은 6ㆍ3ㆍ3ㆍ4의 학제를 채택하며, 초등학교 6년과 중학교 3년을 의무 교육으로 두고 있다. 대학 과정의 경우에는 4년 학제를 기본으로 시행하나, 특수대학(기술, 산업 등)의 경우 2년제, 또는 5년제의 학제를 채택할 수 있다. 각 교육의 교육 행정은 교육부 산하 위원회에서 시행하며, 사립학교의 경우에는 사립교육위원회에서 관장한다.

    문화

    타이 공화국은 본래 역사적으로 불교의 나라로, 현재도 전 국민의 약 95%가 불교(소승 불교) 신자이다. 이러한 불교 양식과 함께 미얀마, 캄보디아 등에서 유래한 양식이 어우러진 '아유타야 양식'이 유행하며 현재 태국 문화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아유타야 양식이 잘 나타나는 것은 현재 남아있는 왕궁과 불교 사원들로, 황금빛의 첨탑과 높은 지붕, 하늘을 향해 곧이 뻗은 장식용 돌기들은 태국 문화의 황금기를 상징한다.

    민주공화정 수립 이후 국교를 해제함에 따라 종교의 다양성을 보장하고 있으나, 현재까지 가장 많은 신자 수를 보유한 종교는 불교이다. 2015년 기준으로 국민의 94.5%가 불교 신자이며, 2위인 이슬람교는 4.29%, 기독교와 힌두교는 각각 1%와 0.03%를 차지하고 있다. 이슬람교는 대체로 남부 말레이 반도 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는데, 불교 중심의 단일 종교 체제의 오랜 역사와 문화로 인하여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지만 소수 종교 차별로 인한 종교 갈등이 나타나고 있다.

    스포츠에서는 현재 축구가 가장 많은 인기를 얻고 있으며, 두 번째가 야구, 세 번째가 무에 타이이다. 축구는 1954년 피분송크람 정부 때 '타이 프로축구 리그'로 출범하였으며, 야구는 같은 시기 '타이 프로야구 리그'로 출범하였으나 관중 부족과 운영난 등 복합적인 문제로 60년대에 폐지되어 '방콕 야구 대회'로 명맥을 이어오다, 다시 1986년 끼티카존 정부의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타이 야구 선수권 대회'로 재출범하였다. 축구는 1990년대부터 1부 리그와 2부 리그 승강제로 운영하고 있으며, 1부 리그 20개 팀, 2부 리그 22개 팀으로 구성하고 있다. 야구는 8개 구단이 참가하는 단일 리그로 운영하고 있다. 축구의 경우는 구단과 지역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시민 구단'이 대다수를 이루는 반면, 야구의 경우에는 대부분 기업 구단 방식으로 운영되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러한 차이는 두 리그의 출범 방식에서 비롯된 것인데, 축구의 경우 처음 프로 축구가 출범했던 1954년에는 피분송크람 정부 주도 하에 '지역 클럽'으로 각 행정구역에서 팀을 창설한 것으로 출발했고 그 팀들이 서로 합쳐지는 과정을 통해 현재 프로 축구의 모습을 갖추었다. 한편 야구의 경우 폐지 이후 80년대에 재출범하는 과정에서 끼티카존 정부가 기업 별로 야구단을 창설하여 운영하도록 하면서 프로 야구가 출범하였기 때문에 축구와 야구의 구단 운영에서 큰 차이가 난다.

    군사

    단위

    법정 연호

    시간대

    관련 문서

    같이 보기

    각주

    둘러보기

    틀:가상국제연합 공동세계관 제 3채널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