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역사(식혜)

Kingdom of Yugoslavia coat of arms.png 유고슬라비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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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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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유고슬라비아 탄생의 순간

유고슬라비아의 역사를 간략히 다루는 문서.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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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혁명페타르 1세의 대관식

1804년, 스메데레보에서 있었던 세르비아인에 대한 학살에 분노한 세르비아인은 조르제 페트로비치를 지도자로 추대하고 세르비아 중부의 오라사크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제1차 세르비아 봉기가 일으켰다. 카라조르제비치 왕조는 이 조르제 페트로비치를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러시아 제국이 지원했으며, 오스트리아 제국이 지원했던 오브레노비치 왕조와 경쟁 관계에 있었다.

1903년, 오브레노비치 왕조의 폭정으로 세르비아인은 재차 봉기하여 알렉산다르를 암살했다(5월 혁명). 알렉산다르가 암살된 후 국회는 스위스에서 망명 중이던 조르제의 손자인 페타르 1세를 추대하여 세르비아 국왕으로 옹립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SHS 왕국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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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 사건

1915년 10월 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아치듀크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이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인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총살당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세르비아는 불가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에게 점령당했다. 그러면서 남슬라브 민족주의가 고조되었고, 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일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그 외 남슬라브인이 거주하는 곳을 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국이라는 단일 국가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로아티아인이었던 안테 트룸비치는 제1차 세계대전 중 남슬라브족의 주요 지도자로 떠올랐고, 연합국(세르비아,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건국을 지지하게 하도록 '유고슬라비아 위원회'(Југословенски одбор/Jugoslavenski odbor)를 이끌었다. 세르비아 총리였던 니콜라 파시치의 강한 반대가 있었지만, 1917년 7월 20일 트룸비치는 코르푸 선언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카라조르제비치 왕국가 이끌기로 결정했다.

1916년에 유고슬라비아 위원회는 망명 중인 세르비아 정부와 협상을 시작하여 왕국의 건설을 합의했다. 이듬해 코르푸 시립 극장에서 열린 코르푸 선언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건국에 대해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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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푸 선언

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국 국가평의회는 28명의 위원을 선발하여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왕국 정부와 유고슬라비아 왕국 건국에 대해 협상하게 했으며, 평의회 대표단은 알렉산다르 1세와 직접 협상을 진행했다. 해당 협상은 국왕 페타르 1세 대신 섭정이었던 알렉산다르 1세가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끝이 났다. 그렇게 1918년 12월 1일 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 왕국이 건국되었으며, 이 날짜는 이후 통일절로서 기념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처음에 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 왕국(Краљевина Срба, Хрвата и Словенаца/Kraljevina Srba, Hrvata i Slovenaca)라는 이름으로 건국되었고, 종종 SHS 왕국(Краљевина СХС/Kraljevina SHS)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했다. 다만 이때에도 '유고슬라비아'라는 명칭이 비공식적으로 쓰이고는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건국은 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국과 보이보디나, 세르비아 왕국과 몬테네그로 왕국이 주도하여, 세르비아 왕국과 몬테네그로 왕국 전체, 그리고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일부로 이루어져 상당히 큰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다. 또 왕국의 건국은 범슬라브주의자와 유고슬라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남슬라브족을 하나로 모아 범슬라브 운동을 더 쉽게 벌어지게 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분열시키려는 연합국의 지지와 지원을 받았다.

새로 건국된 SHS 왕국은 안테 트룸비치를 대표로 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 참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슬로베니아 영토 4분의 1을 이탈리아로 넘겨주는 대가로 연합군에 참여하게 했기 때문에 옛 슬로베니아 영토가 확실해졌고, 트룸비치는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슬라브족이 살던 곳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차지한 지역의 슬라브인들은 이탈리아가 파시즘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이탈리아화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가 리예카를 합병하고자 국경을 수정하려고 하자 당시 국왕이었던 알렉산다르 1세는 이탈리아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국경 변경을 인정했고, 이탈리아 내의 슬라브족들은 유고슬라비아에게 외면당했다.

1월 6일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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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다르 1세

1918년, SHS 왕국이 출범했지만 국내 정치 상황은 줄곧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알렉산다르 1세[1]는 크로아티아 농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1년 6월 28일 왕국의 첫 헌법인 비도브단 헌법을 제정했다. 비도브단 헌법에 따라 알렉산다르는 광범위한 입법권과 행정권을 획득했으며, 의회소집권과 해산권, 전쟁선포권, 강화조약권 등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장관평의회를 구성하는 장관과 그 의장의 임명권을 가졌다. 이로써 알렉산다르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의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1928년 6월 베오그라드 의사당에서 세르비아 급진당 의원이었던 푸니샤 라치치가 크로아티아계 의원 두 명(파블레 라디치, 주라 바사리체크)을 살해하고 스테판 라디치를 포함한 의원 세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 사건으로 알렉산다르는 '왕국'이 해체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으나 크로아티아 농민당의 당수였던 스테판 라디치가 사망함으로써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그레브에서는 유혈사태가 벌어지기도 하는 등 정국이 어수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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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당 암살 사건

국내의 어지러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크로아티아 농민당 당수 블라트코 마체크과 스베토자르 프리비체비치가 연 회담이 성과를 내지 못하자 알렉산다르는 그 다음날인 1929년 1월 6일에 독재 체제 도입을 선언했다. 비도브단 헌법을 폐지하고 의회를 해산했으며, 모든 정당의 활동을 금지했다. 또한 출판물의 검열을 강화했고 자신의 뜻을 따르는 이를 선발해 내각의 수반으로 앉혔다. 국가보호법을 되살려 농민당을 탄압하고 그 지도자인 마체크과 프리비체비치를 체포했으며, 공산주의자들도 심하게 탄압했다. 이로써 알렉산다르는 전보다 더 막강한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었다.

알렉산다르의 독재 체제로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 내부 정치 상황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외국과의 대외 관계만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후원자 역할을 했던 프랑스와 영국은 알렉산다르의 독재에 불만을 표시했으며, 유고슬라비아와 소협상국을 이뤘던 체코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도 독재를 비판했다.

이러한 대내외적 어려움에 직면한 알렉산다르는 자신의 독재를 조금 완화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1931년 9월, 헌법을 새로 개정했다(9월 헌법). 하지만 이 헌법은 은 비도브단 헌법보다 훨씬 비민주적이었다. 9월 헌법은 군주가 비상 상황하에서 헌법과 법률의 구속을 받지 않고 필요한 조치를 취한 후 사후 의회의 동의를 구하기만 하면 되도록 만들었다. 또한 정당을 지역이나 민족 혹은 종교를 기반으로 설립할 수 없게 함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 체계를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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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직전의 알렉산다르와 루이 바소

동맹국과 후원국들의 비판에 직면한 알렉산다르는 소협상국과의 관계 개선과 유고슬라비아의 국제 위상을 높일 필요를 느꼈다. 이에 알렉산다르는 1934년 선박 편으로 프랑스 방문길에 나섰다. 마리야 왕비는 알렉산다르와는 따로 기차를 이용하여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알렉산다르가 탄 배는 1934년 10월 9일 프랑스 마르세유 항구에 도착했으며, 프랑스 외무장관 루이 바소의 영접을 받았다. 알렉산다르는 환영 인파로 향하던 도중 블라도 체르노젬스키에 의해 저격되어 바로 숨을 거두었다. 알렉산다르의 베르사유 저격 사건에는 크로아티아 안테 파벨리치의 우스타샤와 '마케도니아내부혁명기구(VMRO)'가 있었다.

섭정자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

페타르 2세는 1934년 아버지 알렉산다르 1세가 마르세유에서 암살당하자 그의 뒤를 이어 유고슬라비아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암살 당시 페타르 2세는 11세의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미리 작성한 유언장의 내용에 따라 섭정단이 구성되어 페타르 2세를 대신하여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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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레 왕자

알렉산다르 1세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사촌인 파블레를 섭정인으로 지정하였으며 파블레에게 자신의 재산 관리까지 위임하도록 명시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파블레를 중심으로 한 3인(파블레, 라덴코 스탄코비치, 이보 페로비치)의 섭정단이 구성되었다. 이후 파블레는 페타르 2세와 그의 어머니 마리야를 제쳐놓고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했으며 심지어 페타르 2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직접 유고슬라비아의 왕위에 오르려는 방향으로 정치를 해 나갔다.

1930년대 후반의 국제 정치 정세는 주요 인물들 간의 편협한 태도, 전체주의 정권의 공격적인 태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수립된 질서가 거점을 잃고 이를 이끌어가는 이들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확신으로 특징지어졌다. 1939년,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의 지원과 압력으로, 크로아티아의 지도자 블라트코 마체크와 그의 당은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를 성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협정은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의 일부로 남아 있기를 명시했지만, 크로아티아는 서둘러 국제 관계에서 독립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왕국 전체가 연방화될 예정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로 인해 계획이 중단되었다.

1941년 3월 25일, 파블레 왕자는 파시스트의 압력에 굴복하여, 유고슬라비아가 전쟁에서 참여하지 않기를 바라며 빈에서 삼국 조약에 서명하였다. 하지만, 이는 파블레의 섭정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저버렸다. 고위 군 장교들도 조약에 반대하여, 3월 27일 국왕이 돌아오자 쿠데타를 일으켰다. 육군 장군 두샨 시모비치는 권력을 장악하여 빈 대표단을 체포하고, 파블레을 추방하였다. 그리고 17살이었던 페타르 2세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하면서 섭정을 끝냈다. 이후 1941년 4월 6일, 아돌프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하기로 결정했고, 곧바로 베니토 무솔리니의 침공이 뒤따랐다.

제2차 세계대전

1941년 4월 6일 오전 5시 12분,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군대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했다. 독일 공군은 베오그라드를 비롯한 유고슬라비아의 주요 도시를 폭격했다. 4월 17일, 독일군의 침공에 대한 11일 간의 저항을 끝내며, 유고슬라비아의 여러 지역 대표들은 베오그라드에서 독일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때 30만 명 이상의 유고슬라비아 장교와 군인이 포로로 잡혔다.

추축국은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하고 분할하였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1929년 성립된 파시스트 민병대인 우스타샤에 의해 통치되는 나치 독일의 위성국로 성립되었다. 독일군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와 슬로베니아의 일부를 점령하였고, 다른 지역은 불가리아, 헝가리, 이탈리아가 점령하였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정권에 의해 50만여 명이 살해당했고, 25만여 명이 추방당했으며, 20만여 명은 가톨릭교로 강제로 개종당했다.

유고슬라비아 저항군은 공산주의 주도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왕당파 체트니크 두 파벌로 구성되었으며, 파르티잔은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연합국에게만 승인을 받았다. 범유고슬라비아 성향의 파르티잔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끌었으며, 극단적 친세르비아 성향의 체트니크는 드라자 미하일로비치가 이끌었다.

파르티잔은 점령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체트니크는 처음에는 망명한 왕실 정부와 연합국의 지원을 받았지만, 이내 추축국보다 파르티잔과 싸우는데 집중했다. 결국 왕실 정부는 체트니크에 대한 지원을 거두고 파르티잔을 비롯한 항전 세력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체트니크 운동은 전적으로 추축국의 보급에 의존하는 협력주의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 민병대로 변모하였다. 기동성이 뛰어난 파르티잔은 게릴라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점령군에 대한 가장 주목할 만한 승리는 네레트바 전투와 수체스카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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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반파시스트 평의회

1942년 11월 26일, 유고슬라비아 민족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평의회(AVNOJ)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비하치에서 소집되었다. 1943년 11월 29일, 평의회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야이체에서 다시 소집되었는데, 2차 회의에서 전후 국가 조직의 기반을 마련하고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존속시키기로 결정했다. 왕실이 전쟁을 촉발시킨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했지만, 전쟁에서의 왕실의 공을 인정하여 왕실을 존치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당초 서방 세력은 왕국의 옛 정부의 패권에 회의적이었던 파르티잔과 국왕에게 충성하는 망명자들을 재결합시키고자 하였으나, 야이차에서 소집된 2차 반파시스트 평의회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의 결의가 이루어지자 이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고슬라비아 내 희생자에 대한 전후 공식 추정치는 170만 4,000명이다.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제르야비치와 보골류브 코초비치가 1980년대에 수집한 후속 데이터에 따르면, 실제 사망자 수는 100만여 명이었다.

사회민주당의 40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전후 노선 차이로 사회당과 진보당으로 갈라졌다. 미국과 영국을 필두로 하는 서방 세계와 소련을 필두로 하는 공산권 사이에서 중립적인 스탠스를 취했던 이들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주축으로 사회당을 결성했고, 왕실 폐지와 소련과 적극적인 협력을 주장했던 소련파는 진보당을 결성했다. 결과적으로 티토의 인기를 업은 사회당이 권력을 잡게 되면서 진보당은 얼마 안 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전후 실시된 총선에서 사회당은 인민당으로 당명을 바꾼 인민급진당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머쥐면서 사회민주당의 40년의 시작을 알렸다. 이때 사회당은 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사민당의 승리의 배경에는 티토의 파르티잔 활동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사민당은 압도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사회민주당의 40년은 사민당이 1945년부터 1990년까지 약 40년 간 집권했던 시기를 이르는 말이다. 현재 유고슬라비아의 복지 체계의 기반이 이때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대표적으로 의료보험제도와 고등학교까지 책임지는 무상교육, 실업 급여 등이 있다. 독재와 두 차례의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의 삶이 피폐해져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사민당의 복지 정책은 환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복지 체계를 확립한 것뿐만이 아니라, 노동 환경 개선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정 수준 이상의 규모가 되는 기업에는 노동자위원회를 두게 하여 노동자와 경영진이 동등한 위치에서 회사를 경영할 수 있도록 하였고,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환경이 열악한 기업에는 불이익을, 우수한 기업에는 보조금 지급과 같은 혜택을 주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일각에서는 지나치게 반기업적이라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열악했던 노동 환경이 어느정도 개선되는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전후 복구에도 적극적이었는데, 베오그라드, 자그레브, 류블랴나, 사라예보, 니시 등 주요 도시들을 잇는 도로를 건설하여 교통망을 구축했고, 이를 바탕으로 전국 단위의 재건 계획과 산업화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수혜를 입은 기업이 바로 자스타바로, 오늘날 국내에서 손에 꼽는 기업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는 한편 유고슬라비아 내 다양한 민족을 '유고슬라비아인'으로 통합시키는 것이 사회민주당에게 있어 가장 큰 과제였다. 특히 크로아티아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도 했는데, 티토는 민족, 종교, 언어 등으로 툭하면 싸우던 유고슬라비아 내부의 사정을 고려하여 '형재애와 일치' 정책을 수립하여 세르비아 민족주의,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등 유고슬라비아 내 민족주의적 사상을 제거했다. 왕실이라는 유고슬라비아의 구심점은 이 형재애와 일치 정책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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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를 받으며 당사를 나서는 스테판 메시치

분명 환영받았던 사회민주당 정권이었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의 오랜 집권에 질린 것과 더불어 과도한 복지로 인한 국가 재정으로 선거가 거듭될수록 사회민주당보다는 인민당을 선택하는 국민들이 많아졌다. 그렇게 사회민주당과 인민당의 공방전이 계속되던 1990년 7월 24일, 스테판 메시치 전 총리가 이끌던 인민당이 대승을 거두면서 사회민주당의 40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편 1970년 11월 3일 페타르 2세가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알렉산다르 2세가 즉위했다. 페타르 1세의 대관식 이후 약 50년 만에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현재

정권을 잡자마자 스테판 메시치는 우선 사회보장제도를 개편하고 수많은 국영 기업을 민영화하는 방법으로 정부의 재정을 확보해갔다. "아무래도 유고슬라비아에 대처가 온 것 같다"라는 평가가 나왔을 정도였다. 개혁 과정에서 각종 파업이 발생하고 여기저기서 잡음이 들려오기도 했으나, 메시치는 특유의 불도저 같은 성격으로 개혁을 이어나갔다.

집권 초기에는 지지율이 폭락하면서 역대 최단기 총리 타이틀을 얻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으나, 집권 중반에 접어들면서 그 효과가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다. 집에서 게을리 정부의 보조금이나 받으며 지내던 이들은 문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기업 규제 또한 완화되면서 많은 기업들이 생기를 되찾았다. 그 과정에서 대량의 일자리가 생겨나 역대 최고의 취업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러한 성공은 메시치가 2003년까지 13년 간 총리로 재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안정적인 경제 성장으로 높은 소비력을 지닐 수 있게 된 유고슬라비아는 문화적으로도 활기를 띠게 되는데,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오랜 기간 참가했던 것은 물론 개최까지 하는 쾌거를 이뤘다. 뉴웨이브, 포스트 펑크 밴드들도 많이 등장하여 동유럽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활기찬 분위기를 자랑했다.

인구 또한 대폭 증가하면서 부동산 시장도 호황을 맞았지만 인구 밀집 지역에는 심각한 혼잡 문제 등이 발생하여 슬럼가가 형성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치안이 급격히 악회되면서 대도시를 중심으로 마피아 조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마피아들은 주로 무기밀수, 마약밀수와 같은 범죄를 저질러 돈을 벌었다. 영화 '핑크팬더'의 이름을 딴 핑크팬더스란 보석강도 조직은 서유럽에서 수많은 범죄를 저지르며 악명을 떨쳤다. 마피아들은 이런 보석강도들과 연계해서 장물을 유통해 많은 돈을 벌었다.

마피아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하자 2005년 조란 밀라노비치 총리는 마피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세이버 작전'이라는 마피아 소탕 작전을 발표하고 경찰과 군 특수부대를 대거 투입하여 마피아 색출에 나섰다. 베오그라드에서 특히 위세를 떨쳤던 제문 클랜의 수장 두산 스페소비치는 체포하러 온 군경에 저항하다 경찰이 발포한 총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했고 주요 간부들은 체포되어 수십년 징역형을 선고받으면서 제문 클랜은 해체되었다. 제문 클랜 외에도 전국적으로도 많은 마피아 조직이 이때 소탕되었다. 그러나 제문 클랜의 잔당이 '신 제문 클랜'을 조직했는데, 최근 일부 정치인이 신 제문 클랜과 결탁했다는 폭로가 나오면서 유고슬라비아의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2016년부터 다시 장기집권의 길을 걷던 인민당이었으나, 계속되는 마피아 게이트 폭로로 지지율이 급감했고, 결국 34대 총선에서 이전 총선 대비 37석 감소한 108석을 기록, 정권 연장이 불투명해졌으며, 슬라비차 주키치 데야노비치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은 다시 100석을 회복했다. 24석을 추가로 얻으면서 70석을 확보한 적녹연합의 괄목할 만한 성장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사회민주당이 적녹연합에게 제의한 연정 구성이 타결되면서 사민-적녹 연정이 결성, 16년 간 이어지던 인민당 정권이 막을 내렸다.

  1. 당시에는 섭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