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공산주의

Alpha37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3월 21일 (월) 17:04 판
느낌표icon.png
빨간하얀공사중.png
이 문서는 공사 중인 문서입니다.
아직 설정 집필중이며 작성중입니다.
설정 집필이 완료되기 전까지 편집을 자제해주십시오.
공민공산주의
公民共産主義
citizen communism
공민공산론.png
공민공산주의의 상징
이름
한국어공민공산주의
한자어公民共産主義
영어citizen communism
불어Théorie du communisme civil
스페인어teoría del comunismo civil
러시아어Гражданская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теория
독일어Kommunistische Theorie
사유재산을 폐지한 모든 사회는 아나키즘적 공산주의로 조직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나키공산주의로 통하고, 공산주의아나키로 통한다. 아나키공산주의 모두 지배적인 경향의 표현인 평등의 추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 표트르 크로포트킨, 《빵의 쟁취》
권위와 계층을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아나키를 헐기 시작한다. 우리 모두 “모든 권력은 타락한다”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는 빈말이 아니다; 아나키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중략) 당신이 권위를 정당화하는 순간, 당신은 권위에 힘을 쥐어주고 그 어떠한 명령이라도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기관으로 인식하고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권위의 본성 때문에 계속해서 팽창하려 할 것이다. 주변에 끼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되돌아보지 않고 항상 팽창한다. 권위는 해를 입힐 허가증이다. 권위를 정당화했을 당시 폭력적인 정권을 세우는 것이 당신의 원래 의도였는지는 상관없다. 이 권위는 해를 끼칠 것이고 이 권위를 정당화한 자들은 그 피해에 대한 책임이 (최소한 이론적으로) 있다.
아나키는 권위의 반대이다. 아닌 척하는 것은 뻔한 아나키에 대한 사칭이다.

- 아나키 대 아르키: 정당한 권위는 없다
우리는 사회주의 없는 자유란 특권이자 불의이며, 자유 없는 사회주의란 야만이자 노예제라고 확신한다.
- 미하일 바쿠닌
소유란 도둑질이다. La propriété, c'est le vol.
- 조세프 프루동, 《소유란 무엇인가?》

개요

공민공산주의(公民共産主義)는 아나코-코뮤니즘의 한 분파이다. 자본주의로 인하여 고도로 개인주의화된 인민의 이기심에 대한 범국가적 회오ㆍ각성과 절대적인 평등 및 자유, 상호부조적 배타심을 전제로, '생산수단의 공유화'와 '만인의 평등에 반하는 계급악습 소멸' 을 목표로 삼는 정치적, 실용적, 개인적, 사회적, 문화상의 국면들을 모두 포괄하는 정치철학이다.

공민공산주의의 기본적 주장은 위계적 권위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인민의 잠재능력을 극대화하는데 본래적으로 해악을 끼친다는 것이다.[1] 또한, 국가시장자본주의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 대한 철폐를 요구하지만, 생산수단을 제외한 소유물인 동산動産은 존중하며, 생산수단의 공유, 직접민주적코뮌Commune[2]자주 관리, 토지주택식량의복 등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 요소들의 수용[3]을 다룬다.

지향점

공산주의적 재원財源

가난한 사람들이 없는 곳에는 그들을 착취하는 부자들도 없을 것이다.
- 표트르 크로포트킨, 《빵의 쟁취》

공산주의노동자의 노동과 가치가 더 이상 사고 파는 형태가 아닌, 돈(자본)이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 소부르주아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임금제에 의해 강제된 암묵적인 빈곤의 위협 없이도 사회가 필요로 하는, 혹은 요구하는 충분한 생산을 할 수 있는가?"와 같은 의문을 표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산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빈곤이나 기아의 위협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충분한 실재적 근거가 있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에서, 인민은 돈이나 임금노동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필요한 일들은 이미 수행되었다. 예를 들어, 수렵채집사회는, 일과 놀이 사이에 차이가 없는 전적으로 평화스럽고 평등한 사회였다. 오늘날에도 필요한 많은 일이 무료로 행해진다. 거의 모든 유용한 일의 형태 역시 임노동에 의한 것이 아닌 무료로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기도 한다. 이것이 임노동이 반드시 필수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작물을 키우고, 아이들을 돌보며, 곡을 연주하고, 차를 수리하고, 청소하고, 아픈 사람을 돌보고,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하고, 옷을 만들고, 제품을 설계하는. 이러한 형태의 일은 끝없이 많다. 노동자들은 직접민주적으로 재조직된 사회의 집단에서(아나키 코뮌노동조합, 공동체 등) 토론과 합의를 통하여 자신의 노동 강도와 업무 시간 등을 정할 수 있을 것이며, 원하는 것을 하고 원하는 방법으로 일할 수 있는 자유와 긍지를 가지고 있는 노동자 남녀들과 그리고 그렇게 하는 데 있어서 건설적이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이유를 가진 사람들은 그것이 최상의 동기가 될것이다. 더 효과적으로 노동과정을 만드는 이윤 동기, 어떤 기술적인 발전 없이, 그리고 노동자를 해고해서 나머지 작업을 다른 노동자에게 전가하도록 만드는(오늘날에 일어나는 일들) 대신, 노동대중은 모두 조금 덜 일 하고 더 많은 여가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임금노예제'를 완전히 파괴하고 모든 자본주의적 불의를 청산한 뒤에는 아나키즘적 공산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물질적 해방

아르키 없는 사회

아르키의 사전적 의미는 내포된 계층으로 조직된 권위적인 요원들로 이뤄진 체계이다. 이것이 군주제, 과두제, 공화국, 봉건 국가 또는 그 어떠한 계층사회이던 간에 말이다.
아나키는 모든 계층과 권위를 반대하는 반면 아르키는 이 모든 것을 온전히 구현한다. 아나키는 통치자의 부재를 주장하지만, 아르키는 대중이 통치자를 떠받치고 따를 때 번창한다. 어떨 때는 소수의 통치자가 있고 (예. 군주제) 또 어떨 때는 다수의 통치자가 있다(예. 사회민주주의).
- 아나키 대 아르키: 정당한 권위는 없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권위에 반대한다. 우리에게 권위란 특정한 개인 혹은 집단이 자신에게 주어진 다종다양한 권력적 우위를 바탕으로, 권력이 없는 개인 혹은 집단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 아나키스트 연대 강령

전에는 정부만의 기능으로 간주되던 모든 것들이 오늘날에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정부의 간섭 없이도 사람들은 더 쉽게, 더 잘 서로 맞춰 나간다. 인류는 정부의 활동을 영으로 까지 줄이려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불의와 억압, 폭력의 독점자인 국가를 철폐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기 위한 도구이다. 국가란, 타협 불가능한 계급대립의 종합적 산물이며, 피억압계급을 착취하기 위한 도구이고, 인민에게 기생하여 기만적으로 존속한다. 전제군주제 국가이든, 민주공화제 국가이든, 국가는 그 본질적으로 착취적, 억압적 성격을 가진다. 또한, 국가의 권위(국가권력)는 다른 여타 권위들과 마찬가지로, 그 본성 때문에 계속하여 팽창하려 할 것이다. 이러한 국가나 정부의 권위를 포함한 모든 권위적 경향의 억압적 횡포를 막는 것은 가히 필수적이라 단언할 수 있다.
이는 국가를 철폐한 혁명의 직후에도 마찬가지이다. 공산주의중앙집권화된 일개 집단 또는 특정 권위적 정당에서 체계적으로 계획된 전위혁명으로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아닌, 인민 대중의 대규모 자발적 행동을 통한 혁명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또한 이는 아나코-코뮤니즘이어야 한다!). 혁명 이후에는 기존의 '국경'이 아닌 똑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하나하나의 작은 지역단위의 독립(직접민주적인 자율적 아나키 코뮌으로서)이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무국경 사회

아나키 코뮌은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하나하나의 작은 지역단위의 독립된 공동체'이다. 국가가 폐지됨으로서 국경 또한 자연스레 없어질 것이고, 이는 국가를 대체할 수많은 코뮌의 등장을 야기할 것이다.

무국경무정부로, 무정부무국가로 통한다. 틀림없이 국가 없는 사회라는 생각은 적어도 '사유자본이 없는 사회'[4]경제학만큼이나 반론을 불러이르킬 것이다. 우리 모두는 국가의 섭리적 기능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국가의 각종 복지와 서비스들은 인민으로 하여금 정부와 복지국가의 미덕을 믿는 데 익숙해지게 한다. 하지만, 정작 정부가 행하는 역할이 지극히 적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지난 수십, 수백년의 역사는 우리가 맡기고 싶어한 임무들을 대의정부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무능력의 생생한 증거를 제공하였다. "점차 19세기는 의회주의가 실패한 시기로 인용될 것이다."라고 하던 크로포트킨은 옳았다.

분권적 직접민주주의

우리는 사회의 구조가 궁극적으로 하부구조, 혹은 물질, 혹은 생산에 따라 결정된다고 바라본다.
그렇기에 우리의 혁명노동자들이 스스로 발을 붙이고 있는 경제와 생산의 영역에서의 투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노동대중단체교섭단체행동을 통해 산업의 각 영역의 통제권노동대중에게 되돌리는 것이, 그리고 이를 통하여 산업의 전 영역에서 “민주화”를 확보하는 것이 곧 사회혁명의 기저가 되어야 한다.
- 아나키스트 연대 강령

아나키즘은 현대의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에 대하여 회의적이다. 대의민주주의는 다수가 지배자를 선출하여 소수에게 권력을 강제하는 반자유적인 사상이며, 정치 참여에 있어 아무런 제재 없이 완전히 합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는 도장 찍은 종이쪼가리를 투표함에 넣는게 전부[5]이고 유일하지 않은가.

직접민주적 아나키 코뮌에선 공장농장, 이동수단, 극장 등은 물론이고, 직장 내에서는 자신의 업무 강도와 노동 시간, 임금(이 것은 혁명으로서 아나코-코뮤니즘이 온전히 자리잡는다면 필요없게 될 것이다.)을 정하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코뮌의 주민들이 자유로운 토론과 합의를 통한 자주적 관리를 이루는 등, 인민 대중에 의한 직접민주제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상반된다. 정치적 주체는 인민이 될 것이고, 인민 주권을 표방할 것이다.

관료의 사멸과 폐지

많은 사람들은 전문지식을 권위로 혼동하고 이 혼동을 사용하여 아나키는 모든 권위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고집한다. 그들은 아나키는 부당한 권위만을 반대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물론 누가 그 권위가 정당한지 정하는지 절대 설명하지 않는다. 이 결정은 또다른 권위를 통해 결정하는 것인가? 이 권위도 물론 정당화됐을 것이고? 그리고 이 권위는 누가 정당화하지? 아나키스트들이 이 ‘정당한 권위’에 대한 모순에 빠지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다.

목수는 잘 만들어 심지어는 전문가일 수도 있지만, 이는 그를 권위자로 만들지 않는다. 그의 재주는 권위를 휘두를 권리를, 그 누구 위에 군림할 힘을 주지 않는다. 권위는 한 사람이 힘을 사용하는 고립된 사례가 아니다. 권위는 사람들 간에 지속되는 특정한 사회관계이다. 우리들의 계층사회에 의해 정당화된 강압적인 관계이다. 권위자가 그이 보살펴야 하는 약자들을 향해 권력을 휘두를 것이다. 이 약자들은 이 강력한 권위 앞에 무릎을 꿇고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라야한다.

한밤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당신 앞에 누군가가 어두운 골목길에서 튀어나와 당신을 칼로 찌르려 한다는 상상을 해보자. 이에 반응한 당신은 자신을 보호하려다 가해자를 죽인다 하자. 이 때 당신은 단순히 당신의 힘을 사용했을 뿐이다. 이는 당신을 죽이려 한 사람보다 윗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려 실행한 이 단 한 번의 행위는 당신에게 연속살인을 저지를 신비한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비슷하게, 질주하는 트럭 앞을 가로지르는 아이의 손을 잡아 멈추려 할 때 당신은 권위를 행사하고 있지 않다. 당신은 단순히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은 권위가 아니다. 당신이 돕고 있는 사람에 대한 소유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아나키는 체계적인 권위의 존재를 부정하지 일시적인 힘의 사용을 문제 삼지 않는다.

- 아나키 대 아르키: 정당한 권위는 없다

아나키 코뮌은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하나하나의 작은 지역단위의 독립된 공동체'이므로, 아나키즘을 어떻게 실현할 지에 대해서는 그 코뮌의 주민이 토론과 합의를 통해 결정할 일이다. 어떤 코뮌은 '노동전표'를 만들어 물건을 교환하기로 합의할 수도[6], 또 어떤 코뮌시장이 점유하고 있던 물건을 모두 개방하여 완전한 분배에 의존할 수도[7], 또 어떤 코뮌은 개개인의 자급자족을 목표로 할 수도 있다[8]. 따라서, 기존의 권위적 산물인 관료제를 폐지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도 토의가 오갈 것이라 생각한다(아마도 대부분은 폐지하는 쪽으로 결정되겠지만 말이다.). 이 것에 대해 논하자면, 기존의 관료제가 폐지되지 않고 개혁되어 코뮌 평의회 의원으로 교체되었다는 전제하에, 관료권위주의적 성격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며 머지 않아 '전문성을 가졌'을 뿐인 하나의 직업으로 전락할 것이다. 또한, 코뮌 평의회의 의원들은 지역구 시민들의 찬반에 따라 직위를 유지하거나 상실할 것이고, 이런 구조하에서 다양한 '공동협약'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권위적 성격을 잃고 단순 '전문성을 가진 직책'이 된 관료는 곧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사멸하게 될 것이다.

관료제를 폐지 하느냐 개혁 하느냐는 지역 코뮌 내에서 합의할 문제이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혁명 직후에 구체제의 억압적 산물인 관료제를 즉흥적으로 폐지하는 것이지만(이 글을 쓰고 있는 본인 또한 관료제는 즉각적으로 폐지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코뮌 공동체에서 관료제가 즉각적으로 폐지되지 않고 존속했을 경우도 염두에 두고 이에 대한 방법론 또한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론

법의 무용론

가족주의적 권위자들은 비인간적인 사고방식을 배양하여,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여 행동하기 보다는 엘리트들이 대신 결정을 내리고, 욕구를 대신 충족시켜 주기를 바라게 된다. 권위가 개인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적 결정들, 예를 들어 무엇이 가치 있는 죽음이고, 죽일 만한지(징병제 혹은 낙태 등)를 억지로 지배하려 할 때, 인간의 자유는 현격히 감소한다.
- 초보자를 위한 아나키즘

현대의 대의민주주의 관점에서 볼 때, 은 다수의 필요에 의해 제정된다고 포장된다. 그러나, 정작 그 '다수'는 그런 이 있는지 조차도 모른다. 어떻게 이 제정되는지, 해당 의 내용은 어떠한지에 대한 것들은 '다수'에게 있어서는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이 이 과연 사람들이 원해서 제정한 인지, 아니면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강화하거나 통치를 편하게 하려고 만든 인지 구분할 수 없다. 더불어, 온전히 자리잡은 법치주의는 그 것이 선법이든 악법이든 간에 구분할 것 없이 거대한 권위(폭력과 압제, 억압 등, 소위 말하는 '철권'을 말이다).를 수반한다. 이로서 평범한 인민 대중은 그러한 힘 앞에 우선 짓밟히게 된다. 이러한 근거로, 법은 민중의 의사를 대변하지도 못하고, 강압으로 개인을 짓누르며, 그 본래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고, 인간성을 저해시키는, 즉 국가라는 거대한 폭력과 억압의 독점기관이 만들어낸 폭압의 산물이자 그 본질로서 전혀 불필요한(오히려 해가 되는),철폐의 불가피한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 공백(의 부재로 인한 치안과 기존 국가주의사법 시스템 등에 대한 공백)은 무엇이 대체할 것인가?
그것은 개인과 집단 간의 자유로운 토론과 합의, 직접적 경험과 활동으로서 도출된 결과적 '공동협약'이 을 대신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경을 넘어서는 일반적인 목적을 위해 개별적인 이해利害를 규제한다.

아나키와 무질서

아나키무정부는 질서다. Anarchy is Order.
- 조세프 프루동

아나키즘은 무질서 상태, 또는 무질서에서 비롯한 사상이 아니다.이 없는 것과 규칙이 없는 것은 별개의 사항이며, [[아나키즘[[은 분권적 상호부조 인간관을 통하여 국가주의자들이 정부라고 부르는 그들의 질서를 대체하자는 것이고, 이것은 실질적인 질서의 파괴 하고는 다른 것이다.
아나키즘이 그런 사회(원시적이거나 무질서적인 사회)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은 크로포트킨이 쐐기를 박은 바 있다. 크로포트킨은 인류가 평등하게 의식주를 부족함 없이 해결할 만큼의 기술 발전이 필수적이라 봤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나키가 대동된 사회가 국가나 기업의 간섭을 배제함으로서, 수 많은 아이디어들을 창출하게 되며 발전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고 주장하였다(실제로, 국가나 기업들은 유용한 아이디어들을 배척하는 경향이 심하다. 특히 이익 창출이 안 될수록 더더욱.). 이에 해당하는 예시로는 '전기차'가 있는데, 전기차는 무려 19세기 말에 이미 나온 기술이지만, 효율과 이윤 창출면에서 '석유차'에 완전히 밀려 21세기 초에 들어설 때까지 완전히 찬밥 신세 당했다. 이러한 기술의 역전 현상을 부추긴 존재들이 석유왕 록펠러포드를 비롯한 자동차 업계 대기업들이였다.

본능

야만성

우리가 흔히 본능이라 하는 것들은 인간이 봉건제자본주의 사회 아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재발현된 것이며, 권력자들이 내려주는 적은 보상을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가 치열하게 싸우는(마치 원시 사회에서 물자 부족으로 투쟁투쟁을 거듭하는 것처럼) 야만적 본능이 거듭 발현된 것에 불과하다. 이건 인류 문명이 태동하면서 키워지고 발전해온 사회적 본능과는 별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야만적 본능이 인간의 본능이라 말한다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사회적 본능과 함께 인류 사회를 이끈 원동력이였으므로 말이다. 하지만, 본능을 그렇게 해석한다면 대자본과 그 추종자들이 지배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화는 야만 사회의 확장에 불과한 셈이다.

부르주아 사회는 갈림길에 서있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 로자 룩셈부르크

폭력성

인간의 폭력성이 본능이라고 가정해보자. 인간의 본능, 즉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본성'말이다. 이것을 탁월하게 억제하고 있는 기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국가이다. 국가 내의 경찰군대, 사법 또한 그렇다.
하지만 알아야할 것은, 그 국가도 결국 폭력이라는 것이다. 국가는 인민의 의사를 강제하고, 권위를 통해 '원하는대로 행할 자유'를 박탈하는 억제의 기제이다. 지배자가 행하는 억압와 폭력으로 행해지는 '폭력성 억제'가, 탄압과 박해로 이루어지는 세계평화가 뭐가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또한, 가장 근본적인 관점에서 질문한다면 '폭력성이 본질적으로 나쁜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르게 될 것이다.
때로는 싸우고, 다투고, 욕할지라도, 그러할 자유 또한 있어야 하며 그 분쟁 끝에 도출되어 합의된 결론이 기존 국가와 사법 시스템을 대체해야 한다는(또한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은 아나키스트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실현 가능성과 근거

상호부조와 상호경쟁

과도기와 혁명

노동의 전화轉化

반박에 대한 대변

아나키즘 세력화는 모순인가

일부 아나키즘 비판자들은 이러한 비판을 하고들한다. "아나키스트가 자신들을 알리거나 뭉치고 세력화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 이러한 비판은 그 전제부터가 잘못되었다.
아나키즘은 지배자와 강권 없는 공동체 사회를 지향한다(일반적인 해석으로는 말이다.). 조직체를 이루는 것은 공동체주의적 관점에서 볼때에도 옳은 현상이다. 이 부분은 에고이즘을 강조한 슈티르너, 노동조합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말라테스타도 이러한 공동체 사회 현상을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 또한, 아나키즘의 대부격인 크로포트킨을 필두로한 후기 아나키즘에는 계몽주의 철학사도 이어받아 학술ㆍ철학적으로 전파를 논하는 방향으로 전화轉化되었기 때문에 모순되는 부분이 아니다.
즉, 이것은 사상의 발전에 따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지배를 흠모하는가

  1. 초보자를 위한 아나키즘을 참고.
  2. 여기서 말하는 '코뮌'이란, 직접민주적ㆍ자율적ㆍ자치적으로 운영되는 사회 공동체를 말한다.
  3. 여기서 말하는 '수용'이란, 크로포트킨빵의 쟁취에서 언급되는 '수용'을 말한다.
  4. 공산주의집산주의 경제학 등
  5. 투표선거
  6. 아나코-생디칼리즘 혹은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이 이러한 경향을 가진다.
  7. 아나코-코뮤니즘이 이로한 경향을 가진다.
  8. 이외의 아나키즘 실현 방법론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