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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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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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혜종 정종(定宗) 광종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경종 성종 목종 현종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덕종 정종(靖宗) 문종 선종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헌종 숙종 예종 정목왕
제17대 제18대 제19대
인종 고종 금상
추존 국왕 · 왕후 · 왕태자 · 태상왕 · 왕태후
고려 제5대 국왕
경종ㅣ景宗
경종.png
출생 955년 11월 9일
고려 황도 개주 만월대 만령전
즉위 975년 7월 9일
고려 황도 개주 만월대 회경전
사망 981년 8월 13일
고려 황도 개주 만월대 장화전
능묘 영릉(榮陵)
재위기간 고려 정윤
965년 3월 ~ 975년 7월 9일
고려 국왕
975년 7월 9일 ~ 981년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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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개성 왕씨
부모 부왕 광종
모후 대목왕후
형제 2남 1녀 중 장남
왕후 헌애왕후
헌정왕후
슬하 장남 목종
종교 불교
휘 주(伷)
묘호 경종(景宗)
시호 공의정효순희명혜성목헌화대왕
恭懿靖孝順熙明惠成穆獻和大王

개요

고려의 제5대 국왕.

시호와 묘호

후계자 성종이 올린 묘호는 경종(景宗)이다.

또한 경종의 시호는 여러 국왕들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는데,

《고려사》 <경종 본기> 마지막 조 기준

공의정효순희명혜성목헌화대왕(恭懿靖孝順熙明惠成穆獻和大王)

후계자 성종이 '헌화'를, 아들 목종이 '성목'을, 사촌동생 현종이 '명혜'와 '순희'를, 문종이 '정효'를, 숙종이 '공의'를 추가로 올렸다.

경종의 긴 시호 중 중요한 부분은 당시 정윤(正胤)이었던 성종이 올린 대표 시호 '헌화대왕'(獻和大王)이다.

시호 '헌화'(獻和) 중 '헌'(獻) 자를 돌림으로, 경종의 두 왕후는 모두 '헌' 자 시호를 받았다. 헌애왕후, 헌정왕후.

생애

순탄치않은 정윤 생활

아버지 광종의 호족 숙청 작업으로 인해 차기 후계자라는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호족들이 태자를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킬까봐 광종이 두려워한 탓에 항상 태자를 의심하고 경계하여 야단을 쳤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숙청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경종이 광종의 살아있는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차남 효화태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경종의 동복동생이라는 것과 시호만 남아 있어 일찍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어머니인 대목왕후 덕분으로도 볼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설묘는

"경종께서는 깊은 궁궐에서 태어나 아녀자의 손에서 자라서 궁궐 문 밖의 일에 대해서는 일찍이 알지 못하였으나 다만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였기 때문에 후회와 과실을 면하고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아녀자의 손에 자랐다는 것은 아버지와는 교류가 어려웠고, 철저히 어머니나 외가 쪽 세력의 보호 아래서 자랐음을 의미한다. 광종과 관계가 가깝거나 적어도 나쁘지만 않았어도 정통성을 의식해 부자 관계를 실제보다 잘 포장해 적었을 것이기 때문.

대목황후가 광종이 실시한 노비안검법에 대해 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런 것으로 보아 대목황후가 자신의 친정인 황주 황보씨를 포함한 호족 세력들의 대변자였음을 알 수 있으며, 아무래도 이 역시 광종이 모후 혹은 외가의 교육을 받았던 태자 시절의 경종을 경계했던 이유 중 하나로 추정된다. "경종은 천성이 총명하였으므로 후회와 과실을 면했다"는 부분은,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무사히 왕위를 계승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위와 치적

975년 광종이 향년 51세의 보령에 붕어함으로써 왕위를 이어받았다. 선왕이 피를 너무 많이 묻혔고 자신 역시 늘 위협에 시달리며 살아왔던 탓에 공포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목숨을 잃은 혼란상 때문에 사회 전체가 그야말로 원한이 판을 쳤던 탓인지 몰라도 경종이 임금이 되자마자 한 일은 사회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호족과의 화합 정책을 펼치는 것이었다. 호족 출신의 왕선을 집정(재상)으로 채용하고,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효자 표창도 많이 하는 등 백성들에게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였다. 여기까지는 아주 괜찮았다. 광종 시대의 극한 긴장상태를 창출한 공포 정치의 분위기를 풀어주면서, 동시의 유교적 이념을 강조하는 왕도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왕선이 건의한 법안인 복수법을 통과시키면서 사달이 났다. 일단 경종이 효도를 강조했던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건데 진짜 복수법이 옳다 생각하고 이 법을 승인했을 여지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광종 시절 득세했던 세력들이 모조리 버로우하게 되었던 것으로 볼 때 이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나중에 가면 왕선과 호족 세력이 이를 악용하는 문제가 생겼고, 이 와중에 경종의 삼촌들이 이 법에 얽혀 살해당하는 촌극까지 벌어지게 된다. 설묘는

"경종 시대에 복수법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은 대부분 후생들이라서 죽어 마땅한 인간들

이라고 까면서도 두 왕자에 대해서만은

"광종도 연좌시켜 처벌하지 않고 관용한 사람들이었다며 살아있었다면 족히 왕실의 웃어른 노릇을 할 수 있었을 것"

이라고 자뭇 아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복수법의 폐단이 우후죽순 번지자 이를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경종에 의해 입안자인 왕선은 파직된 뒤 지방으로 쫓겨났다. 이 때 경종은 본래 한 사람만 담당하던 집정(재상)을 좌집정과 우집정으로 나누어 권력을 분산시키는 동시에 두 집정들끼리 서로 견제하게 만들었다. 이는 이후 조선 시대에도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이름만 바뀌어서 계속 이어진다. 이후 사적인 복수를 행한 사람들을 모두 처벌하는 동시에 복수법을 없애버렸다. 이 정책으로 인해 다음 왕인 성종 시대에 등장한 최승로가 쓴 <시무 28조>에서 까이게 된다.

경종은 이후에 전시과(일명 시정 전시과)를 실행하여 관료들의 급여 체제를 확립시켰는데 이는 조선 시대까지 쓰이게 될 정도로 합리적이었다. 그러면서 광종 시절에 자리잡은 과거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면서 안정적인 정치를 펼쳐나갔다.

하지만 말년에는 주색과 바둑에만 몰두하며 정사를 돌보는 것을 소홀히 했다. 이에 대해 역사학계에서는 광종 시절의 공포 정치와 그 이후로 끊임없이 반복된 호족들 사이의 정쟁 및 복수법의 참상으로 인해 정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붕어와 유저

과인(寡人)은 4조(四朝)[1]의 위대함을 이어 삼한(三韓)의 패도(霸圖)를 이어받으니 산천토전(山川土田)을 지키게 되었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매일 걱정하며 사니 7년의 시간이 지났다. 근로(勤勞)로 인해 질병(疾疹)에 걸리니 부담을 놓아 정신을 편하게 하고, 거룩함을 전해 아름다운 자에게 넘기고자 한다.

정윤(正胤) 개령군(開寧君) 치(治)는 나라의 현명한 친척이며 내(予)가 아끼는 자다. 그는 반드시 조종(祖宗)의 대업(大業)을 받들고 국가(國家)의 창기(昌基)[24]를 보호할 것이다.

아! 너희(爾) 공경재신(公卿宰臣)들아, 내 개제(介弟)를 존경하고 보호하라. 우리(我) 대방(大邦)을 영원히 빛나게 하라.

과인(寡人)이 늘 예경(禮經)을 보니 '남자는 부인(婦人)의 손을 잡고 죽지 않는다'라 했으니 늘 이를 보고 감탄하였다. 그리하여 금일(今日) 좌우빈(左右嬪)을 물러가게 했으니 혹시나 대기를 맞이하더라도 한스럽게 여길게 뭐가 있겠는가?

제사의 일정은 한제(漢制)에 맞춰 1일을 1달로 계산하라. 원릉(園陵)의 제도(制度)는 검약(儉約)하게 하라.

서경(西京),안남(安南),등주(登州) 등(等) 제도(諸道)는 진수(鎭守)해야 할 임무(任)가 있으니 궐(闕)로 달려 오지 말고 각지에서 애도하라. 3일 안에 상복을 벗게 하고 나머진 사군(嗣君)이 알아서 하라.

—  경종의 유조

붕어 1개월 전인 981년 6월에 병이 들었고, 981년 7월에 도학군자로 이름이 높았던 사촌동생 정윤 개령군 왕치[2]에게 "나의 뒤를 이으라" 는 유조를 남긴 뒤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붕어했다.

각주

  1. ↑ 경종의 전 4대 대왕 태조,혜종,정종,광종을 말함.
  2. ↑ 성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