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목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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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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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국왕 · 왕후 · 왕태자 · 태상왕 · 왕태후
고려 제16대 국왕
정목대왕ㅣ靖穆大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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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110년 8월 16일
고려 개경 개성부 만월대 수령궁
즉위 1145년 10월 7일
고려 개경 개성부 만월대 회경전
사망 1189년 1월 5일
고려 철주목
능묘 정목왕묘
재위기간 고려 왕태자
1116년 8월 21일 ~ 1145년 10월 7일
고려 국왕
1145년 10월 7일 ~ 1155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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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개성왕씨
부모 부왕 예종
모친 폐비 김씨
형제 1남 4녀중 1남
종교 불교
휘 해(該)
시호 문안무정목대왕(文安武靖穆大王)

개요

人君所畏者, 隱秘之記而已。

先王以廢妃之事封於金縢, 雖後世之君亦不得輒啓, 然正穆大王不信之。 一夜醉至中樞院, 欲觀金縢之文, 副使妙香以先王之命止之。 王怒曰: 「汝所事者, 先王乎, 抑朕乎?」 遂揮劍。 妙香避之, 然劍及其肩而傷之。 守先王之命, 臣之忠也, 然人君以怒揮劍, 史亦不得不書也。

임금이 두려워하는 것은 숨겨진 기록뿐이라 하였다. 선왕이 폐비의 일을 금등으로 봉해 후세의 군주도 함부로 열지 못하게 하였으나 정목대왕은 이를 믿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중추원에 이르러 금등 문서를 보려 하자, 중추원부사 묘향이 선왕의 명이라며 이를 막았다. 왕이 노하여 “네가 섬기는 임금이 선왕이냐, 짐이냐.” 하고 칼을 휘둘렀고 묘향은 피했으나 어깨를 다쳤다. 선왕의 명을 지키려 한 신하의 충정은 가상하나, 군주가 분노하여 칼을 휘두른 일 또한 사가가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고려 제16대 국왕.

예종의 유일한 아들이자 공예태후의 이복오빠이며,금상의 사촌형으로, 고려 역사상 유일하게 폐위된 군주이자 반정으로 폐위된 군주이고 , 사사당한 군주이다. 하여 시호는 받았으나 끝내 묘호는 받지못했으며 능호또한 받지 못했다.

고려사에서는 폐위된후 받은 작호인 부여후로 자주 기록되며 ,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군주이다. 하지만 그가 폭군으로 낙인찍히게 된것은 이자겸의 계략과 어미[1]의 죽음, 아비[2]의 집착에서 시작된것이며 정치릉 매우 잘한 군주로 알려져있기에 고려사에서는 미쳐서 사람을 죽인 광군(狂君)으로 기록되고 있다.

시호

시호는 '문안무정목대왕(文安武靖穆大王)'이며 대표 시호인 '정목대왕'은 숙부 인종이 올렸다. 정목대왕의 '정(靖)'은 난을 평정하여 나라를 잡았다는 뜻이며 '목(穆)'은 성품이 온화하고 엄숙하며 덕이 있다는 뜻으로 앞에있는 문안무까지 포함하면 문치 , 무공 , 난평정 , 성품을 다 넣은 매우 큰 시호이다.

예부에서 시호를 발표했을때 폐주에게 주기엔 너무 과분한 시호라며 말이 많았다. 하지만 시호의 뜻대로 문치와 무공이 뛰어났으며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였으니[3] 못줄 이유는 없다고 평가된다.

생애

정목대왕 1110년 8월 16일 오후 1시 만월대 수령궁에서 국왕 예종과 폐비 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왕태자 시절

정목대왕은 여섯 살의 이른 나이에 왕태자로 책봉되었다. 이는 선종에 이어 고려 역사상 두 번째로 어린 태자 책봉이었다. 당시 예종은 왕후인 순덕왕후와 후비 선경귀비 사이에서 딸만을 두고 있었고, 김씨가 낳은 이 왕자가 유일한 적통 아들이었기 때문에 조기에 태자를 책봉한 것으로 보인다.

책봉 논의가 이루어질 당시 일부 대신들은 어린 나이를 이유로 반대하였다. 문하시랑 임원애와 예부상서 곽씨는

" 태자께서 아직 젖어미 곁을 떠나지 못할 정도로 어린데 이 나이에 태자로 책봉하는 것은 이르며, 성년이 된 뒤 책봉해도 늦지 않사옵니다 ”

라고 아뢰었다. 이에 예종은

“과거 짐의 조부인 문종 역시 숙부인 선종대왕을 다섯 살에 태자로 책봉하여 제왕의 교육을 받게 하였으니 지금 태자를 책봉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라고 하며 책봉을 강행하였다.

태자는 열 살이 되던 해 부왕이 건강 악화로 정사를 돌보기 어려워지자, 중궁이었던 순덕왕후의 수렴청정 아래에서 약 4년간 형식상 국정을 대신하는 경험을 하였다.

왕실의 총애 속에서 성장한 그는 아버지의 기대 또한 매우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서른 살 무렵, 이자겸의 계략으로 생모 김씨가 간통 혐의를 뒤집어쓰고 폐출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35세가 되던 해에는 어미가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이 일로 태자는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으며, 훗날 나타난 광증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가 있다.

재위

내치

평양성 재건

즉위 이후 금이 북송을 멸망시키고 사대주의를 요구하자 훗날 전쟁이 일어날것을 우려하여 서경의 군사시설과 군을 전비하고 무너진 평양성을 재건하였다.

황주읍성 건설

고려의 경제단지인 황주목을 우대하였는데 황주읍성을 세우고 황주문을 보수했으며 국영상점 거리를 두배로 확장시키고 의료시설을 세우는 등 경제적으로나 의료적으로나 많은 이득을 보았다.

외치

금

여금전쟁이 발발하자 고려는 선왕 대에 재편성된 별무반을 중심으로 체계적인 군사 작전을 펼치며 수개월 동안 여진군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는 과정에서 금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 와중에 금 희종이 붕어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막대한 규모의 기마군을 앞세운 여진군의 공세를 끝내 막아내지 못하면서 고려는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이후 고려 조정은 전쟁 종결을 위해 금과의 사대 관계를 받아들였으며, 이는 표면적으로만 군신 관계를 인정하는 칭신 사대의 형태였다.

남송

이후 금나라에 의해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성립하자, 남송 조정은 고려에 공동으로 금을 공격하자는 연합 요청을 보냈다. 그러나 당시 고려는 이미 금과의 전쟁 패배 이후 칭신 사대 관계를 맺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고려 조정은 해당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국난과 폐위

이자겸은 부여후를 폐위시키기 위해 즉위 초부터 은밀히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는 난 당일 중추원을 기습하여 조작된 금등 문서를 확보한 뒤, 사숙태후의 진찬연이 열리고 있던 태후전으로 향하였다. 이후 연회에 참석해 있던 부여후에게 “일전에 명하신 금등을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하며 조작된 금서의 내용을 공개하였다.


금서에는 선왕의 후궁인 평산원주와 평주원부인, 그리고 조모 사숙태후가 폐비 사사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이를 들은 부여후는 크게 동요하며 광증에 가까운 격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격분한 부여후는 단상으로 뛰어올라 평산원주와 평주원부인의 머리채를 잡아 태후전 앞뜰로 끌어내렸다. 그러면서 사숙태후에게

“당신이 그러고도 내 할미요. 어찌 내 어미를 그리 비참하게 죽일 수 있소!”

라고 울부짖었다.

이때 붙잡혀 있던 평산원주는 “하늘이 두렵지도 않으시오!”라며 부여후를 꾸짖고 다음과 같이 저주를 퍼부웠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녕 하늘이 두렵지도 않으시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알고있소. 당신이 폭군이라는것을!


당신 손에 죽은 상궁들의 원혼이 지켜보고있고 태묘의 조종들이 지켜보고있소!
고통스럽게 죽게될것이다.. 온몸이 천천히 굳어가지만 사지가 찢어지는듯한 고통을 느끼며 생을 마감하고 극락왕생도 하지 못할지어다!

이에 격노한 부여후는 원주의 비녀를 빼앗아 그녀를 찔러 살해한 뒤 현장을 벗어났다.

이자겸은 이 사건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부여후를 붙잡아 중광전에 유폐하였다. 이후 부여후는 가까스로 탈출해 난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으나, 곧이어 박지만이 정변을 일으켜 사숙태후와 주요 충신들을 시해하였다.

또한 선왕의 후비였던 선경귀비를 끌어와 폐위 교서에 국새를 찍을 것을 강요하였고, 결국 정목대왕은 폐위되어 부여후로 강등된 뒤 철주로 유배되었다.

폐위 이후와 비참한 죽음

이후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고 그의 누나 정휘공주와 여러 용손들이 복위운동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전부 참수당하는것을 지켜보다 사약을 받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부여후가 졸하였다.


폐주는 일찍이 왕태자로 책봉되어 총애를 받으며 자랐고, 즉위한 뒤에도 권신이 서로 다투는 가운데 국정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권세가들이 서로 모함하고 권력을 다투어 정국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처음에 이자겸이 난을 일으켜 후를 폐위하고 중광전에 유폐하였으나, 후가 가까스로 빠져나와 이를 평정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박지만이 정변을 일으켜 사숙태후와 여러 충신을 시해하고 조정을 장악하였다. 또한 선왕의 후비 선경귀비를 협박하여 폐위 교서에 국새를 찍게 하였고, 이에 후는 마침내 왕위에서 물러나 부여후로 강등되어 철주로 유배되었다.


폐주가 유배지에 이르러 지내던 중, 조정에서 그의 누이와 평소 아끼던 신하들이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명목으로 참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후는 이를 듣고 크게 통곡하며 “과인이 덕이 없어 화가 친족과 신하에게까지 미쳤구나.” 하고 오랫동안 슬픔을 그치지 못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마침내 사약을 내려 죽게 하니, 후는 이를 받들고 말하기를 “짐이 비록 덕이 부족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하늘과 조종을 속인 적은 없다.” 하고 잔을 들어 마셨다. 잠시 뒤 숨을 거두니 향년은 79세였다.

—  <고려사>

평가

긍정적 평가

정목대왕은 즉위 초기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도 국정을 일정 부분 안정시키려 노력한 군주로 평가된다. 특히 여금전쟁 당시 선왕 대에 재편성된 별무반을 활용하여 체계적인 방어 작전을 펼쳤고, 수개월 동안 여진군의 남진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전쟁은 결국 패배로 끝났지만 금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며 전쟁이 장기화되는 동안 금 희종이 붕어하는 등 금나라 또한 큰 부담을 겪었다. 또한 전쟁 이후 금과의 관계에서 칭신 사대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이는 완전한 복속이라기보다는 외교적 현실을 고려한 선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표면적으로만 군신 관계를 인정함으로써 전쟁을 종결하고 국력을 보존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정목대왕의 대외 정책을 현실적인 외교 판단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  안극인
폐하께서 군왕이 아니옵고 , 군왕의 아들이 아니였고 , 저희가 평범한 가정의 남매였다면 어쩌면 저희의 운명은 훨씬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정휘공주
그는 훌륭한 정치가였으며 군사전략가요 슬픈과거를 술로 숨기는 군주였습니다. —  곽씨

부정적 평가

반면 정목대왕의 통치는 폭력적이고 감정적인 행동으로 인해 큰 비판을 받는다. 특히 태후전 사건에서 선왕의 후궁이었던 평산원주를 격분 끝에 직접 살해한 일은 그의 통치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비판 사례로 언급된다.

왕이 궁중 연회 자리에서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군주의 품위를 크게 훼손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또한 정목대왕은 술에 지나치게 집착하였다는 기록도 전하며, 술에 취한 상태에서 궁인들과 신하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일부 기록에서는 상궁들을 구타하거나 심지어 살해한 사례도 있었다고 전해지며, 이러한 행동들은 그의 폭군적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이처럼 정목대왕은 한편으로는 전쟁과 외교에서 현실적인 선택을 한 군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잔혹한 행동을 보였던 군주로도 평가된다.

선왕의 후궁은 곧 본인의 계모와 마찬가지이거늘 어찌 자신의 어미를 죽이는 자가 이나라의 군주겠소? —  이자겸
재능이 좋다하여 안좋은 만행들이 숨겨지는것은 아닙니다. 제발 죽어서도 죗값을 치루길

가족관계

정목대왕은 살아생전 왕후도 후비도 두지 않았고 그러기에 슬하에 자녀도 없었다. 교방궁인중 연욱이라는 여인을 연모해 후궁으로 들이려 했으나 출신이 천하고 중궁의 자리를 비운채 후궁을 들이는건 예법에 어긋난다 하여 끝내 들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1남 4녀중 1남으로 유일한 적장자인데 이복누나는 정휘공주로 사이가 좋았으며 이목 여동생들로는 공예태후, 경안택주, 정안궁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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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 폐비 김씨
  2. ↑ 예종
  3. ↑ 하지만 난 당시 정목대왕은 유폐당해있다가 겨우 빠져나왔으며 사숙태후와 김지원이 난의 대부분을 진압했기에 정목대왕의 업적이라 보는게 맞는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