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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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제17대 국왕 인종ㅣ仁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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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079년 10월 10일 |
| 고려 개경 개성부 만월대 만령전 | |
| 즉위 | 1155년 10월 26일 |
| 사망 | 1177년 12월 6일 |
| 고려 개경 개성부 만월대 천덕전 | |
| 능묘 | 장릉 |
| 재위기간 | 고려 상당후 |
| 1089년 10월 10일 ~ 1155년 10월 26일 | |
| 고려 국왕 | |
| 1155년 10월 26일 ~ 1177년 12월 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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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묘호와 시호
묘호는 '인종'(仁宗)이다. 묘호를 달리 불러 '인묘'(仁廟)라고도 불렸다.
시호는 '극안공효대왕'(克安恭孝大王)으로, 대표 시호는 아들 왕창이 올린 공효대왕(恭孝大王)이다. <고려사>에서 작금의 금상은 왜 '공효' 시호를 올렸는지 설명했는데,
공(恭)은'덕(德)의 기틀을 지켰다.' 효(孝)는 '행한 일의 의도가 매우 고귀하다.'
란 뜻으로 올렸다고 한다.
생애
숙종의 왕자
1079년 10월 10일 만월대 중궁전에서 숙종과 사숙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동복 형은 예종이었으며 이복동생들로 제안후와 흥수택주가 있었다.
상당후에 책봉되고 일찍이 출궁하였으나 반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혼인을 하지 않았었다.
국왕의 숙부
백성들을 위해 서버 내 여러 문화시설을 지어 많은 백성들이 섬겼는데 왕실의 허락도 없이 왕재창의 재산으로 만든거라 논란이 되었었다.
또한 노년에 고혈압으로 다소 언행이 거칠고 욕설을 자주 했던것으로 기록이 남아있다. 조정에서 상서령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여금전쟁이 터져 황주로 파견되었는데 철주성 근장 일부가 후일을 대비해 서경으로 물러나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는데
아니된다! 후퇴가 아니라 전진을 해야 한단 말이다! 아!! 이럴때 떡 쳐발라 놔야 하는데!
그러자 문하시중 김지원이 당황하며 언행을 바로하라고 지적하였다.
이후 서경이 점령되고 어머니 사숙태후가 인질로 잡히자 직접 구하러 가겠다며 소동을 피웠으나 결국 상서령 직위가 회수되며 일이 마무리되었다.
즉위
박지만의 정변
이자겸의 난으로 왕실과 조정이 혼비백산에 빠진 틈을 노려 박지만이 다시 정변을 일으켰다.
사숙태후를 피살하고 주요 재신들을 살해하였으며 선경귀비와 평주원부인이 궐 밖으로 도망치고 있을때 귀비를 붙잡아 부여후를 폐하고 인종을 보위에 앉히라는 폐위교서를 건내며 국새를 찍게 했는데 아무래도 귀비가 후궁들중 제일 직책이 높아서 그런게 아닐까 싶다.
이후 어떨결하게 보위에 올랐으나 정변 도중 자신의 어미를 죽이고 권세를 얻어 무신정권기를 연 박지만을 극도로 혐오하였다.
박지만이 교정도감을 설치 하려하자 박지만을 멀리하고 재상이였던 임언년, 김지한을 가까이 두었는데 박지만을 배척하려 한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박지만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편전에서 인종을 암살하려 하였고 인종은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박지만을 엎어치기 해 기절시키고 도주하였다.
이후 박지만, 이자겸과 관련된 그의 가족들과 주요 세력들을 전부 숙청하고 관노비화 시키며 비로소 태평성대를 되찾았고 이 과정에서 평산 박씨와 최고 문벌귀족가였던 경원 이씨가 몰락하였다.
최장수 국왕
이후 자신의 조카였던 수안택주를 왕후로 봉작하였는데 이가 바로 공예태후이다.
본래 국혼을 치룰 생각이 없었으나 조정 신료들이 나라의 후사를 안전하게 하기 위함이라며 재촉하자 어쩔수 없이 왕호로 들인것으로 보인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장남 왕창을 보았는데 너무 고령이였던지라 다른 용손을 입양한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1]
이후 매병에 걸려 문하시중이였던 김지한을 섭정공에 임명하고 대부분의 정치를 맡겼으며 한동안 합병증으로 인해 온갖 고생을 했다.
붕어와 유조
인종은 오랜 세월간 치매를 앓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상께서 매병에 걸리시여 지금까지의 수많은 기억을 잃으셨는데 마치 숙종대왕의 왕자이던 시절로 회기하신 것 같았다. — 임언년의 약방일지
그러다 1177년 12월 6일 만월대 천덕전에서 붕어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유조를 남겼다.
짐이 부덕해 더이상 이 나라를 이끌지 못하니 이는 하늘이 나에게 조카의 옥좌를 빼앗은 죄를 주는가 보구나 그렇지만 짐이 할 일은 태산같이 많거늘 어찌 이런 시련을 나에게 주는가..섭정공 김지한에게 마지막 명을 내리겠다. 나는 고려라는 이 나라가 중요함을 넘어, 내 자식만큼 소중하고 자네의 능력이 훌륭해 내 아들 창이 옳바른 정치를 하게끔 도우나, 내 아들이 그럴 그릇이 안되거늘 자네 혹은 왕후가 바른 정치를 할수 있도록 창이를 이끌어주게 , 또한 궁에선 날 도와준 궁녀들에게 충분히 먹고 살 돈을 쥐어주어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게 하거라.
허허.. 다른 관리들은 내가 죽은 뒤 내 시신을 화장 후 금과 접견한 천리장성 인근에 묘를 조성하길 바란다. 내 죽어서도 최전방에서 오랑케들로부터 고려를 보호할것이니라. 창아..홀아비로 지내게 해서 미안하구나..
유조를 남기고 한시간 후 인종은 붕어하였다.
평가
국원공 시절 어째서 아비는 그리 언행이 험하고 욕설들을 남발하였을까 하고 싫어했었는데 그 용상에 오르고 나니 아비의 마음이 이해되더이다. — 왕창
별 다른 감정의 표현이나 큰 별것 없이 물에 술 탄 듯 , 술에 물 탄듯한 분이셨네 — 공예왕후
각주
- ↑ 이로인해 18대 국왕 왕창은 늘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불안감이 많았고 훗날 여러 용손들을 숙청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