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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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숙종의 왕후 사숙대왕태후ㅣ思肅大王太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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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064년 1월 5일 | ||||||
| 고려 황도 개주 | |||||||
| 사망 | 1153년 10월 26일 | ||||||
| 고려 자경궁 내전 | |||||||
| 능묘 | 인릉 | ||||||
| 재위기간 | 고려 단양택주 | ||||||
| 미성 ~ 1102년 1월 26일 | |||||||
| 고려 왕후 | |||||||
| 1102년 1월 26일 ~ 1105년 8월 1일 | |||||||
| 고려 왕태후 | |||||||
| 1105년 8월 1일 ~ 1145년 10월 7일 | |||||||
| 고려 대왕태후 | |||||||
| 1145년 10월 7일 ~ 1153년 10월 26일 | |||||||
| 고려 왕태후〡고려 국왕 임조칭제 | |||||||
| 1120년 8월 29일 ~ 1125년 9월 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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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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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왕태후 홍씨는 성품이 우직하고 강직하였다. 정변이 일어나 반정군이 궁궐에 이르자 태후가 물러나지 아니하고 꾸짖으며 맞섰다. 반정군이 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난을 일으켜 마침내 태후를 해하니, 궁중 사람들이 크게 통곡하였다. | <고려사> 후비전 - 사숙왕후 |
고려 숙종의 왕후이다.
박지만의 난 때 피살된 비운의 왕후이며 우직한 성품으로 국난을 극복하고 반란 때도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정식시호는 광숙정화사숙대왕태후(匡肅貞和思肅大王太后)이며 줄여서 사숙왕후(思肅王后)라고 부른다.
생애
숙종의 왕후
1102년 1월 26일 간택되어 외명부 정 6품 택주에서 숙종의 왕후가 되었다. 재위 초기 후궁들과의 기싸움으로 인해 왕후로서 위엄을 보이기 위해 내외명부의 품계를 개편하여 왕후의 권력을 강화 시켰으나 한참 조정과 내명부가 충돌하던 시기였기에 비교적 안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박정희를 제거하다.
숙종이 남경 태묘로 향하던 도중 건강이 악하되어 다시 만월대로 돌아오고 있었고 그 상황을 노려 금상을 시해하려한 병부상서 박정희가 숙종의 가마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 만월대에 도착하여 병부상서가 칼을 빼어든 순간 회경문에서 금상의 가마를 기다리던 사숙왕후가 이를 발견하고 자신의 은장도를 박정희에게 던져 그자리에서 제거했다.
자경궁 왕태후
유일하게 본궐에서 출궁한 왕태후이다. 왕후시절 대신들의 비난과 내외명부 조정과의 충돌로 인해 과로가 쌓여 스스로 개경을 떠 서경으로 가서 지냈다.
115년만의 임조칭제
1120년 동북면 전투에서 9성중 7성을 반환해주며 충격으로 인해 위장병이 와 금상이 몸져눕고 왕후 권한으로 수렴청정을 하며 태자와 함께 정국을 이어가던 왕후까지 세상을 떠나자 조정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임조칭제를 시행하였다. 임조칭제 선포 이후 예종이 한평생 이루지 못했던 작위대변동을 성공적으로 실행하여 극찬을 받았지만 목종 시절 헌애왕후의 섭정 여파로 굳이 섭정을 해야했냐는 대신들의 억지 속에 또 비난을 받아야했다.
비운의 말년
아들 예종이 죽고 손자 부여후가 보위에 올랐으나 어머니 폐비 김씨 문제로 술만마시면 광증이 돋아 신하들을 위협하고 궁녀들을 죽이며 폭정을 일삼았고 대왕태후였던 사숙왕후에게도 일부 여파가 가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이자겸의 난과 박지만의 정변
자신의 진찬연중 이자겸이 폐비에 관련된 금등을 발설하여 눈앞에서 평산원주 박씨가 죽임당하는걸 직관하였다. 이후 이자겸이 태후전에 쳐들어와 폐위교서에 국새를 찍을것을 강요받았으나 폐위교서를 찢어버리고 치마속에 국새를 숨기며 " 윤허하오 ~ " 라며 조롱을 하였고 이에 분노한 이자겸이 태후의 치마를 찢어버리며 능욕을 당했다. 다행이 비녀를 뽑아 얼굴을 내려 찍어서 옥체를 보존할수 있었으나 바로 박지만의 반정이 발생하여 국새를 숨기자 그자리에서 박지만에게 시해당하며[1] 고려 역사상 가장 비운의 왕태후로 평가된다.
가족관계
- 아버지 : 참지정사 홍윤
- 어머니 : 달성국대부인 서씨
평가
사숙왕후는 간택(揀擇)으로 중궁(中宮)에 오른 인물이나, 즉위 초부터 단순한 내명부의 주재자가 아니었다. 내외명부(內外命婦)의 권한이 충돌하던 시기에 왕후는 품계(品階)를 개편하여 중궁의 위계를 재정립하고자 하였고, 이는 왕권 보좌라기보다 중궁 권위의 제도화를 꾀한 조치였다. 다만 조정이 예민하던 때라 대신들은 이를 권한 확대라 비판하였다.왕후는 위기 앞에서 물러서는 인물이 아니었다. 숙종이 위태로웠을 때 박정희의 칼을 앞질러 제거한 일은 우연한 충절이 아니라, 군주의 안전을 직접 책임지겠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결단은 사적 감정보다 국본(國本)의 보전을 우선한 행동으로 평가된다.
태후가 된 뒤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한 차례 조정을 떠났으되 이는 권력을 잃어서가 아니라,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몸을 피한 선택에 가까웠다. 그러나 국정이 흔들리자 다시 돌아와 임조칭제(臨朝稱制)를 선포하였다.
이는 전례를 넘어서는 조치였으나, 조정의 공백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작위 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질서를 정비한 일은 실효가 있었고, 그 결단력은 높이 평가되었다. 다만 대신들은 전대 섭정의 기억을 들어 태후의 정치 참여 자체를 문제 삼았으니, 비판은 행위보다 ‘형식’을 향한 것이었다.
왕후의 말년은 권력의 정점과 동시에 파국이었다. 손자의 폭정과 외척의 전횡 속에서도 국새(國璽)를 끝까지 지키려 한 태도는 권위를 상징적으로 사수한 행위였다.
폐위교서를 찢고 국새를 숨긴 일은 한 태후가 제도적 정통성을 마지막까지 놓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반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시해되었으니, 이는 개인의 실패라기보다 권력 투쟁의 잔혹함이 낳은 결말에 가까웠다.
— 《고려사》〈후비전 : 사숙왕후〉
기품있어 보이신다 — 마리아 폰 세피로트
계단에서 말타고 달려오는 사람을 단번에 은장도로 맞춰서 죽인걸보면 에임이 보통이 아니신듯 하다. —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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