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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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태조의 제1왕후 장화왕후ㅣ莊和王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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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894년 | ||
| 후백제 나주 목포 오다련의 사저 | |||
| 사망 | 967년 4월 31일 | ||
| 고려 황도 개주 만월대 | |||
| 재위기간 | 고려 왕후 | ||
| 918년 7월 25일 ~ 미상 | |||
| 고려 왕태후 | |||
| 미상 ~ 967년 4월 3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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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古人云
忠臣不事二君,烈女不更二夫。
昔有義士,聞國將亡,誓以死報國。
臨行之際,有村女奉酒於前。
義士辭曰
國難未平,何敢安飲。
遂策馬而去。 옛사람이 말하기를 |
태조의 정비이지만 천한 약재상의 딸이였기에 외가의 힘이 약해 늘 다른 후비들에게 왕후의 자리를 위협받았으며 역대 왕후들중 유일하게 남편의 시호인 신자 돌림 시호도 받지 못하였다.
생애
태조에게 청혼받다.
태조 왕건이 나주 완사천을 지나던중 목이 너무 말라 버드나무 숲을 지나 우물 앞에 서있는 한 아가씨에게 물 한사발만 달라고 요청했고 그 아가씨는 바가지에 물을 푸고 버드나무잎을 띄워 왕건에게 줬다. 왕건은 어째서 물에 나뭇잎을 띄었냐고 묻자 "목이 마르다고 물을 급하게 마시면 체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답했고 그 아가씨의 현명함에 반해 그녀의 아버지에게 청혼을 하는데 그 아가씨가 바로 장화왕후이다.
혜종을 낳다.
왕건이 금성 정벌을 성공하고 돌아가던 도중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장화왕후와 마주쳤다.
빨래를 하던 황후와 마주쳤는데 그 뒤에서 무지개가 피어들었고 그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다. — 태조가 최지몽에게 한 말중 일부
그날 두 사람은 동침을 하게되고 그렇게 장화왕후는 임신해서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이 바로 고려의 2대 국왕 혜종이다.
왕후 재위기
918년 7월 25일 고려가 건국되고 태조의 1왕후가 되지만 신분때문에 한동안 만월대로 입궐하지 못했다.
신명왕후와의 갈등
왕건은 건국 당시 전국의 호족 세력들의 반발을 방지하기 위한 정책으로 거의 30명에 달하는 호족들의 딸들을 부인으로 맞았는데, 당연히 그 부인들 하나하나가 권력이 막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윤 책봉을 두고 장화왕후와 신명왕후 사이의 갈등이 심했다.
가난한 약재상의 딸이 자신을 제치고 1왕후가 되어 태조의 장자를 낳으니 질투심이 극에 다달하였다.태조가 장화왕후의 아들이였던 왕무(혜종)을 정윤에 봉하려 하자 신명왕후는 충주유씨 호족들을 통해 정윤 책봉 반대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태조는 책봉 의지를 더 확고히 하여 왕무가 머물던 장화왕후의 사가로 자룡포를 보냈다. 당시 자룡포는 오직 황제 즉. 태조 자신만이 입을수 있던 옷이였다. 그를통해 왕무를 자신의 왕위계승자로 확정지으려 한것이었다. 그 상황을 보고 태조의 의도를 눈치챈 박술희와 최지몽이 왕무를 정윤에 책봉하는데 힘썼고 그렇게 왕무는 정윤에 봉해졌다.
순탄치않은 궐생활
장화왕후는 약재상의 딸이였는데 그 말은 즉. 외척의 힘이 매우 약했다는 소리이다. 26명의 호족의 딸인 여러 후궁들에게 늘 왕후 자리를 위협받았는데 장화왕후는 이때 현명한 대처를 통해 1왕후로써의 위엄을 보였다.
나주원왕후께서 모든 부인들을 불러모아 서책을 나눠주시며 명하시길
" 일주일안에 각각 이 서책들을 필사하여 왕후전으로 검사받으러 오시오. "그러자 많은 후궁들이 당황하였고 왕후께서 못하겠느냐 하시며 호통을 치시자 부인들께서 명을 따르겠다 하셨다.
— 고려사
일주일뒤 약 12명의 부인들이 필사를 하지 않았고 장화왕후는 궁인들이 보는 앞에서 필사하지 않은 부인들에게 회초리를 쳐 내명부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그 모습을 본 3,4왕후였던 신정왕후와 신성왕후도 장화왕후을 섬기며 내명부가 잠잠해지는듯 싶었으나 신명왕후는 여전히 장화왕후를 만만히 봐 자주 무례를 범했는데 이 또한 대표적인 예시가 있다.
나주원왕후와 충주원왕후,황주원왕후와 대량원왕후께서 다함께 임천각에 모여앉아 다과를 즐기시다 충주원왕후께서 나주원왕후께 말하시길
" 나주원왕후께선 참 대단하십니다. 의지할 뿌리 하니도 없이 그리 높은자리에 서계시니깐요.다만... 나무라는것이 뿌리가 얕으면 아무리 줄기가 굵어도 바람앞에서 제일먼저 흔들리기 마련이라 하여 신첩은 그저 걱정될 뿐 입니다.. "
— 고려사
그러자 나주원왕후께서 안색이 안좋아지셨고 다른 왕후들께서 눈치를 살피시었다.
그냥보기엔 걱정을 하며 충언을 올린것처럼 보이지만 말을 해석해보면
의지할 뿌리 없는 나무로 비유해 장화왕후의 처지를 비꼬고
바람앞에서 제일 먼저 흔들리는 마련이라 하여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법이라고 왕후의 자리를 위협하는 시비조의 간언이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태조의 총애와 아들 왕무가 성장해가는것을 보며 힘든 궁중생활을 버텨나갔지만 얼마안가 큰 위기를 맞이한다.
궐에서 쫓겨나다
신명왕후가 아들 광종를 불러내 장화왕후와 험께 차를 마시고 있을때 찻잔 깨트리고 아들의 얼굴을 그어버리고는 장화왕후에게 뒤집어씌워버리는 극악무도한 짓일 벌였다. 장화왕후는 결백을 외쳤으나 조정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대신은 거의 없었고 왕후를 폐위시켜 나주로 유배보내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20여명이 넘는 호족들이 연달아 상소를 올리자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태조는 장화왕후의 폐위는 막았으나 만월대에서 출궁시켰다.
그 이후 혜종때 태후가 되어 복귀할때까지 누명을 벗지 못하고 나주 사가에서 생계를 이어간다는 기록 제외 행적이 묘연한채로 살아갔다.
궐로 돌아오다.
아들 혜종이 즉위하고 혜종은 어머니를 왕태후로 존봉하여 만월대로 들였다. 이후 신명왕후를 충주원에 유폐시켰으며 아들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나 궐밖에서 생활할때 병을 얻어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1]
가족관계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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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 혜종은 죽은 어미를 기리며 회경전 뒤 빈 공터에 2층 규모의 거대한 전각을 세우고 어미의 시호를 따 그 전호를 ' 장화전 ' 으로 정했고 이후 역대 국왕들의 편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