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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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문종의 제2왕후 인예순덕태후ㅣ仁睿順德太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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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021년 8월 21일 | ||||||
| 고려 서경 평양부 이자연의 사저 | |||||||
| 사망 | 1092년 9월 2일 | ||||||
| 고려 개경 개성부 만월대 자수전 | |||||||
| 능묘 | 대릉 | ||||||
| 재위기간 | 고려 연덕궁주 | ||||||
| 미상 ~ 1052년 1월 30일 | |||||||
| 고려 연덕궁비[1] | |||||||
| 1052년 2월 1일 | |||||||
| 고려 왕후 | |||||||
| 1052년 2월 1일 ~ 1071년 11월 30일 | |||||||
| 고려 왕태후 | |||||||
| 1071년 11월 30일 ~ 1092년 9월 2일 | |||||||
| 고려 왕태후〡고려 국왕 수렴청정 | |||||||
| 1071년 11월 30일 ~ 1092년 2월 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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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개경 왕룡사 인근에 위치한 인예왕후의 대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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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예왕후 또는 인예순덕태후는 고려 문종의 제2왕후로 문하시중 경원군 개국공 이자연의 딸이다.
문하시중인 아버지 이자연과 문벌인 세도가문 경원 이씨의 후광을 뒤입어 매우 막강한 권력을 가졌었다. 약 40년이라는 세월간 권력의 중심에 있었으며 나라의 크고 작은 일 전반에 관여하였다.
생애
문종의 후비
정확히 어느 시기에 입궐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사 문종본기의 내용을 보면 문종이 즉위한 해 인평왕후가 왕후로 재임된후 4년뒤 입궐한 기록이 남은 것을 보면 1050년대 중후 쯤일 것으로 보인다.
보령공주가 송 황실로 시집가던 날 곤녕궁 사건이 발생해 송에 발이 묶이자 직접 말을타고 군사들과 함께 공주를 구하러 갔었다.
이후 문종의 첫 아들 선종을 낳아 연덕궁 왕비에 봉작되었다.
문종의 왕후
인평왕후가 처소에서 자결하자 문종의 명으로 왕후에 등극하였는데 인평왕후 훙서 바로 다음날에 봉작되어 한동안 여론이 좋지 않았었다.[2]
그녀의 등극으로 경원이씨 가문은 세도가가 되었다. 아버지 이자연은 이미 최고재상인 문하시중이었고, 이후 인예왕후를 보필하기 위해 동생 이태주가 참지정사가 되며 종국엔 평장사까지 관직이 이른다.
문종과의 금슬이 좋아 두 아들을 더 낳았는데 숙종과 대각국사다. 딸이 없어 인평왕후의 장녀였던 보령공주를 친딸처럼 여겼다.
자수전 왕태후
문종이 승하하고 장남 선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중앙집권화하고 여러 작위체제를 탄탄히 하는 등 여러 업적을 이뤄낸 아버지 덕에 그대로 황금기를 이어갈수 있었다.
왕후시절부터 진행했던 국청사 설립을 태후가 되고 그 다음 해 완공하였으며 고려를 문화강국으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국청사에선 밤새도록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려왔는데 백성들은 그곳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음주사무를 즐겼고 38회의 연등회가 진행되었다. — <고려사> 선종 기
2차 여요전쟁
선종 재위기 요에 조공을 보내는 횟수를 더욱 줄이고 송과의 교류를 더욱 공개적으로 진행했는데 이를 고까워한 요가 2차 전쟁을 일으켰다.
그 당시 북쪽에 지방군이 없었기에 수년간의 첩보질로 이를 이용해 기습 남하를 하였다. 고려군은 갑작스러운 남하에 제대로된 수비를 하지 못했고 순식각에 개경이 함락당했다.
왕실과 함께 고성행궁으로 피난가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는데
어찌 태평성대의 고려가 저 오랑케들 때문에 이런 수모를 겪는단 말이냐!
이후 고성행궁에서 선종은 역대 국왕들중 최초로 삼정합의를 열었는데 신료들의 반발이 강해지자 수렴청정을 통해 이 반대의견을 단숨에 제압하였다. 이를 통해 그 당시 권력이 얼마나 막강하였는지 알수 있다.
김러시아의 난
여요전쟁에서 활약한 장군들의 보상문제로 김러시아가 난을 일으켜 선종이 서경으로 행차했을때 만월대를 습격했는데 이때 김러시아와 대립한 유명한 일화가 탄생한다
난군들이 자수전을 기습하였는데 전각 내부에는 자수태후[3] , 선희왕후 , 연화전주[4]가 있었다. 난군들이 왕실 여인들에게 도끼를 들이밀며 왕을 불러내고 지위를 내려놓느라고 협박하였다. 이에 태후께서 자리에 일어나 김러시아의 앞으로 다가가 다음과 같이 받아치셨는데"이보게 , 그대는 과연 이 백정들로 하여금 왕실을 무너트릴수 있을거라 생각하시오? 그대가 살고싶다면 당장 물러나시오. 이 나라 지존의 어미이고 , 또 이 나라 만민의 어미인 본궁이 사는곳에 쳐들어온걸 금상과 신료들 , 백성들이 안다면 네 놈이 어찌 될것같으냐?"
— <고려사> 선종 기
그로인해 난군들이 당황에 주춤거렸고 마침 미리 잠복시켜두던 용호군들이 움직여 난군들을 잡아가며 손쉽게 일을 마무리 하였다.
진한공비를 입궁시키다.
경원 이씨 문중으로 내려가던 날 진한공비가 행렬에 따라붙어 문중 앞뜰에 멍석을 깔고 앉아 본인과 진한공의 혼례를 허가해달라고 애원하였다. 인예태후는 그런 공비의 간절함을 보고 선종을 설득해 손자며느리 공비를 입궐시킬수 있도록 도왔다.
태후의 노년
만월대 화재사건과 김러시아의 난으로 만월대가 위험해지자 선종이 임시로 거처를 서경으로 이여하였고 이때부터 신정대왕태후의 별궁인 명복궁에서 기거하였다.
이후 향년 89세로 침전에서 자연사 하였는데 태후가 키우던 개들이 태후가 죽자 애도라도 하듯 열흘간 곡기를 끊고 목노아 울다 아사하였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공효왕후가 태후의 능 옆에 개들의 묘가 함께 조성되도록 명 하였다.
초상화
| 후궁시절 초상화[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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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후 시절 초상화 원본[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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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후 시절 초상화 복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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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후 재임기 초상화 원본[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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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후 재임기 초상화 복원도[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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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가족관계
- 아버지 : 문하시중 이자연
- 어머니 : 계림국대부인 김씨
여담
고려의 왕후들은 대개 부계든 모계든 왕실의 혈통이 섞이는 경우가 대개인데 인예왕후는 부계와 모계 모두 문벌귀족 가문의 혈통이다. 그럼에도 몇 안 되게 천추태후에게 맞먹는 권력을 지녔다는 점은 굉장히 특이하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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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국왕 수렴청정・임조칭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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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 '연덕궁주 왕비'의 약칭이다.
- ↑ 하필이면 연덕궁비로 승격한 다음날이었는데, 이로인해 문종과 문하시중 이자연이 인예왕후를 왕후로 세우기 위한 과정으로 연덕궁비로 책봉하고 다음날 인평왕후를 죽였다는 음모론도 존재했다.
- ↑ 인예왕후의 별칭
- ↑ 공효왕후
- ↑ 정식으로 식목도감에서 절차를 밟고 후궁 초상화를 그린 사례는 처음이다.
- ↑ 연덕궁 보수공사를 하기 위해 궁인처소권역의 마루를 뜯었더니 아래에서 발견되었는데 여요전쟁 당시 피난가며 미처 챙기지 못해 궁인들이 숨긴듯 하다.
- ↑ 문하시랑 천제공이 초안을 그려 식목도감에 넘겨 다시 그렸으나 불에 타서 사라졌다.
- ↑ 문하시랑 정효윤이 직접 식목도감에서 복원작업을 거쳐 완성시켰다.
- ↑ 이자겸의 장녀로 인예태후의 조카이다.
- ↑ 선경귀비의 장녀로 인예태후의 증손녀이다.
- ↑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다고 여겨지는데 가장 먼저 그녀의 아버지가 문종시대 최고의 거물인 문하시중 이자연이라는 점이다. 또한 아버지를 필두로 하여 동생과 일가를 모두 주요 관직에 등용시켰다. 또한 그녀가 아들을 무려 셋이나 낳았기에 혈통과 무관하게 권위가 매우 높을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본가 경원 이씨는 고려 역대 최고의 문벌 반열에 올랐으며 이자겸의 난으로 몰락하기 전까지 왕실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