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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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인종의 왕후 공예태후ㅣ恭睿太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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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124년 6월 2일 | ||||
| 고려 개경 만월대 적경궁 | |||||
| 사망 | 1190년 1월 6일 | ||||
| 고려 충주목 충주궁 장락당 | |||||
| 능묘 | 장릉 | ||||
| 재위기간 | 고려 수안택주 | ||||
| 1129년 6월 2일 ~ 1161년 11월 10일 | |||||
| 고려 왕후 | |||||
| 1161년 11월 10일 ~ 1177년 12월 6일 | |||||
| 고려 황태후 | |||||
| 1177년 12월 6일 ~ 1190년 1월 6일 | |||||
| 고려 황태후 〡 고려 국왕 수렴청정 | |||||
| 1177년 12월 6일 ~ 1181년 12월 1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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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노년기 초상화[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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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后整肅宮中紀綱,留心於政事,猶如理亂絲然,而權勢過盛之議亦有之。
《고려사》〈후비전 : 공예왕후〉 |
예종과 선경귀비의 장녀로 17대 국왕 인종의 왕후이다. 역사상 배우자와 나이차이가 가장 많이나는 왕후이다.
18대 대왕 왕창의 모후로 5년간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노년에는 충주궁에서 사촌동생 가족들과 지내다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다.
생애
예종의 왕녀
공예태후는 본궐 적경궁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작호는 ' 수안택주 ' 였다. 이때까진 권력욕이 없던것으로 보이며 들판에서 꽃구경을 하는것을 좋아했었다. 허나 건강이 좋지 않아 자주 온양행궁을 갔었다.[2]
궐에서 쫒겨나다.
이자겸의 계략으로 어머니 선경귀비가 폐출당하자 본인도 왕씨 성을 잃고 최씨부인으로 전락하여 궐 밖으로 쫒겨났었다.
이름 가엽게 여긴 문하시랑 임원애와 문하시랑 곽씨가 왕실 몰래 자신들의 사저 다락방에서 지내게 하고 모시며 지냈다.
이후 어미와 다시 만났을때에는 곽씨들이 모아서 준 돈과 시장에서 그림을 팔던 돈을 모아 작은 초가집을 구입해 생계를 이어갔다.
지위가 회복되다.
예종이 죽고 정목대왕이 즉위하며 선경귀비의 지위가 회복되어 본인도 택주 지위가 회복되었다.
인종의 왕후
1141년 37세라는 굉장히 늦은 나이에 왕후로 책봉되었다.
• 지엄하신 금상폐하의 명을 따라 8년 넘게 공석이였던 왕후의 자리에 문종과 인질덕비의 용손이자 예종대왕과 왕대비 저하의 장녀이신 수안택주를 왕후에 봉하고 만령전을 하사하는 바이니 그 명을 받들라. — 중서문하성 책봉교지
재위 초기에는 별 다른 활동 없이 조용히 지냈는데
8년간 밀린 내외명부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빠서 그런것으로 보인다.
사치 금지령 선포
• 태조대왕께서 세우신 이 고려가, 오늘에 이르러 여러 안팎의 변란과 재해를 맞아, 그에 나라와 왕실의 살림또한 어려워지니, 이제 지존의 짝이요 만민의 어미인 왕후의 자리에 오른 나 역시 책임을 통감치 않을 수 없다.이에 따라 내가 수장으로 있는 내외명부가 앞장서 솔선수범키 위해 여러 절차와 그에 따르는 경비 지출을 줄이고저 하니, 먼저, 앞으로 들이는 후비와 후궁들에 대한 모든 책례(冊禮)는 잠정적으로 철폐하고, 다만 전각을 하사받고 하례물을 받는 것만 남긴다.
또한 후궁 반열 이하 내외명부 사람들의 금박 당의 착용을 금(禁)하며 별도로, 내외명부 모든 여인들은 큰머리나 패물(佩物) 등의 치장을 검소히 할 것을 권고하는 바이다.
{高麗王后之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치 금지령을 선포했는데 남편이 문벌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치금지령을 선포한것을 돕기위해 그런것으로 보인다.[3]
자신 또한 12첩 반상을 3첩 반상으로 줄이고 의복도 자수가 새겨지지 않은 옷을 입는 등 솔선수범을 보였다.
이 당시 고려 역사상 유일하게 여인들이 가체가 아닌 쪽머리를 하고 지냈다.
금 사신과의 대립
1169년 11월 27일 원래 오려 했던 금 사신단이 오던도중 사고가 나 돌아가자 황제의 환관이 대신 행차했는데 , 황제가 어릴때부터 직접 양육하여 온갖 부와 권력을 등에 엎고 성격이 괴팍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였다.
당시 금상이였던 인종이 남경으로 행차한 상태에서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당시 국원궁이였던 18대 대왕 왕창도 너무 어려 결국 왕후였던 공예태후 , 김지은 , 묘향 셋이서 금 환관을 접대했다.
금 환관은 재추에 들어오자마자 재신들의 인사를 무시하고 공예태후에게 하오체를 쓰는 등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
금 환관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는데
고려에 경안택주라는 왕녀가 있는것으로 아는데 혼인은 하셨소?
금 환관은 평소 여러 제후국들을 돌아다니며 공녀를 요구한다는 소문을 이미 들은 상태였던 공예왕후는 이를 눈치채고
좋은 혼사를 미리 내명부에서 몰색중이고 이미 내정을 해뒀기에 다른 가문의 혼사도 받지 않고 있다네.
라고 하였다. 하지만 금 환관은 말을 끊고 " 아직 혼인은 안한걸로 알겠소. " 라 하였고 공예왕후가
" 이미 이 나라의 국모인 여가 내정을 해둔 이가 있는데 어찌 안했다고 하겠소? " 라고 반박하였다.
이때 환관이 다음과 같이 말하며 비꼬는데
경안택주라는 자의 혼인은 고려의 비에 입장이고,결과적으로 안한 것인데, 어찌 그리 설명하는거요? 상국이 만만한가?
공예왕후를 "비" 라고 지칭하고 그건 당신의 입장이다 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자 분노한 공예왕후가 호통을 치며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제후또한 금국 황제의 신하, 제후의 위계가 분명 환관의 위계보다 높을 진데, 그 제후의 비가 하는 일을 아무리 사신이라 하나 환관이 부정하겠다는 것이오? 고려에서 황제께 이를 정식으로 표문하길 바라는가?
그리고 지금 일국의 국모를 면전에 대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아시오
그러자 금 환관은 " 어찌 고려 왕실은 계속 무례한가 " 라고 하곤 막무가내로 자리를 떴다. 마침 인종이 만월대로 복귀한 상태였고 회경전에 들어 다음과 같은 조공 내용을 밝히는데
하나 . 기존 조공양의 두배로 늘려 고려청자 300개를 받치고 ,
둘. 두 해 안에 고려 조정은 금에 150만전을 받치고 ,
셋 , 경안택주를 황제폐하의 후비로 들이는 바이니 귀족가 여식들 포함 100명의 공여들과 함께 금으로 보내시오.
여기서 조작된 내용이 있는데 금 황제는 고려청자 300개만을 요구했으나 환관은 이를 조작해 경안택주를 데려가려 한것이다.
인종이 분노하여 환관에게 항의하고 있을때 공예왕후는 사람을 써 여동생 경안택주를 궐 북문을 통해 내보내고 저 멀리 동경으로 보내 안전하게 하였다. 이후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발언을 하는데
그리 환관의 인의 장막에 감싸인 왕이니 오랑캐이지 ㅉ
이를 듣고 분노한 환관이 그 자리에 있던 대전 지밀 임씨의 뺨을 후렸고 그것을 명목으로 환관을 협박해 결과적으로 경안택주를 금으로 보내지 않았다.
영광의 태후
인종이 죽은 후 태후가 되며 백성들은 공예태후를 영광의 태후라고 일컬었는데 그 이유는 인예태후가 기거했던 자수전을 관저로 삼고 고려 역대 태후들중 유일하게 황태후로 재위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들이 어린나이에 즉위하여 국정에 미숙해 수렴청정을 시행하였다.
수렴청정
수렴청정 기간 내내 천자국으로써의 면목을 키우려 하였는데 연호를 재정 하고 국왕의 명령문인 교서, 교지를 칙서, 칙령으로 바꾸었다.
또한 공식 문서에서도 성상을 황제로 칭하고 왕후를 황후라고 높혀서 부르는 등 금의 눈치를 보지 않고 천자국으로써의 위엄을 높히려 하였다.
그 외에도 여금전쟁 이후 방치된 천추태후의 능을 정비하고[4] 잦은 홍수를 방지하여 저수지를 판 후 수로를 정비 , 천문학 발달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사천대를 다시 세워 그 관직명을 태사령으로 하여 역법과 책력을 들였으며 이두와 구결을 보급하였다.
중앙집권화에도 큰 힘을 썼는데 음서제로 관리가 채용되는 것 을 막고 팔표방 제도의 구성을 더욱 더 탄탄히 하고 매년 팔표방을 치루게 하였다.
이후 사병을 혁파하고 지방에 향, 소, 부곡을 폐지하려 했으나 조정 신료들에게 논쟁이 되어 실패하였다.
철렴환정
이후 탐라국과 우산국 내지화도 하려 했으나 사병 혁파 , 향 소 부곡 폐지때 강하게 반발했던 신료들이 수렴청정에 대한 빈발이 커지자 의욕을 잃고 철렴환정을 해 개경을 떠났다.[5]
노년과 사망
이후 충주궁에서 노년을 보내다 충주민란이 터지기 직전에 오랫동안 치매를 앓다 생을 마감하였다.
여담
당시 대국이었던 금국을 북조(北朝)라 일컫고 남쪽의 북송과 남송 즉, 흔히 중원(中原)이라 불리는 지역을 중국(中國)이라 하지 않고 서조(西朝)라 일컬었는데 이는 단순히 고려를 중국 기준에서 바다 동쪽에 있는 독자 천하(해동천하)로 보는 것을 뛰어넘어 철저히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주변국들을 방위별로 나눈 것이었다.
중국(中國), 중화(中華) 등의 뜻이 천하의 중심에서 빛나는 문명이라는 뜻이니, 그것에 반(反)하고 고려를 천하 중심으로 인식하는 용어들을 의식적으로 스스로 쓴 것이다.
평가
논(論)한다. 전(傳)에서 이르길 “국모(國母)가 발(發)을 내리고 청(聽)에 나아감은 유주(幼主)를 보익(輔翼)하여 사직(社稷)을 진무(鎭撫)코자 함이니, 이는 종묘(宗廟)를 위한 권도(權道)일 뿐 권병(權柄)을 제멋대로 농단(壟斷)하기 위함이 아니다”라 하였다.왕태후가 비록 고려로 하여금 천자국(天子國)의 위의(威儀)를 갖추고자 뜻은 웅원(雄遠)하였으나, 그 방략(方略)이 괴이하여 중화의 전장(典章)을 경솔히 모방하니 이는 고구려 이래 해동천하의 자주지도(自主之道)를 스스로 훼기(毁棄)하는 것이요, 천하의 중심을 참칭하면서도 도리어 이적(夷狄)의 동류로 전락하는 꼴이 되었도다!
내치(內治)에 있어서는 대신들의 직간(直諫)을 배척하고 질병(疾病)을 구실삼아 전횡(專橫)을 일삼았으며, 외교에 있어서는 금국(金國)의 국세를 헤량(衡量)치 못하고 망령되이 도발하여 화근을 자초하였다. 더욱이 호족(豪族)의 사병(私兵)까지 혁파하여 방위의 근저(根柢)를 스스로 와해시켰으니, 이 어찌 사직을 위한 계책이겠는가? 사가인 충주를 흥기(興起)케 하려고 후궁(後宮)의 사우(祠宇)까지 천이(遷移)시키니, 이는 대의를 저버리고 사욕을 좇은 것이로다.
그 시책(施策)들이 승하 후에 죄다 환원되고 민간(民間)에서조차 신속히 망각(忘却)되었으니, 이는 천심이 그와 더불어 하지 않았음을 명징(明徵)하게 드러내는 증표로다. 하물며 충주 유씨의 모역(謀逆)이 발생하여 생전에 편애로 베푼 은전(恩典)이 도리어 역도의 근원이 되었으니, 이 또한 사심으로 국정을 농단한 필연적 귀착(歸着)이로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의 본지(本旨)를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되어 독단전제(獨斷專制)의 폐단(弊端)에 빠졌으니, 왕태후를 어찌 성토(聲討)치 않으리오!
《고려사》〈후비전: 공예왕후〉
고려의 수렴청정한 왕태후로서 여러 업적을 펼치려 노력을 했으나 실질적으로 그렇다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였다. 당시 재상들 사이에서도 왕태후가 왕을 대신하여 과하게 정사에 개입한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특히 천자국으로서 행세하려고 했던 부분에 대해 갑론을박이 많은데, 이에대해 논의하던 과정에서 섭정공 문하시중 김지한과 논박을 펼쳤다. 천하의 중심을 자처하면서도 모든 제도와 문물을 중국의 식으로 하려고 하니 정작 고구려를 계승하여 자체적으로 해동천하를 이룩하던 고려를 중국식으로 바꿈은 고려가 천자국으로 가는 게 아닌, 중국을 이상하게 모방하던 오랑캐와 다를 바 없는 정책이라는 결론이 재상들 사이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실책은 고려가 금나라를 상대로 압도적 열세에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이루어져 대외적으로 외교 관계에 악영향을 끼쳤으며 결국 밖으로는 여전히 칭신하는 기존과 다를 게 없는 허울 뿐인 황제국 행세가 되었다. 이렇게 금나라를 자극한 와중에 전시에 동원되는 각 호족들의 사병마저 혁파하여 군사력을 박살내려 시도했고 결국 이것이 발단이 되어 실각함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살아생전 무리하여 수렴청정의 본 가치를 잃어버리고 독재적으로 많은 정책을 과도하게 추진하였다. 결국 그녀의 정책은 그녀 사후 대부분이 원상복구 되었으며 민가에서도 빠르게 잊혀졌으며 사후엔 충주 유씨 일족이 반역을 일으키자 오히려 생전 충주에 과도한 힘을 실어줘 역모의 기반을 만들어준 사실이 수면에 드러나 평가가 더 깎였다.
마음씨 따듯한 분이시다-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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