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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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헌종의 왕후 공효왕후ㅣ恭效王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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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086년 1월 2일 | ||||||
| 고려 개경 만월대 만령전 | |||||||
| 사망 | 1105년 2월 27일 | ||||||
| 고려 개경 만월대 연화전 | |||||||
| 능묘 | 은릉 | ||||||
| 재위기간 | 고려 왕녀 | ||||||
| 1086년 1월 2일 ~ 1102년 1월 16일 | |||||||
| 고려 연화전주 | |||||||
| 1102년 1월 16일 ~ 1105년 2월 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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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고려 헌종의 왕후이다.
선종과 선희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헌종과 친남매라는 이유로 대신들이 왕후 등극을 반대해 정식왕후 첩지를 받지는 못했으나 왕후와 동급인 전주에 봉해지고 궁호로 연화전을 받는 등 사실상 왕후로 대우받았다.
생애
공주이자 태자비
선종과 선희왕후의 장녀로 헌종과 이란성 쌍둥이이다. 공주시절 워낙 많은 사건들이 발생해 고려사에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출생 이후 기록에서 나타나는건 헌종이 왕태자이던 시절 혼인한것인데 신료들이 훗날 국본에 오를 태자가 친족내혼을 하는것은 매우 위험하고 옳지 않은 행위라며 태자비 책봉을 막아 태자비 시절에도 공주였다.
비운의 왕후
태자비 시절과 같은 이후로 왕위등극을 강하게 반대해 정식 왕후로 책봉되지 못하였다. 그래도 남편 헌종은 아내를 챙기려는 의지가 강했던건지 왕후가 받는 전주로 봉작되고 연화전을 하사받았다.
고려사 후비전에서 공효왕후의 전주시절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수 있는데
전주께서는 늘 말수가 적고 성품이 온화하셨다. 늘 자수를 두고 고양이를 곁에 둬 전각밖으로 나오는 일이 많지 않았는데 가끔 전각밖으로 나오면 후원에서 상궁들과 꽃놀이, 뱃놀이를 하였다. — <고려사> -후비전-
말년과 쓸쓸한 죽음
헌종이 죽은 후 전주의 지위를 유지해 궐에서 계속 지낼수 있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비교적 젊은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이상궁과 신상침은 내가 죽거든 궐을 떠나 절에서 평화롭게 지내거라.
성상, 혜영이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였으나, 그 마음은 누구보다도 맑고 곧돋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이 아이를 가엾이 여겨 평생 근심 없이 살게 하소서. 비록 혼인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궁중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돌보아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 공효왕후의 유언
이후 제대로된 시호조차 받지 못해 한동안 연화전주 , 연화태비로 기록되다 사후 10년뒤 예종이 남편 헌종의 시호에있는 공자돌림의 헌의공효왕후라는 시호를 받쳤다.
평가
공효왕후는 선종(宣宗)과 선희왕후(宣禧王后)의 장녀로, 헌종(獻宗)과 동복 남매(同腹兄妹)이자 이란성 쌍생(異卵雙生)이었다.후는 성품이 온화(溫和)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용모와 거동이 단정하였다. 선종이 태자(太子)를 세우자 장차 국본(國本)을 보필하게 하고자 태자와 혼인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료(臣僚)들이 상소(上疏)하여 아뢰기를, “친족내혼(親族內婚)은 예(禮)에 어긋나며 국체(國體)에 해가 될까 염려됩니다.” 하여 태자비(太子妃) 책봉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에 정식 책봉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공주(公主)의 예로 궁중에 거처하였다.
헌종이 즉위(卽位)하자 다시 왕후(王后)로 세우려 하였으나, 대신들이 거듭 간언(諫言)하여 끝내 중궁(中宮)에 책립(冊立)되지 못하였다. 다만 헌종이 후를 깊이 아껴 전주(殿主)에 봉하고 궁호(宮號)를 연화전(蓮花殿)이라 하여 예우를 왕후와 거의 다름없이 하였다. 궁중에서는 이를 사실상 중궁과 같이 대하였다.
전주로 있을 때, 늘 자수(刺繡)를 즐기고 고양이를 가까이 두어 전각(殿閣) 밖에 나오는 일이 드물었다. 간혹 후원(後苑)에 나아가 상궁(尙宮)들과 꽃놀이와 뱃놀이를 하였으나, 정사(政事)에 간여(干與)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헌종이 붕어(崩御)한 뒤에도 전주의 지위를 유지하여 궁중에 머물렀다. 그러나 연유는 자세히 전하지 아니하나 비교적 젊은 나이에 훙서(薨逝)하였다. 초상(初喪)에 정식 왕후의 예가 갖추어지지 못하고 한동안 연화전주(蓮花殿主) 혹은 연화태비(蓮花太妃)로 기록되었다.
예종(睿宗)이 즉위한 지 십 년 뒤, 헌종의 시호(諡號)에 쓰인 ‘공(恭)’ 자를 따라 공효왕후(恭孝王后)라 추시(追諡)하였다.
— 《고려사》〈후비전 : 공효왕후〉
후는 명위(名位)가 온전히 세워지지 못하였으나 궁중의 예우는 왕후에 준하였다. 근친혼을 둘러싼 논의는 나라의 제도와 윤리(倫理)를 지키려는 신료들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며, 후가 이를 억지로 다투었다는 기록은 없다. 평생을 조용히 지내며 전횡(專橫)이나 사치의 허물이 없었으니, 그 죽음이 일찍 닥친 것은 운명이라 할 것이다.
여담
연화공주께서는 자색이 맑고 단정하였으며, 피부가 희고 윤택하여 궁인들 사이에서도 그 용모가 뛰어나다는 평이 많았다. 눈빛은 잔잔하고도 밝았으며, 웃을 때에는 온화한 기색이 드러나 보는 자들이 저절로 호감을 품었다 한다. 또한 검은 머리칼이 길고 윤기가 있어 비녀와 장식을 갖추었을 때 더욱 아름다움이 돋보였다고 전한다.
《궁중야록》에는 ‘그 미색이 지나치게 요염하지 아니하고 맑고 부드러워 오래 바라볼수록 더욱 빼어났다’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후비전:공효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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