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윤

고려기.svg
고려 평장사
[ 펼치기 · 접기 ]
고려 문하시랑평장사
정효윤
丁曉倫
정효윤.jpg
출생 1176년
고려 여수정씨 문중
사망 1231년 6월 13일
고려 개경 개성부 송악산
본관 여수 정씨
사저 여수 정씨 저택
재임기간 정당문학
1210년 2월 25일 ~ 1215년 3월 4일
문하시랑평장사
1215년 3월 4일 ~ 1231년 6월 13일
[ 펼치기 · 접기 ]
직위 정당문학
문하시랑
판이부사
판병부사
태자소부
국대부인
배우자 구하나
형제 환관 정계원
경칭 저하(邸下)
종교 교종

개요

熙露開華 愛染其心


빛나는 이슬이 꽃을 피우니, 그 마음은 사랑으로 물든다.

—  정효윤의 시

고려의 재상이자 시인

생애

역심지시 사건으로 실각한 후 헌애왕후에 의해 사사당한 문하시랑평장사 정유자의 후손으로 가문이 복권되자 뛰어난 유학 실력을 바탕으로 정당문학의 지위에 오른다.

이후 문하시랑평장사로 봉해지며 수상이 되었으며 금상의 승계 방식을 왕후 김씨와 논하는 자리에서 당시 참지정사이던 홍배용과 다툼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을 저론논쟁이라고 한다.

정효윤은 뛰어난 유학자였지만 성격이 모난부분이 많았는데, 재상이 사사로운 이유로 승복궁주가 기거하는 승복궁에 찾아가 불손한 발언을 일삼고 국무를 소홀히 하였다. 고려의 최고재상이 지속적으로 백성들에게 불온한 영향을 끼치자 이에 분노한 섭정공 낙랑공은 정효윤에게 행실을 바로하지 못하는 수상은 필요 없다고 크게 꾸짖었고 이에 정효윤은 사직하며 실각하였으며 그 날 저녁 자성대비에게 태손을 지키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송악산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평가

정효윤은 태자와 태손의 스승으로서 충정을 다하였고, 태손의 죽음을 슬퍼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그 마음은 가상하다.

그러나 재상의 직분은 한 사람을 섬기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사직과 백성을 보전하는 데 있다.

정효윤은 평소 스스로를 무능하다 하며 직무를 가벼이 여겼고, 국정의 중대사를 당할 때마다 탄식과 체념의 말을 일삼았다. 이에 신료들 또한 뜻을 잃고 사직을 입에 담게 되었으며, 조정의 기강은 날로 해이해졌다.

더욱이 몽골이 천리장성을 넘어 침입하였을 때에는 온 나라가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야 함에도, 수상인 그가 백관을 이끌어 계책을 세우기는커녕 스스로 절망을 드러내어 조정의 혼란을 더욱 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대신들은 서로 다투고 명령은 통일되지 못하였으며, 국정은 중심을 잃었다.

뒤이어 개경마저 몽골군에게 포위되는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비록 그 책임을 모두 정효윤 한 사람에게 돌릴 수는 없으나, 재상으로서 나라를 지탱해야 할 때 스스로 무너져 조정을 혼란에 빠뜨린 죄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는 태손의 스승으로서는 충신이었으나, 국가의 재상으로서는 실격이었다. 충절은 남겼으되 책임은 다하지 못하였으니, 후세는 그의 죽음보다 그가 살아서 하지 못한 일을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이다.

—  〈열전:정효윤 중〉

여담

역심지시 사건으로 사망한 정유자의 후손이다. 풍문에 따르면 정효윤은 천추태후를 계속하여 욕보였고 정유자의 시를 정당화 했다고 한다. 이에 승복궁주의 측근들이 만류하였으나 정효윤의 막말은 더 심해졌다고 전해진다.

둘러보기

고려기.svg
고려 정당문학
[ 펼치기 · 접기 ]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