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저론논쟁(儲論論爭)
저론(儲論)[1]은 왕위 계승자와 그 지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정치적 논쟁을 뜻한다.
효강태자와 경민태손이 차례로 훙서한 이후, 일부 신료들이
"증손이 왕위를 계승한 전례는 없다."
라고 주장하며 어린 원손의 왕위 계승 자격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후 논쟁은 원손의 계승권뿐만 아니라 태손비 장씨의 지위와 예우 문제로까지 확대되었으며, 조정은 계승파와 반대파로 크게 나뉘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원인
증손 계승 전례의 부재
일부 신료들은 원손이 국왕의 증손이라는 점을 들어 "증손이 왕위를 계승한 전례는 없다."며 그의 계승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민간과 조정의 상당수는 이러한 주장이 표면적인 명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원손은 경민태손의 적장자로, 적통 계승의 원칙에 따르면 정당한 계승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경민태손은 태손의 지위는 유지했으나 금상의 명으로 죽음을 맞이하였기에, 반대파는 훗날 원손이 즉위할 경우 '죄인의 아들'이라는 오명이 왕실의 정통성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였다. 또한 어린 원손이 즉위하면 왕실의 직계 어른이 부재한 가운데 외척과 대신들의 권력 다툼이 격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 역시 계승 반대의 실질적인 이유로 거론되었다.
이처럼 '증손 계승 전례의 부재'는 명목상의 논리였으며, 실제로는 왕실의 권위와 정치적 안정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원인이 된것이다.
배경
유비의 폐출과 효강태자의 훙서
태자비 유씨는 원손을 출산한 이후 술을 가까이하며 점차 성정이 난폭해졌다고 전해진다. 이후 중궁전에서 시어머니인 왕후 김씨에게 무례를 범하고, 나아가 태조대왕을 능멸하는 발언을 하여 조정의 큰 공분을 샀다.
이에 효강태자는 여러 차례 만류하였으나 태자비의 언행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금상의 명으로 태자비의 자리에서 폐출되었다. 태손은 이후 생모와 생이별하게 되었으며, 왕실의 보호 아래 양육되었다.
그러나 태자비 유씨가 폐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석에 누워 있던 효강태자마저 훙서하였다. 이로써 경민태손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은 채 유일한 왕위 계승자로 남게 되었으며, 훗날 태손이 '희비 투탕 사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희비 투탕 사건
희비는 평소 국왕의 총애를 믿고 후궁들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는 일이 잦았으며, 여러 차례 궁중의 질서를 어지럽혔다고 전해진다. 특히 승복궁주와는 오랫동안 반목하였으며, 결국 이들의 대립은 훗날 희비 투탕사건으로 이어졌다.
어느 날 두 사람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자 승복궁주는 과거 희비가 승은궁인이 되던 날 효강태자가 훙서하였으며, 당시 태자궁 궁녀였던 희비의 행방이 한동안 묘연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효강태자 독살설을 다시 제기하였다.
이에 격분한 희비는 승복궁주의 뺨을 때리며 "태자가 지 몸 간수 못해서 병으로 죽은 것이 어찌 내 탓이냐."고 고함쳤고, 이를 곁에서 듣고 있던 경민태손은 크게 분노하였다. 태손은 희비를 밀쳐 넘어뜨린 뒤 곁에 있던 상궁이 끓이던 차를 그녀에게 뒤집어씌웠다.
희비는 얼굴과 상반신에 심한 화상을 입어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으며, 이 사건은 후세에 희비 투탕사건이라 불리게 되었다. 사건 직후 금상은 태손의 불손한 언행과 평소의 여러 문제를 이유로 태손의 폐위를 검토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이 "태손의 행동은 지나쳤으나 사건의 발단 또한 희비에게 있었다."며 강하게 만류하여 폐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태손은 서경 명복궁으로 거처를 옮겨 유폐되었고, 이후 조정에서는 태손의 품행과 계승 자격을 둘러싼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경민태손의 훙서
《고려사》에는 경민태손이 서경 명복궁에 유폐된 뒤 일주일 동안 단식하다가, 신료들의 만류 끝에 급히 수라를 들었으나 급체하여 훙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공식적으로 남겨진 기록일 뿐, 실제와는 달랐다. 금상은 태손이 유폐된 이후 수라상에 국 대신 사약을, 젓가락 대신 은장도를 올리게 하여 끊임없이 자결을 강요하였다. 결국 태손은 금상의 뜻에 따라 생을 마감하였으며, 조정은 이를 '자결이라 쓰고 훙서라 불렀다.' 《고려사》 또한 왕실의 체면을 위해 이를 병사로 기록하였다.
경민태손의 죽음으로 다섯 살의 원손이 유일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어린 원손이 즉위할 경우 외척과 대신들이 국정을 좌우하게 될 것을 우려한 일부 신료들은 '증손 계승 전례의 부재'를 명분으로 내세워 원손의 계승을 반대하였고, 이것이 훗날 저론논쟁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조정의 분열
경민태손의 폐위 논의가 한창이던 시기, 늦은 밤 승복궁주의 처소에는 태손비 장씨와 그의 부친 장백운, 태손의 고모 화순택주가 모여 은밀히 계책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태손이 끝내 죄인으로 몰려 죽음을 맞이할 것을 우려하였으며, 훗날 원손마저 화를 입을 가능성을 대비하기 위해 원손을 낙랑공 부부의 양자로 입적시키는 방안에 뜻을 모았다.
경민태손이 훙서한 이후 원손의 거취를 논하는 자리에서 왕후와 화순택주는 몇몇의 신료들을 통해 원손을 낙랑공의 양자로 삼아 계승의 명분을 바로 세울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태손의 스승인 문하시랑 정효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증손이 왕위를 계승한 전례는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원손의 계승을 강하게 반대하였는데 이는 원손이 태손처럼 해를 입는것을 우려한것이였다.
이후 조정은 적통 계승을 주장하는 계승파와 증손 계승의 전례 부재를 내세운 반대파로 양분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저론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개
원손의 계승권 논쟁
조정에서는 원손의 계승권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었다. 경주이씨 계열의 신료인 이주형, 이옥영 등은
"전례가 없다면 이제부터 전례를 만들면 될 일이다."
라며 증손의 즉위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일부 신료들은
"왕후께서 아직 정정하시니 원손을 곧바로 보위에 올리고, 왕후께서 대왕태후가 되어 섭정하면 될 일이다. 이후 경민태손과 효강태자를 추존하면 종통 또한 바로 설 수 있다."
라며 원손의 즉위를 지지하였다.
반면 정당문학 홍배용은
"원손을 다른 왕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즉위시키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제안하였다. 처음에는 많은 신료들이 이에 반발하였으나,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경민태손과 더불어 수많은 사건을 일으킨 폐태자비를 추존해야 한다는 점을 꺼려한 대신들이 점차 홍배용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이에 조정은 원손을 왕실의 다른 적통에 입적시키는 방안을 논의하였다. 처음에는 계양후 왕둔에게 입적시키려 하였으나 후궁 소생이라는 점에서 정통성 문제가 제기되었고, 낙랑공 또는 금상의 양자로 들이자는 의견 또한 족보와 종통이 크게 뒤얽힌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원손은 금상의 적통으로 이어지는 양녕공 부부의 양자로 입적시키기로 결정하였으며, 훗날 원손이 보위에 오르면 양녕공을 상왕으로, 친조부인 낙랑공을 태상왕으로 존봉하자는 절충안이 함께 논의되었다.
그러나 입적이 결정된 이후에도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정효윤을 비롯한 일부 신료들은
"계양후에게 입적시키나 양녕공에게 입적시키나 본디 증손인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라며 입적만으로 계승 자격이 바뀔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중국에서도 감히 시행한 적이 없는 일을 어찌 고려에서 먼저 행하려 하는가?"
라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이에 금상은
"고려가 송의 제후국이더냐, 금의 제후국이더냐? 칭신사대를 맺고 있는 금마저도 그러한 명을 내리지 아니하거늘, 어찌 중국의 전례만을 따르려 하는가."
라며 대신들을 질책하였다.
그러나 일부 신료들은 다시
"왕위에 오른 적도 없는 자를 어찌 상왕과 태상왕에 올릴 수 있단 말입니까."
라며 반발하였다. 그러자 홍배용은
"한 태조가 즉위한 뒤 자신의 아버지를 태상황으로 존봉한 전례가 있네. 그토록 중국의 전례를 따지던 자들이 어찌 이제 와서는 이를 외면하는가."
라고 반박하며 오히려 중국의 선례를 들어 신료들의 논리를 되받아쳤다.
태손비 장씨의 지위 논쟁
원손의 계승 문제와 입적 문제가 일단락되는 듯하였으나, 왕후 김씨가 새로운 의문을 제기하며 논쟁은 다시 격화되었다. 왕후는 대신들을 향해
"그렇다면 원손의 어미인 비궁 장씨와 태상왕이 될 낙랑공의 아내인 낙랑공비, 그리고 양녕공비의 지위는 어찌해야 한단 말이더냐?"
라고 물었다. 이에 황보탁은
"낙랑공비는 태상왕후에 봉하고, 양녕공비와 태손비는 모두 태후에 봉하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라며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홍배용은 곧바로 이를 반박하였다. 홍배용은
"태상왕후의 칭호는 전하(殿下)이나 태후의 칭호는 폐하(陛下)이니, 그렇게 되면 시어미인 낙랑공비의 지위가 며느리인 양녕공비보다 크게 낮아지는 모순이 생길 것입니다."
라고 지적하였다. 이어
"더욱이 태손비는 본래 남편이 왕위에 오른 적이 없는데, 어찌 감히 태후의 존호를 올릴 수 있단 말입니까?"
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신들은 다시금 각자의 의견을 내세우며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원손의 계승권을 둘러싼 논쟁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손비 장씨와 왕실 여성들의 예우 문제를 둘러싼 새로운 논쟁이 시작되었다. 훗날 사가들은 이를 원손의 계승 문제를 둘러싼 제1차 저론논쟁과 구분하여 제2차 저론논쟁이라 불렀다.
결과
수개월에 걸친 격론 끝에 조정은 마침내 원손의 계승과 왕실의 존호 문제를 모두 확정하였다. 원손은 양녕공의 양자로 입적되어 정통을 잇기로 하였으며, 훗날 즉위할 경우 양녕공은 상왕, 낙랑공은 태상왕으로 존봉하기로 결정하였다.
왕실 여성들의 봉작 또한 새롭게 정비되었다. 양녕공비는 상왕후(上王后)에 봉하여 낙랑공비와 같은 '전하(殿下)'의 칭호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시어미와 며느리 사이의 서열이 뒤바뀌는 문제를 해결하였다. 또한 태손비 장씨는 장차 원손이 즉위할 경우 성상의 사친(私親)으로 예우하여 대비에 봉하고, 그 존호를 '자성(慈聖)'으로 올리기로 미리 정하였다.
그러나 논의가 모두 마무리되기 전 경민태손이 훙서하면서 더 이상 장씨를 '태손비'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조정은 훗날의 존봉을 고려하여 그 지위를 보존하는 의미에서 장씨를 '수춘궁주(壽春宮主)'로 봉하고, 자성대비로 존봉하기 전까지는 궁주의 예로 대우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로써 원손의 계승 문제와 왕실 존호 문제는 일단락되었으며, 장기간 조정을 뒤흔들었던 저론논쟁 또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다만 후대의 사가들은 이 논쟁이 단순한 왕위 계승 문제가 아니라 왕실의 적통과 종법, 존호 체계 전반을 둘러싼 고려 최대의 예제 논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여담
각주
- ↑ 저는 태자와 세자를 의미하는 '저군(儲君)'이라는 한자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