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고종조 왕태손 경민태손 儆愍太孫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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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207년 2월 6일 |
| 고려 개경 개성부 만월대 수춘궁 정침 | |
| 사망 | 1231년 6월 9일 |
| 고려 서경 평양부 명복궁 | |
| 재위기간 | 고려 왕태손 |
| 1210년 2월 6일 ~ 1231년 6월 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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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경민태손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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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태손의 고려 18대 국왕 고종의 적증손으로 본래 왕위를 계승할 예정이였으나 평소 불손한 품행과 더불어 왕족에게 큰 폭행을 행사해 명복궁에 유폐되었고 이후 병사하였다. 작금의 금상의 생부이다.
생애
왕손 시절
불우한 유년기
경민태손은 1207년 2월 6일, 효강태자와 폐태자비 유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종의 적장손이자 태자의 장남이라는 점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왕실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으며, 특히 조부 고종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의 유년기는 오래지 않아 비극으로 얼룩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친 효강태자가 역병인 백선(白癬)에 걸려 병석에 눕게 되었으며, 만령전에서 은밀히 치료를 병행하였다. 어린 태손은 이때 부친과 사실상 마지막이 될 작별을 나누게 되었다.
이후 모친 유씨 역시 품행을 둘러싼 논란으로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부친 효강태자마저 병으로 훙서하였다. 태자와 태자비를 잇달아 잃은 어린 태손은 의탁할 곳마저 잃게 되었다. 당시의 사관은 이를 두고
“태자와 태자비가 훙서하자 어린 태손이 의탁할 곳을 잃어 궁인들이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고 기록하였다.
태손 시절
왕실의 적장손
부모를 모두 잃은 이후 경민태손은 왕실의 유일한 적장손이자 왕위를 이을 남손으로 남게 되었다. 이에 조정은 그를 왕태손으로 봉작하여 후계자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이후 인동 장씨 가문의 중추원부사 장백야의 여식 장씨와 혼례를 올렸으며, 이 여인이 훗날 금상의 사친인 자성대비이다. 자성대비는 이후 경민태손이 유폐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서도 끝까지 곁을 지킨 인물로 기록된다.
희비투탕사건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은 탓에 경민태손은 평소에도 부모에 관한 이야기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궁궐 정원에서 왕실 사람들이 모여 차를 마시던 중, 희비 장씨와 승복궁주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과거 효강태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돌았던 독살설이 다시 언급되었다.
승복궁주는 효강태자의 죽음을 거론하며,
“희비가 승은을 입은 날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졌고, 그때 태자가 훙서하였는데 시신 또한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라고 말하여 마치 희비가 태자를 독살한 것처럼 몰아갔다. 이에 격분한 희비는 승복궁주의 뺨을 때리며,
“태자가 제 몸 하나 제대로 간수하여 먼저 요단강 건넌 것이 내 탓이더냐? 만약 태자가 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죽은 것이라면 포악한 아내를 만나 일찍이 화병으로 죽은 것이오!”
라고 응수하였다.
이는 경민태손에게 부친과 모친을 동시에 모욕하는 말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태손은 분노를 참지 못하였다. 곁에 있던 상궁이 끓이던 차 주전자를 그대로 들어 희비의 얼굴에 들이부은 것이다.
희비는 얼굴에서 목과 가슴에 이르기까지 심한 화상을 입고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다 그대로 혼절하였다. 이 사건을 후대에 ‘희비투탕사건(熙妃投湯事件)’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건을 보고받은 고종은 크게 분노하였다. 평소 태손의 불손한 품행까지 함께 문제 삼아 마침내 태손을 폐위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태자의 스승 정효윤을 비롯한 수많은 신료들이 강력히 반대하여 폐위만큼은 막아냈다.
다만 경민태손은 결국 서경 명복궁에 유폐되는 처분을 받았다. 서경으로 떠나기 전날, 그는 자성대비에게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고 한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든 부인은 왕손을 데리고 즉시 만령전으로 가 도움을 청하라.”
이 말은 훗날 경민태손이 남긴 마지막 말로 전해진다. 이후 경민태손이 훙서하자 자성대비는 태손의 유언대로 어린 왕손을 데리고 만령전으로 가 도움을 청하였다. 이로써 왕손은 무사히 보호받을 수 있었으며, 훗날 금상으로 즉위하여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유폐와 죽음
경민태손은 명복궁에 유폐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훙서하였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그는 유폐 이후 일주일 동안 수라를 거부하며 단식투쟁을 이어갔으나, 어느 날 갑자기 수라를 들었다가 급체하여 병세가 악화되었고 결국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와 전혀 다르다.
《편년통록》에 따르면 경민태손이 유폐된 이후 일주일 동안 수라상에는 국 대신 사약이, 젓가락 대신 은장도가 올라왔다고 한다. 이는 고종이 사실상 태손에게 자결을 명한 것이며, 경민태손 역시 끝내 그 뜻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민간에서 전해진 야사에 불과하므로 실제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공식 기록과 편년통록의 기록이 극명하게 달라, 경민태손의 최후는 후대에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사후 저론논쟁
경민태손이 훙서한 뒤 조정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또 하나의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 신료들이 “증손이 왕위를 이은 사례는 없다.”고 주장하며 경민태손의 아들인 왕손의 왕위 계승을 강력히 반대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왕손의 혈통과 계승 자격을 둘러싼 논쟁이 조정에서 크게 일어났으며, 이를 후대에 ‘저론논쟁(著論論爭)’이라 부르게 되었다.
결국 왕손은 고종의 차남인 낙랑공 왕협의 아들 양녕공에게 입적되어 계통상의 문제를 해소하였고, 마침내 무사히 보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경민태손과 자성대비는 생전 왕과 왕후로 추존되지 못하였다. 대신 양녕공과 양녕공비는 각각 상왕·상왕후, 낙랑공과 낙랑공비는 각각 태상왕·태상왕후로 존봉되었다.
사후에는 상왕후를 제외한 이들이 각각 신종·사종·경숙왕태후로 추존되면서, 경민태손의 혈통은 왕위에 직접 오르지는 못했으나 결국 그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방식으로 왕실의 계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각주
- ↑ 서경 명복궁 바로 옆에 묘가 조성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