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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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국무총리
이동휘
李東輝 | Yi Dong-h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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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3년 8월 29일
함경도 단천군 파도사 대성리

(現 함경남도 단천시)

사망 1935년 1월 31일 (향년 61세)
소련 러시아 SFSR 극동 지방 프리모리예 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묘소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프리모리예 지방 블라디보스토크 페르바야레치카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위패-60호
재임기간 제2대 임시정부 국무총리
1919년 8월 27일 ~ 1921년 3월 16일
임시정부 수반
1919년 8월 27일 ~ 1919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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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하빈 이씨
부모 아버지:이승교[1]
배우자 강정혜
자녀 아들 이영일[2]

딸 이인순, 이의순, 이경순

학력 한성무관학교 (졸업)
종교 유교 (성리학)개신교 (감리회)
성재(誠齋), 대자유(大自由)
군사 경력
임관 육군무관학교
복무 대한제국 육군
1896년 ~ 1907년
최종 계급 참령 (대한제국 육군)

개요

"이천만 동포는 다 최후의 일인(一人)이 필사(畢死)하기까지 최후의 일인(一人)의 혈점(血點)이 필적(畢滴)하기까지 독립을 필성(必成)코야 말 줄로 확신하노라."
《혁신공보(革新公報)》, 1919년 12월 25일자 기사
조국광복을 위한 일이라면 모든 일에 앞장서서 ‘선봉’에 서고 마는 그의 진보적 행동성, 전통적인 권위와 사회적 제약과 굴레를 과감히 개혁하고자 했던 그의 혁명성은 다른 사람들의 추종을 불허했다.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년 12월 31일

이동휘는 대한제국의 군인, 정치가이자 일제강점기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대한제국기 육군 장교 출신으로 한말 애국계몽운동과 의병 운동을 이끌었고 함경도, 평안도, 북간도, 연해주 한인 사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기독교인으로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는 독실한 전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국무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무장 투쟁을 주장하던 대표적인 인사였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공산주의자로 전향하여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1918년 볼셰비키에서 지원을 받아 한인 최초이자 아시아 최초의 볼셰비키 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다른 요인들과의 의견 대립으로 탈퇴했으며 고려공산당을 창당한 후 남은 생애의 대부분을 공산주의 활동에 투신했다.

아호는 성재이며 대자유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각주

  1. 독립운동가 (1851 ~ 1928)
  2. 개명전 이우석.